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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애런 베너너브 Aaron Benanav

시카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하퍼­슈미트 연구원 및 사회과학 담당 조교수

 

 

* 이 글은 New Left Review 2019년 11/12월호에 수록된 “Automation and the Future of Work 2”를 번역한 것이다(일부는 생략). ⓒ Aaron Benanav 2019/한국어판 ⓒ (주)창비 2020

 

 

 

스마트폰과 자율주행 자동차, 주식 자동매매 데스크가 지구 곳곳의 삶을 변형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요즘, 우리는 현기증 나는 기술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동화된 미래에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새로운 기계시대가 예시하는 인간 자유의 꿈을 실현하도록 우리의 사회·정치 제도를 개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새 시대가 대량 실직의 악몽으로 변하고 말 것인가? 이전 글에서 나는 자유주의, 우파, 좌파 분석가들이 한결같이 제의하는 새로운 자동화담론에 관해 논한 바 있다.1 이 자동화 이론가들은 인구의 상당 부분이 임금노동의 기회를 잃을 것이기 때문에, 대대적인 기술적 실업을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의 지급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 나는 이런 과열된 담론이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실제 동향, 즉 노동에 대한 만성적 저수요에 대한 대응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자동화론자들이 제공하는 설명, 즉 끝없는 기술 변화가 일자리를 파괴한다는 설명은 잘못되었다. 지속적인 노동 저수요의 실제 원인은 1970년대 이래 산업시설 과잉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다른 어떤 대안적 성장동력도 가시화되지 않음에 따라 경제성장이 점진적으로 둔화한 데 있다. 기술에 의한 일자리 파괴가 아니라,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일자리 창출이 저하되는 바로 이 현상이 노동에 대한 국제적 수요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용 성과가 중요한 측면에서 자동화론자들의 예측과 달랐다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국제 노동시장의 역학을 분석하고 자동화론자들이 제안한 해결책, 특히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한 뒤, 이어서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탈결핍(post-scarcity)의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대안적 방법을 고려하겠다. 하지만 먼저 현재의 상황이 자동화론자들이 시사하는 임박한 대량 ‘실업’이 아닌, ‘불완전 고용’의 부단한 증가로 특징 지어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불안정 노동의 세계적 전망에 관한 조사를 보면, 부유한 엘리트들은 이 새로운 현실을 이미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더 인간적인 미래로 형세를 일변시키려면, 다수 노동자들이 노동 수요의 지속적 하락과 그에 수반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항한 투쟁이 이미 국제사회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만약 이 투쟁이 실패할 경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아마도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형태의 약간 더 높은 사회적 임금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목적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되며, 탈결핍의 지구를 출범시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1. 국제 노동시장의 역학

 

이윤 추구를 위한 기술적 약진과 일자리 감소라는 과거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기술 발전만으로 인간의 고된 노동을 완전히 극복한 적은 없다. 하지만 기술 발전이 특정 산업에서 주기적으로 일자리의 전면 파괴를 초래한 것은 사실인데, 특히 그것에 기대어 기업들이 산업 발전에 대한 오랜 저항을 무너뜨릴 수 있을 때 그러했다. 예컨대 농업은 현대적인 생산 방법에 의해 변형된 최초의 분야 중 하나였다. 15~16세기 영국의 시골에서는 인클로저 농장(enclosed farm)에서 행해진 새로운 형태의 목축업이 작물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윤작 농법과 결합되었다. 그러나 경작지의 고르지 못한 지형과 계절의 순환으로 인해 농업은 기계화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었고,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고용의 주요 원천이었다. 그런데 1940년대에 들어 인공 비료의 출시, 작물의 교배, 농기구의 기계화로 산업화된 형태의 농업 생산이 가능해졌고, 운영 원리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농장이 노천 공장과 비슷해지면서, 노동생산성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농업 생산물 수요 증가에 대한 한계를 고려하여, 농업 부문에서 곧 엄청난 속도로 노동자 감원이 이루어졌다. 1950년까지만 해도 전체 노동인구에서 농업 부문의 고용은 각각 서독 24%, 프랑스 25%, 일본 42%, 이딸리아 47%를 차지했다. 2010년에 이르러 이 모든 비율은 5% 이하가 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녹색혁명 기간 동안 산업화된 농법이 열대기후 지역에 적용되었고, 그 결과 국제 농업고용은 충격적으로 변화했다. 1983년만 해도 세계 노동자의 다수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이후 그 수치는 25%로 떨어졌다.3 20세기 국제사회에서 주요 일자리 파괴범은 ‘실리콘 자본주의’가 아니라 ‘질소 자본주의’였다. 노동시장 내부에는 농업에서 상실한 일자리의 숫자만큼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을 보장할 어떤 메커니즘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들은 여전히 산업화의 장애물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지만, 성장속도가 전반적으로 둔화되고 노동시장이 일반적으로 침체된 작금의 시대에 이러한 기술 혁신 탓에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힘든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국제 규모의 전자제품 조립, 의류·신발 업계의 기계화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이 업계가 세계적으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고용하는 부문인 데다 다른 방도로는 돈을 구할 길 없는 경제에 외환을 조성하는 부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봉제업계는 기술 현대화에 오랫동안 저항해왔다. 봉제업은 섬유를 다루는 세밀한 작업을 요하므로 기계로 조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주요 기술 혁신은 1850년대의 씽어(Singer) 재봉기였다. 그보다는 신종 산업이긴 하지만 전자제품 조립 작업도 작은 부품들의 섬세한 조작을 요하기 때문에 노동 절약형 기술 혁신에 저항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도로 기계화된 대규모 생산공정 내부에 있는 기술 정체 분야로서 이 직종들은 1960년대 세계화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소매, 의류, 전자제품 기업들은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저임금 국가의 공급자들과 계약을 맺었다. 이들 업계는 산업 공급 사슬의 첫 연결고리로서 여전히 중요하며, 그 공급자들 간의 맹렬한 경쟁에 영향을 받는다.

