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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

 

한국사회 ‘대전환’의 길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를 읽고서

 

 

김동춘 金東椿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전쟁과 사회』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등이 있음. dckim@skhu.ac.kr

 

 

1. 글머리에

 

전태일(全泰壹)은 “아무래도 누가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라고 생각한 나머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불살랐다. 사람이 죽어야만 세상이 충격을 받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회는 야만사회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사람 한두명은 물론, 수십수백명이 정치·사회적 이유로 죽어도 놀라거나 그들을 죽게 만든 상황을 돌아보지도 않고, 해결책을 마련하지도 않는다. 가까이는 성완종, 유병언, 최근의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이 그렇다. 박근혜정권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결정적 시점에 의문의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간다. 세월호참사로 수백명의 아이들이 ‘수장’을 당하고 삼성, 현대 등 한국 굴지의 대기업 일터에서 많은 하청기업의 노동자들이 자살, 질병,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이 세상은 그 사건들을 무심하게 지켜보며 정권이나 책임당국은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

미칠 정도로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정치, 법, 국가가 존재하는 법인데, 지금의 정치, 법, 국가는 오직 권력자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박근혜정권 3년차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지 매일의 기록 경신에 충격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국가안위’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는 마법의 주문처럼 공중에 떠돌고 있으나, 제도의 강압, 힘 센 집단의 ‘갑질’, 영혼 없는 노동의 고통 속에 우울증 초기증세를 앓으며 살아가는 학생, 청년, 노동자, 노인은 영혼 없는 생명체와 같은 존재다. 이 정권의 권력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라를 일본에 넘긴 구한말 망국의 관료들이 이보다 더 나빴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작업장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정규직 노동자, 알바생을 보면 조선시대 노예가 이들보다 비참했을까 싶기도 하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의 ‘막장’이 어떠한지를 보려면 지금의 한국을 볼 일이다.

나는 최근 출간된 백낙청(白樂晴)의 대담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창비 2015, 이하 ‘대담집’)를 나라에 대한 근심의 고뇌에서 벗어날 길 없는 답답함과 절박한 심경의 표현으로 읽었다. 각계 전문가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려는 그의 이 시도가 세월호참사 이후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 정치와 사회에 대한 원로 학인(學人)의 평생의 내공이 실린 진단이자 다가오는 2017년 대선을 위해 우리는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사실상 연구활동이나 지적인 활동을 거의 중단할 연배(!)인데도 피대담자들이 직접 쓴 글이나 자료를 섭렵해서 인터뷰어로 직접 나선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한국의 후학들이 크게 배워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담집은 지난 대선에서 ‘2013년체제’를 희구했던 백교수 개인의 자기반성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결국 선거결과에 집착한 점, 특히 한국 수구·보수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한 점을 인정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계속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태도는 현실정치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기도 했다. 박근혜정권의 등장으로 ‘87년체제’는 제대로 마침표를 찍기는커녕 ‘신유신체제’라고 부름직한 복고풍이 유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과 힘겹게 맞서야 하는 처지에 있다. 2012년 당시나 지금이나 대전환(大轉換)이 객관적으로는 요청되고 있으나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의 부재, 그리고 야당정치권·지식인 진영의 적공(積功)이 너무나 모자란 데 대한 한탄과 아쉬움이 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다. 아마 그는 박근혜정권하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퇴행, 민생 위기, 정부의 무책임, 남북관계 경색의 상당부분이 그가 제기해온 분단체제와 매우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2013년체제 만들기’1)의 후속 작업을 이런 대담의 방식으로 계속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 것 같다.

