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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시작이다: 세월호참사 9주년을 맞으며

하혁진


우리는 슬픔에 젖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슬픔은 우리를 적신다.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중에서

 

2023년 4월 16일. 그 봄 이후 아홉번째 4월 16일. 그날 이후 3288번째 4월 16일. 빈 종이를 앞에 두고 나는 문득 아득하다. 서랍 한구석 먼지 쌓인 그즈음의 일기장은 어디를 펼쳐도 세월호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구조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까지 회피하고 방해했던 정권에 대한 분노, 전원구조라는 최악의 오보로 시작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까지 부지런히 퍼 날랐던 언론에 대한 실망, 광장에 모인 친구들과 함께 청원 서명을 받고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누볐던 날들, 직접 만든 도시락을 유가족들과 나눠 먹고 그들의 품에 안겨 슬픔의 온기를 나눠 받았던 기억. 내용과 감정은 다르지만 어찌 됐든 거기에는 자연스레 세월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몇년 전의 기억을 하나 더 꺼낸다. 그날 역시 4월 16일이었다. 나는 청와대 분수 앞에서, 광화문 광장 위에서 피케팅을 했다. 시간이 지나 군대에 다녀온 사이 피켓의 구호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에서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짐이 고백이 되는 시차(時差). 다시 시간이 흘러 지금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시간과 기억과 망각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공포이자 불안일 것이다. 그러자 무거운 질문이 떠오른다. 2014년 모두에게 생중계되었던 잔인한 바다 앞에서의 침묵과, 2023년 ‘세월호 참사 9주년’이라는 주제 앞의 침묵은 분명 다르지 않냐는 질문이다. 그때는 거대한 슬픔 앞에 꺼내놓을 언어가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면, 지금은 내 안에서 그 거대한 슬픔 자체가 줄어버린 것은 아니냐는 질문이다. 비참하다는 말로도 전부 표현할 수 없는 비참이지만, 이 불경한 질문을 외면할 방법은 없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왜 자꾸 약해지는 걸까. 잊지 않았다는 고백은 왜 자꾸 옅어지는 걸까.

 

『슬픔의 위안』(현암사 2019)에는 슬픔(grief)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이며,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 ‘참을 수 없는’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슬픔을 위험하고 독성이 있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본다”는 문장은 조금 서글프고, “사람들은 슬퍼하는 과정도 병과 죽음처럼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문장은 너무 잔인하다. 요컨대 슬픔은 짊어져야 할 무엇, 참을 수 없는 무엇,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다. 이에 따르면 슬픔을 간직한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북함이라는 다리를 건너 슬픔에 빠진 타인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고야 만다.” 어째서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간직하고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는 ‘부자연스러운’ 일을 할까. 왜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보일까.

 

세월호참사에 대한 작가들의 글을 엮은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에서 김애란 소설가는 미개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얼마 전 ‘미개’라는 말이 문제 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편 신형철 평론가는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에서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 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 들어온다.”

 

김애란은 미개를, 신형철은 방심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개방이다. 가령 미개(未開)의 ‘개’와 방심(放⼼)의 ‘방’을 합치면 ‘개방(開放)’이 되기도 한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애란의 문장이 ‘시민’의 태도를 요약한다면, 신형철의 문장은 ‘시인’의 태도를 요약한다. 타인의 고통과 곡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민으로서도 시인으로서도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이자 자질이라는 것. 원래부터 하나였던 시민과 시인은 ‘마음을 여는 일’이라는 공통분모로 다시 만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민/시인이기 위해서 슬픔을 향해 있는 힘껏 스스로를 개방해야 한다.

 

때마침 우리의 슬픔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책과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단언컨대 두 작품은 슬픔으로부터 돌아오는 데에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데에 성공한 결과다.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다른 2023)는 세월호 생존 학생인 유가영 작가의 일기를 모아 묶은 책이다. “죽음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갈라놓았고 저는 뭍으로 밀려 나왔습니다. 그렇게 된 이상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 상처 입은 치유자)의 문장을 또박또박 따라 읽으며 나는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 같은 순간을 느낄 수 있었고, 비로소 깊은 자책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소현 감독의 「장기자랑」(2023)은 세월호 희생자 엄마들이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아이들 대신 무대에서 놀아보겠다고 말하는 엄마들은 우여곡절 끝에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이 제주도에 도착하는” 연극을 만든다. 나는 그 과정이 핍진하게 담긴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웃다가, 작은 웃음 하나에도 놀랐다는 사실에 슬펐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의 삶을 지켜낸 엄마들의 마음에 기대어 마저 울었다.

 

「장기자랑」은 영만이 엄마 김미경 님이 부르는 노래로 시작된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달라져. 말하자면 마음이 넓어져. 또 말하자면 초여름 활엽수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야.” 나는 ‘너’의 자리에 ‘슬픔’을 넣어 다시 한번 노래를 불러본다. 슬픔은 우리의 마음을 달라지게 할 것이고, 넓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 슬픔은 시작이다. 기억의 시작도, 연대의 시작도, 사랑의 시작도 슬픔이다. 약해지는 다짐과 옅어지는 고백 속에서 이제 다시, 슬픔으로부터 시작이다.

 

 

하혁진 / 문학평론가

2023.4.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