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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

 

‘87년체제’를 애도하다

김숨과 이인휘의 근작들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역서 『지식의 불확실성』 『한 여인의 초상』(공역)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머리말

 

평문 제목을 위와 같이 걸고 왕년의 노동문학도 다시 훑어보는 과정에서 필자가 곱씹어본 텍스트 중 하나는 안재성(安載成)의 장편 『파업』(1989; 사회평론 2009)이었다. 1987년 당시 분출된 변혁의 생생한 열정이 ‘노동해방’의 대의로 관념화되는 대목들에서 오늘날 변질된 건 그런 열정이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학출(學出)’인 정기준이라는 인물이 동지인 홍기에게 “삼십년 후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라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았다.1)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들을 통틀어 가히 ‘넘사벽’인 자살률이 웅변한다. 20006·15남북공동선언의 감격조차 먼 옛일 같고, 이명박정부를 거치며 876월항쟁이 일궈낸 숱한 과실들도 거덜나다시피 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박근혜정부의 국기문란/국정농단 사태는 87년체제도 사실상 임종에 돌입했음을 선고한바, 이 체제를 장사(葬事) 치르지 않고서는 남녘이든 북녘이든 ‘헬조선’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바로 이 시각에도, 참으로 눈물겹도록 일깨우는 중이다. 876월항쟁에 맞먹는 모종의 대전환이 아니고서는 한반도로 밀려드는 ‘먹구름’에 속수무책인 시국인 것이다.

그런데 시국 타령을 할수록 새삼 절실해지는 것은 큰 포부를 품고 문학의 역할과 의의를 생각하는 비평 연습이다. 문학이 여전히 한 나라의 문화 수준과 저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일종의 척도이고 작가는 현실의 위기를 앞장서서 경고하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는 말이 한낱 허언이 아니라면, ‘문학을 문학으로’ 읽어내는 일도 엄중해질 뿐이다. 그건 87년체제의 극복을 확고하게 지향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 글은 김숨과 이인휘(仁徽)의 근작들을 읽으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을 하나의 화두로 굴려보려는 시도다. 개념상의 논의는 자제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씨름하며 문제의 뿌리를 탐지하는 두 작가의 분투에 집중할 생각이다.

 

 

2. 기록/증언, 작품, 『L의 운동화』

 

필자는 한강(韓江)과 공선옥(孔善玉)의 근작을 논하는 자리에서 “참혹한 사건의 진상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기억하는또한 그런 밝힘과 기억의 자리에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글쓰기가 ‘작품’이 되는 데는 각별한 기술이 요구된다”고 쓴 바 있다.2) 작품에 홑따옴표를 붙인 건 소설이나 시 같은 특정 장르의 문예 텍스트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하기 위해서였다. “각별한 기술”이라는 것도 기술자의 솜씨 같은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의 기술이 작가의 문제의식을 좀더 잘 담아낼 ‘그릇’을 조형하는 능력에 가깝다면, ‘작품’은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묻는 역사의식이 자유로운 글쓰기와 따로 노는 것을 경계·견제하기 위한 방편적 개념인 셈이다. 2)

이런 전제하에 작단을 둘러본다면, 작년과 올해 세편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내놓은 김숨의 숨가쁜 작업은 기록/증언의 싸움과 작품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데 맞춤한 사례가 될 듯하다. 그의 최근 작업은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실증적으로 소설화하는 데 집중되는데다가, 87년체제와 직접 연결해볼 수 있는 고리도 제공한다.

『바느질하는 여자』(문학과지성사 2015)의 경우 우리네 복식(服飾)문화와 관련된 지식을 가히 백과사전적으로 집성해 이야기로 만든 장편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복과 바느질에 맞춰진 일종의 알레고리로 느껴질 정도다. 이한열(, 1966~87) 운동화의 복원 과정을 극미하게 파고든 『L의 운동화』(민음사 2016)와, 일제강점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고 316개의 각주를 달아 당대 여성들의 짐승만도 못했던 삶을 증언한 『한 명』(현대문학 2016)도 ‘있었던 사실’에 대한 집념이 유달리 강하다. 이 세 장편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역시 쇄말(瑣末)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세/미세한 것에 대한 거의 집착적인 나열과 묘사다. 최근 김숨 소설의 이같은 ‘경향’은 가령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시공간의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개인의 개별성도 폭력과 착취의 악순환이라는 맷돌로 갈아 연기처럼 날려버린 『철』(문학과지성사 2008)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삶의 한 단면에 (극)사실적으로 몰두하는 자연주의문학이 개체성/개별성이 소거되고 인간세계의 관념에 경도된 모더니즘의 어떤 면모와 맞닿는 역설을 연상케 하는 대조라 할 만하다.

