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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3회 창비신인소설상 가작

 

김지우 金智雨

1963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 국문학과 졸업.

 

 

 

눈길

 

 

그새 또 지랄맞게 눈발이 날린다. 철 만난 한추위 원풀이라도 하듯, 달도 없는 섣달 그믐밤부터 진탕만탕 퍼부어댄다. 자우룩한 눈안개에 덮여 운장폭포 아랫길이 흔적조차 없다. 밤낮으로 익혀온 길눈이 아니라면 길을 틔울 수조차 없을 것 같다. 그믐치에는 없던 바람마저 살아 산등성이로 밭 언저리로 눈발을 휘몰고 다니고, 과녁빼기 운장사 풍경들은 소리를 놓아버렸다. 아무래도 살짝이 지나가고 말 눈이 아니었다. 운장산성길 돌담 한군데를 호되게 다스려놓든 참나무골 버섯막사를 그예 반병신을 만들어놓든 한바탕 북새질을 쳐놓을 심보다. 별나게 볕이 좋던 두어 날 새 골안개에 먹진 구름이 동무해 걸릴 때, 암만해도 재 넘어오는 바람이 수상쩍다 여겼어야 했다.

‘사람 인심 한번 좆같네. 조카새끼가 암만, 지가 가서 한번 둘러볼랑만요 했다손 한 놈은 내다봐야 쓸 것 아녀?’

명색이 설 푼수에 놀이삼아 치우는 눈도 아니고 안 그래도 뒤숭숭한 속에 부아가 치밀어 사내는 싸리비를 훌떡 내던져버렸다. 종손이면 큰영감이나 장형인 태수형이 종손이지 종갓집 고구마 줄기라고 줄줄이 종손은 아닐진대, 아들병풍 치고 제 모실 것도 아니고 굴러다니는 아들 중에서 하나는 인사삼아, 작은집 태섭이가 시방 참나무골에서 눈 터니라고 욕보고 있응게 얼른 빗자루 한나 들고 나가봐라이, 하고 내몰아야 어른 도리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미친년이 상추 뜯듯 해놓았든 어쨌든 사내는 만여 본이나 되는 큰영감네 버섯막사 스무 동을 털어놓긴 했다. 부라퀴 같은 영감이 매조지 하나는 워낙 단단하게 해둔 덕으로 두어 날은 더 퍼부어도 영감네 버섯들이 눈더미에 몰사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큰영감 밑에서 품팔이 댓달 만에 종산 한옆을 도지 얻어 이천 본 가량 접종해놓은 사내네 버섯들인데, 흥부네 자식들 불쌍타 할 것 없었다. 그집 자식들 이불 하나로 삼동 나는 거나 이집 자식들 뜯어진 비닐 한 장으로 모진 눈발 배겨내는 거나 입성 사납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잖아도 경상도 어디까지 닿는 길이 하필이면 종산을 관통해서 뚫린다는 통에 맨속 시끄러운 날뿐인데 어쩌자고 눈발은 저리 휘몰아치는지, 해토머리 따신 바람 한줌이 이리 귀할 줄 예전에는 몰랐다. 사내는 종잡을 수 없는 날만큼이나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보아하니 금세 시들해질 눈은 아닐 성부르고, 어젯밤처럼 쌕쌕 휘몰아치면 밤중에라도 손전등 밝혀 들고 다시 한번 둘러보고 가더라도 사내는 일단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하도 날이 지랄같은지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조차 잡히질 않고 햇솜을 널어놓은 것마냥 눈안개만 자욱하니 딴세상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골 안에 저 멀리 동진강으로 흘러드는 수만댐 상류를 안고 있어 평소에도 참나뭇골은 골안개가 잦았다. 그러나 오늘처럼 길을 감춰버리지는 않았다. 이쪽 길이 보리밭둑길이지 하고 가늠잡아 걸으면 그보다 더 안쪽에서 불쑥 보리싹이 넘실거리고, 참나뭇골과 수만골 갈림길이 요쯤일 텐데 하고 보면, 밭둑 두어 장은 장히 어긋나 있었다.

갈림길에서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 눈발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야트막한 솔숲 하나만 질러가면 큰집이었다. 한데 요즘 들어 큰영감이 시큰둥하니 사내를 대하는 태도가 어째 떨떠름했다. 갑작스레 종산이 두 동강이가 난다고 깃발이 꽂히면서부터였다. 덩달아 사내도 떠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큰영감 배려가 아니면 알랑꼴랑한 버섯농사나마나 그나마도 작파를 해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큰영감 기침소리가 사내의 일진이 되고 큰영감 눈치에 맞춰 손발을 놀려야 했다.

사내는 일단 큰집이 있는 솔숲으로 발길을 놓았다. 영감 행태가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자니 설인사치고 안됐다 싶고 빈속에 한속도 들고 생판 남도 아니고 어쨌거나 조카새낀데, 덕담으로라도 무슨 언질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시방 저 소리가 떡국을 맛나게 먹으라고 허는 소리다냐, 숟가락 놓고 물러서라고 허는 소리다냐. “국물까정 훌훌 떠묵어감서 묵어야” 하고 말부조를 넣은 것을 보면 조카새끼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말 같기는 한데, 사내는 입맛이 싹 달아나버렸다.

