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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 햄릿을 기다리며: 연극 「함익」

이정진
이정진

이정진                             

「함익」(김은성 작, 김광보 연출, 세종문화회관 4.12~28). 이 공연에는 원작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시사하는 듯한, 아주 고약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농담(?)이 등장한다. 재벌가 외동딸인 주인공 ‘함익’의 집안에서는 ‘햄릿’이라는 이름의 원숭이를 키우고 있는데, 주인공은 극 종반부에 그 원숭이를 잔인하게 죽인다. “금테 두른 세계 명작, 인류 최고의 비극, 웅장한 복수의 드라마를 함부로 건드려”보겠다는 작가 김은성의 각오이며, 그런 결의를 작품 자체에 새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결의로 서구의 고전을 “경쾌하고 방자하게 동시대와 만나게”(공연 팸플릿 「작가 노트」 부분) 하고자 한다. 연극 공연에서 서구 고전의 한국화 논의야 새삼스러울 게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그런 방향으로의 실험이 가장 꾸준하게 이루어진 경우에 속할 것이며, 근래에는 (이 공연에서 어느 인물이 조롱하는 “타이즈 입고 하는”) 이른바 ‘정통’ 공연이 오히려 희귀해진 편이다. 특히 「햄릿」은 한국의 여러 유명극단들이 공력을 쏟아 한국화된 버전을 선보이고 자신들의 대표 레퍼토리로 삼은 작품이다.

 

190417_본문_포스터

 

그러나 연극 「함익」은 이전의 한국적 「햄릿」들과는 다른 길을 개척한 확실한 사례다. 일단 「함익」은 현시점의 한국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못 박았다. 과거 한국적 「햄릿」 공연의 상당수는 전통연희 양식을 활용하는 간문화적(inter-cultural) 무대화 전략 자체에서 의의를 찾았다. 한국 현실과의 연관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작업들도 원작의 복수 지연 플롯을 애도의 장면으로 보충함으로써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우화적인 차원에서 복기하는 데서 그친 면이 컸다.(임승태 「한국 <햄릿> 상연에서의 광증」,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햄릿」 공연에서 유독 굿의 요소가 많이 도입되었던 이유이다. 「함익」은 더 철저하게 동시대적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공연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원작의 과격한 고쳐(다시)쓰기라는 관점으로 다 포섭되지 않는다. 차라리 「함익」은 「햄릿」을 토론에 부치고자 하는데, 이 공연이 끝내 제기하는 비극(성)의 조건에 대한 논의는 결국 누가 한국사회의 진짜 햄릿이고,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까지 내포한다. 「함익」의 성취라면, 이런 메타연극적이고 잠재적으로는 첨예하게 정치적인 주제의식을 흡인력 있는 풍부하고 인간적인 드라마의 전개와 맞물리게 해놓았다는 것이다.

 

도입부 이후 한참 동안은 주인공 함익을 햄릿으로 제시하는 극적 흐름이 지속된다. 앞서 언급한 햄릿 원숭이가 함익이 처한 상황과 「햄릿」의 근본적으로 “어긋나고”(out of joint) “썩은”(rotten) 세계와의 대응관계를 확립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자살한 어머니의 시신에 매달려 있었다는 그 원숭이는 가족들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함익의 신경을 긁는다. 폭군과 같은 재벌 아버지와 지금은 두번째 부인이 된 그의 내연녀가 어머니를 자살로 몰아갔다고 믿는 그녀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환기하는 이 기이한 존재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실 가족 내에서 그녀의 고립을 부각하는 원숭이는 그녀가 대립하는 아버지의 세계를 두루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부에 기반한 과시적인 이색취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는 존재이다. 그는 기꺼이 재롱을 떨어 자신의 원숭이가 되고자 하는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알리바이 삼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애완동물로 부리는 그 실제 광경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꼭 현실에 대한 잔인한 우화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배우의 뛰어난 연기 덕에 딱히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쾌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장면들은 함익이 속한 세계 전체의 부정성을 단숨에 설득한다. 이 공연에서도 등장하는, 정략결혼이나 얕은 교양의 과시 그리고 폭력적인 갑질 같은 부유층 묘사의 상투적인 모티프의 활용만으로는 이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

 