본격적인 고찰을 시도할 계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장편 규모로 본다면 아직 김숨은 양극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내지는 제대로 된 ‘파격’을얻지는 못한 듯하다. 다만, 그의 최근 장편들이 ‘지금 현재’를 만든 ‘과거의 현재성’에 관한 경외와 치열한 탐구가 없이는 문학이라는 것도 허사에 불과함을 새로이 성찰하게 하는 면모는 짚어볼 만하다. 과거가 망각에 처해 어떻게 현재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일제 치하 성노예의 삶을 실증 차원에서 소설화하는 김숨의 노력도 우리 사회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위기의식과 개입 의지를 반영하고 있음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87년체제를 염두에 둘 때 김숨의 최근 세 장편 가운데 소재나 주제 면에서 가장 방불한 작품은 역시 『L의 운동화』이다. 기억의 싸움과 증언의 진실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한 명』과 집필동기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된 사연과 과정을 소설화한 터라, ‘87년’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한 김겸의 강의를 작가가 수강한 것이 집필 계기였다고 하는데, 그 운동화는 물론 단순한 신발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대의 유품”(25면)이다. “민주화를 위한 시위 현장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한 L,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L(84면)의 부스러진 유품을 원래대로 되살려놓는 수작업을 작가는 87년 당시 항쟁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글쓰기로 파악했을 법하다. 복원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사도 그런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55면)

 

하지만 L을 대신하는 증언으로서의 운동화는 시대적 상징이기 이전에 말 그대로 바스러져버린 ‘물질’이다. 이 물건을 원래의 모양대로 복구하는 과정을 소설로 쓰는 작업이 어떻게 87년의 역사현실에 대한 문학적 증언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김숨도 이한열의 운동화와 연관된 저간의 사연들을 탐문하면서 87년의 ‘진실’을 읽어내기 위해 고심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그런 고심의 전체적인 방향이다.

1부와 2부로 구성되는 작품은 자신의 피를 모아 자화상 「셀프」(Self)를 제작한 전위미술가 마크 퀸(Marc Quinn)에 관한 화자의 물음에서 시작한다. 한 예술가의 피로 만들어진 “저 작품이 망실(亡失)될 경우, 저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12면) 이 문장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방점이 자신의 피로 작품활동을 한 예술가의 삶 자체에 찍힌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인간의 피처럼 보존에 취약한 재료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에 관한 복원가적 관심이 인간을 ‘연구’하는 소설가의 호기심보다 앞선다. 작품의 1부는 이한열 운동화의 복원을 의뢰받고 그 복원의 의미를 찾는 복원가의 내면과 주변 동료들의 일상을 주로 다루는 반면, 2부에서는 복원의 사실적 절차, 즉 “경화메우기형태 고정색 맞추기클리닝코팅”을 대체로 따라가는 순서를 밟는다. 작품의 압권은 말 그대로 극기(克己)에 가까운 복원작업 자체다. 그 과정의 묘사는 가히 편집증적 집중이랄 정도로 세밀·정밀하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혁신적인 (복원)예술가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와 신발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은 단조롭게 읽힐 수 있는 서사의 담담한 진행을 감칠맛 나게 해준다. 복원에 관한 진지한 비평적 성찰도 이 장편의 매력이다. 복원가의 직업세계와 복원가들의 생활상 애환도 소상하게 곁들여진다. 이한열 운동화의 복원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이 모든 것이 작품에 살을 찌우고 오늘의 독자들을 87년의 시대현실로 인도하는 세목들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 점을 강조할수록 서사에서도 핵심이 이한열의 복원된 운동화 자체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산산이 부서진 신발 한짝이 표상하는 그의 짧았던 생을 진열관이 아니라 87년의 상황에서 온전히 되살리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식민지조선의 생존 ‘위안부들’의 증언 자체를 소설의 ‘원료’로 삼을 때 어떻게 해야 ‘작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간명한 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제아무리 지극한 사실묘사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소설’이 될 수는 없다. 한 청년의 부서진 신발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해야 그 청년이 살아간 삶의 궤적과 일치될 것인가서사적 해법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창작자에게도 막막함을 안겨줄 것이다. 물론 작가도 그 점을 모를 리 없고, 실상 그 어려움을 독자나 나 같은 평론가보다 더욱 뼈저리게 실감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격 당일 이한열의 전후 행적 및 어머니를 비롯한 친지와 주변 인물들의 당시 정황도 운동화 복원의 필수적인 일부로 들어갔으리라. 그런데 기도(祈禱)를 방불케 하는 한 복원가의 복원 과정을 따라가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반복되는 화자의 다짐에 특히 눈길이 머물렀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110면)