“그렁께 느그 엄니가 찾어와갖고 허는 말이, 니가 맘잡고 살게끔만 해도라는 것여. 그서 내가, 갸가 애깃적버텀 배깥으로다만 떠돌았는디, 농새를 질 중 알겄소, 뒤엄냄시를 맡을 중 알겄소. 아니헐 말로 갸 잘허는 짓거리도 흙 묻히고 사는 것허고는 생판 다른 일인디, 내가 갸헌티 심 보태줄 일이 뭣이 있겄소 했제. 그렁게 느그 엄니가 문중산이서 시숙님 표고 키우는 일 조까 허게 해도랴. 갸도 새끼까정 뒀는디 언제까정 달 밟고 다니겄냠서.”

“아따! 언젯적 얘기다요.”

사내는 못마땅해서 중도에 큰영감 말을 잘라버렸다. 듣자듣자하니 덕담은 고사하고 거지 쪽박 깨는 소리 다름아니어서 낯꽃이 먼저 알고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고렇게 낯 붉힐 일이 아닌디 무단시 성은 내고 그런다. 그렁게 내 말은 문중산이 결딴나뻔지게 생겼응게, 너도 살 채비를 허라 그 말여. 보상비 조까 나오는 것 갖고는 조상님들 묏자리를 봐야 헐 텡게 말여.”

그러니까 큰영감 딴에는 생각고 당신 속엣말을 잘깃잘깃 풀어낸 모양인데, 사내 귀에는 어째 간사위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갈가위 같은 영감이 뉘라서 보상비를 먹잘 것 없이 죄다 뫼 쓰는 일에 풀겠는가. 미련퉁이가 아니고서야 아무렴 여태 그만한 눈치를 못 챘을까. 당신 살 궁리 찾아 황영감네 묵정밭을 봐두었다는 것이 천년만년 감춰질 성부른가. 그럴 양이면 그 땅에다 노지재배를 할 거라고 당신 입으로 냠냠거리지나 말 일이다.

사내는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감당 못하게 들러붙던 졸음이 단박에 가셔버렸다.

하여 사내는 큰영감이,

“입맛이 깔깔허다냐 어쩌다냐. 고거 한술을 다 못 뜨고 냉기게”

하면서 건네준 농익은 죽순주도 마다하고,

“글먼, 제 뫼시고 난 퇴주를 줄까이?”

하고 골방에서 내온 더덕주도 마다하고,

“품팔러 다님서 마시던 쐬주나 한잔 허고 말라요.”

해서, 나는 요 집안에서 암것도 아닌게 요러고 마실라요 하는 게정부림으로 상밑에다 놓고, 한잔 쳐주겠다는 큰영감 손도 물리친 채 자작으로 따라 마시다 일어섰다.

“벌써 갈라고야? 즘심이나 묵고 느 성들 새에 껴 놀다 가제.”

“집에서 기다릴 텡게 가볼랑만요.”

영감이 붙잡거나 말거나 갈 채비를 차린 사내는 두말 않고 문턱을 넘어섰다. 잠깐 새에 눈발이 더 우꾼해진 것을 모르고 무심코 뒤따라 나오다 영감이 진저리를 쳤다. 사내 또한 고개 하나 길이라고는 하지만 날이 보드라울 때 얘기라 순간 아뜩했다.

“쪼깨 지달렸다 시든 참에 갔으먼 쓰겄고만.”

그예 사내가 뚝뚝하게 “눈이야 어채피 내리는 눈이고” 하자, 영감도 “승질도 참말로 개떡 같네이” 했다. 여편네 샛서방을 보내는 길도 말려야 할 참에 조카새끼나 되는 놈이 고집을 쓰니 마뜩찮은가 보았다.

“누가 왔을랑가도 모르겄고……”

얼결에 뱉어놓고 사내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도 영감은 무슨 말인가 하는 눈치였다.

“누가 와야?”

“………”

“요런 눈속에야?”

“………”

“창시가 빠졌는갑다.”

사내는 어물쩍 웃었다. 그러나 창시가 빠졌건 어쨌건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삐죽새가 소양읍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설 전에 출감인사를 오겠다던 놈이 미제 드라이버, 핸드드릴, 소형 커터, 만능키 따위를 마저 구입해 들어온다고 잡은 날이 하필이면 이 눈속이었다.

 

─성님, 나 나왔소.

하는 놈의 안부 전화가 어찌 그리 반가웠을까. 설움 많은 며느리 친정 하늘 쪽만 쳐다봐도 눈물겹더라고 사내가 꼭 그 꼴이었다.

