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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브렉시트 합의안 부결과 노동당의 과제: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어떻게 성취할까

서영표

서영표

영국인들은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51.89%의 지지로 유럽연합과의 결별을 결정했다. 이 ‘이혼’이 영국과 유럽연합 모두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 성사되기 위한 협상이 2년 넘게 진행됐다. 그리고 이 협상결과를 의회에서 승인받아야 했던 지난 1월 15일,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총리는 역사상 가장 큰 표차(432 대 202)로 정부안이 부결되는 참담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메이가 들고 온 안의 핵심은 북아일랜드를 통해 국경을 열어두자는 것이었다. 유럽연합에 속해 있는 아일랜드 쪽에서도 북아일랜드와의 국경을 닫는 것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유럽연합과 완전한 결별을 주장하는 보수당 강경파와 연정 파트너인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이었다. 노동당은 노동당대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협상안에 불만을 드러냈다.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다음날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은 협상안은 거부하지만 정부의 붕괴까지는 원하지 않는 보수당과 DUP의 단결에 의해 저지됐으니 의회해산과 조기총선 가능성은 사라졌다. 새로운 협상안에 대한 윤곽을 제시하고 유럽연합을 설득하는 것이 메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이었다. 브렉시트 시한 연장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됐다. 이도저도 아니면 협상 없는 파국적 이혼만이 남는다.

 

브렉시트,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파국의 증상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매우 복잡한 사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순화해 말하자면 브렉시트는 2008~2009년 금융위기로 경제가 파탄 난 후에도 여전히 ‘긴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파국의 증상 중 하나다. 2008~2009년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의 파산선고였던 이유는 명백하다. 시장의 힘을 종교적으로 신봉하던 미국과 영국 정부가 파산한 은행을 ‘국유화’하는 순간 신자유주의는 헛된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그런데 파산한 은행을 사들이기 위해 발생한 재정적자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탐욕과 투기 때문에 파산한 금융자본을 구제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지출해서 생긴 재정적자는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복지를 줄이는 방식으로 만회됐다. 제로아워계약(zero-hour contract)으로 알려진 유연근로제가 강화됐다. 그랜펠타워 화재로 드러난 것처럼 빈곤층의 주거환경은 악화일로에 처했다. 국민의료서비스는 뒷문을 통해 야금야금 시장원리에 잠식당해왔다. 대학의 등록금은 치솟았고 영국의 청년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나라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렉시트라는 증상을 낳은 병의 근원이 이기심과 탐욕을 ‘미덕’으로 권장하는 시장맹신주의였음이 너무나 분명했다.

 

이렇게 병의 원인은 명백했지만 치료는 쉽지 않았다. 경제 파탄이 초래한 사람들의 좌절은 쉽게 정치적 힘으로 모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빈곤과 양극화만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라는 사회적 연대의 싹을 매우 효과적으로 잘라냈다. 교육을 통해 내면화된 적자생존의 원리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을 헤쳐나가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이겨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협력과 연대의 가능성을 봉쇄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으로 병든 사회와 병든 사람들을 ‘소비’라는 주문으로 마비시킨다. 소비는 부채(負債)의 이면일 뿐이었다. 부채는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거미줄 안에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맸다. 이제 사람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소수자를 적으로, 타자인 ‘그들’로 여긴다. 복지국가 시절, 그리고 그 이전의 계급투쟁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체계를 지탱하고 거기로부터 이득을 얻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그들’에 의해 착취받는 ‘노동계급’ 또는 ‘인민’이라고 자기규정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계급착취의 이빨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계급’이라는 말 자체를 거의 잊게 돼버렸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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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이 균열을 봉합하고 타협안을 만들 수 있을까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 노동당을 이끌게 된 것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관행이 ‘계급’과 ‘인민’의 의미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 마음속에 쌓인 불만이 소비, 중독, 혐오가 아닌 변화에의 열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계급정치’가 실종되고 조직화된 운동정치가 주변화된 상황에서 불만은 ‘무정형’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 무정형의 불만은 극우적인 선동에 동원될 수 있는 만큼 좌파적 열망으로 표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좌파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체계의 한축을 담당하면서 상실됐던 좌파적 열망의 통로를 사람들이 다시 갖게 된 것이다.

 

코빈 노동당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난관은 브렉시트다. 대다수 노동당원들은 유럽연합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분열돼 있다. ‘협상 없는 유럽연합 탈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브렉시트는 심지어 코빈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균열을 발생시키고 있다. 제2국민투표 또는 노르웨이식 해법 사이에서.

 

현재 영국에서 노동당이 가장 높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브렉시트라는 암초를 만나 코빈과 그림자재무장관인 존 맥도넬(John McDonnell)이 추구하는 영국의 사회주의적 개조 전략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브렉시트를 피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코틀랜드 민족당, 웨일스 민족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의 지지를 끌어내 메이의 두번째 협상안을 거부하면서도 협상 없는 결별이라는 파국을 막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 3월 29일로 예정돼 있는 브렉시트 최종기한을 연장하고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브렉시트안을 만들어냄으로써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어쩌면 보수당 내의 잔류파까지도 끌어낼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정쩡한 봉합일 가능성이 높다. 조금 달리 보면 유럽의 지배집단은 영국 국내의 강경 우파보다 더 무서운 적이다. 그들을 상대로 노동당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자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긴축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강화하려는 노동당의 목표는 숨 돌릴 여유를 찾은 이후에 실현해야 할 새로운 정치적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계급과 인민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할 때

 

분명 쉽지 않은 길이다. 그리고 타협의 가능성은 메이에게도 열려 있다. 어쩌면 메이가 쥐고 있는 패가 더 좋을 수도 있다. 메이와 보수당에는 브렉시트를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가 최종목표다. 하지만 코빈의 노동당에 브렉시트는 돌파해야만 하는 난관이다. 이미 시효 만료한 신자유주의를 넘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향해 대장정에 나서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난관 말이다.

 

이 새로운 길 찾기는 우리들의 소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머나먼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서 방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도 이제 뭔가를 해야 한다. 과거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던 사람들이 닫아버린 좌파적 열망의 정치적 통로를 되찾기 위해 나설 때다. 이제 계급과 인민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서영표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19.1.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