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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전문·실업교육의 오늘

 

경인여대의 재단퇴진운동

 

 

이상권 李相權

경인여자대학 세무회계과 교수, 학장직무대행.

 

 

1. 경인여자대학은 1992년 설립되어 지금은 신설학교의 이미지를 벗은 9년 된 전문대학이다. 설립 당시 640명의 학생에 교수 10명, 직원 8명의 자그마한 대학으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재학생 수가 4천명이 넘는 전문대학으로는 작지 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인천지역의 주산인 계양산 자락에 위치한 경인여대는 하나님을 경애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을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아 기독교대학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정보통신부 지정 정보통신 우수시범대학 등 수많은 외형적 지표를 자랑해온 대학이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교육목표와 자랑할 만한 외형적 지표를 내세운 대학에서 학생·직원·교수 및 퇴직교직원까지 하나가 된 재단퇴진운동과 교육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수많은 고통을 감수해온 교직원들은 재단측이 그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람답게만 대해주었다면 이런 분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 구(舊) 재단의 설립자는 모친의 유산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당시 여권의 실력자인 한 의원이 공약이행을 위해 관계 법령까지 수정하면서 설득하고 종용함으로써 졸지에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경인여대 분규의 원인은 학교를 경영할 능력도 인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학교를 설립·운영토록 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2. 경인여대의 재단비리 내용은 사립학교법 등의 관계 법령이 비합리적일 때, 학교운영자가 설립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지를 통제할 관계 관청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불법사실이나 부당성을 적절히 지도 및 감독하지 못할 때, 또 이사회 및 감사가 제 기능을 못하거나 학생·교수·직원 등의 이해관계자들이 학교당국의 불법성을 확인하고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을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분규 직전 경인여대는 설립자가 이사장이고, 그의 처는 학장, 그의 아들은 기획실장으로 있는 등 학교경영의 핵심직위가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설립자의 친인척이 일선에 나서지 않고 뒷선에서 수렴청정한다 해도 그 대리인들이 설립자의 의중을 철저히 반영하기 마련인데, 경인여대와 같이 인적 구성이 이루어질 경우 이들 가족의 대학경영 능력이나 자질 여부를 떠나서 대학경영의 모든 의사결정이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실제로 경인여대에서 모든 의사결정은 관계법령 및 정관과 내규도 무시한 채 오직 이사장과 그 일족에 의해 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경인여대에서 벌어진 비인권적 상황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직원이 학교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그 교목이 주례를 섰다는 이유로 경위서·각서·백지사표를 내야만 했고, 졸업식 날 입었던 가운을 잘 정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졸업식 날 행사장에서 쓴 의자를 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써야 했던 교수도 있었다. 또 가장 신임을 받았던 기획실 주임이 하루아침에 청소부로 전락하기도 하는 등 재단측이 내보내야 한다고 판단한 교수나 직원에 대해 가해진 치졸한 압력은 결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교수나 직원을 불문하고 충복이었든 아니든 한번 재단측의 눈밖에 나면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여지없이 경위서나 각서를 제출해야만 해서 일년에 50종 이상의 사유서나 각서를 썼던 직원도 있었다. 직원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약 4년 전에 노조를 결성하려 했다. 그러나 재단측의 간교한 와해공작으로 노조는 출범조차 하지 못한 채 무산되었고, 노조 가담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근무했던 직원 중 3명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심지어는 노조 와해에 앞장선 직원까지도 강제사직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학교를 조속히 떠나든지 교육적 양심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인권마저도 버려야 했다. 이러한 전례와 비인권적 상황이 처장급 간부와 비서들까지도 전원 재단에 등을 돌리게 했다.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는 경인여대 교직원과 학생들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는 경인여대 교직원과 학생들

 