1990년대 이후 이런 직종의 상당 부분은 중국으로 이전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다른 나라들도 더 많은 경쟁력을 띠게 되면서 진전된 로봇공학이 기계화에 대한 이들 분야의 오랜 저항을 마침내 무너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폭스콘(Foxconn)은 저임금 국가의 전자제품 조립회사들의 경쟁을 따돌리기 위해 ‘폭스봇’(foxbot)을 배치하고 있다. 중국과 방글라데시 의류 회사들은 ‘쏘우봇’(sowbot)과 새로운 편물 기술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 기술은 신발 제조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이 이들 부문의 완전 자동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단시간에 수많은 일자리를 제거할 수 있고, 가령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더 낮은 임금의 국가들이 국제경제에 접근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4 이러한 기술 발전이 십년 후의 일이 될지 이십년 후의 일이 될지는 미지수이며, 혹은 어떤 규모로도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화의 주된 진전 없이도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 전통적인 제조업 생산방식에 IT 시스템을 결합시켜 지능형 생산체제로의 기술 혁신을 꾀하는 산업정책—옮긴이), ‘스마트팩토리’(smart-factory) 같은 기술은 연관 서비스업과의 지리적 인접성 속에서 산업 클러스터링의 이점을 증가시킬 것이고, 그 결과 제조업 일자리는 국제적으로 분산되기보다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주요 노동력 흡수 기능을 해온 부문들에서 기계화의 장애물이 극복된다면 신기술은 노동 수요를 낮추는 원인 중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을 설명하는 열쇠는 특정 부문에서 일자리 파괴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파괴가 얼마나 급속히 일어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가 사라질 때 더 넓은 범위의 경제에서 그에 상응하는 속도로 고용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핵심은 자동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생산성 증가율의 상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산업 생산 능력의 증식과 이와 연관된 자본의 과잉축적과 제조업 확장률 및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의 저하로 인한 불충분한 생산물 수요에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노동시장 침체의 주된 경제적·사회적 원인이다.

 

대규모 불완전 고용

현재의 자동화담론의 핵심에는 하바드대학 경제학자 바실리 레온티예프(Wassily Leontief)가 ‘장기적인 기술적 실업’이라고 부른 개념이 있다. 자동화와 일자리 감소의 구체적인 사례로부터 추론한 바에 따라 이 개념은 경제 전반에 걸친 현상으로 묘사된다. 에릭 브린욜프슨(Erik Brynjolfsson)과 앤드루 매커피(Andrew McAfee)는 『제2의 기계 시대』(The Second Machine Age, 한국어판 청림출판 2014)에서 인간의 수고가 ‘고래 기름’이나 ‘말의 노동’처럼 ‘오늘날의 경제에서 공짜로 제공된다 해도 더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5 언젠가 완전 자동화가 성취된다면, 그 결과 초래되는 일자리의 전면적 파괴로 인해 임금노동이 더이상 중심에 놓이지 않도록 사회생활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곧 입증될 것이다. 하지만 자동화담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노동 수요의 하락이 실제로 실업률 증가를 동반한 적이 있었던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평균실업률은 80년대와 90년대에 상승했고, 2008년의 위기를 맞아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지난 십년간 실업률은 과거의 경기 후퇴 이후보다 느린 추세이긴 해도 대체로 다시 하락했다. 이 데이터는 때로 노동 수요가 장기적으로 볼 때 하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채택된다. 오히려 요점은 노동 수요의 하락이 표현되는 형식이 실업으로부터, 측정하기가 더 어려운 갖가지 종류의 불완전 고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6 많은 논자들이 인식하고 있듯이, 우리는 ‘일자리 없는’ 미래가 아닌, ‘좋은 일자리가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즉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계속 일해야 하고, 따라서 눈에 띄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한다.’ 설령 그 일이 급여가 낮고 노동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근로조건이 형편없다 해도 말이다. 자동화론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무대 뒤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술적 실업 증가의 결과로 해석한다. 실상은 생산의 급속한 자동화는 무대 뒤든 어디서든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다.

1970년대 초 실업률이 처음 상승하고 이후 수십년간 끈질기게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각 나라 정부는 노동시장 보호정책의 약화를 추진하고 실업수당의 규모를 줄였다. 소극적 소득 지원 시스템 대신 실업자들을 다시 일하도록 만드는 ‘근로복지’ 정책이 실직에 대한 주요 제도적 대응이 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외관상으로나 숫자상으로나 오랫동안 실업 상태에 처해 있는 예가 드물다. 대신 그들은 전형적으로 파트타임, 임시직, 혹은 그밖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아 노동시장의 신참 대열에 합류한다. 더 나은 일자리를 전혀 제공하지 못하는 경제에서 별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안정성이 총노동력에 확산되는 정도는 각 나라마다 다르다. 증거자료를 가장 찾기 쉬운 미국의 경우,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고용 보호를 받지 못하며 노골적인 차별의 경우가 아니라면 마음대로 고용될 수도 해고될 수도 있다. 이처럼 실직자들은 재흡수되었지만, 임금 정체와 근로조건의 악화라는 댓가를 치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동 보호제도가 더 강한 일부 유럽이나 부유한 동아시아에서는 노동력의 중요한 부문이 실직 기간과 연관된 시장 압력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곳의 정부 전략은 노동자 내부에 소외계층이 출현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비표준’ 노동자들은 고용 보호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현실에 맞추어 임금인상 요구를 완화하지 않을 수 없다. 1985년에서 2013년 사이에 전체 고용에서 ‘비표준 고용’(non-standard employment)이 차지하는 몫이 커졌는데, 프랑스에서는 21%에서 34%로, 독일에서는 25%에서 39%로, 이딸리아에서는 29%에서 40%로 각각 증가했다. 일본에서는 ‘비정규 고용’(non-regular employment)의 비율이 1986년에 17%였다가 2008년에는 34%로 증가했고, 남한에서도 비슷한 추세가 진행되고 있다. 고용 구성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새로 제공되는 일자리들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OECD 국가에서 창출된 일자리의 60%가 비표준직이었다. 이들 국가의 노동시장은 상대적 고용 안정을 누리는 ‘표준’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과, 이런 혜택에서 소외된, 대개 젊은 층의 늘어나는 국외자 집단으로 양분되고 있다.

