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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시카 브루더 『노마드랜드』, 엘리 2021

난파선에서도 침몰하지 않는 생존주의

 

 

김성중 金成重

소설가 hippiesho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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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 가난해지자 드디어 가난에 대한 책들이 주목받는구나 싶었다. 지난 몇년간 『가난 사파리』 『더 글라스 캐슬』 『하틀랜드』, 베스트셀러가 된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독후는 그러했다. 가난은 늘 있어왔다. 생존도 항상 문제였다. 주변으로 밀려나 방치된 사람들이 겪는 지독한 고통 또한 끝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가난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제1세계 백인들의 계급추락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가 아닌가 싶다.

앞서 언급한 책들은 당사자가 직접 쓴 ‘고백론’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소설가로서 이런 책들에 끌리는 까닭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고발과 증언이 어떤 연구자의 광범위한 저술보다 직접적으로, 미시적으로 다가오는 사회사이기 때문이다. 앞선 책들이 한명의 탈주자(저자)의 증언에 가깝다면, 『노마드랜드』(Nomadland, 2017, 서제인 옮김)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가 3년에 걸쳐 취재한 모종의 ‘탈출 집단’을 다룬다. 아니, ‘종족’이라고 해야 옳을까. 타이어 여행자, 가솔린 집시,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 뭐라고 부르든 그들은 내몰린 끝에 길 위에 서서 새로운 삶을 모색한 사람들이다. 좀더 건조하게 말하자면 ‘밴에 몸을 싣고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미국의 시니어들’이라고 축약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평생 사회가 시키는 대로 직장을 가지고 일해왔다. 그런데 노년기에 이르러 자신을 부양할 수 없게 되었다. 2008년의 금융위기 후 집과 직장과 저축을 잃은 경우가 태반인데(사태가 진정된 후 압류주택 비율이 87퍼센트에 이르고, 800만명이 일자리를, 600만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 연금으로는 도저히 월세와 생활비,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가장 비중이 큰 ‘집세’를 빼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소라게처럼 집이자 이동수단인 차에 몸을 싣고 계절성 일자리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아 미국 전역을 전전한다. 가장 많이 일하는 곳은 아마존 물류센터. 그외에도 캠핑장에서 캠퍼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접시를 닦거나, 과일이나 곡류를 추수하거나, 막노동을 한다.

모든 책들은 질문을 품고 있는데 이 책 또한 그렇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이 노년에 생계조차 해결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은 ‘징징대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자식에게 신세 지지 않고(질 수도 없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한 선택지가 차를 몰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존에는 ‘생활’과 ‘존재’가 들어 있다.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며 가까스로 살아남는 일만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 없다. 길에 나서 모험을 하는 동안 자존감을 되찾는 것, 다른 밴 생활자와 연결되는 일이 중요하다. 우정과 연대감은 이 삶을 굴러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바퀴나 다름없다.

이 책의 주인공 격인 린다 메이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나이 든 여성이지만 낙관을 멈추지 않고 모두에게 우정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령 여성노동자인 린다가 ‘틈새호텔’이라고 부르는 트레일러를 끌고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혹한기를 지내고,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친구를 만나고, 자기의 꿈인 ‘어스십’(earthship, 버려진 물질로 만든 수동형 태양열 집으로, 친환경적인 자립주택)을 짓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는지, 그 여정에 동행하는 것이 책의 큰 줄기다.

아마도 가장 멋진 장면은 “타이어 떠돌이들의 랑데부”일 것이다. 이 행사는 노마드족의 대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밥 웰스가 만들어낸 것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모여 ‘모든 것을 나누는’ 기간을 의미한다. 내 눈에 밥은 체제 전복만 꾀하지 않았을 뿐 혁명가처럼 보였는데, 체제가 개인을 전복시켰을 때 개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줄뿐더러 다른 사람에게도 그 방식을 전파하며 자본주의에 대해 재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밥은 오래전에 밴 생활자가 되었고 차츰 이 생활이 노년가난에서 탈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이 행사는 사막 한가운데 수십대의 밴들이 모여 시작된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나누고, 서로의 노하우와 경험을 나누고, 자기에게 쓸모없는 물건들을 모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우정을 나눈다. 초보들이 참가해 생활에 필요한 연습을 해보는 ‘학교’이기도 해서, 온갖 서바이벌 기술들이 전수된다. 밥은 어디에 차를 댈 것인지, 예산을 어떻게 짤 것인지, 우편물은 어떻게 받을 것인지, 멕시코로 넘어가 ‘어금니 도시’라고 불리는 곳에서 저렴하게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등등을 전수하는 한편, 가진 것들로 풍요롭고 외롭지 않게 지내는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한다. 사람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것 이상으로 ‘살아 있어서 행복한’ 순간들을 발견한다.

캠프파이어 불빛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만 잘라낸다면 더없이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노마드족의 삶을 낭만으로 포장하거나 대안적인 삶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분투라는 것을 엄정하게 직시하면서 세번째 질문, ‘사람들은 어떻게 가장 혹독하게 영혼을 시험하는 종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힘겹게 싸우는 동시에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저자의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 「노매드랜드」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책의 엔진에 해당하는 것, 즉 이들이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얼마나 지독한 환경의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지 그다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길에 나선 이유에 대해서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쉽다. “차량 생활을 하게 되는 사람들은 생물학자들이 ‘지표종’이라고 부르는 생명체들과 유사하다. 그들은 생태계에 일어난 훨씬 더 큰 변화를 알려줄 능력이 있는 민감한 생명체들이다”(400면)라는 문장에 깊게 밑줄 그은 나로서는, 이러한 ‘지표’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채 ‘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장면이, 무척 장엄하고 아름답기는 해도 비어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한편 저자가 밝혔듯 노마드족 대부분이 백인인 이유도 되새겨볼 대목이다. 유색인이 밴 생활자가 되어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니기란 때로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드물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서바이벌 기술이 등장하고, 극적인 사연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분투를 보여주는데다 저자가 직접 밴에서 첫날 밤을 보냈을 때의 암담함과 같은 경험도 생동감 있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괴짜와 은둔자들, 꿈과 우정과 고독과 희망, 좌절 속에 기지와 기다림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들이 섬광처럼 빛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년과 파산이라는 배에 올라섰음에도 침몰하지 않는 이들의 생존주의에서 독자인 우리가 용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2021년 3월 현재, 린다는 전에 사둔 땅을 기부하고 뉴멕시코주 타오스에 새로 땅을 사서 온실과 작은 집을 짓고 정착할 예정”(420면)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린다는 월든 호숫가의 소로보다 훨씬 더 늙고,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은 적다. 그렇기 때문에 린다의 도전을 더욱 응원하고 싶어진다. 한명의 린다는 그뒤에 나타날 백명, 천명의 린다를 의미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