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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명전환의 세계감각과 문학

 

‘기후위기’가 문학에 던지는 물음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역서 『비평의 기능』 『지식의 불확실성』 『한 여인의 초상』(공역) 『근대화의 신기루』(공역), 공편서 『세계문학론』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머리말

 

쏟아지는 기사나 각종 영상 때문에 깜빡깜빡하지만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에는 재난이 있을 수 없다. 당연히 기후에도 위기가 있을 리 없다. 기후위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특정한 현실의 문제이며 인간 자신의 위기일 따름이다. 그래서 해결을 도모해볼 수 있고 기후위기에 문학도, 철학도 따라 붙을 수 있다. 『창작과비평』도 이 위기에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주제—에너지대전환을 필두로 ‘공동영역’(커먼즈), 돌봄, 탈식민, 탈성장,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에 이르는—와 결합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고 우리 평단 역시 논의를 개시했다.1 그런데 기후위기가 ‘기후 너머의 어떤 것’임을 좀더 명확히 인식하고 세상과 나를 동시에 바꾸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라도 문학은 ‘녹색 질문들’을 시야에 두면서2 방편으로서의 해법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견지해야 한다고 본다. 날씨, 계절, 기온 등의 급격한 변동이나 산불, 가뭄, 홍수 같은 재난이 위기의 증상이지 병근(病根)일 수는 없지 않나.

자고 일어나면 ‘뉴 노멀’이 무색해지는 상황에서 필자 스스로도 문득 그 병근을 제대로 성찰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나 자문한다. 그 병근이란 결국 인류가 만들어낸, 나 자신의 골수에도 스민 모든 근대적 관념의 위기가 아닐까 하고. 아니, 기후위기에서도 이게 진짜 문제가 아닐까 되묻는다. 자본주의 근대를 사실상 견인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어낸 추상(抽象)들, 즉 주체, 자유, 욕망, 행복 등이 철저하게 인간 편의적 개념임을 직시하고 해체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지 않는 한3 기후위기에 대한 발본적 사유는커녕 임시적 해법도 요원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해결책을 첨단 기술공학에서 구하려는 기후과학의 성패마저 궁극적으로 인간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회를 어떻게 성찰하는가에 달려 있기 마련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상상력과 지력이 최고도로 발현되는 문학을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탄소경제로 인해 지구온난화라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자각은 20세기 중후반—과학자들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최초로 관측한 해는 1958년이다—에 싹텄고, 인류 문명의 존망을 염려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다. 사정이 이러하니 지난 세기에 기후위기를 주제로 삼은 작가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일견 자연스럽다. 천재지변은 문학에서도 줄곧 다뤄졌지만 그 인과(因果)를 인간의 사상이나 행위와 직접 연결하거나 크게 의식하는 일이 당시엔 어려웠기 때문이다.4 그러나 자본주의 근대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세계임을 직시하고 대안을 찾아 나선 작가들이 엄연히 존재했을뿐더러, 인과의 차원에서조차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시간 배경을 가까운 미래로 설정하고 인간의 생산·소비 활동이 초래한 극한 기후로 인한 종말 사태를 그려낸 작품들이 기후소설(cli-fi, climate fiction)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늘날 문학의 존재 의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소설의 상상적 상황마저 능가하는 기후현실이다.5

기후소설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찾아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라도 암담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 것이다. 내 경우는 암울한 기분을 억누르고 안팎에서 전개되는 기후위기 담론을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검토하면서 일독한 영미 기후소설들 가운데 주로 존 페퍼(John Feffer)의 최근 연작에 관한 독후감을 논문 형식으로 피력했다.6 하지만 기후위기와 연관하여 기후소설이나 생태문학으로 국한할 수 없는, 자본주의 근대 너머의 삶을 탐사한 문학에 대한 심층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은 집필 당시에도 절감했다. 지금도 채비는 멀었다. 다만, 기후위기와 문학의 관계를 심도있게 고민한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의 비평을 참고하고 ‘기후소설’ 한편을 읽으면서 생각의 길을 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2.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과 근대소설