해서 모처럼 만난 감방 동기에게 제 신세를 하소연한다는 것이, 종산이 이러저러해서 내 신세가 각다분하게 됐다 하고 말았으면 될 일을 그만 느자구없이,

─손에 쥔 게 없응게 힘도 팽겨뻔지고, 주눅도 들어뻔지고, 말발도 서들 않고, 깜방에서 시방까지 고생헌 게 넘 존 일만 시케뻔지고, 나는 물먹는갑다.

하고 주절거렸던 것이다.

하여 삐죽새 깜냥에, 이제 막 출감해서 잔전푼 하나 없는 제 신세나 손씻고 나대봤자 개밥에 도토리 꼴인 사내 신세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는지, 사내가 들어 귀가 솔깃한 제안 하나를 하고 나섰다.

─그러게 돈 떨어진 자리가 그대로 초상난 자리고 돈이 많으면 귀신도 사귄다고 안 그럽디까? 내가 말이요, 안에서 새 기술을 하나 전수받어 나왔는데…… 금고요. 아, 그럼, 믿을 만하지. 어떻소? 단칼성님 머리하고 내 기술하고 합치면 큰 거 하나 건질 것 같은데.

순간 사내는 깔깔하던 입맛이 돌았다. 머릿속에서 물레방아가 돌고 낯꽃이 피는가 하면 곱고 고운 여인을 품은 듯 샅이 서고 어이없이 풍맞은 손처럼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사내는 이틀 말미를 달라고 했다.

삐죽새는 단순·무식·과격이란 말을 잊어버렸냐고 깔깔거렸다. 생각이 많으면 이 세계는 종친 거요,라고도 했다.

삐죽새 말대로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이틀을 꼬박 사내는 꿈에 덜미가 잡혀 허덕였다. 아무리 내풀로 꾸어지지 않는 게 꿈이라고는 하나, 뜬금없이 송광이발소 정양이 형사로 둔갑해 기겁을 하게 하질 않나, 이미 육탈삼매경에 든 가친이 느닷없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 물끄러미 내려다보질 않나, 꾸는 꿈마다 방정맞게 죽살이를 치는지라 사내는 가뜩이나 없는 웃음에 말수까지 잃고 시름잠을 앓는데, 삐죽새란 놈은 약조된 날이라고 이틀 뒤 다시 빠꼼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놈은 되묻고 말고도 없었다. 예전에 사내가 그랬듯이 단칼에 잘랐다.

─연장 준비 들어갔소. 넉넉 잡아 열흘 정도 걸릴 테니 성님은 장소를 물색해두쇼.

사내는 다음날로 전당포로 금은방으로 빌딩사무실로 현장답사를 다녔다. 별안간에 잦아진 사내의 바깥 나들이를 두고 노친네가 꾀꾀로 엿보는 눈치였지만 사내는 애써 무시했다. 그러나 그믐을 앞두고 달빛마저 핼쑥해진 길을 걷자면 그날의 노친네 울음소리가 턱턱 가슴을 쳤다.

“인잔 느그 자석을 생각해야 써. 너 볕 보고 나와 요러고 존 날에 요런 말을 헐랑게 나도 마음이 들 좋긴 허다만, 그려도 쪼깐 들어봐라이. 쩌 욱에 운장사에서 작년버텀 유치원맨키로 어린이집을 했시야. 할매가 넘의 일 댕긴께로 어떨 적엔 갱아지맨키로 쫄랑쫄랑 따라댕기기도 했제만, 넘에 일 감서 애기가 따라댕기먼 다덜 들 좋다 헝께 항시 데리가든 못했제. 글먼 쟈 혼자서 집도 보다 잠도 자다 험서 노는디…… 늙으먼 맬갑시 눈이 찔꺽거려싼당께…… 일 갔다 오먼 할매 치매꼬릴 붙잡고설랑은 할매, 할매 함시롱 놔주덜 안혀. 근디 일 가갖고 항시 옳게 올 수는 없고, 날이 저물어갖고 끝날 적도 허다헌께로, 하루는 어두컴컴헌 디서 뭣이 한길까정 나와 섰다가 할매 허고 달라붙는디, 시상이나! 지딴에 암만 지달려도 지달려도 할매가 안 온께로 즈그 어매맨키로 지 띠놓구 달아난 중 알었든개벼. 무단시 울어쌓고 그런다, 인자 니가 있는디 뭔 걱정이라고 그래쌓냐? 그래갖고 쟈를 그 운장사 어린이집에 보내덜 안했겄냐이. 근디 거그서 종우때기에다 아부지넌 뭣을 허고 어머니넌 뭣을 허는가 적어 보내라는디, 오매 환장허겄는 거! 뭣이라고 끄적거려줄 것이냐이, 그 종우가 쟈 낯바닥인디. 아배는 감옥 갔고, 그새를 못 참고 어매는 도망질을 쳐뿐졌다고 써줄 것이냐, 어짤 것이냐. 인자넌 학교할라 들어가는디 어째야 쓸랑가 모르겄다.”

하나 사내는 그 소리도 애써 무시했다. 개장수도 올가미가 있어야 개장수 노릇을 하고 살 것이 아닌가.