 

L의 운동화는 그러나 L이 아니다. L의 운동화가 신화화되어서는 안 된다. L이 그의 유품인 운동화에 집어삼켜져서는.(145면)

 

이런 대목들은 L의 운동화를 사실적으로/언어적으로 복원하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L의 운동화』도 ‘더 중요한 그 무엇’을 탐구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을 듯한데, “L의 운동화가 신화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듭되는 진술도 그런 탐구의 작가적 진지함을 말해주는 하나의 방증이다. L의 운동화를 통해 L의 삶에 다가가고, 그로써 87년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L 자신도 신화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까지 잘 새긴다면, L의 운동화가 결국 초점이 아니라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앞서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예술가들에 관련된 일화들을 서사의 감칠맛으로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 그런 일화의 배치는 이한열의 바스러진 운동화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안간힘도 때로는 지나쳐서 오히려 L 운동화의 신화화가 조장되는 것 같다. 서사의 초점이 흐려진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하게 텍스트를 짜는 과정에서 연유한다. 단적으로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1921~86)의 ‘죽은 토끼’를 고미술품 복원가인 ‘그녀’의 토끼와 연결하는 대목만 해도 그렇다. 전혀 연결점이 없는 삽화들을 연결하려다보니 이야기의 가지치기가 뜬금없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LL의 운동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집중성도 떨어진다.

작가의 거듭된 자기다짐에도 불구하고 L의 운동화가 일종의 예술품으로 신화화 내지는 심미화되는 현상 역시 서사의 집중성이 떨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뭔가를 원형 그대로 되살리는 일의 뜻을 여러 각도로 성찰하는 가운데 “복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복원도 있지만, 폭력적인 복원도 있다”(97면)라는 언급이 나온다. 화자에 따르면 폭력적인 복원이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복원대상에 손을 대는 것이다. 그런데 L의 운동화는 예술작품도, 생물(生物)도 아니지 않은가. 소설을 쓴다면 이 당연한 상식도 당연하지 않게끔 독자에게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예술 작품이 아닌데도 L의 운동화에 작가의 의도가 있을 것 같다”(96면)고 하면서 역사상 작품 복원의 이런저런 사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L의 운동화가 876월항쟁의 시대적 제유(提喩)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역시 화자의 사유가 L의 삶에 좀더 맞춰지면서 87년의 현실을 향해 열려야 했으리라는 것이다.

시대의 유품을 원형대로 되돌리는 작업이 과연 어떻게 876월의 진실과 맞닿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소설가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진지한 독자라면, 특히 80년대를 청년기로 보낸 필자 같은 독자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87년 ‘그날의 진실’을 나름대로 재구성해볼 테니 말이다. 그럴 때 L의 운동화를 작업실로 가져와 복원을 시작하는 ‘소설적 상황’도 운동화가 신화화되는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자일렌 냄새나 에폭시수지 냄새가 L의 운동화가 풍기는 냄새를 잡아줄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간다. L의 운동화는 여전히 그 어떤 물질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내가 여태 경험한 적 없는 기이하고 불온한 냄새를 풍긴다. 죽은 짐승의 사체 썩는 냄새와 비슷하다는 것 말고, 그 냄새를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174~75면)

 

이한열 운동화의 복원 과정에서 스멀거리며 풍기는 시취(屍臭)에 관한 언급이다. 운동화에서 나는 시체 냄새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경건하달 정도로 지극하게 묘사된 운동화의 복원이 완성되자 사라지는 시취가 함축한 ‘뜻’이다. 이것도 이한열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876월’에 대한 작가 나름의 애도행위의 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한열의 운동화가 마치 생물처럼 취급되고 “역사적인 예술작품”(272면)으로서의 후광이 부여될수록 87년 그날의 함성이 오히려 희미해지는 듯한 느낌이 강해지는 것은 왜인가?