설립 후 9년 동안 경인여대를 떠난 교수는 80여명, 직원과 조교의 수는 300명 가까이 된다. 1999학년도만 해도 25명의 교수가 학교를 떠났고, 이들 중 18명은 분규 바로 전 학기에 떠났다. 분규 발생일인 2000년 5월 23일 현재 교수 61명 중 절반에 해당하는 31명이 임용된 지 2년 미만이었으며, 이 중 16명은 채 3개월도 되지 않았다. 직원의 경우에는 기능직을 포함한 총 52명 중 44명이 계약직으로 근무기간이 1년 미만이었으며, 이 중 35명이 6개월 미만이었다. 게다가 계약직이 아닌 8명 중 겨우 5명만 행정직이고, 3명은 운전기사 등의 기능직으로, 행정업무는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이렇게까지 교직원을 내쫓는 비인권적 작태를 계속한 것은 아마도 엄청난 재정비리가 노출될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3. 2000년 5월 23일 이전의 학내 분위기는 어수선하였다. 20여명의 교수들이 교직 자체까지도 포기하고 무조건 학교를 그만두려 하였고, 직원들의 경우도 선임자들조차 1학기말이나 늦어도 2학기에는 학교를 떠나려 하는 등 교직원 모두 정신적 공황상태에 있었다. 교직원들은 2월말 교수연수로 실시한 영성체험에서 전임 학장이 행한 세족식(洗足式)에 충격을 받아 삼삼오오 모여 울분을 토하였고, 이 이상한 종교체험 때문에 한 신임교원은 곧바로 사직하기도 했다. 3월초에 지난 2월 사직서를 제출한 교수들의 징계문제가 구체화되었다. 사직서를 제출한 교수들은 징계를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위서·반성문·각서를 썼을 뿐 아니라, 이를 구 재단일족인 이사장·학장·기획실장 앞에서 마치 초등학생처럼 낭독해야 했고, 2월분 급료도 환불하였다. 한데 4월초 한 퇴직교수가 인터넷에 안티(anti)경인여대 게시판을 운영하였다. 그 게시판은 그간 당한 사연을 공개하는 구 재단의 성토장이 되었고, 퇴직교수와 재직교수 간의 연락창구가 되어 초기 10여일간 무려 1만 건 이상의 접속건수를 기록했다. 그 당시 주요 보직교수와 행정직원 대부분도 이 게시판의 존재를 알고 본인들은 열심히 즐기고 있었지만, 구 재단일족이나 구 재단관계자에게 말해줄 우려가 있는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구 재단의 친인척에게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게시판은 현 재직교수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한 운영자에 의해 한달여 만에 폐쇄되었지만, 교직원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물론, 구 재단의 비교육적 처사에 대해 개인적 차원의 저항은 간헐적으로 있었다. 아니 저항이 아니라 청와대나 검찰·교육부 등에 통할 수 있는 지인을 찾아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소하거나 학교에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차원이었다. 간혹은 강력하게 저항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인들은 오히려 이를 문제시하면 다른 대학으로 이동하는 데 막대한 지장이 있으니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직원 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퇴직한 직원 중 몇몇은 부당노동행위로 구 재단을 노동부에 고발하여 초과근무수당을 받아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울분을 삼키며 조용히 떠났다.

4월말경 학생들에게서 미묘한 움직임이 있었다. 대의원회에서 총학생회의 재건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조사한 것이다. 사실 학생들은 지난해(1999)에도 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했지만, 학교측의 조직적인 방해로 총학생회의 재건이 무산된 바 있었다. 또 체육관에 숙소를 두고 재단 이사장과 학장이 기거하면서 자신들의 체육시설 이용과 안면에 방해된다고 학생들의 수업을 제한하기까지 하여 학생들이 일시적이나마 반발한 적도 있었다. 열악한 교육여건과 복지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수업에 사용하지도 않는 교재의 강매, 실습비의 별도 징수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교수들이 강제적으로 억압하기도 하였다. 강력한 학생자치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일부 학생들이 학생회의 재건 문제를 교수들과 상의하면서 교수들의 적극적 도움을 요구하기도 했다. 교수들은 심정적으로는 동의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미칠 파장을 우려하여 학생들이 이룰 수도 없는 일로 공연히 분란의 불씨를 지피지 않았으면 했다. 때문에 교수들은 자기 학과 학생이 학생회 재건에 앞장서는 것에는 반대하는 이중성을 보이거나, 학교의 문제, 교수의 문제, 교육의 문제가 학생들이 나서서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이 다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학생들을 만류하고 나서는 등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부활절 행사에 세례 학생수를 50% 확보하라는 강요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여 강요되는 주문식 교육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에서 무원칙한 인사정책에 의해 대부분의 교수가 승진에서 탈락되어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수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교수협의회의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교수협의회는 철저히 점조직으로 활동했고, 80% 이상의 교수가 가입한 후 이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노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음에도 4년 전 노조를 설립했다가 철저히 짓밟힌 경험도 있고, 대부분이 경력이 1년도 안된 신임이었기 때문에 중심세력을 규합하기가 쉽지 않았다.

 

4. 학생들은 학생회 재건을 위한 준비모임에서 5월 23일에 비상총회를 개최하여 학생회장을 선출하기로 하고 5월 22일 각 학과로 이를 통지했다. 그 과정에서 정보가 누출되어 5월 23일 새벽 2시 학과장회의가 비상소집되었다. 구 재단측은 이 자리에서 이미 논란이 되고 있던 유치원 교실의 지하강의실 사용 문제로 유치원 자모와 일부 학생들이 동조하여 소란이 있을 수 있다며, 학과장들에게 책임지고 이를 저지하라는 지시와 함께 각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비상학과장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교수는 이미 교수협의회에 속해 있었고, 학생회의 재건을 지지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5월 23일 오전 10시 학생들은 비상총회를 개최해 학생회장을 선출했고, 교수협의회는 오전 11시 이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뒤이어 직원들도 사태를 파악하고 오후 4시 노조를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5월 24일 노조설립 사실과 함께 학생회장 선출에 대한 지지성명을 공표했다. 학생·직원·교수 3주체가 이렇게 짧은 순간에 단합할 수 있었던 것은 구 재단이 얼마나 비교육적·비인권적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학생·직원·교수의 3주체는 곧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밝혀진 비리사실을 밤새 정리하여 5월 24일 오전 10시 경인여대 사태와 구 재단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세상에 알렸다.