세계 노동자의 다수가 살고 있는 저소득 국가와 중간소득 국가에서는 ‘비표준’ 노동이 언제나 표준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세계적으로 실직 노동자의 겨우 5분의 1 정도가 실업수당을 받는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실직자들은 가급적 빨리 수입원을 찾아야 하고, 그 결과 이들 지역에서 측정된 실업률은 구직 기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겨우 5. 3%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시장의 젊은 신참 대열에 합류하여 비공식적으로—보통 노동자 5인 이하의 비법인 영세기업에서—일한다. 2016년, 저소득과 중간소득 지역의 고용 가운데 거의 70%가 비공식 고용으로 분류되었다.7

 

후기 산업시대의 침체

자동화된 미래로의 기술 발전과 연관된 실업의 급격한 증가 대신, 우리는 경제 침체의 악화로 인한 불완전 고용의 만연을 목도하고 있다.8 사람들은 낮은 노동 수요로 인해 실직 상태에 놓인다기보다 정상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 정상 근로조건보다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노동인구에서 탈락한다. 그래서 극심한 고용 불안정은 정체된 경제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으며, 이런 고용 불안정은 숱한 SF에서 잉여인간들이 거주하는 디스토피아로 재현된다.9 불완전 고용이 노동시장의 일반적 특징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해줄 일반적 형식은 없는 것이다. 60년대 중반 이후 줄곧 노동잉여가 국제적으로 확산되자, 다국적기업들은 노동시장의 차익거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산노동을 저가에 얻기 위해 공급자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얻으려 했고, 그러자 공급자들은 공급과잉의 국제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저가의 노동력을 이용했다. 산업체들은 저임금 국가에서뿐 아니라, 고임금 국가에서도 고용 불안을 이용해 다층적 계약을 체결하거나,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를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국제 노동인구의 약 17%만이 제조업에 종사하며, 여기에 광업, 운송, 공익사업 종사자 5%가 추가될 뿐이다.10 따라서 세계의 불완전 고용 노동자 대다수는 결국 매우 잡다한 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게 되는데, 이 서비스 부문이 고임금 국가의 경우 전체 고용의 70~80%를 차지하며, 이란, 나이지리아, 터키, 필리핀, 멕시코,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자의 대다수도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후기 산업 경제—이제 마침내 세계적인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는 대니얼 벨(Daniel Bell)이 1973년에 처음으로 그 출현을 예측한 경제와는 차이가 있다. 즉 연구자와 테니스 강사, 미슐랭 등급 요리사의 경제가 아닌, 골목 이발사, 가사도우미, 과일 노점상, 월마트 상품 진열 담당자가 주류를 이루는 경제다. 1960년대 초, 프린스턴대학의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William Baumol)이 기술한 바 있는, 서비스업 고용 증가의 기본 유형을 보면 왜 이 부문의 불완전 고용이 오늘날의 경제에서 그토록 주된 특징을 이루는지—또 자동화론자들의 설명이 왜 부적절한지—해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보몰은 서비스업의 기계화 및 생산성 증가율이 산업 부문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서비스 부문의 고용 증가를 설명했다.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고용 또한 증가하는데, 그 증가량이 거의 같다. 이와 달리 제조업에서는 대개의 생산물 증가가 고용 상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도매업처럼 어떤 서비스업은 급속한 생산성 증가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전 부문에 걸친 지속적인 생산성 증가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서비스업은 수요 증가를 위한 가격 효과—즉 생산성 증가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고, 그럼으로써 수요가 늘어나는 효과—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서비스 부문의 고용은 느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해야 한다. 보몰이 보여주었듯이, 서비스 부문의 가격은 ‘비용 질환’(cost-disease)을 앓고 있다. 즉 굼뜬 생산성 증가율로 인해 서비스가 상품에 비해 점점 더 비싸진다는 뜻이다.11 따라서 서비스 부문의 수요 증가는 소득효과, 즉 경제 전반에 걸친 소득 증가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산업 성장동력의 노후화와 함께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이 저하함에 따라 서비스 부문의 고용 성장속도도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진국 경제성장의 둔화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부문의 고용은 특정 저임금·불안정 직종에서 빠르게 늘어났다. 불완전 고용의 논리가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도 노동자들에게 더 적게 지불함으로써, 혹은 빈약하게나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얻어진 생산성 증가에 비례하는 임금 상승을 억누름으로써, 이들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는 것—그럼으로써 수요를 확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동일한 원리가 자기고용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함으로써, 소득을 희생하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 부문은 노동자의 임금이 최종 가격에서 비교적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에 초착취(super- exploitation)를 통한 일자리 창출의 최적지이다. 특히 저소득 혹은 중간소득 국가에서 사람들이 퇴행적 전략을 통해 스스로 일자리를 마련하면서, 많은 서비스업 생산성 증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불완전 고용이 증가함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득 증가가 평균 수준에 맞추어 억제되는 한에서만 일을 할 수 있다.12 그 결과, 실제 임금의 상승과 생산성 수준의 상승 간 격차가 커지면서, G20 국가에서 지난 50년간 9%의 소득이 노동소득에서 자본소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1980년에서 2000년대 중반 사이에 소수의 자산 보유층이 점점 더 큰 몫의 소득 증가분을 획득함에 따라, 노동소득 비율이 5% 하락했다.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상 통계수치가 나타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데, 이는 가장 큰 급여 인상분이 관리자들에게 돌아가면서 노동소득의 분배 자체가 더 불평등해졌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사이에 노동생산성이 평균임금(average wage)보다 더 빨리 상승했고, 평균임금은 다시 OECD 국가 전반에 걸쳐 중위임금(median wage)보다 더 빨리 상승했다.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초착취의 기회도 늘어난다. 더 부유한 가정에서, 스스로 할 법한 일을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해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오로지 노동가격의 극심한 차이 때문에—합당한 일이 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세는 자동화론자들이 예상하는 노동시장의 기능 정지라는 종말론적 위기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대신 경기 하락기 내내 실업이 급격히 증가한 뒤 불완전 고용과 불평등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로봇의 부상』(Rise of the Robots)에서 마틴 포드(Martin Ford)가 우려한 최악의 공포는 비자발적 실직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경제체제가 결국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을 테지만, 사실 경제체제는 적응했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표현했듯이 ‘후기 자본주의의 인간 분류 심사’는 ‘이미 이루어졌다’.13 조율된 정치적 행동으로 저지하지 않는다면 향후 수십년간 같은 현상이 더 많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즉 국제시장에서 농업과 공업 생산품의 용량 초과로 인해 노동자들이 이들 분야에서 계속 밀려나 서비스업으로 몰려들 것이고, 서비스업이 세계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52%에서 세기 중반에 이르면 70~80%로 뛰어오르게 될 것이다.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이 낮은 상태에 머물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서비스 부문은 오직 소득불평등을 증가시킴으로써만 실직자들과 노동시장의 신참들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소득 증가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몫이 전체 인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몫보다 훨씬 적은 상태가 유지될 것이라는 뜻이다. 토마 삐께띠(Thomas Piketty)와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듯이, 세계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은 1980년에서 2016년 사이에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아주 근소한 양의 증가일 뿐이지만) 두배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증가는 전체 소득 증가분의 겨우 1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반면 가장 부유한 1%는 같은 기간 동안 그 두배 이상—27%—을 손에 넣었다.14 노동 부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역량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경제적 불평등의 제어는 복지국가 제도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들 제도는 장기적 경기 침체에 직면해 힘없이 무너지곤 했다. 주기적으로 긴축에 시달리는 활력 없는 경제에서 사람들은 새롭고 해방적인 사회적 기획을 중심으로 단결하기보다, 경기 침체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악화를 노동인구의 취약 부문—이민자, 여성, 인종적·종교적 소수자—탓으로 돌리며 비난하기 쉽다.