필자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언어’로 복원함으로써 876월항쟁 당시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김숨의 분투를 응원하는 순간에도 허구의 문자행위로써 시대의 진실을 담아내는 소설이라는 서사양식의 역설적 운명에 대해서 골똘해진다. L의 운동화를 언어로 복원하는 소설 작업이 “시대의 유품”을 독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말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고 추적하는 글쓰기가 따르지 않고서는 진실도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L의 운동화』도 그 점을 다시 확인해주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조형예술은 아니다. L보다 운동화가 앞서서 소설의 화두가 되고 언어로 운동화를 복원하는 일에 몰두하는 한 소소하고 자질구레한 소재주의를 피하기는 어렵지 싶다. 멀쩡히 극사실적인 묘사로 일관하다가 시체 냄새를 풍기는 L의 운동화라는 무리한 상황을 설정하는 것도 L의 운동화가 L을 집어삼키는 한 양상인 셈이다. 이한열이 그렇게 매몰되는 순간 87년체제 너머의 지평도 사라진다. ‘87년’을 소설화한 최근의 또다른 사례를 떠올린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3. 『폐허를 보다』와 87년체제

 

87년체제가 비록 역사적 시효를 다하고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그런 체제도 계승해서 극복해야 할그렇기에 더 값진유산을 각 분야에서 적잖이 남겼다. 노동문학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강산이 세번이나 변한 지금, ‘노동문학’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인휘는 ‘디지털타운’으로 변신한 가리봉 오거리를 보며 “이십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온 나라는 존재가 갑자기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 같고, 처참하게 버림받은 것 같기도 하고……”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내 생의 적들』, 실천문학사 2004, 14면) 노동문학의 처지도 매한가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작단을 둘러보면 이것도 피상적인 생각임이 금방 확인된다. 시단 쪽 경향, 특히 백무산과 김해자(金海慈)의 최근 시집은 왕년 노동시들의 익숙한 가락 및 리듬과는 전혀 질감이 다른 새로운 화법과 시적 사유로써 생활현장의 체취들을 나눠주고 있다. 소설의 경우, 이인휘부터가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천착한 『폐허를 보다』(실천문학사 2016)를 들고 복귀했을뿐더러, 80년대 노동현실과 또 달라진 면이 있는 비정규직의 삶은 독자에게도 익숙해진 우리 시대의 전형적 풍경이다.

『폐허를 보다』는 당대 변혁운동의 ‘도구’를 자처한 노동문학이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스스로 문학적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준다는 점에서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폐허를 보다』를 거듭 주목한 강경석(姜敬錫)이 의욕적으로 설파한 민중론을 잠시 짚어보자. 민중담론의 ‘리부팅’(rebooting)을 주창한 강경석은 민중 개념이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내발적으로 성장한 변혁주체로서의 상징성을 여전히 지”녔다는 전제하에3) 일종의 개념적 실체화를 시도한다. 이 전제에 관한 한 필자도 강경석의 문제의식에 힘을 보태고 싶다. 또한 그가 민중이라는 용어의 쓰임새를 여러 방면으로 검토하는 대목은 새길 바가 있고, 이론 차원에서 더 파고들어볼 만한 화두라고 본다. 다만, 민중을 정의하는 방식과 그에 입각한 작품 읽기의 몇몇 대목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 함께 일어서는 연대의 순간에 가시화되는 존재”를 민중으로 명시하는 문장과 그에 따른 비판 말이다.(같은 글 235, 248면)

그가 『폐허를 보다』의 표제작을 온당하게 논하는 와중에 “냉동식품공장의 또다른 동료들일 이주노동자들에겐 얼굴과 이름이 없고, 여성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남성중심적 시각에 포획되어 있다”(248면)라고 평가하는 데도 ‘가시성(可視性)’을 핵심으로 삼는 민중 개념의 실체적 규정이 은연중 작동한다고 봐야 할 듯하다. “연대의 순간”을 못박고 그 순간에 “가시화되는 존재”로 민중을 정의하는 한, 뿔뿔이 흩어진 익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민중’에 못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 관리자에게는 찍소리 못하고 저들끼리 한풀이나 하는 공장의 여성노동자들도 남성 중심의 시각이 작용한 인물형상화로 규정한다. 그런데 세목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었는가도 중요하지만 강경석의 이런 논법이 으레 혁명적 전망의 유무를 기준 삼아 작품의 한계를 적발하곤 했던 80년대 평단 일각의 논법과 어딘가 닮았다는 점을 먼저 환기해야 할 것 같다.

세목을 읽는 데서도 「폐허를 보다」에서 스치듯 언급된 이런저런 외국인노동자들이 얼굴과 이름이 없다고 꼬집는 것은, 텍스트의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내려는 평자의 과욕이자 드러난 민중의 상()에 집착하는 데서 연유한 비판에 가깝다. 막장까지 내몰린 공장의 상황에서조차 희로애락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연출한 ‘아줌마들’이 남성주의적 시각에 포획되어 있다는 지적 역시 안이한 독해다.4) 표제작 「폐허를 보다」를 포함해 나머지 네편을 두고도 ‘노동문학’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엄밀한 읽기가 필요하지만 그런 읽기를 위해서라도 민중 개념도 일국 중심의 시야나 공장노동자 위주의 고착화된 계급관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렇게 개념을 넓히고 탈피해야만 좀더 섬세하고 정확한 비평도 가능해질 듯하다.

