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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

 

거울 앞에서

분단체제와 북한의 변화

 

 

김연철 金鍊鐵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저서로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냉전의 추억』 등이 있음. dootakim@hanmail.net

 

 

1. 두개의 코리아, 역전의 데자뷰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정은(金正恩)체제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보수정부의 정보 무능과 언론의 책임감 결여, 북한에 대한 편견이 어우러지면서 정보와 첩보가 뒤섞이고 실상과 희망을 구분하기 어렵다.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실어 나르는 것은 바로 ‘북한붕괴론’이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만약 북한정치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남한이 개입할 근거는 없으며 실제로 개입하기도 어렵다. 북한이 붕괴하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도 없고 현실적 가능성도 없다. 예측은 ‘희망적 사고’와 다르다. 현미경이 아니라,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는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쌓은 중층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고, 좀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북한체제를 전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분단국가다. 두개의 코리아는 서로 부정하며 대립하고 경쟁했고, 때로는 대화하고 협력하며 포용했다. 북한체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분단체제라는 시각으로 보면, 두개의 코리아는 닮아 있다. 시차가 있지만 상대의 태도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남북관계에서 인도주의라 하면 남한이 주고 북한이 받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주고 남한이 받았다. 19849월 서울과 경기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수재민이 발생했다. 98일 북한의 적십자회는 쌀과 시멘트, 의약품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남한에 수해가 나고 가뭄이 들고 재난이 발생할 때 언제나 인도지원을 제안했다. 남한은 당연히 거부했다. 냉전시대는 상대편이 받을 수 없는 혹은 상대편을 고려하지 않는 ‘제안경쟁’의 시대였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역전되었지만, 제안의 관성은 1984년까지 지속되었다. 전두환(全斗煥)정부가 북한의 상투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제안경쟁’은 끝났다. 1983년 아웅산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정부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북한의 제안을 덜컥 받았다. 1983년 기준으로 쌀 생산량은 남한(540만톤)이 북한(212만톤)보다 2.5배 많았고, 시멘트 생산량도 남한이 북한보다 2.7배 많았다.1)

인도지원의 핵심 쟁점인 분배의 투명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남한의 대북 인도적 지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분배의 투명성 문제는 남한 내부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둘러싼 갈등의 핵심이었다. 군대에 전용될 가능성을 주장하며 ‘퍼주기’ 프레임을 덮어씌울 때도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분배의 투명성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1984년 북한 수해물자 인도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은 직접 수해지역을 방문하여 물자를 수재민에게 전달하겠다고 주장했다. 분배현장에 접근할 권한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대한적십자 측은 “받는 쪽이 물자인도 장소를 지정하는 적십자 관례”를 들어 강력히 반대했다. 국내 언론들도 ‘북한의 저의’를 규탄했다. 경제력이 역전되었다고 과거의 기억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때로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005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은 200kW의 전력제공을 북한에 제안한 적이 있다.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를 폐기하는 대신, 대체에너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다만 방식은 남한에서의 직접 송전이었다. 남한은 몸에 피가 돌듯이 전기가 통하면 통합이 가까워질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상호의존이 적대의 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거부했다. 상호의존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1948514일 정오에 북한은 남쪽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해방 직전 한반도의 전력설비 및 발전량은 90% 이상이 북부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렇듯 풍부한 전력공급원이 존재했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을 중화학공업지대로 육성했다. 1940년대 초반 한반도 북부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 수준의 발전설비를 보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해방 직후 남한 지역의 발전량은 미미했다. 한반도 남부는 19484월까지 평균전력의 66%를 북한의 송전에 의존했다.

북쪽에서 전기를 끊자 어떻게 되었을까? 남쪽의 공장 가동률이 30% 아래로 떨어졌고 가정용 전력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수돗물 이용도 곤란해졌다. 전기세가 대폭 올랐지만 그래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남한의 전력수급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나아질 수 있었다.2)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은 분단의 역사 때문이다. 분단 70년이 흘렀다. 분단체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적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역사적 접근도 중요하다. 기억은 아름다운 것만 담아두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이다. 상대의 기억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은 또 하나의 분단국가다. 북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분단체제가 북한체제에 미친 영향을 이해해야 한다.

