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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선영 尹善暎

1972년 서울 출생.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aquacat@hanmail.net

 

 

 

 

미세스 오

 

 

셔츠가 왜 다 이 모양이야? 옷장 속의 와이셔츠들을 뒤적이던 남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토스터에 식빵을 집어넣으며 여자는 남편 쪽을 향해 되물었다. 이거 좀 봐. 남편이 거실로 나와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 한장을 여자의 얼굴을 향해 들어 보였다. 와이셔츠는 구깃구깃 했다. 그제야 여자는 어젯밤 해뒀어야 할 일을 미처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림질해둔 거 없어? 하나도? 남편이 물었다. 미안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박 잊었어. 여자는 잰걸음으로 남편을 향해 다가가다가 식탁 다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었다. 짧고 큰 신음을 내뱉은 여자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남편은 괜찮으냐는 말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통증이 멎을 때까지 기다릴 새도 없이 여자는 다리를 절룩이며 남편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와이셔츠를 빼앗았다. 금방 다려줄게, 오분이면 돼. 여자의 얼굴이 구겨진 와이셔츠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무슨 수로 오분 만에 다린다는 거야? 난 지금 나가야 돼. 남편은 여자를 밀치고 다용도실을 향해 걸어갔다. 남편은 세탁물 바구니 안에서 어젯밤 벗어놓았던 셔츠를 다시 집어들고 나왔다. 여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찧은 새끼발가락을 감싸쥐었다. 남편은 와이셔츠를 걸치고 빠르게 단추를 채웠다. 잠들어 있던 아기가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토스터에서 구워진 식빵이 튀어올랐다. 뭐라도 먹고 나가야지, 빵에 버터 발라줄까? 여자는 깨금발로 일어서서 토스터 안의 식빵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편은 대꾸도 없이 넥타이를 둘러맨 후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발치에 떨어져 있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주워 소파 위로 던져놓았다.

아이의 칭얼거림이 점차 커지더니 곧 울음소리로 변했다. 오전 여덟시였다. 겨우 세시간을 자고 일어나 잠에서 덜 깬 채로 아이를 안아 어르고 분유를 먹여 재운 지 한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야? 울잖아, 가서 어떻게 좀 해봐. 재킷을 걸쳐 입고 방에서 나온 남편이 턱으로 방을 가리켰다. 남편은 두리번거리며 가방을 찾기 시작했다. 가방은 소파 위에 널려 있는 옷가지와 담요 아래 처박혀 있었다. 집구석이 이게 뭐냐? 정리 좀 하고 살자. 남편의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오늘은 정리가 좀 되겠지. 여자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남편은 여자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오늘 온다고 했나?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시계를 확인하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었다. 간다. 짧은 인사를 남긴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두꺼운 철제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여자는 스물네평 아파트에 남겨졌다, 우는 아기와 함께.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는 다리를 절룩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부딪힌 발가락이 아직도 아릿했다. 아기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울어대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여자는 스툴에 앉아 아기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우는 아기의 가슴을 토닥였다. 소용없었다. 아기는 특별히 까다롭거나 예민하지는 않았지만 유독 잠투정이 심했다. 어쩔 수 없이 여자는 아기를 들어 안았다. 빨리 아기를 재워야만 했다. 이틀 후가 마감이었다. 오늘의 작업분량을 진척시키지 못하면 마감을 어기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그것은 여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 중 하나였다. 여자는 양팔로 아기를 가슴에 받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방 안과 거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생후 육개월인 아기는 이제 오래 안고 있기에는 무거웠다. 금세 손목이 시큰거렸다. 아기를 안은 채 여자는 하품을 했다. 졸리고 피곤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져 사흘 밤낮쯤 깨지도 않고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아기를 안고 서성거리는 동안 여자는 흡사 포탄이라도 맞은 듯한 집 안 풍경을 둘러보았다. 소파 위에는 가방과 옷가지가 널려 있고 소파 테이블에는 책과 잡지들, CD와 과자봉지 등이 빈틈없이 올려져 있어 상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보행기와 일회용 기저귀 패키지, 장난감과 걸레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텔레비전 앞 거실 한가운데 놓인 건조대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빨래들이 늘어져 있었다. 식탁에는 빈 컵과 스푼, 젖병과 밀폐용기가 함부로 널려 있고, 개수대 안에도 양념과 음식 찌꺼기가 묻은 그릇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걸레질을 하지 못한 바닥은 얼룩지고 끈적거렸다.

