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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이’는 ‘따상상상’의 꿈을 꾸는가

한영인

한영인

주식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SK바이오팜’에 이어 ‘카카오게임즈’가 역대 최고 청약 경쟁률을 갱신하며 화제를 모으더니 9월 15일 기준으로 전체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2천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주식 열풍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뒷맛은 개운치 않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영세 자영업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름 깊은 얼굴과 연일 우상향하는 코스피 지수를 바라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들뜬 표정이 나란히 선 풍경은 실물경제와 투기성 금융시장이 괴리되어 따로 노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양가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근의 주식 열풍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시장에 새로 진입한 청년들의 활약이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욜로’와 ‘소확행’을 외치며 내일을 위한 축적보다는 오늘을 향유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여겨지던 존재들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청년들의 돌연한 ‘전향’을 둘러싼 해석 또한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청년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자 일회성 소비를 줄이고 그 돈으로 미래를 도모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거나, 밀레니얼 세대들이 이미 오를 대로 오른 부동산시장을 투자처로 고려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부와 노력을 통해 새로운 미래가치를 발굴할 수 있는 주식시장으로 눈을 돌렸다는 분석도 있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오늘날 일군의 청년들이 기꺼이 ‘주린이’(주식과 어린이를 합친 말로 주식투자 초보자를 뜻하는 신조어)가 되어 ‘따상상상’(공모가의 두배에 시초가가 형성된 뒤 사흘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는 것)의 꿈에 부풀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파국이 곧 기회인 세대

 

‘주린이’의 탄생을 소묘하자면 마땅히 파국의 장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된 지난 3월 코스피 지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여년만에 최저치로 곤두박질치면서 1500선이 붕괴되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앞에 정부도 시장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그때, 어떤 사람들은 파국이 열어젖힌 기회의 틈을 발견했다. 그들은 대표적인 우량주였던 삼성전자 주식이 6만 2000원대에서 4만 2000원대로 급락하자 이때다 싶어 ‘줍줍’에 나섰다. 이른바 ‘동학개미’의 탄생이다. ‘주린이’는 ‘동학개미운동’에 감화받아 새롭게 주식시장에 진입한 사람들을 일컫는데,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2030세대가 이런 ‘주린이’의 56%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주식에 뛰어든 이유는 간명해 보인다. 거기서 기존 질서의 드라마틱한 붕괴가 일어났고 오늘날 청년들은 파국에 뒤이은 붕괴의 국면에서야 필드에 진입할 틈을 엿볼 수 있을 만큼 ‘기회의 적체현상’에 시달리기 때문이다(현재 청년들이 ‘공정’에 민감한 것은 예전에 비해 ‘불공정’이 심화되어서가 아니라 기회 자체가 매우 적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강명은 『표백』(한겨레출판 2011)에서 모든 것이 빈틈없이 짜여 있는 사회에서 자살만이 유일한 자기증명의 형식으로 허락된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빈틈없는 세계에 자신을 기입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 세계에서 자신을 없애는 것이라는 역설적 인식은 섬뜩함을 자아내지만 이따금 현실은 소설에서처럼 완벽하게 폐색되어 있다기보다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에 개방되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과 코로나 사태 모두 예측을 불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흥미로운 건 오늘날 청년들이 정치적 승리보다 기존 시스템의 파국에서 더 큰 희망과 기회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2030 ‘주린이’들이 주식에 뛰어든 배경 중 하나가 (초저금리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정권 3년 동안 폭등한 아파트 가격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한국인에게 부동산이 단순한 주거의 공간이 아닌 “배타적 생존(생계)의 수단”(김명수 『내 집에 갇힌 사회』, 창비 2020, 8면)이라면, 청년세대에게 부동산가격 폭등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삶의 전망을 앗아가버린 거대한 폭력이었다. 청년들이 주식을 통해 뒤늦게나마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에 뛰어든 데는 ‘촛불정부’를 자임한 집권 세력이 청년들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 탓도 크다.

 

생존의 불안에서 삶의 희망으로

 

얼마 전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가 한국을 비롯한 미국·프랑스·독일·영국 등 주요 14개국 국민 1만 4276명을 대상으로 기후변화, 감염병 확산, 테러 등 글로벌 이슈 9개 항목에 대해 얼마나 큰 위협으로 느끼는가를 평가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인은 감염병과 세계경제를 걱정하는 비율이 각각 89%와 83%로 1, 2위를 차지했다. 질병과 세계경제의 향방에 대한 유난할 정도의 민감성을 한국인 특유의 생존에 대한 강박이 반영된 것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분단체제하에서 동족 간의 살육전을 경험한 한국사회에서 생존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문화적으로 유전돼 다수의 성원이 공유하는 집단적 심리에 가까워 보인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조급하게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청년들의 뒷모습에서도 역력하게 감지된다. 그들은 주식에 뛰어든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노후대비’를 꼽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오늘의 삶을 인질로 잡혀버린 청년들은 한국 노인의 비참한 현실을 도래할 미래의 악몽으로 매일 밤 재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200만원 남짓한 근로소득으로는 미래를 위한 준비는커녕 현재를 위한 소비에도 허덕일 수밖에 없는 청년 노동자들이 애써 찾아내 자신의 희망을 의탁한 곳이 주식시장이라는 점은 사회안전망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매우 옅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주식시장으로 달려간 청년들은 부자의 꿈에 부풀어 있다기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훗날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리라는 절박한 불안감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대정부질문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그같은 신뢰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두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두려움을 압니다. 무한한 경쟁 속에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날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온갖 재난과 불평등으로부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누구를 타도해야 이 두려움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문제는 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주식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데 있다. 어쩌면 ‘주린이’들이 ‘따상상상’의 꿈에 부풀어 자신의 눈을 주식 차트의 그래프에 고정할수록 그 두려움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 오늘날 청년들을 짓누르는 불안과 두려움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며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전문가들이 우려하듯이 세계경제의 회복이 미래의 존속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지구의 기후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에 비하면 앞선 주식시장 붕괴는 ‘가짜 파국’(pseudo catastrophe)에 가깝다. ‘주린이’들이 코로나로 인해 촉발된 작금의 위기는 단지 일시적일 뿐이며 세계 자본주의가 이내 정상성을 회복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 회복에의 순진한 믿음이 진정한 파국의 징후를 외면하게 만드는 동시에 서로를 보호해주는 공통의 영역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청년들이 투기성 자산시장에 뛰어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비트코인이 문자 그대로 ‘투기’에 가까웠다면 최근의 주식 열풍은 절제와 수양에 기반한 자기계발의 측면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청년들의 멘토로 새롭게 떠오른 금융인 존 리가 노후준비 수준이 전세계 꼴찌에 가까운 한국의 청년들에게 지금 낭떠러지에 서 있다며 경고한 뒤 당장 신용카드를 없애고, 차를 사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라고 당부하면 청년들은 그의 ‘소비절제론’에 화답하며 주식계좌를 신설하는 식이다. “은퇴 후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라는 존 리의 지론은 언뜻 부인할 수 없는 진리처럼 들리지만 이는 은퇴 시점의 자산 액수가 인생의 성적표처럼 작용하여 여생을 등급화하는 사회를 받아들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오늘의 청년들은 그 냉혹한 자기책임의 원리를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성의 원리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청년들이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다운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오늘날 청년들이 지닌 불안에 맞서 노년의 행복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도 아끼고 아껴서 겨우 마련한 돈으로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20.9.2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