 

 

2. 또 하나의 분단국가: 형성과 발전

 

북한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동시에 분단국가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과 체제개혁의 물결에도 북한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분단체제가 북한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군사국가화다. 항일무장투쟁의 전통, 한국전쟁과 두 코리아의 대결, 그리고 체제위기 국면에서의 선군정치 등 시기별로 군사화의 직접적 계기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안보전략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변수는 분단국가라는 점이다.

분단체제론은 남북 사이의 공고한 체제적 성격을 강화하는 분단으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이해관계를 주목한다.3) 분단체제는 북한의 국가 형성, 발전, 위기,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인터페이스 동학’(interface dynamics)이라는 개념4)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단순한 상호관계(interaction relations)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상호관계를 구성하는 전체질서로서의 분단체제가 마주보는 두개의 주체에 부과하는 제약 혹은 작용을 더욱 중시한다. 분단체제는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분단: 정당성 명분과 경제적 결핍

분단체제는 북한의 국가 형성에서 차이와 경쟁의 환경을 의미한다. 분단 전후의 국면에서 남한은 북한에 정당성 경쟁, 우월성 경쟁, 발전 경쟁의 대상이었다. 북한은 분단정부의 수립 이후 교육정책, 노동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한과 비교하고 차별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았다. 해방 직후 시대의 과제인 토지개혁의 형성·집행·결과의 과정에서 남한과의 차별화는 북한체제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로 강조되었다.

북한에서의 계급투쟁 혹은 문화혁명 과정에서도 분단의 변수는 중요하게 작용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국가 형성 직후의 ‘계급투쟁’은 북한에서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의 스딸린(I. Stalin) 체제에서 벌어진 대숙청이나 195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반우파투쟁과 비교해보면 말이다. 북한 계급투쟁의 결정적 차이는 남한이라는 출구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기독교세력이나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지주층은 저항보다는 탈출을 선택했다. 출구의 존재는 저항의 강도를 약화시켰다.

경제의 분단은 북한경제의 구조적 왜곡을 가져왔다. 일제하에서도 한반도는 단일경제권이었다. 분단정부가 들어서서도 남북 양 지역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는 그렇게 쉽게 단절되지 않았다. 남쪽에서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8927일, 이승만(李承晩)정부가 대북교역을 중단시켰을 때 산업계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승만정부는 중단조치 한달 후인 1027일 남북교역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반출품목을 통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한편 해방 이후 공식적인 남북교역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38선을 가로지르는 밀무역이었다. 이른바 ‘38밀무역’의 규모는 공식 교역을 능가했다. 1948년의 경우 남북 총 거래량은 167천만원 정도로, 그중 반출액은 46천만원, 반입액은 125백만원이었다. 38밀무역의 규모를 정확히 추정할 수 없으나, 1948년 적발건으로만 27천만원이고, 당시 발간된 조선중앙연감(1949)은 실제 밀무역 규모를 적발건수의 수십배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밀무역이 공식 교역액을 넘어섰다고 추정할 수 있다.5) 북한은 남쪽으로부터 얻어야 할 물자가 적지 않았다. 38선은 점차적으로 분할의 점선이 짙어졌지만 여전히 사람, 물자, 정보가 교류하는 통로였다. 38선을 통해 사람들이 월남·월북을 했으며 고무신, 옷감 등 갖가지 생필품과 곡식이 북쪽으로 들어갔고, 소, 비료 등이 남쪽으로 내려왔다.6)

분단은 북한경제에서 결핍과 구조의 왜곡을 의미했다. 일본인 기술자가 철수하고 원자재와 부품조달이 어려워짐에따라 북한의 중화학공업 가동률이 떨어진 상황에서, 남북분단은 전체 경제의 순환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후체제와 사회주의 발전전략