아기는 삼십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다시 잠들었다. 여자는 조심스레 아기를 침대 위에 눕힌 뒤 방을 빠져나왔다. 여자는 식탁 앞에 앉아 토스터 안에 그대로 꽂혀 있는 식빵을 빼냈다. 빵은 그사이 비스킷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여자는 물 한잔과 함께 굳은 식빵을 먹어치웠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정오였다. 아기를 보행기에 앉혀놓고 이유식의 마지막 한 숟갈을 막 떠먹인 참이었다. 여자는 이유식 그릇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안에 사람 얼굴 하나가 동그랗게 떠올랐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죠? 여자는 물었다. 모니터 안의 사람은 대답 대신 철제 현관문을 작게 두번, 똑똑 두드렸다. 여자는 체인을 걸어둔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을 열고 여자는 다시 한번 물었다. 방문자는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고, 검정색의 큼직한 토트백을 들고 있는 50대 중반의 여자였다. ‘여호와의 증인’일까? 그렇지만 방문자는 포교활동 다니는 종교인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은 반드시 둘씩 짝지어 다니지만, 방문자는 혼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방문자는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라는 말 대신 여자에게 1041105호가 맞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경계심을 지우지 못한 채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 제대로 찾아왔네요. 사람 쓰기로 하셨지요? 방문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제대로 찾아왔다고? 여자는 당황해하며 천천히 현관 체인을 풀었다.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방문자는 여자의 거실을 훑어보았다. 당황한 것은 여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방문자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고 놀란 기색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여자는 보았다. 저기…… 여자가 허둥거리며 입을 열자 방문자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입가에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업체 소개로 왔어요, 저는 미세스 오예요. 방문자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여자가 가사도우미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여자는 살림에 재주도 취미도 없었지만 식구가 단둘이었을 때에는 적어도 집다운 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것은 아기가 태어난 후부터였다. 작업과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여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점차 지치기 시작한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살림을 포기하다시피 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처리하며 지냈다. 그래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이런 꼴로 살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기를 갖지 않거나, 몇년 후로 미뤘을 것이라고 여자는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작업을 포기한다면 적어도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려두지 못하거나 집구석이 이게 뭐냐는 핀잔을 듣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여자는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자는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웹툰 작가였다. 인터넷 포털에 자신의 이름이 내걸린 연재 페이지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행운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출산으로 인해 두달가량 연재를 쉬어야 했을 때,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하고 불안했다.

여자는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부터 가사도우미 문제를 고민해왔지만, 어쩐지 선뜻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용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도우미를 고용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돈이 들겠지만, 망설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미묘한 죄책감이었다. 돈을 지불하거나 지불하지 않거나,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부리는’ 일에 여자는 왠지 저항감이 들었다. 이를테면 여자는 대중목욕탕에서조차 한번도 목욕관리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본 일이 없었다. 옆자리의 누군가가 서로 등을 밀어주자는 청을 해오지 않는다면 먼저 그런 부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사지가 멀쩡한 이상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공간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하는 몫이라고 여자는 생각해왔다.

