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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신한반도체제’와 정책 리더십

이일영

이일영

1987년 민주화 이후 출범한 정부들은 예외없이 ‘제왕’과 ‘레임덕’ 사이를 오갔다. 이런 패턴이 반복된 요인으로, 정당권력의 장악 정도나 행정입법권·인사권 행사의 정도에 진폭이 크다는 점이 논의된 바 있다. 필자는 대통령제의 정책 리더십 약화를 또 하나의 요인으로 들고 싶다. 정부의 힘을 뒷받침하는 것은 대중의 광범한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지지율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가 정책 리더십이다.

 

신한반도체제라는 문재인정부의 정책 리더십 비전

 

정책 리더십의 요소를 생각해보면, 첫째는 이상화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담론·비전, 둘째는 담론·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한 의제·과제, 실행체계·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의 정책 리더십에서 담론·비전에 해당하는 것은 소득주도성장 또는 혁신적 포용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담론의 기반은 일국적 거시경제와 복지국가 모델에 있다. 그런데 세계체제, 분단체제의 규정이 강한 한반도 상황에서 이러한 담론·비전이 구체적 정책의제와 실행체계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 실행과 효과에 대한 의심은 정책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을 약화시킨다.

 

문재인정부의 담론·비전 중에서 세계체제, 분단체제 현실을 고려한 것은, ‘신(新)한반도체제’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삼일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신한반도체제로의 담대한 전환”을 선언했다. 이어서 지난 5월 7일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한 「평범함의 위대함: 새로운 세계질서를 생각하며」라는 글에서 ‘신한반도체제’를 다시 언급했다.

 

‘신한반도체제’ 담론은 일국경제의 틀을 넘어서는 정책 리더십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재인정부 2년간의 정책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보는 관점과 이 담론의 경제적 구성요소인 ‘평화경제’와 관련해서 수정·보완해야 할 점이 여러개 있다.

 

어떻게 지금의 경제체제를 혁신할 것인가

 

첫째, ‘신한반도체제’와 세계체제와의 관련성에 관해 심화된 토론이 필요하다. 소득주도성장은 물론이고 ‘평화경제’를 논의할 때도,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은 국가 단위를 경계로 해서 내부와 외부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소득주도성장 개념은 ‘한국’과 ‘경제’를 각각 별도로 구획하고 독자의 정책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신한반도체제에서도 한국을 독자적이고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 부각하고 있다. 이렇게 할 경우 한미공조, 남북관계, 동아시아공동체 등이 한국을 중심으로 한 각각의 관계로 설정되게 된다.

 

필자가 제기한 ‘한반도경제’ 또는 ‘한반도체제’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단위이고 체제이다. 여기에서는 정치·군사부문-경제부문이 상호작용하고 있고, 세계체제-분단체제-국내체제의 세개 층위가 중첩되어 있다. 각각의 부문과 층위는 독자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하나의 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세계체제가 분단체제, 국내체제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체제 외부에 분단체제, 세계체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라는 지역 단위에서 세개 층위의 계기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신한반도체제’가 현재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혁신하는가, 어떤 경제체제 원리를 지향하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일단 신한반도체제를 구성하는 경제체제의 핵심요소인 평화경제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 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남북관계에 한정해서 평화와 발전이 체제작동의 원리가 되고 그 결과로 모두 함께 잘 살게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반면 ‘한반도경제’ 또는 ‘한반도체제’는 특수한 ‘자본주의’체제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체제 변동의 구조와 근원에는, 정치·군사-경제적 계기를 동력으로 하는 세계체제-분단체제의 변동, 그리고 4차산업혁명의 흐름으로 대표되는 기술체제-경제체제의 변동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의 압력이 자본의 활동방식 변화, 성장 정체, 불평등 확대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로운 한반도 경제체제 개념은 세계체제 차원에서 진행되는 생산시스템 변동과 연결하여 구성할 필요가 있다.

 

평화경제 프로젝트를 위한 제언

 

셋째, ‘평화경제’의 실행과 관련된 과제·의제의 현실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간 제시된 평화경제 프로젝트는 남북경협 차원과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차원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남북경협과 관련해서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남북 간 철도와 도로 연결 등 사업이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해서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 신북방·신남방 정책이 논의되었다.

 

우선 확인할 것은 평화경제가 정치적·군사적 해법과 분리돼 경제협력만을 독자적인 프로젝트로 추진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현 시기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미동맹·군사훈련의 위협이 대립하는 데 있다. 서로 간의 위협 강도를 낮추는 것이 중요한 교환 품목이다. 경제협력은 이러한 핵심적 거래과정과 병행될 때에 강력한 실행력을 가질 수 있다.

 

한반도체제는 남북관계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따라서 남북경협을 통해 남북 네트워크를 진전시키고 동시에 이를 글로벌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것을 새로운 체제 형성의 기본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철도나 도로는 주로 국내경제의 밀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글로벌 차원의 네트워크에 있어서는 해운과 항만의 역할이 크다. 따라서 금강산 관광은 원산(元山) 지구 세계도시 프로젝트로, 개성공단은 임진강·한강 수변(水邊)도시 프로젝트와 연결·확대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

 

본격화된 미중 대립을 새로운 기회로 바꿔야

 

넷째, 실행 과제 선정에서 동아시아-한반도의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유럽연합의 사례를 참고하여 동아시아철도공동체와 동북아에너지공동체를 추진하는 것은 현재의 세계체제 상황에 잘 부합되지 않는다. 기존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크게 동아시아·북미 네트워크와 유럽 네트워크로 양분되어 있다. 유럽에서의 여러 공동체 실험은 기본적으로 유럽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확대·강화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의 네트워크는 동아시아 영역 내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북미지역과의 연결을 통해서 진전된 것이다. 동아시아-북미 경제네트워크의 핵심부에는 미국이 위치해 있고, 중국, 일본이 그다음으로 중심적이며, 한국은 좀더 바깥쪽에 있다. 동아시아 철도공동체나 에너지공동체는 글로벌 네트워크로의 확장성이 제한되어 있다.

 

게다가 2010년을 전후로 해서 미중 협조에서 미중 대립으로 세계체제 변동이 진행 중이다. 현재 미중 간 무역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기술·금융·통화·에너지·군사 등의 분야에서도 대립과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신북방정책은 정치·군사 분야에서 일부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경제네트워크 확장 효과는 크지 않다. 미중 간 갈등 격화는 남북 모두에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남북 모두 미중 갈등에 선제적으로 적응·대응하면서 남북네트워크를 동아시아-북미 네트워크로 연결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남방정책의 전략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는 촛불혁명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으며, 스스로 ‘촛불정부’를 자임한 바 있다. 문재인정부에 대한 지지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에 대한 기대에 입각해 있다. 기대에 부응하는 정책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정부 지지율은 유지되기 어렵다. 체제 차원의 인식과 실행에 접근하려면, 상황의 핵심을 짚어야 한다. 극단과 치우침을 경계하되, 체제 변동에 대응하는 핵심 프로젝트를 선별해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이일영 /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장, 경제학

2019.5.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