이 대담집을 읽으면서 20세기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론된 ‘문제(問題) 중심’과 ‘주의(主義) 중심’의 접근법이 떠올랐다. 즉 생산대중이 처한 고통 등 실제 현실에서 출발해서 해법을 찾는 것이 ‘문제 중심’이라면, 문제를 파악하고 행동을 조직하려면 ‘주의’에 입각해서 해법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의 중심’이다. 정치·사회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컸던 한국에서는 80년대 이래 방법론적으로는 ‘주의 중심’의 접근이 ‘문제 중심’의 접근을 압도해왔다. 그러다보니 사회운동과 지식인 진영 내에서 노선갈등과 사상투쟁이 격렬했는데 그 후과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대담집은 큰 틀에서 보면 ‘주의 중심’에 있는 지식인 백낙청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즉 현장과 밀착되어 있는 전문가, 연구자나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본인의 ‘주의’, 즉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주의의 틀로 포괄하려 하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는 자신이 주장한 변혁적 중도주의가 ‘주의’라기보다는 ‘아닌 것’을 제외한 잔여 노선이라고 말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의 담론을 무리하게 그의 ‘주의’로 유도하려 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의 현장진단을 그의 ‘주의’, 즉 분단체제의 틀로 설명하고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다. 주제와 대상에 따라 인터뷰어로서가 아니라 같은 입지의 토론자로서 강하게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주의와 문제를 잘 결합시키려는 보기 드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대담집에 등장한 각 분야 전문가의 주장과 담론 모두 평가할 역량이 필자에게는 없지만, 백낙청의 시각과 접근법, 특히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주의의 기조에서 본 우리 사회 여러 전환의 과제에 대한 이 책의 대안에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2. 분단체제와 한국의 여러 사회문제들: 거시구조와 현실정치, 그리고 정책적 대안

 

박근혜정부는 개혁·진보진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구적이었고, 지난 2년 동안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물론 어느정도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예상됐던 남북관계에서조차 어떤 결실도 보여주지 못했다. 세월호참사, 메르스 사태 등을 겪고 나서 온 국민은 정권의 무능을 넘어서 이제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이며, 어떤 정책대안을 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백낙청은 원인진단을 함에 있어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반동’으로 규정하고, 그 구조적 배경으로는 분단체제를, 그것을 불러온 주체의 한계로는 ‘적공’의 부족을, 그리고 해법에서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건다. 그의 분단체제는 단순히 한반도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대립상황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사회·경제, 정치체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배후의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세계체제까지 포괄한다. ‘변혁적 중도’의 개념도 변혁이라는 체제전환과 중도라는 정치전략이 결합되어 있는 개념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개혁의 전망을 갖되 현실정치에서는 중도를 포괄하여 단기, 중기의 대책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의 분단체제론의 내용과 문제의식은 단순히 남북한의 적대적인 공존과 교착 상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북한의 지배체제, 사회 운영의 원리까지 포괄한다. 그러나 역시 남북관계, 한국정치의 구조적 특징에 대한 해석과 극복의 대안이 그 핵심적 내용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이번 대담집에서 경제, 교육, 노동, 생태, 여성 등의 주제로 분단체제론의 외연을 넓히려 했다. 물론 이전의 여러 저작이나 논문에서 복지, 생태, 여성 등의 문제가 분단체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강조하기도 했지만 이번 대담집에서는 분단체제와 직접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경제, 교육 등의 영역까지 포함한 것이다.

나는 지난 대선 전 ‘2013년체제 만들기’라는 그의 제안을 듣고서 약간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즉 한국에서 87년 민주화운동의 시효가 끝났고, 남북관계 변화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변경’이 객관적으로 절실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정권교체가 매우 중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총선·대선에서 야권의 승리가 ‘2013년체제’라고 부를 정도의 ‘대전환’의 변곡점이 되리라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언급은 했지만,2) 당시 대선에서 문재인(文在寅)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보수세력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아 노무현정부 이상의 파행과 굴절을 겪었을 것이고, 남북관계와 국제관계,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 변혁에 시동을 걸 수 있는 역량 동원은 어렵다고 보았다. ‘2013년체제’의 담론이 정권교체를 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전망 제시와 개혁진보진영의 내부 전열을 정비하자는 제안으로서 의미는 있었지만, 희망사항과 객관적 조건, 주체 역량의 괴리가 너무 커 보였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또다시 ‘2017년체제 만들기’ ‘2022년체제 만들기’를 내걸 수는 없는 일이다.