사실, 비상대책위는 재단과의 싸움에서 특별한 전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비상대책위의 구성원 대부분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상당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 비상대책위의 3주체는 업무를 분담하여 각각의 임무를 수행했다. 학생회는 외곽경비조와 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조직했고, 노조는 집행부를 구성하여 노동조합법을 학습하면서 학생회와 교수협의회의 활동에 필요한 행정지원을 하고 학생들과 함께 야간경비를 담당했다. 교수협의회는 재단비리의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정보화하고 문서화했다. 교수협의회는 운영팀, 자료분석팀, 싸이버팀, 문서화팀, 대외협력팀, 복사 및 팩스팀, 의료지원팀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 교수협의회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3인의 공동의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사실 교수협의회의 구성원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교육민주화와 교육개혁에 대한 의지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차 구 재단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분개하기 시작했고, 또 분규사학과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여 공부하면서 우리의 투쟁이 단순한 악덕비리재단의 퇴진만이 아니라 교육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한 운동으로 승화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교수협의회는 점차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교육민주화’라는 최종 목표를 설정하여 구호화했고, 매일매일의 회의 시작과 끝에 이를 구호로 외치며 결의를 다졌다. 농성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월급과 일상 경비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처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마련한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철야농성에는 출산을 앞둔 여교수님까지도 참여했으며, 3개월째 접어들자 생활고로 부인이 부업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자녀를 학교로 데려와 돌봐야만 하는 교수가 하나둘씩 늘어갔다.

우리의 교육민주화 운동의 목표는 우선, 구 재단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고 그들을 옹호하거나 도와주려는 개인이나 단체에 그들의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계기관에 구 재단의 비리를 폭로하고 우리의 입장이 재단퇴진임을 명확히 알리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홈페이지를 비상대책위의 홈페이지로 전환하여 구 재단의 비리를 공개하고, 성명서를 비롯한 우리의 입장을 천명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인터넷의 위력은 대단했다. 퇴직교직원들은 격려와 함께 그들이 당했던 사실을 폭로했고, 심지어는 미국으로 떠난 교수들까지도 참여했다. 또한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시민, 작가, 타대학 학생과 교수들까지도 참여했다. 또한 인터넷으로 관계기관에 정확히 문서를 보낼 수 있어 재단비리와 우리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사태를 파악한 주요 언론사와 방송국은 관심을 표명하며 취재에 나섰고, 사정기관에서조차 관심을 피력하고 관련자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비리사실에 대한 구 재단의 근거 없는 해명과 변명에 대하여 정확한 증거를 스캔하여 제시함으로써 구 재단의 거짓된 탈을 철저히 벗겨낼 수 있었다. 급기야 구 재단측은 인터넷선과 전화선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 재단측의 이러한 행동으로 여론은 그들에게 더욱더 불리해졌으며, 우리 구성원의 대오는 더욱더 굳건해졌다. 물론 인터넷의 힘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교육NGO의 대표들과 만나 대책을 숙의하는 한편 관계기관 앞에서 시위도 하고 국회의원이나 관계 요로를 찾아다니며 우리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5. 분규발생 후 2주 만인 2000년 6월 7일부터 17일까지 교육부 감사가 있었고, 분규발생 40여일 만인 7월 3일에 구 재단의 퇴진이 결정되었으며, 60일 만인 7월 21일에 관선이사회가 개최되어 이사장과 학장(직무대행)이 선임되면서 경인여대의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아직 구 재단의 치졸한 대응이 상존하고 몇가지 필요한 후속조치가 있지만, 경인여대의 학생·직원·교수 3주체 모두는 이제 불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경인여대의 구성원들은 이 나라의 보편적 정의와 양심을 믿고, 경인여대를 자유, 자율, 교육적 양심 그리고 학문과 사고의 다양성이 넘치는 활기찬 민주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또한 경인여대를 좋은 대학으로 만들어 분규대학의 모범적 모델이 되도록 관선이사와 학교 구성원은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분야를 논의하고 협조하는 등 힘을 합하고 있다. 분규 시작 당시에는 강의실에 분필이 모자라고 교육자료를 복사할 복사용지도 없는 열악한 교육여건과 인사권의 전횡을 비롯한 암담한 교육현실을 다소나마 바꿔보려는 생존권 차원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분규과정에서 많은 사학의 분규자료를 분석하고 교육NGO 대표들과 논의하면서 사학비리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악덕비리재단의 퇴진이야말로 교육개혁과 교육민주화 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경인여대의 분규는 생존권 차원의 재단퇴진운동에서 교육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한 재단퇴진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경인여대 재단퇴진운동의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너무나 치욕적인 상황을 개선하고자 뭉친 학생·직원·교수 3주체의 전원 참여와 흔들림 없는 단결된 힘에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양심적 지성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심적인 지성을 대표하는 수많은 교육NGO, 언론인, 방송인, 국회의원, 사정기관, 사회지도층, 교육부 공무원, 시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승리는 경인여대 구성원들은 아직도 악덕비리재단 치하에서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이제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면 경인여대의 악덕재단퇴진 승리사례가 이 나라 교육민주화와 교육개혁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