드디어 사흘째 되던 날, 사내는 숙직원도 없고 경비도 없는 신용금고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층은 철창과 쇠문으로 철저히 방비가 되어 있지만 이층은 철창이 없어, 연장가방을 둘러메고 옆 건물을 통해 이층 창문을 따고 들어가서 일층과 이층 사이의 철문만 통과하면 될 것 같았다. 사내는 낮에 나가 잔전을 바꾸고 통장 하나를 개설하면서 내부구조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맨 안쪽에 대형금고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장통이라 마감시간을 넘겨서도 입금이 되는지라, 금고에 쌓아둔 돈은 다음날 개점시간에야 은행으로 옮겨가는 듯했다. 사내는 그날로 삐죽새에게 연락을 취했다.

 

영문을 모르는 큰영감은 아직도 어떤 창시빼기 빠진 놈 운운하고 있었다. 점심이나 먹고 갈 줄 알았다가 사내가 급작스레 일어서는 바람에 놀란 큰집붙이들이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젖혔다.

“누가 온다고 저런 답뎌?”

“들어보먼 모르냐? 허는 소리제.”

“안 그런감만……?”

그러든 말든 사내는 모자를 툭툭 털어 쓰고 마루를 내려섰다. 한데, 개새끼조차 사람을 만만히 보는지 제 집 식구들 하고많은 신발들은 저만치 아껴두고 하필이면 사내의 축축한 장화를 깔고 앉았는지라 사내는 심사가 뒤틀려,

“망할 놈의 개새끼, 요리 안 내놀라냐?”

하고 대뜸 소리부터 내질렀다.

그예 큰영감이 민망했던지,

“요샌 야도 시먹었는지 말을 안 들어야. 살살 달개야 써.”

하는 것을,

“짐승새끼도 늙으먼 그런갑소이.”

하고 귀거칠게 맞장을 쳐주고 영감이 뺏어준 장화를 꿰신고 나왔다.

 

고샅을 벗어난 사내는 눈안개에 둘러싸여 꼬리가 잘린 신작로를 놔두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상수리나무를 붙잡고 폭포 옆으로 살살 질러가면 될 길을 발품 팔면서 구불탕구불탕 놓인 신작로로 돌아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침나절에 올라올 땐 나무등걸을 한짐 양껏 지고 오르는 양 기운을 뽑아놓더니 내려가는 길 또한 만만찮게 가파르고 뒤가 사려졌다.

오를 적엔 깔꾸막이요 내릴 적엔 비탈길이라. 좆같은 내 인생 똑 그 짝이 났구나. 지랄허고 아리랑, 옘병헌다 아리라앙…… 하다보니 사내는, 내가 언제는 편편한 길 딛고 살았더냐 싶고 통이 대통만 해지는 게 세상일이 별것도 아닌 것 같아졌다. 자빠지고 또 자빠지면 내 살인께 궁뎅이야 아프겄제만 물정없이 자빠지랴, 한정없이 아프랴.

앞도 뒤도 없이 끄무레한 눈바람 속이라 대관절 얼마나 내려왔는지도 모르겠고, 헐떡거리기나 할까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질 않는데, 몇잔이나 마셨다고 취기는 또 그렇게 올라채는지 몰랐다. 맞바람에 쫓긴 눈송이들이 한사코 얼굴로만 달라붙는 통에 사내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정작 날리는 눈송이들은 종잇장보다 가벼운데 바람이 매웠다. 술기운마저 삭아드는지 다시 한속이 들었다. 찬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된 살갗들이 얼음 박인 살성처럼 빨갰다. 겨우내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다독거려 놓은 살성들이 아릿거리는 게 결국 트고 말려나 보았다.

덜그럭거리는 장화조차 눈길을 걷기에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도나캐나 쭝절거리던 타령도 집어치워버렸다. 이따금 낮도깨비마냥 적막을 깨뜨리던 꿩들조차 아랫길로 가뭇없이 날아가버리고 발목까지 움푹움푹 패는 사내의 장홧발 소리만 둔탁하게 울렸다. 사내는 갈수록 힘이 팽기고 고단했다. 말동무 없이 혼자 걷는 길은 가슴에다 묻어버린 사람을 불러내고 물색없이 맥없는 사람을 보고 싶게도 해, 사내는 울적해졌다.

여자는 못 올 것이었다. 저 눈속에 여기가 어디라고 여자 몸에 언감생심 길을 나설 것인가.

그날 해월양반을 거기서 만난 것부터가 탈이었다.

 

설을 이틀 앞두고 표고수매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명절을 쇠려면 언제해도 이발은 해야 할 터, 따로 시간을 빼고 말 것 없이 나온 김에 들러가자 싶어 사내는 이발소로 들어갔다. 설대목인지라 그날따라 송광이발소는 무척 붐볐다.