다른 한편 『폐허를 보다』에서 감흥이 일어 이인휘가 지금까지 써낸거의 절판된작품들을 오름차순으로 읽으면서 필자가 확인한 것 중 하나는, 1980년대 변혁운동의 ‘전위’를 자처한 노동문학의 낯익은 관성과 도식이다. 『폐허를 보다』가 결코 우연히 씌어진 것이 아님도 그 과정에서 좀더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이인휘라는 이름 석자는 그간 평단의 조명은커녕 존재감도 워낙 미미했던 터라, 중편 「우리 억센 주먹」(1988)으로 등단한 그의 띄엄띄엄한 창작 궤적을 간략하게나마 독자에게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이인휘 장편들의 혈맥은, 때로는 세태소설의 한계를 그대로 안은 채, 계급투쟁의 대의에 바쳐진 80년대 노동문학을 거쳐 카프(KAPF, 1925~35)에 닿아 있다. 광부들의 생활상은 여실한 반면 완고한 선악 구도와 상투화된 변혁의 전망으로 점철된 『활화산』(세계 1990)이 특히 그러하다. 연이어 발표된 『문밖의 사람들』(민맥 1992)이나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일터와사람 1993)는 당시 문단의 지배적인 시류인 ‘후일담’을 거슬러 1980년대 운동의 현실을 천착한 장편들이다. 그의 창작 행보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변혁의 열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절의 대세와 정면으로 대립한 것이다. 그런 때 『문밖의 사람들』은 도식화된 노동투쟁의 전형을 보여주는 『활화산』에서 진일보하여 87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패권주의와 분열로 얼룩진 노동운동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활동가들의 (가정)생활 현장 속에 녹여냈다. 반면에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노동문제와 여성문제를 동시에 다루려고 했고, 가정과 일터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의 처지를 다각도로 포착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문밖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연희 같은 자각하는 여성인물의 고민을 도식화하는 댓가를 치렀고 당시 평단은 바로 그 점을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혹독하게 비판했지만, 그같은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후 다시 11년 만에 내놓은 『내 생의 적들』은 5·18광주민중항쟁까지를 시야에 넣고서 민주화의 참뜻을 작가 자신의 자전적 삶의 행로에 비추어 되새기는 장편이다. 고집스레 ‘사실주의’를 붙잡고 있는데, 시대적 현실에 대한 고발 의지 및 고뇌는 여전한 반면 고문을 딛고 양심선언으로 나아간 한 인간의 내면은 무척이나 평면적이다. ‘평전소설’의 한 전범을 선보인 『날개 달린 물고기』(삶이보이는창 2005)에 이르러서야 인간에 대한 지극한 탐구로써 한국 노동현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도가 이뤄진다. 뒤로 갈수록 노동문학의 장르적 규범을 되풀이하는 면이 눈에 띄긴 해도, 분신으로써 비정규직의 비인간적 현실에 항거한 이용석씨(1972~2003)의 일생을 곡진하게 추적한 이 장편은 노동문학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후 11년 만에 나온 『폐허를 보다』는 중·단편 규모들이지만 『날개 달린 물고기』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판단되며, 이제 비로소 노동문학이라는 틀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워진 서사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에겐 문학 앞에 노동보다는 차라리 ‘인간’을 붙이는 게 적절하겠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운명처럼 관철되는 사회의 특정 구조 속에 놓인 인간의 고뇌와 길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문학이라면 장르화된 노동문학의 창의적인 해체와 확대로 규정해야 맞겠다는 말이다.