정책은 거시역사적인 구조와 현실정치의 역학, 관료집단과 사회운동세력의 관성과 행동이 결합해서 나오는 종합예술 같은 것이다. 일찍이 밀즈(C. W. Mills, 1916~62)는 국가의 변화와 관련된 정책을 두 차원으로 구분했다. 국가의 존립과 관련된 최상위 정책, 그리고 국가의 운영과 관련된 중위 수준의 정책이 그것이다. 밀즈는 군사, 안보와 경제 정책이 전자에 속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정책은 후자에 속한다고 보았다. 전자는 국가의 기본 성격, 가장 결정적인 이해집단 혹은 계급 간의 세력관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혁명, 전쟁 등 체제변화 혹은 중요한 정권교체가 아니고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3) 반면 후자는 세력 간에 전자만큼의 결정적 이해가 충돌하지는 않기 때문에 기존의 정치질서 내에서도 어느정도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물론 중위 수준의 정책도 전자의 영향 속에 있는 것이기에 완전한 독자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최상위 정책의 변화는 헌법의 변화, 국가의 기본 이념과 가치의 변화, 지배질서와 권력구조의 변화, 예산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중위 수준의 정책 변화는 입법화,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 변화, 정부조직 개편, 예산집행의 배분구조 변화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물론 한국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주의 나라에서는 중위 수준 정책의 자율성이 낮고, 최상위 정책을 관장하는 정부 부서가 나머지 정책 관련 부서를 거의 군림하듯이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밀즈 시대의 미국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한국에서는 외교, 안보 정책 가운데 남북관계가 별도의 범주로 존재하면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87년 민주화가 미진했을뿐더러 남북한의 군사대결이 지속되기 때문에 국정원, 검찰 등 공안기구의 정상화와 정치개혁, 법조개혁, 과거사 정리를 통한 ‘민주화의 질’을 높이는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동시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조건 때문에 경제정책이 과거에 비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며, 복지, 환경, 여성, 안전 등의 의제도 매우 중요해졌다.

한반도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분단을 하나의 ‘체제’로 보고, 그 변화를 ‘변혁’으로까지 보는 백낙청의 이론에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질서가 요동친다면 남북한 모두 레짐(regime)이 아닌 시스템 수준의 ‘체제’변화까지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객관적으로든 주체적으로든 국내외 사회·경제질서와의 연관성을 상정하지 않고서 남북한의 분단질서, 구조, 상황 등을 하나의 ‘체제’ 차원으로 승격시키기는 어렵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재벌, 교육, 노동, 복지, 그리고 생태환경과 여성 문제는 분단과는 다른 역사적 기원, 세계사적 조건, 경로를 통해 한국 사회·경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영역은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거나 허물어져도 그것과 더불어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낙청도 분단체제가 자기완결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문제를 환원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도 아니라고 했지만, 분단은 어떤 부분에서는 가장 결정적 변수이나 동시에 세계체제와 국내의 정치경제를 연결하는 매개변수이고, 여러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역사적 변수이거나 촉진변수의 위상을 갖고 있다. 즉 현상기술적인 개념으로 분단체제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분석적인 개념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볼 때 대담집은 대담자인 백낙청의 ‘분단’, 즉 최상위 정책인 안보·국방 정치 부분과 관련된 정책구도와, 대체로 중위 수준의 정책을 말하는 사회경제 분야 전문가들의 진단 대안과 접점을 마련하는 데는 다소의 어색함이 있고, 추상 수준에서도 괴리가 있다. 분단체제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김연철(金鍊鐵)과의 남북관계 대담에서 비교적 풍부한 담론이 오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또다른 최상위의 정책인 경제 분야 정대영(鄭大永)과의 대담에서는 조세, 금융, 부동산, 성장전략 등 실물경제 논의가 주로 진행되었고, 재벌, 산업구조, 불평등 등 최상위 정책 수준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부분은 오히려 비껴갔다. 즉 경제 영역에서는 이 책의 큰 제목인 ‘대전환’에 걸맞은 내용이 채워지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분단체제의 문제의식을 경제정책과 접목한다면 평화 혹은 통일 문제와 경제를 접목하거나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대결과 한반도 경제체제 변화의 가능성 등을 집중 논의하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4)