미장원이야 남사스러워 발 넣기가 그렇다 해도 이발소는 소양반점 옆에 하나가 더 있었다. 시설도 송광보다 낫고 마흔댓된 부부 둘이서 하나는 깎고 하나는 면도를 하는데, 인상들도 후덕하고 속도 무던해 보이는 집이었다. 하나 아주 나이든 축이나 드나들까, 눈 달린 사내들은 죄다 송광 패찰을 달았다. 이발비를 살짝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소양이발관처럼 기다리면서 심심하니까 요거 한잔씩 마시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 커피를 내놓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들이란 집밖으로 나서면 고자 아닌 이상 딱 한 부류였다. 소양이발관에는 없는 면도사 아가씨가 송광이발소에는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면도사 아가씨가 보통 맹랑한 것이 아니었다. 성씨나 일러줄까, “이름이 뭣이요?” 해도 “몰라요,” “글먼 나이가 있어 뵈는디 몇살이나 자셨디야?” 해도 “몰라요,”  “글먼 겔혼은 했디야?” 해도 “몰라요,” “글먼 여그가 객지랑가 고향이랑가?” 해도 숫제 “몰라요”였으니, 사내 몸 만지고 사는 년이 영판 싸가지가 없다고 단박에 사내들 입초시에 올랐다.

사내야 큰영감 대리로 표고조합 회의에 갈 때나 들러갈 뿐으로, 그것도 기껏해야 부스스한 머리털이나 후닥닥 손질하고 갈 뿐이었다. 여자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법도, 이발 후 여자 손에 머리 감는 일을 맡기는 법도 없었다. 그저 데면데면하지 않을 정도의 눈인사나 상긋이 건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나 여자는,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건달들처럼 똥배짱도 없는 사내의 자라난 습성이 본시 그런 것을, 사내가 쇠양배양하지 않아 보여서 눈길을 주었던가 보았다. 표고조합 사람들이 이따금 흘리고 가는 말도 사내에 대한 정보로 새겨들으며 눈길을 키워나간 모양이었다.

어느 한갓진 날, 여자가 머리만 깎고 바람처럼 일어서는 사내를 붙잡아 앉혔다.

“손님도 없고 하니 노는 손에 면도 한번 해드릴게요.”

“저를요? 왜요?”

말해놓고 쑥스럽기는 여자나 사내나 마찬가지여서, 여자는 의자 앞에 가서 무턱대고 섰고, 사내는 우물쭈물,

“이런 디서 한번도 안해봤는디……”

하다가 주인남자가,

“써비스해줄랑감만 가서 앉으쇼.”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앉기는 했으나 주인남자가,

“우리 정양이 웬일이디야.”

하고 한켠 놀리는 소리에 사내는 그만 자리가 옹색해져, 물수건도 싫고 대충대충 밀어만 주면 일어서고 싶은데, 여자는,

“그렇게 움직이시면 베어요.”

하면서 꼼짝을 못하게 하고, 보다 못한 주인남자가,

“이따가 우리 정양헌테 커피라도 한잔 사주면 되지라.”

해서야 사내는,

“그러지라.”

하고 온정신을 되찾았다.

그 다음부터 가끔 오다가다 이발소에서 종이커피나 한잔씩 나눠 마셨을 뿐, 별달리 속깊은 얘기가 오간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해월양반이 그날따라 무슨 주책을 부리려 했는지 별안간에,

“정양은 슬에 집에 안 가남?”

하는 것이었다. 여자도 그날따라 무슨 생각에선지, 몹시 지쳐 보이기는 했으나 평소와는 다르게 가벼이 속내를 드러냈다.

“갈 데가 없어요. 태섭씨네나 갈까요?”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해 사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해월양반이 냉큼 받아,

“항, 그리혀뿔소. 요즈막새야 여자가 슬에 넘의 집 찾어가는 것이 어디 숭이간디?”

하고 항, 항, 주책을 떨어댔다. 사내는 그저 해월양반이나 여자나 명절 앞두고 하는 말치레겠거니 했던 것이다.

 

개울 건너 오성마을부터 시작되는 운장산성길은 발밑을 내려다보기가 겁날 정도로 급회전길이었다. 평소에도 야트막한 가드레일에 의지해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야 할 정도로 사나웠다. 가랑비만 뿌리려 해도 온통 뿌옇게 안개가 서리는 탓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아니면 섣불리 들어서기를 꺼려했다. 때문에 큰눈이 내리면 오성리분서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들의 출입을 통제하곤 했는데, 입춘이던 그믐밤에 내린 눈이 바람만 재워두고 왔을 뿐 근자에 드문 폭설이었다. 해서 마을사람들은 몰라도 외지인의 출입은 막을 것이 뻔했다.

용케 출입을 허가받았다 해도 운장사 밑까지 오르막길로 이십여리에다, 운장폭포에서부터 내리막길로만 십여리 길을 제 발로 걸어들어오지 않는 한, 삐죽새도 수만골로 들어서기란 당분간 글러먹은 셈이었다.

하물며 여자 몸에야.