 

 

2. 묘책?

 

자동화담론은 지속적인 노동 저수요와 연관된 세계경제의 일련의 염려스러운 동향을 확인해준다. 오랜 시간 진행된 이러한 추세에 수반되는 사회적 위기는 통계수치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경제에 의미있게 참여할 수 없고, 자본주의사회의 불리한 조건 아래일망정 경제활동이 제공하는 힘의 감각과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고용 불안과 불평등으로 증폭되는 원자화로 인해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경제민족주의의 호소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자동화론자들은 이러한 위험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노동 수요 하락의 음울한 조짐은 관세장벽이나 직업 훈련시설로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는 현 시대의 재앙에 비추어 평가해볼 때, 그처럼 틀에 박힌 문구는 별 희망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자동화론자들은 근본적인 재고를 시도한다. 이 점에서 자동화는 지구온난화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사람들이 지구온난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 다른 경우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사회생활의 기본 구조에 대한 수정을 기꺼이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를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규정하면서, 자동화론자들은 노동계에 닥친 위기를 해소할 근본적인 방법을 상상한다. 그들의 해결책은, 내가 주장해왔듯이, 원인 규명에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고려할 가치가 있다.

자동화론자들의 주요 제안은 보편적 기본소득, 즉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소득이다.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책정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빈곤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이다. 고용 불안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안전장치를 공급할 것이고, 이는 낮은 노동 수요와 대량 불완전 고용의 시대에 중요한 개혁조치이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자동화론자들은 종종 보편적 기본소득을 전지구적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중립적—좌파와 우파 모두에 매력적인—정책 도구로 제시한다. 마치 녹색혁명 기술이 국제적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같은 기술관료적 중립성은 환상에 불과하다. 실행되는 방식에 따라 보편적 기본소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방향들은 대개 우리를 인간 번영의 세계로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5

보편적 기본소득의 제안은 자동화담론 출현 이전에도 존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원을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에게서 찾는데, 그는 이미 1797년에 모든 개인에게 성년 나이에 도달하자마자 일괄 급여를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페인은 이 성년 보조금을 정통 로크주의(Lockean) 노선에 입각해서 정당화했다. 즉 보조금 덕택에 모든 사람이 시장 교환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사적 소유권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확충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비슷한 이유로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대체하는 형태로 역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주장했다. 즉 빈곤 감소를 목표로 공적 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각 개인에게 빈곤 한계선 위로 올라가기에 충분한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17 오늘날 보편적 기본소득을 극구 찬미하는 신자유주의의 주장은 찰스 머리(Charles Murray)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서구사회의 쇠퇴를 막아주고, 그 지친 영혼들을 기독교 신앙과 진정한 일부일처제 결혼으로 귀의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현금—한달에 1천 달러—은 복지국가 체제의 대부분을 해체함으로써 조달될 것이다.18 머리의 보편적 기본소득 옹호는 복지국가의 제도들이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영혼 파괴적—개인적 의미 생성의 핵심 원천을 국가에 양도하게 하므로—이라는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빈곤이나 약물중독 같은 사회문제들은 그것이 발생한 공동체에서 ‘자발적 단체들’(voluntary associations)을 통해 직접 다루어야 하며, 보편적 기본소득이 아무도 굶지 않을 만큼 충분한 사회적 임금을 공급함으로써, 그리고 현재 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그런 단체들을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리의 비전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은 낮은 수준에 고정되어 있을 것이다. 소득 재분배를 위한 더이상의 노력은 차단될 것이며, 따라서 불평등은 계속 극단화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한 머리의 제안은 지속적인 노동 저수요를 특징으로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사회가 가난한 구성원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관한 불온한 비전이다. 많은 우파 자동화담론의 정책 제안 저변에 그의 강령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보편적 기본소득은 그 실행 면에서 좌파의 대안이기보다 우파적 판본이 될 위험이 있다.