전쟁은 38선을 가는 점선에서 굵은 실선으로 바꾸었다. 전쟁의 유산은 북한 사회주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과정에서 박헌영(朴憲永)과 이승엽(李承燁)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몰락했다. 남로당의 몰락은 남쪽 지지기반의 상실 때문이었다. 숙청의 이유도 정책경쟁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1920년대에 벌어졌던 신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아니고, 중국에서 벌어졌던 시장의 역할에 대한 논쟁도 아니었다. 김일성(金日成)은 남로당을 간첩으로 몰아서 숙청했다. 분단체제의 산물인 적대의식을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중앙집중성이 강화되었다.

1956년 중소분쟁 이후 사회주의진영이 분열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자주노선을 정립했다. 자주노선의 형성과정에서도 분단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분열과 한반도 냉전체제의 격화라는 이중적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1960년대는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었고, 한반도에서도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벌어진 시기였다. 1968년에는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일어나고 동해에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으며 울진·삼척 지구에서는 몇달 동안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등 ‘제한전쟁’이 전개됐다.

196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예산에서 국방비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고, 사회의 군사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체제는 유일체제로 전환했다. 즉 현대 북한체제의 기본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하게 약소국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냉전적 대립의 심화가 정치체제의 형성, 중공업 중심의 발전전략, 그리고 전반적인 군사국가로 나아가는 촉진요소였다.

1960년대의 냉전적 적대환경은 북한의 발전전략에 있어 외연적 성장전략에서 내포적 발전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일반적으로 대중동원운동을 장기 지속하기는 어렵다. 노동력의 양적 증가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냉전체제는 노동과 전투를 동일시하며 발전전략의 전환을 가로막았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내적 개혁을 진행했던 점과 비교해보면 결정적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변화하는 국제질서와 흔들리는 분단체제

1969년 닉슨(R. Nixon) 독트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중소분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데땅뜨 외교는 냉전의 진영 대립을 약화시켰다. 서독은 닉슨이 만든 데땅뜨 국면에서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고 동독과의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동유럽과 화해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도 흔들렸다. 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1972) 국면을 국제사회와의 접촉기회로 활용했다. 그동안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상황에서 이 시기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수교에 나섰는데 그 성과가 적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차관을 도입해서 설비 현대화에 나섰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인해 북한 원자재의 가격이 하락했고, 결국 프랑스 등에서 얻었던 설비도입 차관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북한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 국제적인 신용불량국가로 전락했다. 7·4남북공동성명 국면도 오래가지 않았다. 1976년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자르는 과정에서 미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남북한에서는 흔들렸던 분단체제가 곧바로 복원되었다.

1980년대에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사회주의권의 위기와 변화가 분출되고, 북한의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면서 남북한의 국력 역전이 일어났다. 분단의 역사에서 대화를 통한 공존의 움직임이 나타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80년대 중반 대화에 나서고, 1989년 이후 고위급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체제에 참여한 이유는 위기의 반영이었다.

중국이 1978년 개방노선과 경제특구 정책을 발표하고, 베트남이 소련의 경제원조가 줄어들자 1986년 도이모이(doimoi, 개혁개방) 정책을 들고 나왔듯이, 북한 역시 새로운 대안을 선택해야 했다. 다만 북한은 분단체제 내에서 출구를 모색했다. 사회주의권의 체제전환에 따라 우호무역이 감소하자 북한은 남북경제협력을 선택했다. 외교적인 고립과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북한은 전두환·노태우(盧泰愚)정부의 북방정책에 호응했다. 북한이 연방제통일론에서 후퇴하고, 유엔 동시가입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체제위기와 적극적인 대남정책의 결합은 90년대 중반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의 ‘고난의 행군’은 결국 북한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응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3. 탈분단과 북한 변화의 관계

 