가령 맨 앞머리에 실린 「알 수 없어요」만 해도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사람”(10면)의 사연『날개 달린 물고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을 쓰기 위해 만해마을 창작실에 들어갔다가 만해(萬海)로부터 받은 감화를 작가 자신의 창작 구도(求道)로 연결한 단편이다. 이어지는 「공장의 불빛」에도 80년대 노동소설이 모범답안처럼 제시하곤 했던 혁명적 낙관주의는 없다. 주인공도 ‘각성한 노동자’라기보다는 도상(途上)의 번민하는 일상인이다. 꽤나 변모한그러나 노동의 조건은 더 열악해진수도권 변두리 노동현장의 실상과 자살로 항변할 수밖에 없는 한 노동자의 내몰림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나’의 심정은 비루한 만큼이나 비극적 공감을 자아낸다. ‘한 여자의 일생’을 담은 반()세태적 세태소설이라 할 만한 「그 여자의 세상」이나 1997년 국가부도사태 이후 울산을 중심으로 벌어진 노동투쟁의 분열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한 ‘후일담’으로서의 「폐허를 보다」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생 고리가 처참하게 파괴된 노동현장에 대한 사실적 보고(報告)인 동시에 그 이상의 삶의 진실을 담은 이야기다. 오늘날의 노동현장이 살벌한 각자도생만 남은 ‘폐허’라면 누군가는 그렇게 망가지게 된 원인을 기록해야만 한다. 게다가 이인휘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폐허만 남은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폐허만이 남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발동되는 것도 사람살이의 이치에 해당되거니와, 그런 과정에서, 만해의 시가 그러하듯, 문학다운 문학이 태동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점에 관한 한 『폐허를 보다』에 실린 중·단편 다섯점이 모두 고른 건 아니다. 왕년 노동문학의 고질적 이분법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하고, 감상(感傷)의 매너리즘이랄 만한 약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분법과 약점을 안고서도 인간과 노동이라는 화두를 걸고 정진한 작가의 분투는 괄목상대다. 그중 평단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은 「시인, 강이산」은 특히 감명 깊었다. 노동문학의 진화뿐만 아니라 87년체제의 행로와 연관해서도 더 자상하게 살펴볼 만하다.

이인휘는 이 중편에 붙인 짤막한 후기에서 “이 글은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쓰게 됐”다고 했다. 고() 박영근 시인(朴永, 1958~2006)은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 창조해낸” 허구인 반면, 박영진(朴永, 1960~86)의 “삶과 죽음에 대한 소설적 기록은 모두 사실”에 근거했다는 것이다(208면). 박영진은 신흥정밀 옥상에서 삼반(반민족·반민주·반민중)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노동자다. 그가 분신하는 과정은 안재성의 『파업』에서도 소상히 그려진 바 있는데, 「시인, 강이산」에서 기술된 부분도 『파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5) 반면에 ‘시인, 강이산’은 허구가 분명하다. 강이산이라는 인물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청에 남아 총을 들었”다든지(198면) ‘사노맹 사건’ 등에 직접 연루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았고 고대 구로병원에서 운명한 것으로 기술된 대목 등도 전혀 사실무근일뿐더러, 윤세인이라는 여성과의 관계를 포함한 그의 사적인 삶도 전적으로 지어낸 것이다.6) 시인 박영근의 행적을 아예 통째로 허구화한 셈이니, 이인휘는 그야말로 ‘소설’을 쓴 것이다.

따라서 허구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시인, 강이산」이 어떤 차원의 소설이냐는 물음이 핵심일 듯하다. 우선, 87년체제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민중의 숱한 고난과 비극이 박영근/강이산이라는 시인의 상상의 행적을 통해 온전히 실감된다면 그 상상의 허구성은 사실성 여부를 묻는 수준에서 논하기 어렵다. 시대의 진실이라는 것이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단순히 수집해서 밝힐 수 있는 사안도 아니려니와, 자신의 삶을 최대치로 살아냄으로써 시대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작가로서의 싸움이 따르지 않고서는 그런 기록에 근거한 서사도 ‘르뽀르따주’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시인, 강이산」에서 재현된 박영근은 명백히 상상의 인물이지만, 그 허구성도 박영근의 시에 대한 이인휘의 열정적 읽기, 그 자신의 오랜 현장생활과 노동운동을 향한 지극한 헌신, 소설가로서 발휘한 얽매임 없는 상상력 등이 두루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물임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빚어진 허구의 효과는 과연 역설적이다. 시인이자 혁명가로서의 강이산의 처절한 행려는 오직 있던 사실과 실제로 느낀 진실로만 구성된 허구인바, 그런 허구에서 다름 아닌 ‘리얼한 것’을 말하는 힘이 발생하고 그로써 작품도 19805월 광주민중항쟁 이래 참다운 사회의 건설에 참여해온 뭇사람들의 좌절과 희망을 온전히 담게 된다.