순서상 정치 부분을 제일 뒤로 배치하고 거기서 주로 선거정치 중심의 의제를 삼은 것도 분단체제 혹은 대전환의 문제의식과는 맞지 않는 인상을 준다. 분단체제하의 정치란 ‘선거정치’가 아니라, 사실상 국정원, 검찰, 경찰, 관료기구의 ‘선거 이전의 국가정치’이므로 이런 현안들이 논의되어야 했다. 한국 관료집단에 대한 논의는 매우 타당했지만, 한국의 여야 독점 정당체제, 특히 한국 지배체제의 특성에서 정당체제 일반, 지역주의, 그리고 지방정치의 현실 등으로 더 들어갔으면 이 대담의 취지와 잘 맞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중위의 정책이라 볼 수 있는 교육, 노동, 환경, 여성 영역은 분단체제와도 다소 거리가 있고, 실제 논의의 내용도 ‘대전환’보다는 박근혜정권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그 극복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와 직접 연결고리는 약하고 정책의 성격 역시 중위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이 영역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거시구조적 변화, 더 장기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측면도 있다. 교육 문제 관련 이범과의 대담은 주로 제도 차원의 논의가 진행되어 내용은 알찬 것이었지만, 경제, 고용, 계층, 문화 등 사회경제 영역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논의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여성 문제 관련 조은(曺恩)과의 대담에서는 여성정책 제도화의 성과나 한계 등 많은 현안보다는 담론 위주의 논의로 흘러간 감이 있고, 노동, 환경 관련 대담에서도 전체 구도보다는 대담자의 주요 활동영역에 집중되는 면이 있었다.

선정된 대담자들 가운데 추상적 이론이나 거시정책을 다루는 연구자가 아니라 현장성이 강한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 사회·경제의 거시적 변화에 대한 논의보다는 박근혜정부의 정책을 실마리로 해서 당면 사안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고 우리가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백낙청 교수의 애초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각각의 문제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들이 분단체제와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논의하는 쪽으로 갔으면 이 대담의 특성과 장점이 더 부각되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을 모두 충족시키는 대담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다보니, ‘대전환’이라고 했지만 실제 어디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미래 구상 관련 논의도 좀 부족해 보인다. 경제정책에서는 고용 없는 성장 혹은 저성장시대라는 인식, 남북관계 논의에서는 미·중 양강(兩)시대, 정치 좌담에선 계급정치의 후퇴, ‘탈정치’ ‘탈정당’ 시대의 변화 등을 고려하면서 각 영역에서의 한국의 현실이 검토되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정책에서 최상위와 중위의 구별이 있듯이, 백낙청이 강조한 대로 장기적인 과제와 중단기적인 과제가 있고,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중요한 의제로 삼아 야당이 정치적 승리를 거둔 다음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단기적인 승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시구조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구조와 전략을 어떻게 결합시킬지가 매우 중요하다. 사실 그것은 이 대담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고 한두권의 작업으로 정리할 사안도 아니다. 정당의 연구소나, 국가의 미래를 구상하는 정책연구단 등에서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머리를 짜내서 해야 할 과제다. ‘체제변혁’의 역사구조적 맥락과 정치전략적 대응을 구별하면, 현재의 유사한 이념적 스펙트럼에 위치해 있는 보수 양당의 독점적 정당구조에서 선거를 통해 ‘변혁’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사실상 거의 손댈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지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체제변혁은 정책변화가 아니라 국가의 성격변화이므로 현재 선거정치나 정당정치의 힘으로는 거의 도달할 수 없으며, 국가기구 특히 관료조직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가능할 것이다.