북한의 변화와 관련해서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북한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강조하는 시각과 북한 내부의 개혁의지를 강조하는 시각이 대립한다. 그러나 외부환경과 내부선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변화하는 환경을 유리하게 활용하려면 적극적인 변화의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은 2000년대 들어 몇번의 ‘전환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변화는 지속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분단체제와 군사국가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만들어낸 전후청산의 기회는 부시(G. W. Bush) 행정부의 등장으로 무산되었다. 2002년 북한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7·1경제관리조치는 2차 핵위기가 시작되면서 지속되지 못했고, 2007년 남북한의 10·4공동선언도 이명박(李明博)정부의 등장과 남북관계 악화로 이행할 수 없었다. 결국 외교환경은 불안정해졌고, 시장과 계획 사이를 방황하는 와중에 3대 세습이 이루어졌다.

김정은체제의 북한은 어디로 갈까? 북한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오래된 의견이 있다. 이러한 ‘북한불변론’은 냉전적 믿음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그 속도와 방향이 쟁점이다. 북한도 변하는 영역이 있고, 변화가 더딘 분야가 있다. 3대 세습에도 불구하고 리더십 형태의 변화가 예상되었으나, ‘인격적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수령제’ 정치체제가 신속하게 복원되었다. 정치체제는 변화가 느린 분야다. 반면 북한의 경제체제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달라지고 있고 사회문화적인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정책결정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경제 분야의 분권화와 사회문화적인 다양성은 한계가 있다.

북한의 변화는 분단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개인숭배와 인격적 지배, 초집중화된 정책결정구조는 냉전의 환경 속에서 정당화되었다. 또한 수령제는 군사국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군사질서는 단지 군대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영역에도 내장되어 있고, 지도자는 전시의 사령관으로 비유되는 경향이 있다. 외교적으로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남북한의 화해가 성사되지 않으며, 군사적으로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유지되는 전후체제가 지속된다면 북한의 군사국가적 성격도 계속될 것이다.

반대로 군사국가적 성격은 북한을 둘러싼 긴장구조가 완화되면 점차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 내부에서 군사적 이해관계는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다. 2002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박봉주(朴奉珠) 내각의 경제정책 변화는 결국 당과 군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좌절되었다. 북한에서 군은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재정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 운영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핵무기의 수를 늘린다 하더라도 현재의 병력수준을 유지하는 한 국방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 중국의 덩 샤오핑(鄧小平)이 경제개혁을 시작하면서 과감히 군병력을 감축하여 국방비를 줄이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외교적 환경을 조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투자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군이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핵 억지력의 수준을 갖춘다 하더라도 그것이 재래식 군비에 대한 투자 감소로 이어지기 어렵다. 미소 냉전의 역사나 인도·파키스탄의 관계에서 보면, 핵 보유에도 불구하고 제한분쟁은 지속되었다. 재래식 군비경쟁을 계속한다면 국방비 지출을 줄이기 어렵다. 북한 역시 저출산에 따른 인구감소로 병력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현재의 병력수준을 유지할 경우 산업활동인구는 더욱 줄어드는 가운데 군의 경제활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고, 이익이 많이 발생하는 영역을 군이 선점할 것이다. 따라서 대외적 긴장구조가 완화되고 북한의 ‘피포위의식(被包圍意識)’이 줄어들어야 선군정치의 정책적 영향력은 감소될 수 있다.

 

경제개혁과 ‘문지기 국가’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북한의 부분개혁은 연관 분야로 확장하기보다는 분절적이고 단절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농업정책에서 ‘포전(圃田)담당제’는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농업 분야에서 인센티브의 단위는 작업반에서 분조(分組)로, 그리고 분조의 축소를 거쳐 2013년부터 3~5명 수준의 포전으로 축소되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제개혁 초기에 등장했던 가족영농책임제(농가책임제)와 다를 바 없다. 포전담당제는 실질적으로 농업생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농가책임제는 단지 농업정책으로서가 아니라 경제개혁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 농가가 국가수매에 응하고 남은 농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게 되면서 시장가격이 형성되었다. 국가는 시장가격을 고려해서 수매가격을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국가에 출하하는 양을 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농산물에 대한 시장가격의 형성은 도시지역의 임금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식량가격이 기준가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가책임제는 지속적인 농업생산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급격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나갔다. 토지투기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또한 사회주의 시절에는 수리·관개시설에 계획적으로 투자했지만, 시장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러지도 못했다.

