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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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중편소설 『어제는 봄』 등이 있음.

alfmrlal@naver.com

 

 

 

장편연재 2

마주

 

 

나는 가능하면 송미림 의사가 원하는 걸 주고 싶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하기도 심부’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을 최대한 부풀리며 후두부에 힘을 줘봐도 나오는 것은 침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정말로 가래가 없으시군요. 어쩔 수 없네요. 일단 집으로 돌아가세요.’

하지만 그들은 나를 집으로 보내는 대신 객담유도실이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탁자 하나와 세면대 하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물품이 놓인 선반이 전부인 곳이었다. 탁자 위엔 깔때기 같은 흡입마스크가 달린 네블라이저가 있었고 그 옆으로 ‘객담 검사용 고주의 약물’이라고 쓰인 커다란 주사기가 있었다.

방 풍경을 보자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곳은 나 같은 사람들, 혼자서 가래를 못 뱉는 사람들의 기관지로 무언가를 주입하는 곳이었다. 주입해서 가래를 강제로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집에서 차로 십분 거리에 있는 기정병원, 그곳을 십년이 넘도록 여러 이유로 드나들었지만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내겐 잠깐의 호흡 불편이 있었을 뿐이다. 호흡 곤란도 아닌 호흡 불편. 그것도 딱 한번이었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이대로 살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당장 그곳을 뛰쳐나와 오종수와 오은채가 있는 내 집으로 가고 싶었다. 향기로운 초들이 있는 내 공방으로 가고 싶었다. 객담유도실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45밀리리터 용량의 객담통 세개와 함께 그 방에 혼자 남겨졌다. 나를 두고 나가기 전 간호사가 말했다. 배를 치라고. 배를 세게 치면서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약물이 분사되는 흡입마스크를 입에 대고 앉아서 기체를 한참 들이마시고, 배를 쳤다. 배를 치면서 있는 힘을 다해 기침을 했다. 다시 기체를 흡입하고, 배를 치고, 기침을 했다. 각 통에 최소 5밀리리터의 객담을 담기 전까지 나는 그 방을 나갈 수 없었다.

주사기 몸통처럼 투명하고 길쭉한 객담통을 보면서 나는 송미림 의사의 진료실을 떠올렸다. 피 뽑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도 된다는 듯 ‘가래 뱉고 가세요’라고 말하던 그 얄미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객담유도실 벽면에 붙어 있는 ‘낙상주의’라는 글자를 멍하니 쳐다봤고, ‘뉴욕 맨해튼 52번가 하수구 밑에 사는 작은 벌레’, 빨간 라바와 노란 라바를 생각했다. 나는 벌레가 싫었다. 벌레 중에서도 라바들 같은 애벌레를 특히 싫어했다.

애니메이션 「라바」가 처음 방영된 게 2011년이었으니 생각해보면 라바를 싫어한 지도 근 십년이었다. 사람에 따라 노란 라바는 좋아하고 빨간 라바만 싫어한다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빨간 라바와 노란 라바 둘 다 싫었다. 생긴 것부터 하는 짓까지 다 싫었다. 콧구멍도 싫었다.

언젠가 공방 손님한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라바」의 모든 등장인물을 한명의 성우가 연기한다고. 주인공 애벌레인 옐로우와 레드는 물론이고 쇠똥구리 브라운, 장수풍뎅이 블랙, 똥파리 블루, 달팽이 레인보우…… 이 모두를 단 한명의 성우가 맡아서 한다는 것이었다. 「라바」에는 대사가 없었다. 이들이 구르고 먹고 웃고 놀라고 곤경에 빠지는 효과음 같은 소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얼굴이나 이름을 전혀 알고 싶지 않은 한 성우를 떠올렸다. 더빙실에 혼자 앉아 크억, 헤엑, 읏, 냐앗, 허으, 끄헤헤헤, 이런 소리만을 내고 있는 사람을.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고 이 성우의 안티 팬까페가 있는지 당장 검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목 끝으로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이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느껴지지조차 않던 가래가 기도를 타고 정말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도 이런 방에 갇힌 적이 있었을까? 평소에 가래가 많았다면 기관지를 자극하는 약물 같은 건 흡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조 아줌마는 「라바」를 본 적이 있을까? 손주가 있다면 봤을 수도 있다. 나는 만조 아줌마 인생에 손주라는 존재가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했지만 「라바」를 봤다면 만조 아줌마가 이런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쟤들이 털도 없이 귀여운 척을 하네.”