대체로 이 대담집의 기본 문제의식은 2017년 대선으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분단체제와 연결하지는 않더라도 2013년에 ‘실패’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더 퇴행시킨 이 국면에 대한 이해와 중·단기 정책 의제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3. ‘대전환’의 객관적 조건과 현실적 제약

 

정말 지금이 대담집의 제목처럼 대전환 혹은 체제전환이 요구되는 시기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현재 ‘체제’의 성격은 무엇인가? 대전환은 오직 한국, 한반도만의 요청사안인가, 아니면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과제인가?

우선 한국만 보면 나는 지금이 대전환, 체제전환의 시기인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7,80년대는 개발독재와 민주주의 압살의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지만, 삐께띠(T. Piketty) 식의 설명으로는 그래도 이때가 자산불평등이 비교적 낮고 계층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던 성장과 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 과도기가 지나가고 이제는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과반 가까이를 독점함으로써 국가권력마저 이들의 의중에 따라 집행되는 ‘가망 없는’ 시대에 접어든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5)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 더욱 심해졌지만 경제, 정치, 사회 모든 영역에서 말기적 징후가 두드러지고 있기도 하다.

한편 대전환의 요청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해당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퇴행, 실업과 고용불안, 불평등과 양극화, 그 결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후퇴 역시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부인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도 거의 바닥 수준이다. 그리스 위기 국면에서 독일과 유럽연합의 지도력도 도전받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6)도 공공연하게 제기된다.

물론 대전환, 체제전환의 요청과 징후가 세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자본주의가 대공황이나 파국, 전쟁에 의해 일거에 변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형태의 파시즘으로 갈 수도 있거니와 변화의 방식과 심도는 다를 것이다. 국민국가체제 역시 아무리 낡았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백낙청의 ‘이중과제론’의 문제의식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는 국민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일은 아예 포기하고 더 근본적인 대안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대안 모색과 미래에 대한 상상은 계속해야 하지만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일, 복지국가·‘사회국가’를 만드는 일에 초연할 수는 없다.

내가 이러한 세계적 대전환의 객관적 필연성을 논증할 능력은 없지만, 자본주의 근대국가체제의 모든 빛과 그늘이 집약되어 있는 남북한의 오늘을 보더라도, 한국 문제를 통해 세계가 겪는 딜레마를 볼 수 있고, 그래서 한국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세계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위기는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동시적 조건과,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분단-전쟁-개발독재 이후의 역사적 조건이 결합되어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 문제는 다른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세계 경제질서와 국제정치의 일부이며 백낙청이 강조하듯이 방법론적으로는 분단, 즉 한반도의 시야로 접근할 때 훨씬 구체적인 대안과 전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분단체제가 냉전 세계체제의 일부라는 백낙청의 지적에 공감하지만,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근대 세계질서가 한반도에 가장 파행적으로 응축해 있다는 점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단이 식민주의의 연장이며 미완의 근대라는 점에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결손국가’를 미완성된 반() 국가라고 보았고, 국민주권은 ‘반의 반’만 보장되었다고 주장했다.7) 한국전쟁기 피학살자들이나 이후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겪었던 ‘학살자’ ‘고문자’로서의 국가, 용산참사 유족이 겪었던 폭력 진압경찰로서의 국가, 그리고 단순한 ‘안전사고’ 피해자인 세월호 유족이 자기 자식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데도 집요하게 조사를 방해하고 유족을 분열시키는 국가는 별개의 국가가 아니다.7) 바우만(Z. Bauman)이 말한 것처럼 ‘권력과 정치의 분리’, 제도권 정당정치의 해결능력 부재, 즉 내가 말한 ‘주권 부재’는 한국인에게는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 처음 겪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과거 냉전시대의 주변부 자본주의 시기부터 지속되어온 특징이다.8) 한국에서는 냉전, 개발독재 시기 이래 국민이 주권자의 지위를 충분히 누린 적이 없다.

