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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전제

노영기

‘역사적 사건’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경우가 많다. 5·18도 영화 「화려한 휴가」나 「택시운전사」보다 더 극적이다. 최근 특전사동지회와 일부 5월단체가 마치 ‘상무충정작전’(광주 재진입 및 전남도청의 광주시민 진압을 위해 펼친 계엄군의 작전)을 하듯이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대국민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특전사동지회가 참배하기 전부터 지역사회는 ‘난리’가 났다. 그날 이후 광주·전남의 시민단체들이 이를 규탄하고 ‘오월정신 지키기 범시도민 대책위원회’를 만들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분명 ‘용서와 화해’를 바라고 추진한 일일 텐데,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된 것이다. 왜 많은 사람들은 특전사동지회의 참배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철회를 요구했을까? 그 뿌리 깊은 불신은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 1980년 5월 18일 오후. 김경철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며 백일 된 갓난이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날 오후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한 그는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온몸이 짓밟혔다. 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끝내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한 5·18 최초의 희생자이다. 그의 시신은 상무대의 백일사격장에 묻혔다가 5·18이 끝난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리부터 온몸의 마디마디에 처참한 상처가 문신처럼 새겨졌다.

 

둘, 5월 21일 새벽. 광주역 부근에 두구의 시신이 내팽개쳐졌다. 이날 새벽 2시 무렵까지 제3공수여단은 광주역을 지키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전남대로 쫓겨난 뒤 시민들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두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광주시민들은 시신을 태극기로 덮고 손수레에 실은 뒤 전남도청 앞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시민들은 대표단을 뽑아 전남도지사와 면담하며 공수부대를 정오까지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그간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가 떨렸기 때문이다.

 

5월 18일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저들이 국군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잔혹했다. 길 가던 사람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때로는 총검까지 휘둘렀다. 공수부대원들은 마치 ‘적국의 포로’를 잡은 것처럼 국민들의 겉옷을 벗겨 금남로 한복판에서 기합을 주고 두들겨 팬 뒤 트럭에 실어 보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의 ‘폭력과 야만’을 겪은 광주의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향토사단인 31사단으로 교체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철수와 교체 대신 계엄군의 총격이 시작됐으며, 이윽고 공수부대 저격수들의 총구가 광주시민들에게 돌려졌다. 공수부대의 총구는 어떠한 자비도 없었고 대상도 가리지 않았다. 헌혈을 마치고 나오던 여고생도, 어린 꼬마도, 임산부이던 아이 엄마도 공수부대원들의 총격에 쓰러졌다. 그날은 세상이 대자대비(大慈大悲)로 가득해야 할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셋, 계엄군의 발포로 사람들이 쓰러지자 광주시민들은 무기를 들었다. 국민들이 무장하자 군은 광주 시내에서 물러나 시 외곽을 틀어막았다. 군은 ‘명령’에 따라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을 향해 무조건 발포했다. 이제 광주는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육지 속의 섬’이 돼버렸다. 5월 22일 트럭을 타고 광주교도소 앞을 빠져나가던 가족은 ‘폭도’로 내몰렸다. 공수부대원들의 발포로 트럭에 타고 있던 엄마는 총격에 쓰러지고 막내딸은 척추를 관통당해 이후 반신불수의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넷, 5월 24일. ‘상무충정작전’을 앞두고 공수부대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장갑차와 트럭을 타고 지나던 공수부대원들은 소리만 들리면 무조건 총을 쏴댔다. 저수지에서 놀던 중학생이 저격당하고, ‘국군 아저씨’들에게 손 흔들던 초등학생은 선물로 받은 운동화가 벗겨져 이를 다시 주우려다 공수부대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원 간의 오인사격이 발생했다. 전교사 병력이 길을 지나던 장갑차와 트럭에 발포해 많은 공수부대원들이 희생됐다. 공수부대원들은 마을을 뒤져 젊은이들을 연행해 엉뚱하게 보복했다. 외지에 살다가 잠시 집에 온 청년이, 인근의 직장에 다니던 마을 청년들이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공수부대가 떠난 뒤 마을 부근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비슷한 시각 공수부대와 총소리가 무서워 하수구 밑으로 숨은 50대 주부도 공수부대의 총격에 희생됐다. 통곡과 아픔, 상처만을 남겨두고 이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다섯, 5월 2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공수부대 특공대원들이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 주요 건물을 무력 점거했다. 공수부대원들이 난사한 총격에 시민들이 쓰러졌다. 그중에는 도청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던 폭발물의 해체를 도운 신학대학생(문용동)도 있었고, 소설 『소년이 온다』(한강 지음, 창비 2014)의 주인공인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도청 안에서 피 흘린 채로 쓰러졌다. 소년의 어미는 2021년이 되어서야 노먼 쏘프 기자의 사진을 통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43년 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의한 공적 직무”나 “질서 유지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특전사동지회가 5‧18민주묘지에서 참배하고 ‘대국민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그날, 그들은 ‘얼룩무늬 군복’과 베레모 차림으로 광주에 나타났다. 이 모습을 보면서 5·18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0년 5월 27일 아침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는 보병부대 복장으로 위장한 공수부대원들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검은 베레모」)를 부르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 모두가 이 노래를 부른 건 아니었다. 그중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얼굴을 찡그린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공수부대원들은 ‘전투’에 ‘승리’한 군인들 같았다. 누구를 상대로 한 ‘전투’이며 ‘승리’였을까?

 

이번 사태를 보며 들었던 의문은 특전사동지회와 일부 5월단체는 왜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가이다. 필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응보적 정의는 마뜩잖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내용도 없이 ‘용서와 화해’만을 강요하는 것에는 반대다. ‘용서와 화해’를 구하려 했다면 광주시민들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망월동을 참배하는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걸었던 광주시민들과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아직껏 5·18의 많은 문제는 말끔하게 풀리지 않았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의 참회와 사과가 있었으나 극소수일 뿐이다. 그렇기에 2023년에도 진상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특전사동지회와 일부 5월단체가 진정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려 했다면, ‘군사작전’과 같은 참배와 선언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인 선배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증언토록 설득하는 게 먼저였다. 난데없이 나타나 윽박지르듯 강요하는 난폭한 ‘용서와 화해’에 대해 광주·전남의 지역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이다.

 

 

노영기 /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2023.3.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