 

다복솔밭을 지나 사내는 잔돌평전으로 나왔다. 마른 풀들이 자리보전하고 누운 산죽더미만 벗어나면 너덜겅과 된비탈이 끝나고 거기서부터가 잔자룩한 구릉지이자 수만골 초입이었다. 소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따위가 우거져, 예전엔 산판일과 숯막이 쌔고쌨던지라 산판골이나 숯막골로 불렸다.

그러나 사내 기억에 본디 수만골 자리는 지금보다 더 깊은 안골, 그러니까 진묵대사 설화 속에나 나오는 태조암 근처로 산판일이나 숯 굽는 일보다는 문종이 만드는 일들을 했었다.

봄이면 골안 가득 닥나무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던 것을 어찌 잊으랴. 사내의 유년이 게서 딱 멈춰버린 것을……

동상댐 물막이공사가 시작되고 마을이 지금의 수만골로 옮겨 앉자 언제부턴가 안골마을에 차츰차츰 물이 차오르더니 어느 틈에 산기슭의 닥나무까지 잠겨버렸다.

문종이 기술자였던 사내의 아버지는 산판일도 숯 굽는 일도 하지 않았다. 사내 생각에 그 일이 문종이 만드는 일과 뭐가 다를까마는 그는 주막거리에서 술에 절어 살았다. 뭇사람들 말에 술과 계집과 노름은 함께 온다던가. 그가 그랬다. 술 다음에 주막거리 여자가 순번을 타더니 산판 뜨내기 노름꾼들이 달라붙고 이주보상비가 넘어갔다. 그 뒤를 유산으로 받은 참나무골 전답문서가 잇고 마침내는 그가 감나무에 목을 매고 넘어갔다. 하여 사내의 유년마저 천둥벌거숭이로 훌떡 넘어가버렸다.

 

이윽고 사내는 돈들막으로 내려섰다. 하나, 둘, 셋, 하고 뛰어내리기만 하면 그대로 신작로에 풀썩 내려앉을 터였다.

멀리서 보매 철딱서니없이 뉘집 개가 저러고 어슬렁거리나 했더니 개가 아니라 수만상회 해월양반이 그 날궂이를 하고 있었다. 당신네 가게 앞을 쓴다지만 눈이나 그친 다음에 쓸어도 쓸 일이지, 저것이 날궂이가 아니면 영감태기 노망 아니겠는가.

“아따, 설에 점빵문도 열고 신작로도 치우고 겁나게 부지런도 허시요이.”

사내가 웃음엣소리를 건네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손반갑게 맞더니 눈을 쓸던 빗자루로 사내 몸을 툭툭 털어댔다. 언 몸뚱이에 쏟아지는 빗질인지라 빗자루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쇠막대로 두들겨맞는 것처럼 얼얼해 사내가 손사래를 치자, 해월양반이 집이 지척인데 게서 몸을 녹여 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해서 사내는 정초 마수걸이나 해줄 요량으로 안으로 들어서서 진열된 과자 나부랭이들을 훑어보았다.

“저기 말여, 정양헌티서 연락 없었어?”

해월양반은 궁금한 김에 묻기는 했어도 깜냥에도 이 눈속에 어찌 오랴 싶었던지,

“아니, 접때 말여. 지가 먼첨 오고 잡다고 그래쌓길래……”

하고 슬쩍 말꼬리를 사렸다. 그래도 영감망구 되면 오지랖만 넓어진다고, “가시나가 고만허먼 싸가지는 있어뵈던디”라고 끝내 훈수 한수를 두고서야 물러났다.

“무단시 그래쌓소. 가시내가 싱겁 한번 떤 것 갖고는. 갈라요.”

사내가 과자 댓 봉지를 집어들고 일어서자 해월양반이 먼저 나서,

“내가 고것덜 조까 애기헌티 선사헐라네.”

하고선 한사코 돈을 마다했다. 한동안 서로가 됐다느니 마다느니 실랑이를 하다가 사내가 끝내 고집을 세우자 해월양반이 막무가내로 싸리비를 내둘러 사내를 밀쳐냈다. 저만큼 밀려나서도 사내가 선뜻 걸음을 못 떼고 망설이고 섰자,

“어른 말 들어라이.”

하고 제법 서슬 푸르게 나왔다. 그러고 나선 그 길로 도로 비질이었다.

“넘들이 보면 노망났다고 그러겄소. 눈 그치먼 허제.”

“글먼 저대로 애껴놔두라고? 을어뿐질 틴디? 내싸둬라이, 늙어서나 저 허고 잡은 디로 허고 살게.”

‘해필이먼 오늘막사 눈이 요러고 퍼붓을 것이나.’

더는 해월양반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사내가 지나가는 고샅을 따라 예서제서 개들이 입방정을 떨어댔다.

 

“쟈는 즈그 아배 똥 빨아묵을라고 저러고 지케섰는갑네.”

“아녀이. 아버지하고 장기 한판 둘란단 말여. 그치이?”

“글 텡께 먼처 들어가 있으야.”

사내가 물찌똥을 내뿜느라고 말이 어눌한 것을 저만 못 알아듣고,

“뭐라고? 크게 좀 말해봐.”