결국 분단·전쟁체제하에서는 프랑켈(E. Frankel)이 말한 이중국가(dual state)체제, 즉 정상국가(normal state) 위의 특권국가(prerogative state)가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권력행사가 자행되고 검찰의 수사나 재판은 주로 정적에게 보복적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9) 즉 북한과의 대립, 한국사회 내부의 ‘종북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삼는 (정당)정치 위의 국가와 그 특권국가의 범법행동을 국민이 견제할 수 없는 구조적인 조건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퇴행을 가져온 배경이다. 안보, 성장을 지상목표로 하는 이러한 국가의 틀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때 내걸었던 경제민주화는 선거 구호 이상일 수 없었고, 노동기본권, 표현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 원칙도 지켜질 수 없었다.

그래서 백낙청이 주장하는 대전환, 분단체제 변혁을 강조하려면 우선 분단이 곧 준전쟁상황임을 더 강조해야 하고, 체제변혁은 현실정치 혹은 정권의 변화가 아니라 ‘특권국가’의 해체 혹은 전면개편을 반드시 거쳐야 함을 거론해야 한다. 그래서 이 대담집에서도 국정원의 대선개입,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전교조 법외노조화 등 일련의 냉전회귀 사태를 출발점으로서 해서 어떻게 이중국가체제를 극복할지 논의하는 것이 우선시됐어야 한다고 본다. 분단·전쟁체제하에서 이중국가의 극복이 매우 어렵다면, 바로 그 안보, ‘종북’ 논리의 이중성과 허구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대전환’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백낙청과 김연철이 강조하듯이 국방·안보를 민주주의의 감시권 내에 두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물론 복지국가도 성취할 수 없다. 사회국가, 생태, 여성의 가치가 존중되는 국가는 오직 이런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남북관계에 적용되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한국 국민의 주권을 제약하고 있는 반북·안보논리의 극복, 그래서 사회를 경제와 정치의 식민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백낙청이 말하는 ‘적공’이 집단적 의식이나 조직이라고 본다면, 그 축적을 가장 심하게 제약하는 것이 안보논리라 할 수 있기에 ‘적공’은 사회가 안보와 경제의 식민상태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백낙청도 언급하고 있지만 분단·전쟁체제는 한국 자본주의 경제질서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한국의 분단이 미국발 냉전질서 및 반공주의의 극단적 내재화이며 한반도의 휴전(준전쟁)체제가 남북의 군사대결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의 일방적 옹호, 즉 대기업과 사용자의 재산권 보호, 조직노동에 대한 배제와 노동기본권의 사실상 무력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자본권력의 편향적 행사, 반공의 이름하에 공공복지 대신에 사적 복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복지비 지출과 조세부담률이 OECD 거의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것, OECD 국가 중 복지후진국인 미국, 일본보다 한국의 공공영역 비중이 훨씬 적은 것도 냉전자본주의, 주변부 신자유주의의 특징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 재벌세습, 수도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 등도 분단·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어떻게 이런 냉전 자본주의의 ‘경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의해야 한국적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분단·전쟁이라는 역사구조적 규정성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신자유주의화, 그리고 필자가 강조했던 ‘기업사회’화라는 동시대의 조건과 결합, 내재화되어 있다.10) 즉 “검찰은 삼성이 관리하는 작은 조직”이라는 김용철(金勇澈) 변호사의 증언에 집약되었듯이 97년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하에서도 입법, 사법, 행정의 공공기관 활동마저 대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상위의 목표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재벌 대기업은 모든 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노사관계의 외주화를 통해 노동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정부는 경쟁력의 신화를 내세우며 기업이 가져온 해악으로부터 노동자, 소비자, 환경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다.11) 즉 분단·전쟁체제와 결합한 한국의 기업사회, 기업국가로의 전환, 시민이 소비자로 호명되는 지금의 자본주의 질서가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온 직접 요인이다.