언젠가 만조 아줌마가 뭔가를 보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물었다.

“아줌마, 털이 있어야 귀여울 수 있는 건가요?”

이렇게 물었을 수도 있다. 털이 없다면 안 귀여워도 되나요?

만조 아줌마는 말했다.

“그렇고말고. 자고로 털이 부얼부얼해야 어디 가서 귀엽다는 명함이라도 내미는 거지.”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만조 아줌마의 그 말을 몇번쯤은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무렵, 나는 만조 아줌마를 몇번쯤은 그리워했던 건지도 몰랐다.

예성에서 이사 나와 대전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우리 집에서 만조 아줌마는 점점 언급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건 만조 아줌마가 농축산신문에 나왔을 때였다. ‘이달의 영농인’ 류의 크지 않은 꼭지였다. 거기에서 만조 아줌마는 내 엄마 아빠한테 하던 말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나무들 서 있는 키가 달라서 햇빛이 골고루 들어요. 경사가 져서 물도 잘 빠지고 산비탈 아래라 밤만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지요. 사과는 이렇게 일교차가 큰 데서 자라야 씹었을 때 아삭한 맛이 제대로 나요.’

비탈 사과가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얘기로 기사는 마무리되었다. 내 부모는 그 신문을 접어 신발장 하단에 넣어놓았다. 나는 엄마 아빠가 깨어 있을 땐 숨도 쉬지 못한 채 있다가 그들이 잠들면 신발장을 열어 신문을 펼쳐 보곤 했다.

기사 상단엔 그늘막 모자를 쓴 만조 아줌마가 수확 직전의 사과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나는 만조 아줌마가 쓰고 있는 알록달록한 꽃무늬 모자가 나와 함께 시장에 갔을 때 고른 모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란색 플라스틱 상자가 사과밭 고랑을 따라 줄지어 놓여 있는 것도 보였다. 나무들을 따라 길게 깔아놓은 반짝이 비닐이 비탈의 경사 각도로 빛을 반사시켜 사과와 이파리의 색깔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만조 아줌마는 가을 사과밭 속에 서 있었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쓰라림으로 가슴이 헤집어진 채 신문을 다시 접어 신발장 하단에 넣어놓았고, 그런 날이면 밤새 대전의 내 방 천장 아래에서 예성의 밤낮을 다시 겪었다. 스프링클러가 지루하게 돌아가는 한낮의 사과밭을 보았고 잘라낸 사과나무 가지를 소각하는 매캐한 저녁 연기를 맡았다.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가 숨던 어린 나를 만나기도 했다.

잠을 설치고 학교에 가면 하루 종일 정신이 멍했다. 대전이라는 곳에도 중학교 생활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늘 곤두서 있었지만 친하다 싶은 애들도 내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짝이 몸을 꼬며 기지개를 켜다가 팔을 뻗어 내 볼을 쥐고 흔들었다.

“으이구, 귀여워어어어.”

이런 말과 함께.

뭔가 보들보들한 것을 만져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표정을 한 여자애들이 내 주위엔 너무 많았다. 내 볼따구니를 잡아당기기 위해 옆 반에서 오는 애도 있었다.

“건들지 마.”

그래도 애들은 안 들었다.

“건들지 말라고.”

그래도 안 들었다.

“건들지 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면 다음 날 나는 호박씨를 까는 애가 되어 있거나 ‘척’을 하는 애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세상의 모든 귀여움은 털이 부얼부얼한 것들이 독차지하기를. 오직 그것들한테만 귀여울 자격이 주어지기를. 나는 반 애들이 끈질기게 휴지를 빌리러 오는 몇몇 사람 중 한명이기도 했다. 휴지가 필요하면 애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나리를 찾았다.

“야, 휴지 있냐.”

“나 큰 거 싸야 되는데 휴지 좀.”

“나 생리 터졌는데 휴지 좀.”

씨발 내가 휴지걸이도 아니고, 나한테 휴지를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나는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애들은 왜 내가 당연히 휴지를 가지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부산하게 귀여운 게 아니라 참하고 차분하게 귀여워서? ‘여자여자한’ 모범생이어서? 문제는 내가 그들의 예상과 똑같이 정말로 휴지와 손수건을 늘 구비해 다닌다는 것이었다.