이대로는 안돼. 네가 일을 계속할 거라면 사람을 쓰는 게 합리적이야. 처음에는 그저 좋을 대로 하라고 여자의 선택에 맡겨두었던 남편은, 집안이 점차 쑥대밭이 되어가자 당장이라도 도우미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품 내다버리는 일을 제외하면 남편은 가사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남편은 여자보다 더 바빴던 것이다. 그들 젊은 부부는 매일 되풀이되는 바쁜 일상과 업무, 육아와 가사에 지쳐 밤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이 시기를 잘 버텨내야 했다. 여자는 절박했고,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여자는 사흘 전 도우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거실에 서 있는 방문자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방문자는 여자가 상상했던 가사도우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장 차림으로 찾아오는 가사도우미가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잘 관리된 단발머리와 자연스럽고 세련된 화장, 미세스 오라고 자신을 소개한 말투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자는 뭐랄까, 가사도우미라기에는 지나치게 품위와 교양이 있어 보였다. 동네 거리나 아파트의 벤치, 슈퍼마켓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마주치곤 하는 편한 옷차림과 흔한 파마머리의 중년 여자들과 달리, 방문자는 어느 대학의 교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인상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어쩐지 주눅이 들었고, 아기의 이유식이 묻어 있는 자신의 셔츠가 신경 쓰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무슨 일부터 하면 좋을지 말해줘요. 미세스 오가 말했다. 일할 때 입는 옷은 가방 안에 따로 넣어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주방 쪽에 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고, 미세스 오는 토트백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도우미의 근무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네시로, 일주일에 두번 방문해주었으면 한다고 업체에 말해뒀다. 업체에서는 시급은 만원이며, 방문한 도우미에게 일당으로 지급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여자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보행기에서 꺼내 전동요람 위에 눕혔다. 우선은 세탁과 설거지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달라고 하면 좋을까? 네시간 안에 몇가지의 일을 해줄 수 있는 것일까? 해달라고 하기만 하면 그 어떤 귀찮은 일이라도 다 해주는 것일까? 여자는 궁금했다.

슬랙스와 셔츠로 갈아입은 미세스 오가 방에서 나왔다. 편한 옷차림으로 바뀌자 위화감이 약간 가시기는 했으나, 결코 친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미세스 오는 이런 일을 다닐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주 가사도우미를 부리며 낮에는 백화점이나 문화센터를 다닐 법한 넉넉한 집안의 사모님처럼 보였다.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미세스 오가 물었다. 여자는 머뭇거렸다. 일하러 온 사람에게 일을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왜 이다지도 힘든지 여자는 곤혹스러웠다. 여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겨우 입을 뗐다. 저, 그럼…… 먼저 설거지 좀 부탁드릴게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여자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미세스 오는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씽크대로 걸어갔다. 고무장갑은 어디에 있나요? 미세스 오가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평소 고무장갑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마침 서랍 속에 새 제품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미세스 오에게 건넸다. 미세스 오는 씽크대에 널려 있는 그릇들을 개수대 쪽으로 끌어모으고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짜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여자는 전동요람에 달린 모빌을 아기에게 흔들어주며 씽크대 앞에 서 있는 미세스 오를 곁눈질했다. 세찬 물줄기에 한동안 접시들을 헹구던 미세스 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물을 잠갔다. 괜찮다면 라디오를 들어도 될까요? 미세스 오가 여자를 향해 물었다. 공손하고 정중한 말투였다. 라디오요? 여자는 뜻밖의 기습이라도 당한 듯 되물었다. 네, 음악을 틀어놓고 일하는 편이 능률도 올라가고 즐겁거든요. 아기도 깨어 있고 하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미세스 오가 말했다.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텔레비전 옆에 놓인 작은 일체형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디오 전원을 켜본 건 얼마 만일까? 다행히 오디오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93.1로 맞춰주실래요? 미세스 오가 요청했다. 여자는 버튼을 돌려 채널을 FM 93.1에 맞췄다. 스피커에서 여자가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곡이 흘러나왔다.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자신의 집 거실은 여자에게 매우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라디오 채널 하나만으로 지저분하고 비좁고 어지러운 실내에 고여 있던 공기가 변화하고 일순간 생기를 띠는 것에 여자는 기이한 감동을 느꼈다. 미세스 오는 물을 틀고 설거지를 계속해나갔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조대 앞에 섰다. 빨래를 부탁하려면 건조대부터 비워놓는 것이 순서일 듯싶었다.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일하고 있는데 자신은 가만히 앉아 빈둥거리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다. 여자는 바싹 말라 있는 수건과 옷가지를 걷어서 갠 뒤 옷장을 놓아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손잡이에 미세스 오가 입고 온 베이지색 정장이 걸려 있었다. 여자는 옷장 문을 열려다 말고 미세스 오의 상의 안쪽에 달린 옷의 상표를 슬쩍 확인했다. 검정색에 은색 실로 수놓인 상표의 알파벳 철자를 보고 여자는 깜짝 놀랐다. 미세스 오가 입고 온 정장은 오늘만큼의 일당을 400번쯤 받아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가인 브랜드였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여자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는 가사도우미 일을 했다. 물론 어머니는 정장 따위를 입고 일하러 가지 않았다. 아니, 여자의 기억 속에 정장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도 어머니는 낡은 스판 바지에 패딩 차림이었다. 빈약하고 시든 꽃다발을 건넨 어머니는 여자와 사진 한장을 겨우 찍고는 졸업식이 끝나기도 전에 일을 하러 가야 했다. 여자는 미세스 오의 정장 상의 칼라를 쓰다듬어보았다. 고급스러운 소재였다. 캐시미어일까?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얇은 모직의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저 여자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사업가인 남편이 부도라도 낸 것일까? 아니면 심심풀이 삼아서?