좌파의 보편적 기본소득 제안은 사회적 지급(social provision)을 유지하거나 확장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제안은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요할 것이다. 아마도 보편적 기본소득의 가장 존경할 만한 옹호자일 필리프 판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는 중도좌파적 평등주의의 입장에서, 복지국가를 해체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제공하기를 원한다. 그와 야니크 판데르보흐트(Yannick Vanderborght)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per capita)의 25%—2019년 미국에서는 1인당 1년에 약 15,500달러—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이 목표를 좀더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지급을 아주 ‘낮은 수준’에서 그리고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시작할 것을 권한다. 즉 보편적 기본소득 국가로의 ‘선택적 이민’을 막기 위해 지역사회 봉사나 자격 제한 같은 ‘참가 조건’이 있을 것이다. 적은 양이나마 매달 지급되는 급여가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더 높은 수준의 보편적 기본소득, 혹은 대안으로 더 높은 임금을 강력하게 추진할 토대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19

다른 한편, 닉 스르니첵(Nick Srnicek)이나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 같은 반자본주의 자동화론자들에게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완전실업—임금노동을 넘어선 삶—으로의 고통 없는 전환을 촉진할 한층 급진적인 가능성을 연다. 자동화가 진전되면서 보편적 기본소득의 가치는 이 대안적 분배구조를 통해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평등의 관점에서 급진적 진전이다. 『미래의 창조』(Inventing the Future)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은 완전 자동화된 세계로의 이행을 가속화할 방법으로 제시되는데, 왜냐하면 최저소득의 하한선이 높아지면 노동자들은 일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는 고용주들에게 일자리를 유쾌한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자동화해서 아예 없애버릴 유인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0 그리하여 보편적 기본소득은 후기 자본주의 경제를 안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탈결핍의 세계, 즉 ‘경제 문제’가 해결되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열정을 추구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 이 지점을 넘어서면, 주된 질문은 인류의 궁극적 지평에 관한 것이 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케인즈(J. M. Keynes)의 상상처럼 취미에 탐닉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우주선을 만들고 별을 탐험하는 것을 의미하는가?21

 

한계

평등주의의 형태를 띤 보편적 기본소득은 매력적인 측면이 많다. 최소한의 순소득 재분배조차, 무엇보다 가난이 주는 스트레스와 이와 연관된 정신적·육체적 질병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대로 환영받을 수 있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전지구적 탄소세(carbon tax)와 결합된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직에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한편, 기후변화를 경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22 하지만 기술관료적 해결책에서 해방적 기획으로 진화하려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그 이상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즉 개인들에게 극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과연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보편적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주장의 근거로 삼는 공동체의 번영을 보자.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 자체로 공동체가 활성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맑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가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주장하듯이, 현금경제의 확장은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를 녹여 공중분해하는 경향이 있다. 돈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는 공동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필요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은 그들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능력을 침식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교통, 오락, 섭생이 이러한 시장경제의 내적 논리에 맞게 완전히 개조되었다. 사람들은 일터를 오가며 차량 안에서—누군가와 함께지만 근본적으로 혼자—맥도날드를 먹고, 폰으로 고양이 동영상을 보며 하루에 몇시간씩 보낸다. 모두를 원자화된 존재로 축소하도록 이미 설계된 경제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대치할 때 노동자의 역량을 강화해줄 것이라는 주장은 또 어떤가? 이 주장은 말 앞에 수레를 놓는 격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를 바꿀 만큼 충분히 큰 보편적 기본소득을 얻으려면, 노동자의 역량이 먼저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려는 설령 보편적 기본소득이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싸울 더 큰 능력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더 광범위한 해방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실행 가능한 통로를 제시할지는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좌파적 비전의 토대로 기능하려면 자동화론자들의 분석이 옳아야 한다. 즉 오늘날의 지속적인 노동 저수요가 경제 변화의 빠른 속도와 맞물린 생산성의 급속한 증가에서 기인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회가 직면할 주된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일 것이며, 이 불평등은 점점 더 많은 소득을 임금의 형태가 아닌, 보편적 기본소득 급여의 형태로 분배함으로써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현재의 노동 저수요가 내가 주장한 바대로 전지구적 과잉 생산 능력과 위축된 투자—전반적인 경제성장률 하락을 몰고 온—의 결과라면, 그와 같은 분배 투쟁은 곧장 노동과 자본 간의 제로썸 갈등이 될 것이며, 그 결과 더 자유로운 미래를 향한 진보는 아예 막히거나 최소한 그 속도가 현격히 늦추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자산 소유자들로부터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을 계획이 필요함에도, 보편적 기본소득의 제안자들은 생산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을 어떻게 줄일지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얻는 소득과 그들이 하는 일의 양을 분리하려는 장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소득과 자산 사이의 관계를 바꿀 어떤 일도 하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신용대부를 통한 이자, 땅과 집의 임대로부터 발생하는 임대료, 사업을 경영함으로써 얻는 이윤이 전체 소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시스템에 우리를 계속 묶어둘 것이다. 이윤 동기가 계속해서 경제의 원동력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투자 결정 능력을 보유할 것이고 이 투자 결정이 경제의 성장 혹은 위축을 지속적으로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은 ‘자본 파업’(capital strike)이라는 무기, 즉 투자 회수와 자본 도피를 통해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자본소유자의 특권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23 지난 40년간, 악화되는 과잉생산 능력과 둔화되는 경제성장의 환경 속에서, 자본가들은 정당들이 그들의 요구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이 무기를 사용하겠다고 협박해왔다. 즉 사업 규제의 완화나 노동법의 이완, 그리고 경제위기시 사기업 구제금융 조치와 공공 긴축 같은 요구들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세상의 도래를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을 이용하기 원하는 좌파라면 자체적 마이드너 플랜(Meidner Plan, 1951년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 소속 경제학자 예스타 렌Gösta Rehn과 루돌프 마이드너Rudolf Meidner가 입안한 경제·임금·복지 정책 모델로 렌-마이드너 모델이라고도 한다. 물가안정, 완전고용, 경제성장, 소득균형의 네가지 목표를 골자로 한다—옮긴이)을 제시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하여 자산 소유권의 전체 사회로의 계획된 이전을 거쳐, 생산수단의 점진적 사회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24 문제는 스웨덴에서 원조 마이드너 플랜을 폐기한 이유가 바로 1970년대 위기 당시 자본의 투자 회수 위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계급 조직이 훨씬 약하고 경제성장이 저조한 오늘날 그러한 계획은 실현되기가 한층 더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자본파업이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재빨리 밀어넣을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목표를 더 높게 세울 필요가 있다. 즉 생산의 정복이라는 목표 말이다. 자본가들로부터 투자결정을 통제하는 능력을 빼앗고, 자본파업을 무력화하는 것이 탈결핍의 미래를 향한 집단적 전진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이다.