내가 여자여자하기 때문에 휴지를 갖고 다니는 것인지, 휴지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여자여자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학에 가서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대학 내내 나는 씨컬이 살짝 들어간 긴 생머리를 유지했고 흰 컨버스화에 무릎을 덮는 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귓불엔 작디작은 귀걸이가 점처럼 박혀 있었고 늘 말린 장미색 콘셉트를 유지한 채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은 버스에서 처음 보는 남자한테 며느리를 제안받았다. (실화다.) 나이 많은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호의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학생, 인상이 너무 좋네. 나한테 결혼 안 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내가 우리 아들을 좀 소개시켜줘도 될까?”

내가 정중하게 사양하자 남자가 말했다.

“어느 집 며느리가 될지 그 집은 참 복도 많네. 공부 열심히 하게, 학생.”

내가 다가가보고도 싶었던 학교 내 모 단체의 여학우들은 이런 나에게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내가 타도해야 할 여성성의 재현물 그 자체인 것처럼 대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존재인 거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거의 내 엄마급이었다.

물론 그들이 나를 밀어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애들은 내게 보이는 것과 다른 면이 있길 기대하며 다가오기도 했다. 내게 의외의 모습이 있다면 충분히 받아줄 용의가 있다는 듯이. 하지만 나한테 그들이 바라는 반전 따윈 없었다.

내가 마음 붙일 곳은 남자들밖에 없었다. 남자와 있으면 나는 비난받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주눅 드는 느낌도 없었다. 그런 느낌은커녕 그들은 나한테 안달하기까지 했다. 남자들은 나를 꽤 좋아했는데, 여학우들의 말대로 내가 남자들의 판타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현하고 다녀서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친밀감에 목이 말라 있었고 누군가 나한테 조급과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 짜릿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짜릿함에 중독 수준으로 빠져든 채 짧고 자극적인 연애를 반복했다. 개중에는 연애 기간 내내 다정하고 사려 깊었던 놈도 있었고 씹새끼였던 놈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놈이든 내게 반전을 바랐다는 점에서 결국은 여학우들과 마찬가지의 피곤함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십대 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피곤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봐줄 누군가를 계속 갈구했다. 오종수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오종수가 꼭 그 누군가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종수는 내가 만나온 남자들 중 나를 가장 덜 피곤하게 했다.

오종수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기정시에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정시에 살지 않았다면 기정병원 3층의 객담유도실에서 혼자 기체를 흡입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정시에서 오종수와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았다면, 나처럼 신혼 초부터 기정시에 살아온 수미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미.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객담통 세개엔 어느새 내가 채워야 할 최소한의 용량이 채워져 있었다. 헌혈을 하고 난 것처럼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기도가 쓰라렸다. 나는 통을 든 채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출입문을 열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내 객담통을 보더니 말했다.

“어우, 잘하셨어요.”

 

*

 

객담 배양 검사를 통해 균을 확인하는 데엔 8주가 걸린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내겐 2주간의 자가격리에 이어 다시 8주라는 유예기간이 생긴 셈이었다. 그 기간 동안은 공방 클래스를 여는 대신 제작 주문만 받으면서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 최선일 듯했다. 8주가 지나 균 여부가 확실해질 때쯤이면 더위도 수그러들고 수미도 퇴원을 한 뒤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6월 마지막 주에 은채는 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찍었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등교수업은 짝수번호와 홀수번호의 등교일이 달라서 은채는 1학기가 거의 다 지났지만 아직 홀수번호 아이들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졸업사진도 짝수번호 아이들하고만 찍을 수 있었다. 졸업사진을 찍긴 했지만 겨울에 학교에 모여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여름과 가을이 오게 될지, 어떤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

나는 감정이 요동치지 않게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적어도 8주 동안은, 적어도 수미가 퇴원을 해 동네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길 바랐다.

내게 닥쳐올지도 모를 부작용에 대비라도 하듯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라바」를 첫 시즌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고 닭간 요리도 꾸준히 검색했다. 호흡기내과에 다녀온 뒤부터 「라바」와 닭간은 내 하루의 주요한 의식이 되었다. 닭 오마까세로 유명하다는 연남동의 한 이자까야에서 닭간 빠떼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라바」 성우의 팬까페에도 가입했다. 그때만 해도 안티 팬에 더 가까운 상태였으면서도 나는 등업을 위해 열심히 출석 도장을 찍었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앉아 온라인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은채를 보면서 나는 내가 예성을 떠날 때 정확히 지금의 은채 나이였다는 걸 자주 떠올렸다. 만조 아줌마한테 손주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만조 아줌마 또한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가 딸을 낳았다는 걸.