소파 테이블에 쌓여 있는 책과 잡지를 여자가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씽크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 이걸 어쩌지. 미세스 오가 황망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개수대 안에 접시 한장이 깨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여자가 물었다.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워서 그만. 미세스 오는 한숨을 쉬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여자는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접시는 대형마트에서 한장에 삼천원을 주고 산 싸구려 제품이었고, 여자 역시 급하게 설거지를 하다가 종종 접시를 깨뜨리곤 했다. 개수대 옆의 식기건조대에는 세척된 그릇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미세스 오는 특별히 일손이 빠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제 씽크대와 식탁에도 마침내 빈 공간이 보였다.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미세스 오는 깨진 접시와 파편을 수습해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뒤 설거지를 마저 했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가스레인지까지 닦았다. 여자는 세탁과 욕실 청소를 맡기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곧 욕실에서 물을 뿌리고 솔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세스 오가 작업실 방문을 노크했다.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하던 여자는 회전의자에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욕실 청소까지 끝냈는데, 차를 한잔 마셔도 좋을까요? 미세스 오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네, 그러세요. 여자는 쉬어가며 일하라는 말을 자신이 먼저 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여자는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한시반이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함께? 여자는 고민스러웠다. 냉장고 안에는 이렇다 할 반찬거리도 없었다. 미세스 오가 손님은 아니었지만, 낯선 탓에 가족이나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하기도 어려웠다. 여자는 미세스 오를 따라 주방으로 나왔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온화한 목소리로 곧 방송될 관현악곡을 소개하고 있었다. 식사부터 하셔야 하지 않나요? 여자가 물었다. 아, 그럼 그럴까요?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점화 스위치를 돌리던 미세스 오가 동작을 멈추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 역시 엉망이어서 누군가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제가 준비할 테니 가서 일 보세요, 바쁘신 것 같은데.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등 뒤에서 미세스 오가 말했다. 아뇨, 여태 계속 일하셨는데,까지 말하고 여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줌마 혹은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려니 어쩐지 실례를 범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다른 고용인들이 흔히 그러듯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앉아서 좀 쉬세요. 여자는 호칭을 생략하고 말했다. 식사부터 하고 나서 쉬는 게 낫겠어요. 미세스 오가 말하며 여자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여자는 엉거주춤 일어나 냉장고 옆으로 물러섰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비좁은 주방에서 오히려 방해가 될 터였다. 여자는 방으로 돌아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준 뒤 매트에 눕히고 장난감으로 한참 놀아주었다. 아기의 웃음소리와 도마를 두드리는 리드미컬한 칼질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식탁 위에 2인분의 점심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플라스틱 찬기에 들어 있던 밑반찬이 깨끗한 접시에 덜어져 있었고, 새로 끓인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 미나리 초무침이 올라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냉동실 안에 고등어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호박이 좀 물러지고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인 두부가 있기에 얼른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끓였어요. 여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미세스 오가 말했다. 그건 미나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자는 다듬는 것이 귀찮아서 채소 칸에 미나리를 처박아둔 채 잊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찌개는 간이 심심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미나리 초무침은 별다른 양념을 한 것 같지 않은데도 새콤달콤해서 식욕을 돋웠다. 미세스 오가 차린 밥상은 여자를 기쁘게 했다. 누군가가 해주는 밥을 먹어본 게 얼마 만일까, 여자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가 방문했다면, 아마도 오늘 같은 이런 평일 오후에 모녀가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결혼한 딸의 집으로 밑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주고, 일하는 딸을 위해 밥상을 차려준다거나, 잔소리를 하면서도 집안일을 거들어준다거나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여자의 어머니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한번 해봐요. 미세스 오가 자신의 생선 접시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말했다. 네? 고등어살을 헤집던 여자는 고개를 들어 미세스 오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하면 가시들이 일어나서 빼내기 쉬워져요. 미세스 오는 젓가락을 수직으로 세우고 반으로 갈라 구운 고등어의 노릇노릇한 속살을 살살 긁었다. 자, 그다음에 이렇게 옆쪽 가시를 깨끗하게 떼어내는 거예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미세스 오가 말했다. 미세스 오는 깨끗하고 요령있게 생선살을 발라낼 줄 알았다. 여자는 미세스 오가 가르쳐준 대로 따라해보았다.