 

 

3. 변화의 주체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탈결핍의 세계에 자동적으로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대수명, 교육 수준, 도시화 정도가 지난 세월 극적으로 상승했지만, 여전히 매우 불평등한 상태이다. 다른 한편,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조차 대개의 사람들은 너무 원자화되고, 물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집단적 역량에서 소외되어 가능성이 위축되어 있다. 완전한 자동화가 꿈으로도 또 악몽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내재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탈결핍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교육과 보건의 기회가 극적으로 넓어지고, 재생산에 필요한 일을 협력 분담함으로써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고, 산업이 부분적으로 사회화된다면 그때는 기본소득이 인간의 자유를 지향하는 더 큰 계획의 한 부분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25 그러나 탈결핍 세계로 가는 길은 전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다면, 도중에서 길을 잃기가 쉽다.

탈결핍의 세계가 기술적 진보나 기술관료적 개혁의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면, 그 세계는 사회생활의 근본적인 재구조화를 추진하는 사회운동의 압력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동화담론의 가장 실망스러운 측면 중 하나는 기존의 사회적 투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다. 1985년에 쓴 논문 「공산주의로 가는 자본주의의 길?」(A Capitalist Road to Communism?)에서 로버트 판데르 빈(Robert van der Veen)과 필리프 판파레이스는 ‘급속한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가 ‘경제성장의 제약’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간행동을 통해 사회변화를 요구하고 실행할 동력을 ‘조만간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30년 후에 닉 스르니첵과 알렉스 윌리엄스는 실제로 형성된 동력이 단순한 ‘서민정치’(folk politics)일 뿐이라며 절망한다. 즉 사람들이 현대 세계의 증가하는 복잡성에 반발하여, 얼굴을 맞대고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지역공동체의 단순성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26

오늘날 사회적 투쟁의 해방적 잠재력에 대한 절망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거칠고 사나운 신자본주의의 조류를 바꾸려면 대규모의 끈질긴 대중 동원이 필요함에도, 이러한 과업을 떠맡을 규모와 힘을 가진 유일한 운동—역사적 노동운동—은 완전히 패배했다. 파업과 노동자 시위는 주로 방어적이다. 노동자들은 대항하기 어려운 자본의 힘, 즉 결코 끝나지 않는 경기둔화에 대응하여 긴축과 노동유연성과 사유화를 더욱 강력하고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자본의 공세 속도를 늦추기 위해 싸운다. 노동운동은 경제성장이 둔화하는 상황에서 기술에 의해 유도되는 일자리 상실에 어떻게 대응할지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이 표현하듯, “무질서한 자본주의는 자신뿐 아니라 반대 세력도 무질서하게 만든다”.27 이런 이유로 장기적 경기침체로의 오랜 하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노동자계급 조직은 부활하지 못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2008년의 위기 이후 십여년간 계속해서 정치적 정체 상태에 금이 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수십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파업과 사회운동의 물결이 중국에서 북아프리카, 아르헨띠나에서 그리스, 인도네시아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5개 대륙에 걸쳐 일었다.28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 수요의 장기적 하락의 음울한 조짐—식료품, 에너지, 운송 가격의 급상승은 물론 불평등, 고용 불안정, 정부의 부패, 긴축 조치—에 항의하며 작업 중지, 점거, 봉쇄, 폭동, 시위에 다시 합류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폭발적인 운동들은 완강한 정부를 물러서게 할 만한 지구력을 아직까지는 결여하고 있으며 역전과 패배를 겪어왔다. 그럼에도 이 운동들은 정치적 가능성을 넓혀왔으며, 새로운 세대의 투사들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우리 시대는 19세기 중엽과 같은—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을 배출하는 동시에 해방적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울 새로운 구성원들을 만들어낸—시대인지도 모른다. 현 시기의 객관적 특성은 다음의 가설, 즉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세계 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가장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가장 도시화되어 있고,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인구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배울 만큼 배우고 기동성 있는 사람들이 해수면이 상승하는 지구에 살며 ‘불평등이 심화되고 성장이 정체된 미래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29 하지만 이 현실이 우리를 더 자유로운 미래로 더 가까이 데려갈지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현 시기의 사회운동이 더 영속적인 편재로 뿌리를 내린다 할지라도, 과거의 노동운동과 유사한 형태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와 그 과거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있다. 노동운동은 긴 산업화 기간에 발생한 반면, 우리는 후기 산업시대의 침체기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운동은 산업화의 종말이 불러온 결과를 둘러싼 투쟁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산업 생산에 대한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의존이나 공장 노동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하락했다는 것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미래 질서의 대표자로 나설 역량이 이제는 없다는 뜻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산업화되었고, 제조업 노동자들이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투쟁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남한, 브라질 같은 나라들조차 서비스 부문이 과반을 차지하는 경제가 된 지 오래다.

노동인구 구성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오늘날의 사회운동을 본질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만들 것이다. 자동화담론은 이 추세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핵심산업에서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이 예전보다 훨씬 적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맑스가 예측했듯이, 자연력과 기계 모두를 움직이는 거대한 하부구조에 구현된 과학기술적 지식이 인간 노동을 밀어내고 주요 생산력의 자리를 차지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버려졌고, 노동생산성이 느리게 증가하는 장래성 없는 서비스업에 깨어 있는 삶의 많은 부분을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생산성 증가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을 것인가를 둘러싼, 이전 세대의 노동자를 고무시켰던 역동적 투쟁은 발생하지 못한다. 오늘날 생산비용을 어떻게든 줄이려는 자본의 강박은, 대개의 노동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급여의 인상 없이 노동강도를 높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논자들은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아무리 큰 불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밀어붙이는 데 필요한 생산현장에서의 힘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밝혀지고 있듯이, 낭비와 재고를 최소화하기 위한 적시생산(just-in-time production) 방식의 세계에서는 주요 도시 내부 혹은 주변의 유통을 봉쇄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술로 입증될 수 있다. 초기 사례로 아르헨띠나의 삐께떼로(piquetero) 운동을 들 수 있는데, 이 운동에서 실업 노동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의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실업수당의 개선을 요구했다. 2011년 이래 이 전술은 미국, 프랑스, 이집트와 그밖의 지역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차용되어왔다.