비탈 과수원을 떠난 건 열세살 여름이었지만 엄마가 방학 때마다 나를 만조 아줌마한테 맡기는 걸 그만둔 건 그보다 두어해 전이었다. 아마도 4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무렵이었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는 짝꿍 남자애와 말다툼을 꽤 크게 했는데 그애는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것을 정말 말도 안 되게 우겼다. 기싸움을 하면서 이 말 저 말을 해대다가 나는 만조 아줌마 특유의 건조한 어조를 흉내 내 그애한테 말했다.

“야.”

“왜.”

“낫으로 좆을 가려.”

그 이후로 나는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우면 만조 아줌마네에 가는 대신 집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다. 열한살은 한두끼 정도는 혼자 먹을 수 있는 나이였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쯤 이미 엄마는 무언가를 도모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년 후 마침내 예성을 떠날 때까지, 끝끝내 물러섬 없이. 그때의 엄마 마음을 생각하다보면 나는 자주 가위에 눌렸고 그 안에서 늘 한가지 질문을 받았다.

‘무슨 일 하세요?’

혹은

‘하시는 일이 뭐죠?’

순서는 늘 비슷했다. 처음엔 흰 방호복을 입은 선별진료소의 의료진이 물었고 그다음엔 송미림 의사가 물었다. 한참 생각해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공방에 나가 있는 중에도, 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두 눈으로 확실히 보고 있는 중에도 나는 그 질문을 계속 받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클래스 연기 공지를 한 뒤부터 나는 초 하나하나를 공들여 완성하는 데에 기력을 집중했다. 공방은 여름내 내 개인 작업실과도 같아져서,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색감의 캔들을 뽑아내겠다는 의욕에 사로잡혀 조색 테스트로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판매 공지도 수시로 반복해 올렸다.

‘주문 문의는 디엠이나 프로필 링크 타고 카카오톡 오픈채팅으로 해주세요.’

‘나리공방 캔들은 스마트스토어에서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스토어찜 하시면 1000원 할인쿠폰을 드려요!’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실내에 놓아둘 수 있는 소품을 이전보다 더 많이 찾았다. 배송 주문이 많은 날은 뽁뽁이 포장지에 둘러싸여 종일 택배 작업을 했다. 송장 작업까지 끝나고 나면 손에 잡히는 아무 용기에나 맥주를 따라 혼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 모든 작업 과정을 (조색 팔레트와 광목 커튼, 스텐 비커와 히트건, 늘 물품이 흘러넘치는 트롤리와 창턱에 말려놓은 몰드를) 찍어 하루도 빠짐없이 공방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수미가 보라고.

어느 병상에 있든 나는 수미가 매일매일 나리공방의 인스타그램에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은채의 학교에서 사진 샘플을 보내온 날은 저녁내 은채와 함께 졸업앨범에 넣을 사진들을 골랐다. 수미와 서하도 꼭 일년 전에 이 과정을 거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자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나는 누군가와 쓸데없는 얘기를 길게 나누고 싶었다.

‘너무 작은 꼬마였는데 언제 이렇게 큰 거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벌써 졸업사진을 찍을 수 있지?’

‘나는 어제까지도 삼십대였던 것만 같은데 언제 여기로 넘어온 거지?’

이런 흔하고 뻔한 감상을 신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내게는 종수와 수미뿐이었다. 밀려오는 감상을 수다로 풀지 않으면 열세살 아이의 여섯살 적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올리는 참사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수미는 격리치료 중이었고 종수는…… 나는 종수랑은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그걸 하는 게 더 좋았다. 종수랑 내가 합법적으로 하고 있는 ‘그거’ 말이다. 종수랑은 두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둘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즐거운 걸 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나는 오종수와 맥주를 앞에 두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은채 휴대폰에 내가 ‘엌마’라고 저장된 걸 봤기 때문이었다.

“자기야, 엌마는 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맥주를 들이켜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자기야, 내가 왜 엌마인 거지?”

은채 휴대폰에는 내가 이렇게 뜰 것이었다.

‘엌마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엌마님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엌마님의 부재중 전화 1통.’