하고 눈치없이 누차 채근을 넣다 제 할머니한테 면박을 당했다.

“거 봐라. 할매가 뭣이라고 했냐? 대그빡에 눈 이고 섰지 말고 후딱 안 들올쳐?”

노친네의 닦달이 떨어져도 아이는 제 나름의 뒷심을 믿고 움쩍도 하지 않았다.

저번 슬 같잖게 인자는 느그 아배가 있단 말이제. 노친네는 슬몃 웃음을 베물었다. 사내가 출감해서 한동안은 제 할머니 치마꼬리만 붙잡고 배배 돌더니만 그래도 핏줄이라고 사내가 일하는 참, 쉴 참에 짬짬이 담배도 날라오고 물대접도 들고 오며 풀방구리 드나들듯 하더니, 표고막사까지 따라다니며 일일이 참견하고 간섭하고 나섰던 것이다.

“인자 니가 고러고 느그 아배를 꽉 지케섰뻔지먼 쓰겄다.”

순간 변소간에서 “아 데꼬 헐 말이 따로 있소” 하는 사내의 엉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노친네는 다소 무르춤하기는 했어도,

“글먼 인자 느그 새끼가 너를 지케주고 니가 느그 새끼를 지케야제 무장 심이 보타가는 내가 헐거나?”

하고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내도 더는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 후딱후딱, 하고 보채대던 아이가 손바닥을 샅에 넣고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랴아, 꽁꽁 얼어뿐져라이.”

노친네가 그예 미운 소리를 쳤다.

하나는 지키고 섰고 하나는 방문도 못 닫고 찬바람을 쐬고 앉았는지라 사내는 마음이 급한데, 설사라는 게 가래떡 뽑듯이 쑥쑥 밀고 나오는 게 아니고, 옷을 추스를 만하면 다시 뱃속이 사매질을 놓는 통에, 그만 다리에 쥐가 나려고 했다.

꽝꽝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온 바람에 변소간 나무문짝마저 삐걱빼각 호들갑을 떨어대는지라 사내는 꼭 벌판 가운데 나앉은 것만 같았다.

 

─시팔 것들이 기를 쓰고 막네. 도무지 말이 안 통해. 깝깝시럽고만.

예상했던 대로 삐죽새는 오성리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성님 집에 세배 간다고 허지 그랬냐?

─왜 안 그랬겠소. 그런데 새끼들이 대번에 거짓말 말래. 배낭 메고 세배 가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여튼 배는 고프지 날은 춥지 시팔 것들은 저 지랄이지 환장하겠네.

설이라고 근방의 음식점들이 죄다 문을 닫아 여태까지 음식이라고는 휴게소에서 국수 하나 사먹고 슈퍼에서 컵라면 하나 물 부어 먹은 것밖에 없다니, 남들 배터져 죽는 설마당에 배곯아 죽은 거리귀신 하나 생겨나 운장산 눈길이 원수라고 두고두고 날궂이를 해도 탓할 바가 아니었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네.

사내는 겨우 “해필이면……” 했고, 만수받이처럼 삐죽새가 그 뒤를 받아 “하필이면” 했다.

고수레떡은 풍신나게 던져놓고 손바닥만 옹골차게 비벼댄 것도 아니건만, 무슨 날이 저리도 자발맞단 말인가.

─어찌 했으면 좋겠소? 삼사일 안엔 어림없다던데.

─사날이야 가겄는가마는 우선 자네가 탈일세.

수중에 지닌 돈도 없고, 그렇다고 정초부터 목탁동냥을 다닐 수도 없고, 더더구나 큰일을 앞두고 잔전푼에 억지시주를 받으러 월장을 할 수도 없는 터라, 여간 외통수에 몰린 것이 아니었다.

─야튼 뱃속이라도 채워야 헐 팅게 이러면 쓰겄네. 일단 시내로 나가서이……

─여기 말고요?

─여그서 우왕좌왕해봤자 졸 게 뭣이 있겄다고? 시방은 넘 눈이 무선겨.

─모자를 눌러 썼으니까 그건 뭐. 안경도 하나 썼고.

─영판 잘했네이. 나가는 대로 방버텀 한나 잡고이, 귀때기 엷은 가시내나 한나 꾀어갖고 객고 풀고 있으소.

─요새 누가 외상씹을 준답디까? 방값도 간당간당한데. 야튼 현장 부근에다 잡아놓겠소.

전화를 끊고 나서도 사내는 어째 불안불안했다. 사천만이 다같이 쇠는 명절날이니만큼 임검이야 나오겠는가마는, 현장답사를 한답시고 밤잠 안 자고 설치다 놈이 불심검문이라도 당하는 날이면? 게다가, 아이고! 이 까마귀 대갈통아! 사내는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눈바닥에다 발자국 찍어놓지 말라는 소리는 누구 제상에 올리려고 깜빡 잊고 말았단 말인가.