 

인도 콜카타 출신인 고시는 대홍수를 피해 비하르(Bihar) 지역 갠지스강둑에 터 잡은 조상을 소설의 무대로 불러내면서 작금의 생태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작가이다. 기후문학 비평에 해당하는 『대혼란의 시대』7에도 그같은 면모가 잘 드러난다. 기후위기 시대의 문제를 도덕이나 윤리로 환원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조목조목 짚는 데 기꺼이 동의할 수 있었다. 이어서 손에 잡은 그의 장편소설 『굶주린 조수』(The Hungry Tide, 2004)도 인상적이었다. 기후 문제를 탈식민투쟁과 인간해방의 지평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딱딱 떨어지는 교차서술의 진행 속에서 서사의 긴장이 느슨해지고 생태주의의 대의에 대한 자의식도 때로 지나친 탓에 기후소설로서 아주 흔쾌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탈식민문학이 민중의 구체적인 생활과 역사 현장에 깊게 뿌리 내린 사례로 평가할 만했다.

기후위기와 근대소설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한 『대혼란』의 핵심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기후위기는 문화의 위기이며, 따라서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하다”는(GD 9면; 『대혼란』 19면) 단언이 될 듯하다. 고시가 일반론에 자족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위기는 자본주의 문화의 위기이고 그 문화에 함몰된 상상력이 문제임을 구체적으로 논하기 때문이다. 가령 제국의 식민주의자들이 바다 풍광을 ‘소유’하기 위해 세계 해안가에 호화로운 저택과 거주시설을 생각 없이 건설해온 역사를 길게 서술하는 대목도 그중 하나다. 바다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선조의 지혜로운 경고는 그들에게 한낱 미신이었던 것이다. 고시는 “집착적이고 편집광적인, 거의 미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뿌리째 뽑아서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쓴다(GD 54면; 『대혼란』 76면).

그가 영민한 독자라는 점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기후변화에 관한 빠리협정문(2015.12.12)과 프란치스꼬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5.24)의 문체를 비교·대조하면서 권력자 및 기후사업가들의 무책임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데서도 확인된다(GD 150~62면; 『대혼란』 196~211면). 고시의 비평은 기후재난이 서구 제국들, 특히 미국의 군사주의·식민주의 수탈의 맥락에서 고탄소 생활양식이 초래한 것임을 밝히고 그 역사적 책임을 낱낱이 심문할 때 가장 통렬하며, 최근에는 한층 본격적인 분석을 책으로 펴낸 바 있다.8 하지만 통렬함에도 위험은 따른다. 자본주의 근대가 아니라 식민주의·제국주의에 초점을 맞춘 기후위기론의 한계도 엿보이기 때문이다.9 그 점은 역시 ‘기후위기’를 문학이 어떻게 다뤄왔나를 분석하는 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탄소경제로 인해 황폐해진 세계의 실상을 배경에 두고, 서구 근대의 ‘진지한 소설’(serious novel) 전체에 사실상 유죄를 선고하는 제1부(이야기들)에 집중해보자.