농업생산력과 관련해서는 소농경제가 아니라 대농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농업생산에서 인센티브 단위를 농가 혹은 포전으로 줄이면 단기적으로 생산성이 올라갈 수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농업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에서 포전담당제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농가책임제와 비슷하게 농산물의 시장가격 형성과 임금 현실화, 그리고 수매가격의 인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농업정책의 변화가 다른 분야의 경제개혁에 미친 효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북한에서는 왜 변화가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지 못하는가? 2000년대 초반 꾸바의 ‘제한적 경제개혁’을 평가하면서 활용된 ‘문지기 국가’(gatekeeper state)라는 개념7)을 적용할 수 있다. 이 개념은 경제개혁 과정을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제개혁으로 생겨난 수익성 높은 분야에서 국가가 문지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꾸바는 주로 관광 분야를 중심으로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국가의 인허가 권한을 행사하고 수익에 대한 접근권한을 통제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북한의 외화소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노동력 송출사업이다. 중동 건설시장에서 북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중국, 러시아로의 파견노동도 규모가 늘어나고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 중국 접경도시에서는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위탁가공 형태도 등장했다. 해외파견 노동자들은 북한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중산층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북한정부는 인력수출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이러한 인력 송출사업은 문지기 국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경제특구정책도 마찬가지다. 개방과 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며, 국내 경제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은 개방은 일정수준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성공단의 임금지급 방식이다. 현재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북한 노동자에게 직접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 달러로 개성공단 총국에 임금을 지급하면, 총국은 북한정부가 지정한 공식 환율을 적용해 북한원화로 환전한다. 이 중 30%는 사회문화 시책비(무상주거와 무상교육 등에 대한 공제)로 공제하고 나머지를 현물임금과 현금임금으로 나누어 지급한다. 현물임금은 금액에 해당하는 상품권 개념으로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전용상점에서 생활필수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문제는 현금임금이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본시장이 개방되어 있지 않고, 외화관리를 위해 해외노동 혹은 외국인 투자기업의 임금을 외화로 직접 지급하지 않는다. 남한도 1970년대 중동 건설노동자들이 달러로 받은 임금을 송금하면 정부가 공식 환율로 환산해서 원화로 지급했다. 이 과정에서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의 차이가 중요하다. 20154월 현재 북한의 공식 환율은 달러당 107~109원 정도다. 그러나 통일부가 발표한 비슷한 시기의 시장 환율은 8,000원이다.8)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 사이에 이처럼 80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면 환차익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환차가 너무 크면 기업이 개성공단 총국에 지급하는 가치와 총국이 북한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가치에 차이가 날 수 있다. 북한정부가 중간에서 환차익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노동자들의 요구로 현재는 현물임금의 비중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환율 문제는 남아 있다.

임금의 직접지불을 남북한이 합의했지만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북한 내부적으로 환율제도와 금융제도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 없이 개방 없다. 북한 국내적으로 격차가 너무 큰 이중환율제도를 유지한다면 경제특구에서 임금인상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북한이 외국자본을 더 많이 유치하고자 한다면 국내 경제제도도 함께 개혁해야 한다.

 

 

4. 분단체제와 북한인권 문제

 

북한은 ‘국가 이미지’를 개선해야 한다. 국제정치이론 중 구성주의는 현실주의와 달리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북한에 대한 악화된 인식은 미국이나 일본의 대북정책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남북관계가 장기적으로 교착하면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또한 강화되었다. 또한 북한인권 문제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다.

