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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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운영자’는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

황정아

황정아

계절마다 한권씩 출간되는 잡지가 한국사회의 휘몰아치는 시간을 따라잡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쟁점이 언제 그랬나 싶게 잦아들고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 화제의 운명도 며칠 새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어차피 느린 걸음, 더 머물러 타고 남은 이슈들의 잔해를 들여다보고 아직 살아 있는 불씨를 살피는 것으로 ‘책머리에’를 시작하려 한다.

 

거론하는 것조차 새삼 피로감을 불러올지 모를 이른바 ‘조국사태’는 휘몰아친 것치고 예외적이다 싶을 만큼 오래 기세를 유지했다. 그 사태에서 무엇보다 진보마저 잠식한 불평등의 표식을 읽어낸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검찰개혁의 시급성을 절감한 이들도 있었고, 결국 언론개혁이 선결과제라 강조한 쪽이 있었다면 이 사태로 인해 묻혀버린 현안들을 염려하는 이도 있었다. 각자의 입장이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와 반드시 연결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면서부터 그 모든 이슈들이 실은 연동되어 있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가능해졌다. 그렇게 접근할 때 이 사태를 관통하는 핵심을 무엇으로 볼지가 또다른 쟁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진실’도 중요한 키워드로 포함되어야 하리라 본다.

 

진실이라니! 차라리 이즈음 세계적 유행어가 되어버린 ‘탈진실’(post-truth)이라고 해야 옳다고 여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탈진실’이라 함은 자신의 말이 허위인 줄 모르고 열렬히 주장하거나 허위임을 알고 거리낌을 가지면서도 어떤 명분을 위해 주장하는 행위를 가리키진 않을 것이다. 그 반열에 들어서려면 어느 책의 제목처럼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하고 나아가 진실 따위를 아예 떠올리지 않는 한층 강화된, 아니 엄밀히 말해 한층 저하된 능력치를 시전해야 한다. 지난 몇개월만이 아니라 실상 지난 십수년에 걸쳐 이런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과 조직을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일례로 진실과의 특별한 관계를 표방하는 언론계조차 그따위를 얼마나 가볍게 여길 수 있는지 질릴 만큼 목격했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말한 대로 미디어(media)는 사실이든 진실이든 어떤 것도 매개하지(mediate) 않고 대신 정동(감정)을 직접 조정하고 증폭하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를 탈진실의 시대로 규정하지 않는 이유는 일각에서 목도되는 진실에 대한 망각이 오히려 진실의 정체에 대한 물음에 새로운 연료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진실을 향한 모색은 포기되기는커녕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자끄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는 근대 문학에서 성취된 민주주의를 논하며, 요약건대 그것이 기본적으로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은 필경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그런 지경에 놓인 것은 아닐까.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던 시절에 진실을 향한 열망은 마치 주어진 설정처럼 마땅히 발생했고, 그때의 진실은 대개 권력이 은폐했으나 저기 어딘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진실은 위험하지만 단순한 문제였고 허위는 은밀하고도 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발견되어야 하거나 실제로 수두룩하게 발견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아무 말 속에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섞인 허위처럼 보인다. 허위가 점령한 ‘드러냄’의 차원을 지평으로 삼으면 진실은 얼핏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실이 그 부재를 통해 존재감을 강화했다는 식의 있으나 마나 한 가짜뉴스를 유포하자는 건 아니다.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이제야말로 진실은 모든 중차대한 문제들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저 발견되기보다 모색하고 논하고 구축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실 따위가 무어냐는 일축과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뼘이다.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없었던들 진실이 ‘추구’에 값하는 과제가 될 수 있을까. 아무나 아무 말을 할 수 있는 만큼이나 늘어난 허위의 폭로와 가짜의 적발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런 것들이 진실을 향한 추구와 동일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로소 또는 다시금, 진실에 진정으로 목마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거기에 ‘아무나 아무 말이나’라는 민주주의의 진실이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과 관련하여 새롭게 조명할 여러 문제 가운데 무엇보다 긴급한 당대성이 있는데도 적절히 호명되지 못한 사안이 ‘당파성’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이 개념은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이야말로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상투어구의 포박 탓인지 이후 좀처럼 다시 부상하지 못했다. 진실이 무중력에 있지 않고 중립에 있지도 않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 된 반면 입장과 위치를 갖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모호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것만도 어딘가 싶지만 기껏 조직에 충성하거나 진영에 충성하거나 기득권에 충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궁극적으로 어떤 입장을 욕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재해석한 『코뮤니스트 후기』(한국어판 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진정한 소비에트인”이 “자신의 부분적인 필요를 전체의 맥락 속에 가져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런 “총체적인 사유”를 통해 “그들은 어느 지점에선가 자신들의 이익을 망각했고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장소에 남겨져버렸다”고 묘사했다.(92~94면) 입장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것이 저마다의 주장과 감정을 증폭하는 탈진실의 난맥으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바로 이런 망각된 어떤 장소를 지향해야 하리라 본다. 전체에 관한 사유를 밀고 나가다가 어느새 자신의 이익을 망각하는 것, 곧 리얼리즘 문학론이 이미 제기한바 ‘지공무사(至公無私)’로 재해석된 당파성이야말로 지금 무엇보다 열렬히 욕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촛불혁명이 우리 대다수를 ‘국정운영자’로 거듭나게 해주었다면 최근의 사태들은 그에 더해 우리가 진실을 향한 ‘구도자’도 겸해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국정운영자야말로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피곤하고 종종 좌절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민주주의라는 커먼즈(공동영역)는 열려 있지만 동시에 어떤 도정이므로 곳곳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선명한 표지판으로 촛불혁명이 있다. 집단적이고 열렬하게 당파성을 발휘했던 그때 합의했던 과제들을 얼마나 굳건하게 밀고 나가는지가 시금석이다. ‘조국사태’가 그 과제들을 또 한번 절감하게 만드는 계기로 남기 위해서는 이제부터가 관건일 것이다. 당장 시한이 다가온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에서 ‘자신의 이익을 망각할’ 책무를 시험받을 이들에게 미리 엄중한 경고를 보내야 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북미대화의 진로가 어찌 되든 한반도 평화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직시하도록 격려하는 일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간의 혼탁함을 핑계로 국정운영이 어차피 기득권과 정파의 문제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맞서 그것이 진실과 당파성의 차원에 있음을 거듭 새겨야 한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9년 겨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9.11.2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