주요 투쟁 과정 중에 열릴 수 있는 자율적 공간에서 사회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집회는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개방된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형태의 강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문제에 대해 모두가 발언권을 갖는다는 공유된 인식이 있다. 점거농성장에서, 그리고 봉쇄의 최전선에서 실제로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아낀다. 이들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봐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는 대개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어지럽히려 하는 정상적인 삶의 경로에서 구매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같은 노력이 그저 더 단순한 삶에 대한 집착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단발적인 데 그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일반화된 세상, 경계와 한계가 더 적게 존재하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규모가 아무리 커진다 해도 이들 시위는 임금 정체와 고용 불안, 복지국가 후퇴의 압력 아래 극심하게 열악해진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재생산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이 가진 한계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즉 남아 있는 산업 핵심부문에서 파업을 조직하거나 파업에 합류할 때조차도 ‘재생산’의 층위에서 ‘생산’의 층위로 상승하지 못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의 와중에 이들 운동이 아무리 큰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우리 시대의 대규모 소요 시위는 전혀 다른 세상에 대한 비전—자본주의 사회의 하부구조가 집단적인 통제하에 놓이고, 노동이 재조직되고 재분배되며, 상품과 서비스의 무상분배에 의해 결핍이 극복되며, 실존적 안정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열리면서 인간의 역량도 상응하여 확대되는 비전—을 아직은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투쟁이 이러한 역사적 과업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면, 인간됨이 의미하는 바의 새로운 종합(synthesis)으로 약진하지 못할 것이다. 가난과 억만장자가 없고, 나라 잃은 난민과 수용소가 없으며, 꿈꾸기는 고사하고 거의 단 한순간도 쉴 틈 없는 고된 노동으로 소모되는 삶이 없는 세상에서의 인간됨의 새로운 의미 말이다. 비전이 없는 운동은 맹목적이다. 하지만 운동이 없는 이상주의자는 훨씬 더 심각하게 무력해진다. 탈결핍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사회적 투쟁이 없다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주의자는 기술 유토피아의 신비주의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번역: 이종임(李鍾姙)/영문학 박사, 네브라스카대학 영문과 강사

 

 