유엔인권이사회의 북한인권보고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구체적이고 엄격한 대응조치를 권고하고 있다. 북한인권의 실상은 일부 탈북자들에 의해 과장된 경우가 적지 않으나, 보편적 인권의 기준에서 보면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개선의 방법이다.

북한인권 문제 또한 분단체제의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정권의 주민 감시 및 통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강화된 분단체제의 산물이다. 분단은 북한에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 그리고 집단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남한은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중등학교의 매스게임이 사라졌지만, 북한은 여전히 집단체조의 나라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이 국제인권 원리와 상호존중의 정신 아래 인권개선을 위해 협력해나가는 과정”을 강조한 서보혁(徐輔赫)의 ‘코리아 인권’ 개념9)은 적절하다. 분단극복 노력, 즉 “인도주의로 생존권과 발전권 개선, 민간교류로 정보접근 촉진, 경제협력으로 사회권 개선이 가능하다”는 지적10)도 참고할 만하다.

자유권의 개선과 관련해서는 실효성이 중요하다. 북한정부는 인권침해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인권개선의 당사자가 된다. 적대적인 인권정책으로 해당 국가의 자유권을 개선한 사례는 드물다. 강압외교는 오히려 상대국의 권위주의 정치를 강화하고 일반 주민들의 경제·문화적 인권을 악화시킨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권개선 요구가 북한의 체제전환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된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와 거리를 두고 전통적 체제를 강화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은 한층 악화될 것이다. 20142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북한의 일반 주민이나 북한 경제 전체를 겨냥한 안전보장이사회 또는 양자 차원의 제재를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서독 관계에서도 서독의 협력적 인권정책은 적대적 인권정책보다 실효성이 더 컸다. 중국의 경험을 보더라도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개혁개방의 심화와 국제사회 참여가 인권개선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인권 문제와 관련해 ‘헬싱키 프로세스’의 의미를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1975년 헬싱키 프로세스는 동서 유럽이 모두 참여한 집단적 안보협력의 전환점이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헬싱키 프로세스를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동유럽사회주의 민주혁명의 배경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오히려 헬싱키 프로세스는 ‘포괄적 접근’의 대표적 사례다. 1975년 채택된 헬싱키 최종의정서는 ‘인권개선’만큼이나 주권존중과 무력사용 금지, 내정불간섭, 경제·문화교류의 중요성을 핵심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 주권과 인권의 관계는 오랫동안 국제정치의 논쟁 대상이었지만, 헬싱키 프로세스는 주권존중의 정신 아래 ‘대화를 통한 인권개선 노력’을 촉구한 사례다.

남북관계에서 인권 문제는 더욱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했다. 20156월 유엔 인권위원회의 서울사무소 설치가 남북관계 악화의 계기가 되었듯이, 인권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현대 국가의 외교정책은 여론으로 표현되는 일반 국민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국내외적으로 북한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지면서 북한인권 문제 역시 외교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인권 논의가 정치의 공간에서 벌어지고,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루즈벨트(F. D. Roosevelt) 대통령은 니까라구아의 쏘모사(Somoza) 정권과 외교관계를 맺을 때, 담당 실무자가 독재정권이라고 반대하자, “개새끼지. 다만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라서”라고 답변했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보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더 중요하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현대외교가 인권의 가치를 과거에 비해 높게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략적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외교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와 달리 북한이 유엔 차원의 인권 논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다만 북한은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특수성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유엔의 인권정치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꾸바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강력한 주장에도 꾸바인권결의안이 소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한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꾸바는 다수의 비동맹국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소위원회의 결의안 채택을 무산시켰다. 그러면서 꾸바는 90년대 후반 이후 국내적으로 인권단체의 활동을 허용했고,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했으며, 국제 인권단체의 접근을 막지 않았다. 인권 이슈를 무시하지 않고 특수성만을 주장하지도 않은 것이다. 결국 오바마(B. Obama) 행정부에서 최근 미국과 꾸바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워싱턴에 꾸바의 국기가, 아바나에 미국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앞으로 꾸바는 중국과 동유럽에 이어 ‘접근을 통한 인권 변화’의 실증적 사례가 될 것이다.