동시에 함익이 결국은 햄릿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상당히 분명하게 암시된다. 함익의 분신이라는, 또 하나의 영리한 연극적 장치를 통해 이 인물의 한계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분신과 만나는 장면에서 그녀가 토해내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깊은 분노와 죄의식 그리고 격렬한 복수의 감정은 관객들이 이 인물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감정들의 표출은 마약을 매개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자기해방’의 순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면, 이 인물의 최대치는 마약의 힘을 빌려 억압된 인간적 감정을 풀어놓는 정도인 것이다. 확실히 분신은 햄릿의 복수의지를 북돋는 유령의 존재를 대체하지도 못하고, 원작의 유명한 독백들처럼 인물의 지적·정서적 폭을 드러내며 비극의 주인공다운 인물의 크기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인물은 스스로를 햄릿으로 상상하고 싶어한다. 그녀의 이런 욕망은 또 한명의 햄릿 캐릭터를 만나면서 불붙는다. 아버지가 소유한 대학의 연극과 교수로 부임한 함익은 학생들의 「햄릿」 공연을 지도하면서 단역인 파수꾼 버나도 역할을 맡은 가난한 휴학생 연우에게 끌리게 된다. 연우는 배우들에게 연기조언을 하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를 “직접 힘들게 고쳐” ‘배우의 기도문’으로 삼을 만큼 열렬한 연극청년이자 「햄릿」 애호가다. 이 공연에서 가장 흐뭇한 순간은 연우의 독자적인 햄릿 이해에 자극받은 함익이 연우와의 사랑을 포함하여 보다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을 느끼는 대목들이다. 연우는 햄릿의 유명한 제4 독백을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로 고쳐 쓰고, 그것을 이를테면 삶의 표어로 삼고 있다. 함익이 주재하는 작품토론 장면에서 동료들이 햄릿에 대한, 딱히 틀리지는 않은 여러 비평적 의견들을 인용할 때 연우는 햄릿을 삶의 의욕을 북돋아주는 친구 같은 존재로 소개한다. 햄릿은 예정된 왕의 지위를 마다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대로 살려고 했으며 그 댓가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고 싶은 것 뭐 하나도 뜻대로 안 되는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햄릿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 햄릿을 동시대 청년들의 선배이자 친구로 바라보는 이런 이해는 단단한 실존적 체험에 바탕해 있기에 그저 소박한 것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함익이 원작의 복수 플롯에 대응하는 존재라면, 연극 애호를 비롯해 원작의 곳곳에서 암시되는 과거의 활력을 볼 때 햄릿에 더 가까운 인물은 연우이지 싶다. 그래서 이 공연은 함익이 아니라 이 인물에게 독백의 영예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햄릿 역할을 연우로 교체하는 등 함익이 연출에 좀더 깊숙이 관여하면서 두 ‘햄릿’은 충돌하게 된다. 연우가 이전에 연기했던 버나도를 비롯 군소인물들에까지 관심이 미친다면 함익은 오로지 햄릿에게 집중한다. 게다가 연출로서 그녀는 햄릿의 풍부한 면모를 삭제하고 복수자로서의 측면만 부각하고자 하며, 점차 원작을 무시하고 고쳐 쓰면서까지 그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리허설 중에 자신이 재구축한 햄릿에 빙의하는 ‘광기’마저 보여준다. 그러나 노련하게 원작과의 대칭관계를 확립하는 플롯 진행은 햄릿과 함익의 차이를 육중한 아이러니로 조롱할 뿐이다. 아버지와 대립한다고 믿고 싶은 그녀이지만 실상 함익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폭군으로 군림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

 

그녀가 재벌가 자제로서 자의적으로 햄릿 역할을 교체한 것부터가 재단 이사장 딸이자 교수로서의 절대권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작과의 대칭관계가 더 진전되려는 순간에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함익은 햄릿이 그랬던 것처럼 증오하는 가족들을 자신이 연출한 연극에 초대한 것이다. 함익 판 「햄릿」 공연은 원작 「햄릿」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극중극 장면에 대응할 것이다. (「햄릿」에 기반한 작품에서 「햄릿」 공연이 「햄릿」 안의 극중극 역할을 하는 구조는 아주 흥미로운 자기반영성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무덤덤한 가족들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고쳐 쓴 「햄릿」은 쉽게 예상되듯이 자기만족적인 무력한 복수 판타지에 불과하다. 관객들의 반응만 보여주는 독특한 연출 끝에, 극중극 장면은 배우들의 기습적인 랩 공연으로 마무리된다. 그리스 비극 배우들처럼 모두 가면을 쓰고 나온 배우들은 각자 ‘청소부’ ‘수위’ 등등의 직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유쾌한 희극적 장면이지만, 비극을 독점하려는 함익에 대한 예술적 반란이라 할 것이다. 햄릿 역의 연우마저도 어떤 구분 없이 그 무리 중의 일원으로만 존재하는 모습이 그들의 평등주의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이런 해석/저항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은 함익의 본색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녀는 ‘평생 세상의 중심에서 비껴나서 남들 시키는 일이나 할 것들이 무슨 비극이냐’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이 공연은 이후에 마약에서 덜 깨어난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가 애꿎은 햄릿 원숭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얼마간 진심 어린 연민을 지불할 희생자로서의 면모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병적인 인물이고, 그런 모습이 까발려진 다음에는 더 극화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함익의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공식적인 주인공을 제대로 예우한다. 그녀가 분신과 함께 거울 속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장면은 장엄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다. 이런 애매한 결말이 함익에게서 햄릿을 읽어내는 오독을 자극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작품이 대안적인 비극의 주인공을 좀더 풍부하게 구현해놓았다면 이 인물에 대한 절충적인 태도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분명 「함익」은 지금 모습으로라도 한 작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을 넘치게 보여준다. 오히려 작품의 내적인 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미래의 창작과제를 예고하는 듯한 내용을 집어넣는 결정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창작과제는 동시대의 많은 젊은 연극인들이 함께 짊어진 것이기도 하다. 어쩌다보니 「햄릿」은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비극의 모델이 된 듯하고, 이즈음 젊은 연극 예술가들은 한국사회의 숱한 비극적 현실을 극화하기 위해 거듭해서 이 서구의 고전을 참조하고 있다. 특히, 정상적인 애도가 방해받는 세월호 이후의 한국사회의 상황은 햄릿과의 유비를 부른다. 「함익」은 직접적으로 그런 흐름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좀더 착실하게 이 서구의 고전비극을 학습해서 통렬한 계급 우화로 다시 쓰는 데 성공하고 있다. 충실성 논란을 피하면서 충실하게 이 작품을 활용하는 김은성의 솜씨와 접근방식은 다른 연극인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탁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생하게 구현한 보통사람 ‘햄릿’의 출현까지도 기대해본다.

 

이정진 / 문화평론가

2019.4.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