여자는 촉촉한 고등어 살을 씹으며 미세스 오에게 말을 건넸다. 이 일은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미세스 오는 일년 남짓 되었다고 말했다. 미세스 오는 묻는 말에 딱 필요한 만큼만 대답했을 뿐, 그 이상의 말을 덧붙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일을 다니는 다른 집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을지도 모른다. 힘들지는 않으세요? 여자가 묻자 미세스 오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할 만하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그 이상 캐묻는 것은 역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을 삼켰다. 전업주부는 아니신 것 같고, 집에서 일을 하시나봐요? 이번에 질문을 해온 건 미세스 오였다.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미세스 오는 여전히 정중한 말투로, 필요 이상 조심스레 물었다. 아, 저는 그림을 그려요. 여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만화를 그리고 있어요. 미세스 오가 미나리 초무침을 젓가락으로 집어올리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리시는구나. 저도 젊었을 때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그다지 재주는 없었지만. 한때 유화를 배운 적이 있다고 말하며 미세스 오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웃는 얼굴에 어쩐지 쓸쓸한, 혹은 씁쓸한 표정이 섞여 있다고 느꼈을 때였다. 미대 출신인가요? 미세스 오가 물었다. 여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요, 저는 그냥…… 여자는 말을 흐렸다. 그럼 전공은 그림 쪽이 아닌가보네요? 무심히 묻는 미세스 오에게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 비운 밥공기에 물을 따라서 천천히 마시고 나서야 여자는 말했다. 저는 대학 안 나왔어요. 미세스 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래요. 미세스 오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을 생전 처음 봤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고 물을 끓였다. 커피랑 녹차 티백이 있는데 뭘로 하실래요? 여자가 물었다. 미세스 오는 식탁을 정리하며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여자는 두잔의 머그컵에 커피믹스 봉투를 뜯어 털어넣고 끓인 물을 부었다. 미세스 오는 씽크대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한손으로 목덜미와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가 머그컵 하나를 미세스 오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미세스 오는 예의 그 품위있는 어조로 말했고, 그러자 여자는 자신이 이 집에 일하러 온 사람이고 미세스 오가 자신을 고용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미세스 오는 여자가 갖다준 컵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저기, 이거 혹시 커피믹스인가요? 미세스 오가 물었고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세스 오는 시음이라도 하는 양 가만히 컵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바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컵에 다시 손대지 않았다. 여자가 젖병을 소독하고 아기 분유를 다 탈 때까지도 미세스 오의 커피는 줄어든 흔적이 없었다. 커피 안 드세요? 여자가 묻자 미세스 오는 난처한 듯 웃었다. 사실 저는, 커피믹스는 못 마셔요.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나봐요. 못 마신다고? 어째서?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가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동안 미세스 오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미세스 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세스 오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망설이다가 베란다 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거실이 비좁은 탓에 듣고 싶지 않아도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정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전화를 받기 전의 굳은 표정과는 다르게 미세스 오는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반색하며 상대방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요즘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미세스 오는 가볍게 한번 웃었다. 여자는 팔에 안은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린 채로 미세스 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거실 유리창에 눈을 내리깔고 있는 미세스 오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네, 여러모로 죄송하게 됐어요. 등을 돌리고 있던 미세스 오가 여자 쪽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미세스 오와 여자의 시선이 짧게 스쳤다. 아기가 도리질을 치며 젖병을 밀어냈다. 여자는 젖병을 식탁에 내려놓고 아기를 세운 다음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기는 곧 트림을 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한동안 듣기만 하던 미세스 오가 목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아녜요, 아녜요, 그래도…… 그래도 이번 달 안에는 꼭 처리해드릴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통화는 오분가량 이어졌다. 미세스 오는 비슷한 말을 서너번 반복했고, 지금 밖이라서 오래 통화하기 곤란하며 조만간 반드시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사이 여자는 젖병을 씻었고 식탁 위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미세스 오의 커피를 개수대에 쏟아 붓고 컵을 닦았다. 통화가 너무 길었네요. 미안해요. 휴대폰을 슬랙스 주머니에 넣으며 미세스 오가 주방으로 걸어왔다. 여자는 미세스 오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거실 정리와 세탁에 관한 지시사항만 간단히 전달하고는 아기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다용도실에서 세탁 종료를 알리는 멜로디가 울렸다. 씽크대의 물소리가 멎고 다용도실 문이 열리는 소리, 세탁기 도어가 열리는 소리, 그리고 잠시 후 다용도실에서 나와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기척이 차례로 들려왔다. 여자는 채색 작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미세스 오의 기척이 날 때마다 정신이 흐트러졌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태블릿펜을 쥐고 끼적이던 여자는 문득 손을 멈췄다. 여자는 펜을 팽개치고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건조대 앞에 서 있던 미세스 오가 거실로 나오는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미세스 오의 손에 여자의 낡은 팬티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세스 오는 말없이 여자의 팬티를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빨래는 제가 널게요. 가서 다른 일을, 냉장고 정리를 하시든지 진공청소기를 돌려주세요. 여자는 빠르게 말했다. 변색되고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레이스가 달려 있는 브래지어를 여자에게 건네고 돌아서면서 미세스 오는 슬쩍 웃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여자는 미세스 오가 분명히 웃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브래지어를 건조대 구석에 걸면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속옷이라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가사도우미를 쓸 생각이었다면, 그리고 세탁도 맡길 생각이었다면 당장 속옷부터 새로 구입했어야 했다. 여자는 치부를 내보인 것처럼 치욕스러웠고, 급기야 대상이 불분명한 분노에 휩싸였다. 여자의 어머니는 속옷을 일일이 손세탁해주기를 원하는 집도 적지 않다고 여자에게 말했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생리혈이 묻은 팬티를 손으로 세탁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역겨웠고, 화가 치밀었다. 부끄러움 없이, 염치도 없이, 그런 일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도 되는 양 타인에게 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일을 다니던 곳은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치던 시절의 신도시 대형 아파트였다. 어머니는 그 집에 다녀올 때마다 유독 힘들어했다. 갈 때마다 60평 아파트에 딸린 네개의 방과,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거실을 손걸레질해달라고 시키는데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시급이 가장 좋기도 했고, 더러 멀쩡한 옷가지나 살림살이를 얻어올 때도 있었고, 명절 때가 되면 꼬박꼬박 참치캔 선물세트와 함께 얼마간의 돈봉투를 쥐여주기도 했지만, 그 집에 다녀올 때마다 여자의 어머니는 무릎과 허벅지, 등과 어깨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밤새 끙끙거렸다.

