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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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미사여구와 냉담을 넘어

황정아

황정아

4·19 직후 김수영 시인은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사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책형대에 걸린 시」, 『김수영 전집 2: 산문』) 이때 ‘시인’이란 “시 작품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라 했으니, ‘자격 있는 시인’이 되는 것 역시 문인들만의 일은 아닌 셈이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다름 아닌 그 시절 김수영의 ‘분’을 통해 혁명이라는 이름의 사건 이후 그 사건에 값하는 주체로 살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오늘날 ‘자격’을 둘러싼 비판이 일차적으로 향하는 곳은 정부여당이고, 지난 보궐선거는 그 비판이 특별한 분개의 형식으로 표출된 결과였다. 이전 정권에서라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오싹한 코로나19 방역을 비롯하여 지표상 양호한 경제 상황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제도권 정치의 틀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가 있지 않았는가 싶을 수 있겠다. 그렇기에 사실상 ‘따귀를 맞은’ 데 해당하는 보궐선거 결과를 두고 분석과 개탄이 잇따랐는데, 그 대다수가 이것이 스스로 표방한 ‘촛불정부’라는 자격과 관련된 문제임을 간과했기에,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한 시인처럼 우리의 답답함이 깊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촛불혁명의 정신에 비추어 자신의 잘못을 평가하려는 태도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남주 「민주당 참패, 촛불정신 포기에서 시작되었다」, 창비주간논평 2021.4.21.)이야말로 자격 시비를 소급적으로 정당화해준다.

 

자격 있는 주체로서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새기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를 새길 사건이 있음을 잊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촛불의 경험을 귀하게 간직해야만 그 경험을 배반하는 행위는 물론이고 그것이 가리킨 삶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팬데믹 역시 그저 더 큰 규모의 유행병이 아니라 세계의 ‘정상적인’ 작동방식이 실은 거대한 탈선임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을 기억해야 문명적 대전환이 긴급 의제임을 실감할 수 있다. 이 이중적 계기의 무거움을 계속해서 상기한다면 획기적 발상을 궁리해도 모자란 이때 인색하고 허술한 개혁마저 할까 말까 미적대는 태도가 터무니없음을 알게 된다. 지금의 우리에겐 무엇보다 다른 세계를 위한 영감이 필요하고, 당장 실행 가능한 형태가 아닐지라도 영감을 삶의 중심에 두는 순간 세계는 이미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이 ‘사건’의 경험이 준 교훈의 일부였다.

 

획기적 발상이라 했지만 어쩌면 그런 것은 듣도 보도 못한 뜻밖의 계획이 아니라 세상이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상식의 구현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다시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적어도 상식을 ‘천명’하는 일이라면 그간에도 인색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철석같은 계승을 말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 했으며, 위기를 기회로 삼아 불평등을 줄이겠다는 선언이 있었다. 한때 가슴 벅찼을 이 언어들은 이제 미사여구만을 나열하는 ‘아름다운 나쁜 시’들을 연상시킨다. 그런 시가 쓰이게 된 것이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나쁜’ 취향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세한 경위 추적 없이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기에 그 앞에서 우리는 시원하게 비웃을 수 없다. 지금의 정부가 촛불정부로 불릴 수 있든 없든 그 영감 부족과 실력 부족은 전체로서의 시민적 역량이 일정하게 반영된 것이라는 데 이르러 사태의 심각성은 온전히 체감된다.

 

여기서 김수영의 자격 시비가 겨냥한 주된 표적이 동료 ‘시인’들이었다는 점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들의 태도가 ‘냉담’이었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현재의 냉담은 그 자체가 혁명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다시 말해 혁명적 시선으로 볼 때 애초에 혁명은 없었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른 세계를 향한 영감의 문제는 다시 한번 묻힌다. ‘시인’의 자격은 지금의 정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충족되고 그 비판이 냉담하면 냉담할수록 더 ‘시인답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의 김수영이라고 세상이 다 바뀌었다거나 금방 바뀔 거란 생각에 ‘분’을 터트린 건 아니었다. 다만 ‘사건’의 의미를 향한 치열한 시적 통찰을 계속해서 수행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를 자격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사여구의 언어와 냉담의 언어는 상호조응하는 관계에 있다. 미사여구는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람이 먼저라 말하면서도 부득이 고려해야 할 기업의 처지가 있고 경제의 사정이 있으며 재정의 건전성이라는 게 있다는 함축을 행간에 심어둔다. 반면, 사태의 복잡성도 허위고 사람이 먼저라는 것도 허위이니 오로지 허위를 끊임없이 폭로하는 스스로만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냉담의 언어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원칙과 고려해야 할 상황 사이에 그어진 적대가 오랜 관행일 뿐이며 무엇보다 상상의 한계에 편승하여 지속되는 관행이라는 인식, 그러니 바로 이 한계를 돌파하여 원칙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한다는 과제는 미사여구와 냉담의 언어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믿음’이야말로 다시 출발점이어야 할 것도 같다. 이 모든 과제에 답이 있다는 믿음, 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답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본다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의 확인을 위해 촛불이 있었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그런 점에서 적폐의 청산이란 과거보다 미래를 대상으로 더 절실한 작업이다. 미래라고 여겨진 주류적 예단을 청산하는 일, 그리고 오지 않으리라 포기해온 것을 가능한 미래로 복구하는 일 말이다.

 

분열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개혁을 머뭇거리거나 개혁의 발목을 잡는 일이 빈번한 이유도 미래의 적폐청산이 미흡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최저임금과 부동산 정책이 그랬으며 검찰개혁이 그랬고 재해방지와 차별금지와 손실보상이 다르지 않았다. 불평등에 팬데믹까지 가세하여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동료시민들을 향해 더 과감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불가피함을 유보 없이 인정하고 관행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야 해답을 찾는 일은 본격화될 수 있다. 일년이 채 남지 않았지만 정부는 정부대로,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각자가 썼던 ‘아름다운 나쁜 시’들을 무책임하게 내버리는 대신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방도를 더 고심할 때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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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21.5.2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