‘진실된 허구’를 작품으로 만드는 데 필수인 허구의 서사화 기술을 짚어보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강이산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의 풍경 사이사이에 변혁운동의 희망과 좌절의 파편들을 요모조모 배치하고 연결하는 솜씨도 솜씨지만, 박영근의 시세계에 대한 곡진한 이해 및 서사의 진행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시의 적절한 인용·해석도 살벌했던 그 시절의 역사를 시적 감성으로 충만한 서사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876월항쟁을 ‘역사’로 배운 1980·90년대생 독자들에게 「시인, 강이산」은 역사교과서로 배울 수 없는 87년체제의 진실에 대한 하나의 서사적 증언으로 읽힐 것이다. 아니, 1965년생인 나 자신에게도 그런 증언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그런데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사건을 하나의 작품으로 증언하는 경우일수록 자기증언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는 점도 시인 박영근의 허구화와 연동해서 주목할 사안이다. 노동/변혁운동에 투신한 박영근의 삶의 궤적은 87년체제가 성립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치른 민중의 고난과 비극을 압축해서 드러내는바, 그의 죽음을 조상(弔喪)하는 화자인 ‘나’의 자기증언이 과거와 현재의 반성적 대화로써 구현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즉, 시인 강이산의 행적을 증언하는 1인칭 화자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함으로써 사실/진실로만 구성된 허구도 비로소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인휘 자신의 과거 및 현재와도 상당부분 겹치지만 다른 인물인 점도 분명한 화자의 자기증언에는 일상인의 치열한 자기성찰이 따른다. 이런 성찰에는 ‘각성한 노동자’를 비롯한 일체의 상()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미 내 안에서 혁명이니 노동 해방이니 정권 타도라는 말이 희미해진 지 오래”되었으나(153면) 희미해져버린 상황에서도 지극한 기도로서의 염원을 멈추지 않는 화자의 자기성찰이니, ‘소설’임에도 어떤 무념(無念) 지향의 서사 같은 인상마저 준다. 80년대 노동투쟁에 관한 그의 기억과 기록이 감상적인 후일담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도 작가의 자기성찰이 오늘의 현실에 굳게 착근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가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왕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가 이제는 “시인이 되고 싶”은 중학교 국어교사(124면)로 설정된 화자의 순응과 체념의 고백에도 귀 기울여야만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아를 찾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박았습니다. 어떤 사회도 사회구조가 달라진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수없이 나에게 속삭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힘이 센 존재가 약한 존재를 지배했듯이 구조가 달라져도 그 관계는 새롭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 사회의 숙명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170면)

 

그 ‘숙명’은 강이산 자신의 언어로 표현되기도 한다“자본과 권력을 그렇게 증오했으면서도 한 줄의 시도 던지지 못했다. 내 영혼은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206~207면) 물론 화자의 고백과 이런 문장도 저 87년 이래 노동현장에서 신산한 세월을 딛고 오늘까지 작품활동을 끈질기게 이어온 이인휘 자신이 한때 품었음직한 상념일지언정 작품 자체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시인, 강이산」은 강이산이라는 허구 아닌 허구의 인물을 창조하여 시대적 진실을 일깨우고, 그런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작가 스스로 길 잃은 자신을 되돌아본 기록이다. 화자의 기록은 일면 패배와 좌절의 연속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무너져내린 삶에 대한 시적 조문(弔問)으로서의 서사인바, 담담하게 ‘강이산의 죽음’과 ‘나의 패배’를 직시하는 지성 어린 애도의 언어들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 사회의 숙명”이라는 것도 한낱 미망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운다. “그의 비극이 내 안에서 새로운 눈을 만들었습니다”(205면)라는 화자의 말이 확인해주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강이산을 추억하는 작품의 결말에서 87년체제로 표상되는 한 시대를 떠나보낸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지 싶다. 그것은 전망(희망)이라는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털어버림’으로서의 조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치 돈오돈수의 한순간처럼 깨달음이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엽니다. 열린 문을 통해 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206~207면)다고 화자가 말할 때 독자로 하여금 마음의 문이 열어놓은 그 길이 바로 ‘나의 길’임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게 한 점이야말로 「시인, 강이산」의 ‘작은 성취’일 것이다.

 

 

4. 결론을 대신하여

 