기후위기와 문학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고시가 제기한 핵심어는 근대성, 상상력, 장르문학, 근대소설 등이다. 그중 근대성에 대한 그의 논의는 대담하지만 낯익다. “근대성이 (전래의 것과는—인용자) 다른 형태의 지식 형태를 모조리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라든가(GD 20면; 『대혼란』 33~34면) “인간이 비인간과 맺는 동류의식을 연상시키는 모든 옛 자취를 깡그리 지워버렸다”는(GD 70면; 『대혼란』 98면) 진단은 근대성 및 근대주의 비판에서 참신하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 인식에 근거하여 근대문학에 던지는 고시의 물음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파국을 알리는 탄소 시계(carbon clock)의 경고음이 커지는 동안 문학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연관하여 서구의 근대문학, 그중에서 소설 장르의 역할을 논하는 고시의 방식도 매우 논쟁적인 터라, 이 물음은 한층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는 지질학에서—지구 기후시스템의 안정성·지속성을 당연하게 전제하는—점진설이 격변설보다 우위를 점해온 연유를 설명하면서 부르주아적 현실인식과 합리주의, 과학주의 등이 서사의 구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주목한다. 인식 가능한 것에 골몰하고 잘게 쪼개 분석하는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나날의 일상적 디테일을 축조한 근대 주류 문학의 DNA이며, 고시에 따르면 그런 문학은 사실상 근대주의(경제발전주의)에 가세한 공범이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자 주인공임을 촘촘한 사실로써 구축해온 서사에는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경이와 신비, 공포나 ‘비인간’과의 공생적 지평이 소거되어 있다. 서구의 사실주의 소설은—산업화의 진군이 그러했듯이—그러한 원초(元初)의 것들을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로 규정하고 주변으로 밀어내면서 주류 문학으로 성장했다.

고시의 단죄 근거는 간명하다. 몇몇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류 문학은 탄소경제가 불러올 묵시록에 완전히 무지·무관심했거나 맹목이었다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시대 대부분의 예술과 문학 형식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마주한 곤경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은폐의 양식에 휘말려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그 점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는 한 기후위기에 대해 문학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뭐라 떠들든 21세기는 “거대한 혼돈의 시대”로 기억되리라는 것이다(GD 24~25면; 『대혼란』 22면). 그러니 사회참여와 체제변혁을 외친 소위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작가들조차 시대를 앞서가기는커녕 뒤처진 느림보였다. 진보를 자처한 작가들일수록 대멸종 사태를 촉발한 탄소경제의 파국에 더 눈이 멀어 있다는 취지다.

한발 더 나아가 고시는 ‘제3세계’의 문학도 서구 추종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고시가 식민주의 비판에 헌신한 자기 세대의 작가들조차 근대성의 위력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대목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물론 피지배 국가 및 민족 내부에 쌓인 식민주의의 온갖 전근대적 인습과 계급모순, 성차별에 맞서 싸운 제3세계 작가들의 분투를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어 폄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해도 그들 역시 이런저런 방식으로 서구 따라잡기의 포로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대목은 적지 않다.

이 지점에서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재개한 한국의 민족문학(운동)이 고시의 이같은 비판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물음도 제기된다. 아쉽게도 이 물음과 본격적으로 대면할 여유는 없다. 다만, “제3세계 민중 속에 전승된 문화적 유산을 활성화시켜 새로운 리얼리즘을 창조하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다짐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식이 리얼리즘론의 일환으로 제출되었음을 확인해둘 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인용자) 「포스트모더니즘론」에서 ‘대자연 자체의 근본적 엄폐’라든가 ‘하이데거의 ‘들길’은 아무래도 되찾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는 등의 표현도 그런 점에서 제3세계의 시야가 배제된 위험한 수사법이다. 후기자본주의 세계의 중심부에서 파괴·멸절된 것이라도 동일한 세계의 어느 구석에 끝까지 남아 있지 않고 완전히 명맥이 끊어졌다면 이를 되살릴 어떠한 ‘변증법적 전환’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 중심부 자체에서도 자연처럼 정말 중요한 것의 ‘완전파괴’는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며 실제로 완전파괴가 잘 안되기 때문에 그처럼 값진 것일 터이다.”10

오늘날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떠올리면 제임슨이 역설한 변증법적 전환은 더 요원해진 것 같다. 왕년에 제3세계라고 부른 ‘남반부’는 선진국들보다 탄소경제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소용돌이에 더 거세게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고시의 말처럼 “불가사의할 정도로 영악한 자기보호의 몸짓을 통해 그 시대의 예술가, 작가, 시인들이 정확히 자기네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는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내몬 것”(GD 125면; 『대혼란』 166면)은 바로 그런 탄소경제다. 따라서 현실의 모순을 천착한다고들 했던 사실주의 소설에 대한 고시의 평가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짐작 가능하다.