유엔 무대에서 비동맹국가들은 인권 문제의 ‘이중 잣대’를 꼬집는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나 파키스탄의 인권상황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데도 북한인권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킨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인권정치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비동맹국가들조차 설득하기 어렵다. 북한은 중단된 유럽연합과의 인권대화를 재개하고, 유엔의 북한인권담당관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보편적 인권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5. 마주보고 변화하기

 

두개의 코리아가 거울 앞에 서 있다. 상대에게서 자신의 과거 흔적을 발견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역행의 증거다. 여전히 분단이 변화를 가로막고 국내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아주 오래된 과거’를 대면하는 일은 얼마나 참담한가.

이미 두개의 코리아는 대칭적이지 않다.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는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고 인권과 민주주의 역시 비교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전히 남북관계가 대칭적인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남한 내부적으로 보면, 정치·사회적 발전에도 분단인식이 재연되면서 과거로의 퇴행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거울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데, 거울을 보고 왜 도발을 하느냐고 화를 낸다. 비극이면서 희극이다.

북한 또한 변해야 한다. 분단극복은 환경이 변한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책결정구조도 달라져야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를 위한 정책변화도 불가피하다.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사회 다수의 지지를 얻도록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남한도 변해야 한다.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도 달라져야 하고, 분단극복이 우리 시대의 과제임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 안의 냉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함께 변하자는 공진화(共進化) 전략은 성공하기 어렵다.

두개의 코리아는 무엇보다 격차를 줄여야 한다. 경제력 격차는 비교우위를 결합시켜 경제협력을 가능케 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임금격차를 이용한 노동집약적 분야의 협력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격차를 줄여야 경제협력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정치·사회적 격차는 말할 것도 없다. 민주주의와 사회문화적 격차는 이질성을 심화하고, 상호인식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벌린다. 화해의 정신과 공존의 철학으로 공감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야 한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거울 속의 상대도 웃고, 내가 주먹을 들면 상대도 든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는 분명하다. 거울 속 상대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울 속의 상대를 움직인다. 북한의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변해라. 악순환의 고리를 선순환으로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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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의 제안으로 성사된 적십자회담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통일부 『남북대화』 제36호(1984.8~1984.11) 참조.

2) 류승주 「1946~1948년 남북한 전력수급 교섭」, 『역사와현실』 제40권, 2001.

3) 백낙청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21~22면 참조.

4) 박명림은 인터페이스를 대쌍관계로 번역하면서, 상호관계를 넘어서는 “구성된 전체질서가 두 행위자에게 특정의 조건을 부과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박명림 「분단질서의 구조와 변화: 적대와 의존의 대쌍관계동학, 1945~1995」, 『국가전략』 제3권 1호(1997) 참조.

5) 장화수 「해방후 남북한의 ‘지역간 무역’에 관한 연구(1945~49)」, 『아세아연구』 통권 53호(1975) 참조.

6) 김보영 「8·15 직후 남북한 경제교류에 관한 연구: 남북한 분단의 경제적 귀결」, 『경제사학』 제22집, 1997.

7)Corrales Javier, “The Gatekeeper State: Limited Economic Reforms and Regime Survival in Cuba, 1989~2002,” Latin American Research Review 39, no. 2 ( June 2004) 참조

8) 노컷뉴스 2015.7.10.(http://www.nocutnews.co.kr/news/4441839) 참조.

9) 서보혁 『코리아 인권: 북한 인권과 한반도 평화』, 책세상 2011 참조.

10) 서보혁 「분단체제와 인권문제: 북한인권 논의의 재설정」, 『통일인문학』 제61집(20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