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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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국제여맹, 냉전의 동토에 묻힌 평화의 이름

 

 

김귀옥 金貴玉

한성대 교수, 사회학 free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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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5일 독일 엘베강 연안, 미군과 소련군의 극적인 만남은 연합국의 최종 승리를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세계적 전쟁으로 신음하던 세계 인민들과 군인들이 전쟁의 공포와 고통에서 해방될 것을 예고했다. 나아가 국제연맹(United Nations)의 탄생을 낳았다. 좌우의 화해와 연대를 기대케 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간 전쟁과 파시즘으로 참혹한 시련을 겪었던 프랑스 여성들이 다시는 비극을 겪지 않도록 국제 여성평화 단체를 만들자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1945년 11월 빠리에 “프랑스 여성들의 문제의식에 공명한 40개국 850여명의 여성들이 운집했”다. 성공적인 여성대회는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평화를 핵심 모토로 내세운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이하 ‘국제여맹’)의 창립으로 이어졌다.(『냉전의 마녀들』, 307면) 또한 식민주의적 참혹상에 놓여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여성들이 가세함으로써 국제여맹은 반전평화, 반파시즘은 물론 반식민주의와 제3세계 여성해방을 모토로 삼게 되었다. “당시 국제여맹은 산하 조직 내에 9100만명의 여성회원들을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여성단체로서, 유엔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296면)

그러나 한국의 여성사에서 국제여맹의 자리는 없다. 일본의 ‘일본민주부인협의회’(현 일본부인단체연합회)는 국제여맹에 가입했으나, 반미활동으로 간난신고를 겪었다고 한다. 더욱이 1954년 국제여맹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파견한 문제로 유엔 내에서 모든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한국의 여성단체들 사이에서 국제여맹은 기억조차 되고 있지 않다.

내가 국제여맹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북측 자료에서 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 등의 가학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여맹이 북측을 방문했던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보고서를 남겼다는 사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머리에서 적색경보(red alert)가 울렸다. 당시 냉전의 성역을 건드리며 근근이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연구에서 적색 등이 켜지면 인생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고개를 들면서 결국 스스로 학문의 자유를 누르고 자기검열을 하는 비굴함으로 진실의 문을 열 기회를 닫았다.

학문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연구자로서도 냉전에 맞서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금단의 열매를 앞에 두고 ‘저건 신 포도야’라고 되뇌었던 나의 비굴함을 한방에 훅 날려버린 연구가 2021년에 드디어 나타났다.

김태우 교수가 펴낸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여맹의 1951년 보고서와 김태우 교수의 다년간의 연구가 결합된 8개의 장은 시간과 주제 별로 집필되었다. 왜 국제여맹이 한국전쟁 와중의 북한 지역을 조사하게 된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북한의 요청이 있었으나 무엇보다 제3세계 고통의 실체를 직시하겠다는 국제여맹의 고민과 결단의 발로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 한국에는 일본의 후지메 유끼 오오사까대 교수가 2013년 한국의 『사회와 역사』에 발표한 「모니카 펠튼과 국제여성민주연맹(WIDF) 한국전쟁 진상조사단」 연구가 있었다. 후지메 교수는 국제여맹 조사위원회의 영국 조사위원이었던 모니카 펠턴이 방북조사 후 펴낸 책, That’s Why I Went(1953)와 펠턴 관련 신문기사 등의 자료들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이번 김태우의 책에서는 18개국 출신 21명 다국적 여성의 조사위원들이 주인공이다. 물론 펠턴은 김태우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한 사람이지만, 그는 최대한 다양한 다국적 자료를 동원하여 21명의 조사위원들을 추적했다.

『냉전의 마녀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의심’이다. 그 의심은 한편으로는 냉전체제에 갇힌 시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체제를 허물어뜨리려는 시선이었다. 책에는 21명 여성들과 김태우의 합당하면서도 치열한 ‘의심’의 시선이 겹쳐져 있다. 21명에게 한국전쟁의 기원은 주요 논점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파괴와 방화, 대량학살, 성폭력 등이 휩쓸고 간 북한 지역에서 진실을 찾으려 했다. 누가 누구에 의해 왜 어떻게 죽었고 파괴되었는가를, 가슴을 누른 채 냉정한 의심의 눈으로 파헤쳤다. 특히 국가폭력의 주체인 미군과 남한군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한국인 우익청년들의 학살 가담 문제는 간과되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북한 당국과 통역관의 역할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고, 나 역시 동의한다. 이 부분은 더 파헤칠 것이 있다고 본다.

북한에 들어가기 전 다양한 입장에서 출발했던 21명이 3주간의 조사를 마치고 나설 때에는 비슷한 진실에 도달했다. 그 진실은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종 보고서 『우리는 고발한다』(We Accuse)라는 소책자로 전세계에 동시 발간되었고 유엔에도 공식 제출되었다.(284면) 드레퓌스 사건을 밝힌 에밀 졸라의 유명한 논설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서구 지식인들의 양심의 소리로 표상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발한다』를 펴낸 조사위원들은 냉전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21명의 조사위원들 중 사실상 좌우진영을 대표했던 영국의 펠턴과 소련의 옵샨니꼬바는 조사위원회의 위상과 조사의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수차례 격돌했다. 그런 그들이 유사하게 느낀 괴로움에 대한 고백은 냉전의 무게를 깨닫게 하기 충분하다. 의심으로 가득 찼던 펠턴이 북한에서 목격한 것은 연일 퍼부어대는 미군 폭격과,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약품도 제대로 없는 처절하게 파괴된 현장의 북한 인민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약품 하나 못 가져온 자신의 처지를 펠턴은 두고두고 원망했다. 자신이 공산주의 원조자로 낙인찍혀 조사의 진정성마저 배격당할까봐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러한 처지는 사회주의자 옵샨니꼬바도 다르지 않았다. 북한에 의약품을 선물하면 자신의 행위가 서구에 의해 ‘군사원조’로 해석될 상황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185~86면)

21명의 조사위원들은 처음 기대와 달리 남한 지역을 조사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전선을 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조사보고서 역시 냉전의 전선을 넘을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그 보고서에 대해 무관심과 무대응 입장을 취했다. 대신 보수 여성단체를 동원해서 그들을 “냉전의 마녀들”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펠턴을 비롯해 덴마크의 언론인으로서 참관했던 플레론 등은 진실을 외치는 활동을 쉽사리 접을 수 없었다. 냉전이 진실을 호도하도록 둘 수 없었던 것이다.

21세기 들어 1951년의 국제여맹의 조사 내용과 의미가 해외 연구자들에 의해 새롭게 조망되기 시작했다. 이번 김태우 교수의 연구는 전쟁과 냉전이 낳은 문제를 객관적으로 조망한 학문적 결과물임과 동시에 학문의 자유를 주창하는 선언문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 학계도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안경을 벗고 객관성과 보편성, 당대성의 관점에서 분단구조를 뛰어넘는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이다.

김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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