사내는 구시렁구시렁,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남의 몸뚱이를 빌려다 뼈마디는 못질하여 박고 살은 인두로 땜하여 붙인 듯 온 삭신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사내가 오갈병이 든 것처럼 하도 떨어대자 장기판을 들고 설레발을 치는 아이를 노친네가 눈짓하여 밀어냈다. 아이가 퉁퉁걸음으로 튕겨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노친네가 꿀물 한 대접을 조심스레 내밀더니,

“아까막새 큰집이서 즌화가 왔는디 무신 여자 한나가 시방 거그 와 있댜.”

했다. 꿀물이고 나발이고 사내가 흠칫해서

“뭔 소리다요?”

하고 놀래자, 별안간에 노친네가 음성을 높였다.

“느그 큰어매 말이 오성리분서서 즌화가 왔는디, 아무케 아무케 생긴 여자가 이래저래 해갖고 시방 갔응께, 여자 혼자 몸에 사고나 안 당혔는지 느그가 츳 들목인께 조까 나가 보래디야. 그서 가본께, 그집 메누리요 허드라든디, 니가 모르먼 내가 니 몰래 감춰둔 자석이 따로 한나 있을 것이나?”

해서 사내가,

“아따, 아 듣소. 혹시 소양서 왔다고 헙디까?”

라고 나직하게 되묻자 노친네도 나지막이, 근갑더라 했다.

사내는 가슴이 벌렁벌렁 뜸베질을 치는 한편으로 난감했다. 이래저래 설마설마했던 것을, 저 눈길이 어디라고 그래, 어쩌자고 들어왔단 말인가.

“느그 큰어매가 시엄씨도 모르는 메누리가 다 있다고 웃어쌓는디 넘부끄러 혼났다. 어째 요즈막새 밤길을 밟는다 했더니 그서였고만 무단시 가슴 죌였다. 어째? 아랫방이다 불 조까 지필거나? 말 안헐래? 나 맘대로 헐까이? 헌다이. 좆뺄 눔, 뭣이 챙피허다고 말도 못허고 저럴까이. 야튼 색시가 꾀 하나넌 조조다.”

하고 노친네가 호물호물 웃는데, 사내는 노친네가 “아이, 라이터 조까 던지랑께” 하고 삼이웃이 다 알아채도록 소리를 질러서야 골똘한 생각에서 풀려났다.

 

사내는 담배 하나를 불붙여 물고 마루로 나왔다. 줄 풀어진 연처럼 바람만 펄렁거릴 뿐 눈은 잠깐 그쳐 있었다. 울안이고 울밖이고 온통 하얘서 너도나도 없어져버린 듯했다. 낮으니까 땅바닥이고 일어섰으니까 나무고 산자락이고 하늘이지 사내 눈엔 그저 한가지, 눈세상인 것만 같다. 참말 곱다. 곱고도 섧디나 섧다. 사내는 새삼 눈을 떼지 못했다.

“오사네. 냉갈내가 모다 저헌티만 가느만 얌잔내고 앉었네이. 아이, 지침나와야아?”

아랫방에다 마들가리를 지피던 노친네가 눈물을 훔치며 나와서야 사내는 후루룩 정신이 깨어났다.

아궁이로 들어가야 할 내가 거처없이 마당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오래도록 비워놨던 방이라 불이 잘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곡식창고로밖엔 쓸 일이 없어서 작년 여름 기름보일러를 묻으면서도 부러 놔둬버린 방이었다.

“매운디 놔둬뻐리쇼 그래.”

한번이나마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면서 만사가 귀찮은 아낙처럼 퍼져 앉아 입으로만 한몫 보려드니 노친네는 사내가 같잖은가 보았다.

“상관 마시고 후딱 넘어나 갔다 오시제? 해 떨어지먼 가고 잡아도 못 갈 팅게.”

하고 새살궂게 농을 걸려 들었다. 안 그래도 돌아가는 판세가 어째 요상하다 싶어 심란해 있던 참이라 사내는,

“내싸두쇼. 지 발로 걸어오겄제라.”

라고 볼강볼강 어깃장을 놓긴 했으나 여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답답한 노릇이었다. 여자도 우썩우썩 들어오는 길을 어째서 대갈마치 삐죽새가 못 들어오냔 말이다!

아무래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듯싶었다. 하나 그 길을 또 넘어갔다가 올 일이 암담했다. 저퀴들린 것처럼 몸상태도 간단치 않은데다 아직도 고까운 심사가 남아 썩 내키지 않는 길이었다.

이나저나 코딱지만한 마을에 정초부터 여자가 저 눈길을 뚫고 찾아든 것만 해도 말 물어낼 일인데, 제 스스로 며느리라고 명토박고 나왔으니 여자 뱃속에 서너달 수 애까지 하나 심어둔 걸로 혹 하나 덧붙여 소문이 돌 것이다. 정초부터 우세도 보통 우세가 아니었다.

어쨌든 뒷갈망은 해야 할 터였다.

한정없이 퍼부을 것 같던 눈이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인날 궂은 일진이 예서 멈출지는 더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