다행인 것은 나만 ‘엌마’인 게 아니라 오종수 또한 ‘앜바’로 저장돼 있다는 것이었다.

“뭔가 어감이 이상해.”

“난 재미있기만 한데?”

오종수는 아무 의미 없는 말장난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송미림 의사의 ‘무슨 일 하세요?’에 걸려들었듯 은채의 ‘엌마’에도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

나는 맥주를 한캔 더 딴 뒤 오종수를 붙들고 앉아 은채가 ‘엄마’ ‘아빠’한테 얼마나 알록달록한 손편지를 쓰던 아이였는지를 늘어놓았다. 다음 날 나는 오종수와 오은채와 셋이 있는 단톡방에 옛날 사진 수십장을 올렸다.

‘6년 전 오늘이래.’

아무도 답이 없었다.

다음 날에도 사진을 올렸다.

‘8년 전 오늘이래.’

휴대폰이 알려준 팔년 전의 시간 속엔 솜사탕 하나에도 행복해하던 은채, 내 한풀이 같은 짜증을 받아내고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던 은채, 차마 돌아보기 가슴 아픈 어떤 날의 은채, 내 딸, 내 아기, 내 은채가 있었다. 나는 은채의 어렸을 때 사진을 제정신으로 보는 게 늘 힘들었다. 아이를 조금 덜 힘들어하며 키웠다면 이런 마음이 안 들 수도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리 병상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미에게 수미의 휴대폰이 육년 전, 팔년 전을 던져준다면 나는 수미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도 처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서하의 마음을 다치게 한 채로 수미는 확진자가 되어 격리된 상태였다. 서하도 수미도 서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한 채였다. 아무리 서하가 보고 싶어도 수미는 지금 서하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지난 시간이 가득 저장돼 있는 휴대폰만을 쥐고 있다면,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폭풍이 수미에게 찾아올 수도 있었다.

코로나가 완치된 뒤 돌아오면 수미는 제일 먼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 수미는 학원 차량 기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수년을 같이 일해오며 신뢰를 쌓아온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확진된 학습지 교사들도 완치 뒤에 원래의 지국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미가 어떤 마음의 변화를 겪든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수미의 선택폭을 아주 많이 제한할 수 있었다.

나는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채로 집과 공방을 오가며 여름의 한복판으로 가고 있었다.

 

*

 

어느 날 나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실내에 앉아 있었다.

나의 그이와 함께.

그곳은 까마득하게 솟은 돔 천장 아래로 풍선 바구니가 떠가는 곳이다. 해적선에 탄 사람들이 다 같이 비명도 지른다. 탐험 보트를 타러 간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선 줄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어색하고 심심해서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계단을 올라 실외로 통하는 긴 길을 걷는다.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도로를 내려다보며 매직 아일랜드로 나간다. 그러곤 겁도 없이, 어떤 그네에 올라탄다. 4.5미터 상공에서 시속 50킬로미터의 속도로 회전하는 그네에. 한바퀴, 또 한바퀴, 그네가 속도를 올리고 상공을 세차게 돌기 시작하자, 눈앞으로 호수가 펼쳐진다. 나는 그네 손잡이를 꼭 쥐고 앉아 내 머리끈이 풀려 호수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어느 날은 뙤약볕 아래에 있다.

엄마의 그이와 함께.

은색 사다리. 용달차와 경운기. 새참 보자기. 나는 흰 꽃이 핀 사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토끼풀을 헤치며 네잎클로버를 찾는다. 무릎으로 풀밭을 기어다니다 구슬을 움켜쥔다. 구름은 너무 높고, 바람은 불지 않고, 나무밭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가위를 들고 쏙속쏙, 쏙속쏙, 과실을 솎는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다.

요새는 출렁다리가 유행이에요.

호수가 있는 마을 어디에나 흔들리는 다리가 생겨나고 있지요.

겁을 먹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다리.

다리 아래로는 호수가 있고, 호수 아래에는 마을이 있다. 물에 잠겨 있는 마을이.

나는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을 알고 있다.

물에 잠겨 있는 나무도 알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경고해준 적이 없었다. 딱 한방울로도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호수가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찰랑이고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차올라와 있어서,

한방울의 눈물, 무심코 흘린 땀, 바람에 날아온 이파리 하나, 그 정도의 수분, 그 정도의 무게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칠 수 있다고, 곤란한 항진을 불러온다고,

그 순간이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도, 누구도 경고해준 적이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