여자는 세탁물을 손에 쥔 채로 진공청소기로 거실 바닥을 밀기 시작한 미세스 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태리 가곡의 경쾌한 멜로디에 맞춰 나지막히 콧노래를 따라 부르며 진공청소기를 밀고 있는 미세스 오를. 작은방의 열린 문틈 사이로 옷장 손잡이에 단정하게 걸려 있는 미세스 오의 베이지색 정장이 눈에 띄었다. 여자는 건조대에 걸린 자신의 낡고 초라한 속옷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세탁물을 마저 넌 여자는 오디오로 다가가 전원을 눌러 껐다. 음악이 사라지자 실내에 진공청소기 소음만 윙윙거렸다. 미세스 오는 콧노래를 멈추었다. 여자와 오디오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그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자는 세탁물 바구니를 다용도실의 제자리에 갖다놓은 뒤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미세스 오가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세스 오와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미세스 오가 여자를 향해 애매하게 웃어 보였고, 이제 미세스 오의 그 미소가 여자는 불편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테이블 위에서 잡지 한권을 집어 펼쳤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깊숙이 앉아 무릎에 올려놓은 잡지를 한 페이지씩 펼쳐 넘겼다. 청소기 흡입구가 여자의 발치에 와 닿았을 때 여자는 흡입구가 지나가도록 발을 잠깐 들어올렸다 내렸다.