이 점에서 역사구조적 현실로서 분단·전쟁과 9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기업국가 현상 및 금융자본주의와 서비스자본주의의 확대 심화, 소비주의 현상이 어우러져 한국은 오늘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 한가운데 있다. 이명박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고 있지만, 그것이 백낙청이 지적하듯이 민주/반민주의 구도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12) 즉 분단·전쟁이 가져온 억압적 국가의 비대화와 취약한 하부구조(법 집행의 공정성 결여와 공공지출 예산 부족), 다시 말해 공공부문의 취약성과 국가의 무능·무책임이 뒤엉켜 세월호참사와 메르스 사태 등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 복지, 노동, 환경 문제는 이러한 과거형 국가억압과 현재형 국가무능이 합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분단·전쟁체제하의 개발독재는 국가와 국민이 갖고 있는 자원을 재벌 대기업에 집중적으로 몰아주었다. 수출지원과 환율지원, 부동산 띄우기 정책은 중간층 이하의 부를 강제로 대기업에 이전시켜주었다. 공공성의 실종은 오늘의 한국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국가가 공익의 대표자나 옹호자가 아니라 사적 이익의 후원자·추진자 역할을 하고, 국가기관이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교육, 주택, 의료 등 재생산의 영역에서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래서 한국은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국가의 공적 성격이 매우 취약했다. 개발독재 시절 편향적으로 축적된 부는 민주화 이후 가장 중요한 권력자원이 되어 재벌 대기업이 정치와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박근혜정부는 사실 분단·반공체제의 모든 퇴영적인 것들과 신자유주의, 그리고 탈산업 소비사회의 구조적 특징의 종합판이다. 그래서 박근혜정권의 수구퇴영적 행태는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국가의 유산인 국정원과, 재벌 대기업이라는 ‘그림자 정부’, 그리고 구세대의 냉전반공주의에 의해 지탱된다. 박정희식 성장주의, 물질만능주의의 때늦은 출현으로서 박근혜정권은 분단과 전쟁의 귀결이며, 한반도의 냉전과 열전(한국전쟁)은 일제 식민주의를 어느 정도 연장한 것이기에 결국 대전환의 역사적 요청은 구한말 이래의 강요된 근대화, 비자주적인 근대화라는 긴 흐름 속에서 추적해야 한다.

분단체제의 변화 혹은 대전환도 국내 정치변화보다는 미·중관계 혹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의해 초래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기는 어렵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퇴행으로 이중국가, 분단모순이 다시 부각되기는 했지만, 이미 한국 사회·경제는 신자유주의적인 기업사회, 소비사회 국면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대전환 논의는 이러한 당면 사회·경제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분단체제 극복은 ‘반국가’ 상태의 극복이라는 점에서는 ‘변혁’의 측면이 있지만, 현 자본주의 사회·경제질서의 ‘대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구자유주의 시대 혹은 냉전시대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박근혜정권의 파행을 출발점으로 해서 대전환, 체제변혁의 여러 차원, 단계, 경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낸 여러 역사적 단계와 층위, 가까이는 87년체제와 주변부 신자유주의 체제 및 그 극복의 가능성을 먼저 정리해봐야 하고, 그다음에 분단체제,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만들어진 식민지체제와 서구 따라잡기 근대화의 역사문화적 심층 구조의 특성과 극복의 방략을 거론해야 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역사적인 것과 동시대적인 것의 결합으로서 현재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물론 단계론적으로 보자면 시민민주주의, 사회국가, 생태·여성친화 국가의 길을 걷고 있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길과 달리 한국은 식민주의, 반공주의, 관료주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안보국가를 넘어서지 않고서 복지국가는 어렵다고 주장했고,13) 사회를 세워 정치와 국가를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14) 그러나 동시대 세계사 속에 있는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단계적 접근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즉 지금 신자유주의가 병폐라고 이상적 구자유주의 상태를 만들 수도 없고, 분단이 심각한 문제라고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도 없다.