87년체제는 4·19혁명의 유지(遺志)를 잊지 않은 숱한 민중의 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체제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6·15남북공동선언의 산파 역할도 했지만 이제는 한반도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심대한 걸림돌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5월 광주’를 거쳐 6월항쟁과 이후 전개된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탄생한 87년체제가 우리 사회의 일대 전진을 이룩한 빛나는 이정표임도 온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건대 문학도 그런 울력 가운데 하나였고, 그 나름으로 한국사회의 정신적 성숙에 기여했음은 첨언할 나위 없다. 특히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은 분단된 한반도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자각과 각성을 날로 새롭게 일깨운 바 있다. 87년체제 극복을 운운하는 어떤 담론이든 민족문학의 유산을 창의적으로 계승하지 못하는 한 말잔치에 그칠 위험이 크다고 보는 것도 민중의 깨우침이 오늘의 현실에 살아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져 우리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존 장르의 관습화·상투화된 틀을 깨면서 새로운 화법과 형식 실험을 모색하는 작품들을 찾아내서 곡진하게 읽어내는 작업도 바로 그런 계승의 필수적인 일부일 터이며, 87년체제의 비판적 성찰 역시 그같은 읽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논한 김숨과 이인휘의 근작들, 특히 80년대 노동문학의 장르적 관성을 해체하고 이어받은 후자만 해도 87년체제의 청산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데 좋은 자극이다. 문학으로 체제화된 현실을 넘어선다는 것이 대체 뭔가를 근원적으로 묻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한바, 그로써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두고 87년체제 이후 ‘통일시대’의 지평을 새로이 탐색하는 한국문학의 과제가 여전히 절박하다는 점이 다시 확인되기도 한다. 물론 87년체제에 대한 냉철한 (사회)과학적 분석도 그것대로 절실하다. 그런 분석의 토대에서 한반도 정세, 나아가 한반도와 연동된 세계체제의 실상을 헤아리지 못하고서는 이미 울려퍼지기 시작한 87년체제의 조종소리를 옳게 들을 수도, 상주를 바로 세워 장례절차를 제대로 밟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아니, 냉철한 분석에 기반하지 않고서 변혁을 꿈꾸는 것 자체가 체제 말기현상의 일부이자 징후일지 모른다. 탁월한 예술작품이 중요해지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즉, ‘작품’ 하나가 사실과 진실의 증언으로써 과학적 분석을 아우르기조차 한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도 87년체제의 청산에 기여하는 길이 된다.

비유하기로 치면, 87년체제라는 것도 이를테면 외생변수와 내생변수가 고도로 상호작용하면서 굴러가는 어지간히 복잡한 텍스트다. 이런 텍스트를 김숨과 이인휘가 ‘작품’으로써 얼마나 읽어냈는가는 앞서 논한 셈이고 더러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시도 머물거나 고정된 법이 없는 체제적 현실을 파악하는 작업에도 작품을 읽어내는 공력 못지않은 노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뭔가의 극복을 지향하는 일체의 실천도 마찬가지다.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것도 문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민중의 혼신의 힘이 차곡차곡 쌓이는 순간순간이 없다면 부질없다. 그렇다면 독자의 마음을 일깨우고 움직일 수 있는 고유한 작품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도 ‘사건’이 된다. 그 역시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작금의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데 이바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문학을 다른 무엇이 아닌 문학으로 읽어내는 일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언설로도 대신할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읽지 못하고서는 87년체제 너머의 ‘비전’을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선취한 작품의 의미를 대중독자와 공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작품에 근거한 본격적인 논의는 앞으로 숙제로 남은 만큼, 여기서 글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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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희문·안재성·정도상 『철탑/파업, 친구는 멀리 갔어도 』, 동아출판사 1995, 316면. 이런 질문에 대해 ‘동지’인 홍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자본주의가 유지된다면 극빈자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회주의가 된다면? 사회주의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군. 사회민주주의적인 세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2009년 개정판 『파업』에는 ‘북의 존재’를 괄호 안에 묶어버린 이 물음과 이후 대화도 전문 삭제되어 있다.

2) 졸고 「문학의 실험과 증언」,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111면.

3) 강경석 「리얼리티 재장전」,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234면.

4) 반면에 비전과 현실의 안이한 구도가 「폐허를 보다」에도 구태(舊態)로 남아 있다는 일침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될 듯하다.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 굴뚝을 올라”간 정희가 본 울타리 안(황폐한 공장현실)과 울타리 밖(광활한 초원)의 대립이 그러한데, 이 역시 어떤 해답이나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유한 이분법이 아닐까 싶다.

5) 그러나 특히 구로동맹파업(1985.6.24)으로 촉발된 이른바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1985~86) 노선과 관련하여 중요한 차이도 발견된다. 시인, 강이산에서 박영진은 “서노련의 투쟁 방식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선도적인 투쟁만 내세운다며” 서노련의 조직원이 되기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단순히 임금 몇푼 올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경제주의자로 비판받은 인물로 설정된다. 이에 반해 『파업』의 박영진은 말 그대로 전태일을 잇는 ‘열사’의 한 전형으로 형상화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차이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시인, 강이산이 당대 지식인중심 노동운동의 급진성에 비판적 인식을 내비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6) 이런 판단은 시·산문 두권으로 묶인 『박영근 전집』(실천문학사 2016)의 7쪽 분량 작가 연보에 근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