청소가 끝나갈 즈음 여자는 잡지를 덮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창에 걸려 있는 먼지 쌓인 커튼이 눈에 띄었다. 여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30분이었다. 커튼 세탁까지는 오늘 안에 무리라고 판단한 여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락스 냄새가 흐릿하게 풍겼다. 미세스 오가 청소를 마친 욕실은 한결 청결해져 있었다. 여자는 욕실에서 젖은 걸레 두장을 찾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미세스 오에게 다가가 그중 하나를 건넸다. 미세스 오는 얼결에 걸레를 받아들었다. 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자국이 많아서 밀걸레로는 깨끗하게 안 닦일 거예요. 이쪽은 제가 할 테니 거실 끝부터 현관 앞까지 손걸레질을 해주세요. 미세스 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여자는 미세스 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걸레질을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던 여자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팔과 어깨가 뻐근했다.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아기는 여자의 뒤편에 놓인 요람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해가 진 뒤라 거실은 어둑했다. 여자는 스위치를 찾아 스탠드를 켰다. 스탠드 옆에 서서 여자는 한동안 거실을 둘러보았다. 책과 잡지는 테이블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소파에는 쿠션과 깔끔하게 접힌 담요 한장만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유리는 스탠드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였고, 바닥에는 아무런 얼룩도 보이지 않았다. 씽크대 위에 널려 있던 그릇들은 모두 안으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행주는 바싹 말라 있었으며, 개수대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하루도 지나기 전에 도로 어질러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노란 백열등 불빛이 비치는 정돈된 거실은 꽤 아늑해 보였다. 여자는 낮에 먹고 남긴 반찬을 꺼내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바로 빈 그릇을 닦아 식기건조대에 엎어놓았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여자는 커피믹스 봉지를 뜯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건 다시 제품 박스 안에 집어넣고 대신 녹차 티백을 꺼냈다. 여자는 끓는 물을 컵에 부은 뒤 녹차 티백을 우려냈다.

미세스 오는 오후 415분에 돌아갔다. 여자의 집을 찾아왔을 때처럼 베이지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현관 앞에 서 있는 미세스 오에게 여자는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열고 만원짜리 지폐들을 꺼내 건넸다. 찾아보면 서랍 속 어딘가에 흰 봉투 한두장쯤은 있을 것이었지만, 여자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수고하셨어요. 여자의 말투는 딱딱했고 미세스 오의 안색은 창백했다. 미세스 오가 손걸레질을 했을까? 물론이었다. 스팀청소기가 없나요? 미세스 오가 묻기는 했다. 네, 저희 집에는 그런 거 없어요. 여자가 잘라 말했다. 멀거니 서서 먼저 걸레질을 시작한 여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미세스 오는, 여자가 채근하자 이윽고 체념한 듯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는 바닥에 엎드려 손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잃지 않고 있던 입가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세스 오가 돌아간 뒤 여자는 도우미 알선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이름과 주소지를 댄 뒤, 가사도우미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상담원은 뭔가 문제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일이 많이 서투신 것 같아서요. 여자는 대답했다. 상담원은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조선족 도우미도 괜찮으신가요? 상담원이 마지막으로 물었고, 여자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녹차가 마시기 좋게 식었다. 작업을 마치려면 아직 한참을 더 일해야 했고, 남편의 와이셔츠도 다려두어야 했지만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여자는 컵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여자는 텔레비전을 끄고 리모컨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오디오로 다가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93.1 채널에 맞춰져 있던 라디오에서 쳄발로 독주곡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여자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곡이었다. 여자는 볼륨을 한단계 높이고 소파로 돌아왔다. 녹차를 한모금 마시고, 머리에 쿠션을 받치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음악을 들었다.

쳄발로 독주가 끝나고 이어지는 피아노 연탄곡을 듣던 여자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여자는 미세스 오를 생각했다. 겨우 네시간을 함께 있었을 뿐인데 이제 생선 가시를 발라내거나 93.1 채널을 들을 때마다, 혹은 커피믹스를 마시거나 마시지 않을 때마다, 이따금 미세스 오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을 여자는 깨달았다. 생판 낯선 사람이었던 미세스 오를.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탁 다리에 찧었던 새끼발가락을 무심코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