 

 

4. ‘대전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이 대담집에서도 김연철과의 국제관계 관련 대화에 박근혜정권의 철학의 빈곤이 거론되었고, 교육 문제를 다룬 이범과의 인터뷰에서 공교육 자체의 기능부전이 강조되었지만, 세월호 이후 집권세력은 물론 국가 자체의 이념 부재와 방향상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백낙청도 언급했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유목민화된 시대에, 특히 국민국가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이 의문시되는 세계적 전환기에 한반도의 전환과 새 정치공동체 건설을 위한 사상적 대안 마련은 모든 학인들과 사회운동진영이 피할 수 없는 임무다. 분단된 ‘섬나라’ 남한의 집권세력은 중국이 그러하듯이 ‘내향적 자기착취’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할 뿐,15) 근대서구 물질문명의 찌꺼기를 답습하는 것 이상의 시야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연철의 언급처럼 실질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경제체제의 대전환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백낙청도 평화가 통일보다 상위의 가치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제 어떤 평화, 어떤 통일, 어떤 체제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가져야 한다. 적공의 부족이라는 것도 그동안 민주화를 주도해왔고 지금도 변화를 열망하는 개혁진보진영의 집단적 지적 역량, 즉 대안제시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실질적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우리의 사상·이론적 준비 정도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인 담론과 정책, 특히 경제민주화나 복지 혹은 사회적 경제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과연 우리가 그 내용을 소화해서 대중의 언어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16) 신앙화된 신자유주의 교리와 주류 경제학, 즉 자유시장이 경쟁과 혁신을 촉진한다는 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담론과 정책 아래에서 실제로는 재산권의 배타적 보장, 독점권력 및 계급권력의 강화와 사용자의 전권 행사, 용역 폭력의 횡행 등 ‘자유’의 이름을 빌린 억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면서 왜 경제가 사회에 복속되어야 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17)

따라서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할 것이다. 좀더 들어가면, 경제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폴라니(K. Polanyi) 식 질문이 필요하다. 불평등의 극복은 우리 시대 최대의 과제다. 이는 재벌 세습, 낮은 법인세와 소득세, 자사고와 특목고 문제 등 모든 의제와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서 불평등은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고, 어디까지 용인할 수 없는가? 공공성, 정의의 수립과 불평등 극복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도 정리해야 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의 공적 활용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분단체제 변혁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18) 결국 우리의 지난 한세기 근대화 과정, 분단·전쟁체제에 대한 되새김질, 즉 성찰성의 자세가 필요하다. 성찰성은 지난 한세기의 타율적 근대화, 서구화 과정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입, 사용해온 개념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 재개념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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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낙청 『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2) 같은 책 53면.

3) C. W. Mills, The Cause of World War Three, New York: Ballantine Books 1960, 36~41면.

4) 임현진·정영철 「‘전환의 계곡’을 넘어: 통일편익, 통일비용, 그리고 통일혜택」, 『역사비평』 2011년 겨울호.

5)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2014.

6) Paul Mason, “The End of Capitalism has Begun,” the Guardian, 2015.7.17, 혹은 월러스틴과 랜들 콜린스의 주장,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성백용 옮김, 창비 2014.

7) 졸고 「국가 부재와 감정정치: 세월호참사 이후의 한국사회」,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현실문화 2015, 157~90면.

8) 지그문트 바우만·카를로 보르도니 『위기의 국가』, 안규남 옮김, 동녘 2014.

9) Ernst Frankel, The Dual State: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Dictatorship,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10) 졸저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도서출판 길 2006.

11) 마이클 페렐먼 『기업권력의 시대』, 오종석 옮김, 난장이 2009, 18면.

12) 바우만, 앞의 책 29면.

13) 졸고 「분단·전쟁체제에서 복지국가는 가능한가」, 참여사회연구소 기획, 윤홍식 엮음 『평화복지국가: 분단과 전쟁을 넘어 새로운 복지국가를 상상하다』, 이매진 2013.

14) 졸고 「‘사회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황해문화』 2015년 여름호.

15) 성근제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역사비평』 2011년 겨울호.

16) 강수돌은 외환위기 이후 제기된 대안으로 김대중정부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비롯해서 ‘사회적 경제론’ ‘사회경제 공공성 강화’ ‘문화사회론’ ‘생태적 자율공공체론’을 거론했다. 강수돌 「경제와 사회의 조화를 위한 대안: 1997년 외환위기 이후를 중심으로」, 『역사비평』 2008년 가을호.

17) 자유 개념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21~58면.

18) 우자와 히로후미 『사회적 공통자본』, 이병천 옮김, 필맥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