  1. Aaron Benanav, “Automation and the Future of Work 1,” NLR 119, Sep- Oct 2019.
  2. 여기서 논의되는 자동화론자와 그들의 글은 다음과 같다. Eric Brynjolfsson and Andrew McAfee, The Second Machine Age: Work, Progress and Prosperity in a Time of Brilliant Technologies, London 2014; Martin Ford, Rise of the Robots: Technology and the Threat of a Jobless Future, New York 2015; Carl Frey and Michael Osborne, “The Future of Employment: How Susceptible Are Jobs to Computerization?,” Technological Forecasting and Social Change Vol.114, January 2017; Andrew Yang, The War on Normal People: The Truth About America’s Disappearing Jobs and Why Universal Basic Income Is Our Future, New York 2018; Andy Stern, Raising the Floor: How a Universal Basic Income Can Renew Our Economy and Rebuild the American Dream, New York 2016; Nick Srnicek and Alex Williams, Inventing the Future: Postcapitalism and a World Without Work, London and New York 2015; Nick Dyer-Witheford, Cyber-Proletariat: Global Labour in the Digital Vortex, London 2015; Peter Frase, Four Futures: Life After Capitalism, London and New York 2016; Manu Saadia, Trekonomics: The Economics of Star Trek, San Francisco 2016; Aaron Bastani,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 A Manifesto, London and New York 2019; 그리고 Nick Dyer-Witheford et al., Inhuman Power: Artificial Intelligence and the Future of Capitalism, London 2019도 참조.
  3. 통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Groningen Growth and Development Centre, “10-Sector Database,” updated January 2015; FAO, FAOSTAT ; ILO, Key Indicators of the Labour Market, 9th edition, 2015.
  4. Jon Emont, “The Robots Are Coming for Garment Workers. That’s Good for the US, Bad for Poor Countries,” WSJ 2018. 2.16.
  5. 다이어위더포드는 ‘디지털 자본이 더는 요구하지 않아 깊어지는 실업자층’에 관해 말한다; Dyer-Witheford, Cyber-Proletariat, 3면. 다른 한편 양은 ‘점점 커지는 비자발적 영구 실직자(the permanently displaced) 집단’에 대해 언급한다; Yang, The War on Normal People, xli면.
  6. 미국에서의 실업 회복의 이론과 역사에 관해서는 Nir Jaimovich and Henry Siu, “Job Polarization and Jobless Recoveries,” NBER Working Paper no.18334, August 2012, revised November 2018을 보라. 실업을 노동시장 건전성의 척도로 보는 시각의 한계에 대해서는 David Blanchflower, Not Working: Where Have All the Good Jobs Gone?, Princeton 2019를 보라. 경제 범주로서의 실업의 기원에 관해서는 Michael Piore, “Historical Perspectives and the Interpretation of Unemployment,”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vol.25 no.4, 1987을 보라.
  7. ILO의 Key Indicators of the Labour Market; 그리고 Women and Men in the Informal Economy: A Statistical Picture, 3rd edn, Geneva 2018, 23면을 각각 참조하라.
  8. 일부 자동화론자들은 불완전 고용을 현대 경제의 공통적 특징으로 인지하지만, 기술 변화의 외견상 활력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를 들면 Stern, Raising the Floor, 185면; 그리고 Yang, The War on Normal Peole, 79~80면을 보라.
  9.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비전의 예로는 알폰소 꾸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2006),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2009)과 「엘리시움」(2013), 그리고 뻬드로 아길레라가 제작한 브라질의 TV시리즈 『3%』(2016) 등을 들 수 있다.
  10. ILO, Key Indicators of the Labor Market. 이 17% 중에서도 꽤 큰 비율의 노동자들이 비공식적으로 고용되어 국내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집 안 혹은 뒤뜰에 마련된 자그마한 작업장이나 주물공장에서 벽돌, 담배, 자물쇠, 구두 등을 생산한다.
  11. 보몰에 따르면, 서비스업의 가격이 점점 더 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상 제조업의 가격 하락 때문이다. 서로 다른 노동생산성 증가율에 의해 상대가격의 변화가 결정된다는 이론은 노동가치이론을 뒷받침하는 근원적인 통찰이었다. Adam Smith, Wealth of Nations, New York 2000, 73~74면 참조.
  12. 데이비드 어터와 애나 쌜러먼즈가 자동화담론을 비판하면서 주목하듯이, ‘비자발적 실직(labour displacement)이 반드시 고용이나 노동시간, 임금의 하락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임금 산정치—즉 노동시간과 시급의 산물—가 부가가치보다 더 느리게 상승함에 따라’ 노동자계급을 상대적으로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Is Automation Labour—Displacing? Productivity Growth, Employment and the Labour Share,” Brookings Papers on Economic Activity, 2018, 2~3면.
  13. Ford, Rise of the Robots, 219면; Mike Davis, Planet of Slums, London and New York 2006, 199면.
  14. Facundo Alvaredo et al., eds, World Inequality Report 2018, Cambridge 2018, 52면. 가장 빈곤한 50%의 소득 증가분 일부는 측정이 무척 어려운, 도시의 높은 생활비용으로 소비되었다. 도시화는 같은 기간 39~54% 증가했다.
  15. 이 점은 Dyer-Witheford, Cyber-Proletariat, 185~86면; Srnicek and Williams, Inventing the Future, 127면; Annie Lowrey, Give People Money: How UBI Would End Poverty, Revolutionize Work and Remake the World, New York 2018, 130면에서 인식된다.
  16. 토머스 페인의 『토지 정의』(Agrarian Justice, 1796)에 관해서는 Philippe van Parijs and Yannick Vanderborght, Basic Income: A Radical Proposal for a Free Society and a Sane Economy, London 2017, 70~72면을 보라.
  17. Milton Friedman, Capitalism and Freedom, London 1962, 191~95면. 또한 Friedrich Hayek, Law, Legislation and Liberty vol.3, London 1979, 54~55면 참조.
  18. Charles Murray, In Our Hands: A Plan to Replace the Welfare State, Washington DC 2016, 11~15면; Coming Apart, New York 2012. 머리의 지적 궤적에 대해서는 Quinn Slobodian and Stuart Schrader, “The White Man, Unburdened,” Baffler no.40, July 2018을 보라. 보편적 기본소득의 자유주의 옹호자들은 물론 좌파 옹호자들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Brynjolfsson and McAfee, Second Machine Age, 234~37면; Ford, Rise of the Robots, 262~63면; Darrell West, The Future of Work: Robots, AI and Automation, Washington DC 2018, 99~100면; Annie Lowrey, Give People Money: How UBI Would End Poverty, Revolutionize Work and Remake the World, New York 2018, 128~30면 참조. 앤디 스턴은 심지어 머리와 마틴 루서 킹의 대화까지 허구로 구성하여 서술한다; Raising the Floor, 202~203면.
  19. Van Parijs and Vanderborght, Basic Income, 11~12, 214, 220~24, 127~28면을 보라. 또한 Erik Olin Wright, How to Be an Anti-Capitalist in the 21st Century, London and New York 2019, 74~75면도 보라. 이러한 주장의 이전 형태로는 Stanley Aronowitz et al., “The Post-Work Manifesto,” in Stanley Aronowitz and Jonathan Cutler, eds, Post-Work: The Wages of Cybernation, London 1998을 보라.
  20. Srnicek and Williams, Inventing the Future, 117~23면. 이러한 주장의 근원적 형태로는 Robert J. van der Veen and Philippe van Parijs, “A Capitalist Road to Communism,” Theory and Society vol.15 no.5, 1986을 보라. 또한 Frase, Four Futures, 54~58면도 참조하라.
  21.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in Essays in Persuasion, London 1963, 366~67면; West, The Future of Work, 83~88면. 또한 Saadia, Trekonomics; Iain M. Banks’s Culture Series도 참조. ‘완전 자동화된 호화 공산주의’의 밈(meme)은 이러한 매력적인 비전을 대변한다.
  22. Alyssa Battistoni, “Alive in the Sunshine,” Jacobin 2014.1.12; Van Parijs and Vanderborght, Basic Income, 227~30면.
  23. James Crotty, “Post-Keynesian Economic Theory: An Overview and Evalu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vol.70 no.2, 1980, 25면; Adam Przeworski, “Social Democracy as Historical Phenomenon,” NLR I/122, July-August 1980, 56~58면; Jonathan Levy, “Capital as Process and the History of Capital,” Business History Review vol.91 no.3, 2017을 참조.
  24. Bertram Silverman, “The Rise and Fall of the Swedish Model: Interview with Rudolf Meidner,” Challenge vol.41 no.1, 1998을 참조.
  25. 대부분의 보편적 기본소득 이론가들은 결국 이 점을 시인하게 된다. 예컨대 Van Parijs and Vanderborght, Basic Income, 246면 참조.
  26. Van der Veen and Van Parijs, “A Capitalist Road to Communism,” Theory and Society vol.15 no.5, 1986, 652~53면; Srnicek and Williams, Inventing the Future, 9~13면.
  27. Wolfgang Streeck, “How Will Capitalism End?,” NLR 87, May-June 2014, 48면.
  28. 이러한 운동을 총괄적으로 평가하려고 시도한 텍스트로는 Paul Mason, Why It’s Still Kicking Off Everywhere: The New Global Revolutions, London and New York 2013; Manuel Castells, Networks of Outrage and Hope: Social Movements in the Internet Age, 2nd edn. Cambridge 2015; Zeynep Tufekci, Twitter and Tear Gas: The Power and Fragility of Networked Protest, London 2017; Endnotes, “The Holding Pattern,” Endnotes 3, 2013; 그리고 Göran Therborn, “New Masses?,” NLR 85, Jan-Feb 2014를 보라.
  29. Paul Mason, Postcapitalism: A Guide to Our Future, London 2015,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