단적으로 그가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1857)을 읽는 방식을 보자. 간명하게 제시한 단평 형식이라서 고시의 생각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선이 여주인공의 낭만적 도피에의 열망에 꽂힌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콕 집어 논한—작품 2부의 15장에서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리드 싱어를 보면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달라”고 속으로 외치는—보바리 부인의 열망은 사실주의 소설에서 ‘예외적 순간’이다. 그것은 임시가설물(scaffolding)처럼 소설이라는 건물 짓기에서 한시적으로만 존재한다. 그의 논법을 풀어보면 플로베르(G. Flaubert)는 그 열망의 잔해들을 끌어 모아 서사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정력을 바쳤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 근대소설은 지질학과 달리,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의 핵심적 중요성과 대결하는 상황에 내몰린 적이 결코 없었다. 즉, (예외적—인용자) 사건들의 무대를 은폐하는 것은 근대소설의 기능에서 여전히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바로 그런 은폐가 어떤 특정 유형의 서사를 다름 아닌 근대적 소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사실주의’ 소설의 아이러니가 있다. 사실주의 소설이 현실을 불러내는 바로 그 방식이야말로 실상은 리얼한 것의 은폐이기 때문이다.(GD 23면; 『대혼란』 37면)

 

사실주의도 사실주의 나름이리라는 반론에 자족할 수 없게 하는 문장들이다. 물음은 필연적이다. 사실주의 소설이 현실을 ‘불러내는’(conjure) 방식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지금까지 “리얼한 것”(the real)을 은폐해왔다고 주장하는가? 이때 ‘리얼한 것’은 뭘 말하는 것인가? 그렇게 은폐한 것은 유전과 환경의 기계적 인과에 묶인 자연주의 소설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시의 비판은 정말 타당한가? 루카치(G. Lukács)가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부르고 우리는 ‘리얼리즘’으로 통칭하는—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한—문학에서는 어떨까? 기후위기가 가시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위기의 징후들을 날카롭게 예지한 ‘진지한 소설’이 과연 존재하지 않았을까? 가령 “사용하되 낭비하지 마시오. 숲은 짐승과 새들이 거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가”11라고 반문하면서 백인 지배자 템플 판사에게 무분별한 개발을 끝내라고 요구하는 인물을 창조한 쿠퍼(J. F. Cooper)의 소설은 어떤가?

물음은 이보다 훨씬 많고, 그래서 길을 잃을 위험도 커진다. 어쨌든 고시가 이런 식의 물음들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손쉬운 도식으로 회귀하면서 기후위기에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는 그 자신의 급진적 충동을 이론화하는 데 골몰한다. 손쉬운 도식이라 함은, ‘리얼한 것’을 은폐한 사실주의가 지배종으로 군림함으로써 고딕소설, 공상과학소설, 공포소설 같은 장르서사가 주변화된다는 고시의 이분법을 가리킨다. 급진적 충동이라 함은, 고시가 기후위기에 대한 문학의 대응을 서구문학에 축적된 일체의 ‘진지한 소설 양식’과의 극단적 단절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12을 깨는 자연의 경이와 신비, 두려움과 비인간 존재들은 장르서사의 영역에 귀속된다. 현실 재현 과정에서 ‘리얼한 것’을 은폐한 사실주의 소설의 득세로 인해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과 신비, 비인간과의 교감이 가득한 다양한 장르서사들이 서사의 본령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다. 고시는 사실주의 문학과 대비하여 자연과 초자연, 비인간적 존재 등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한 것이 비주류 서사라는 주장을 펼친 셈이다.13

이와 같은 고시의 비평을 좀더 간명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서구의 주류 소설은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을 충실히 따르고 구현하는 문화의 지배종이다. “전례 없는 사건은 배경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으로 끌어내는”(GD 17면; 『대혼란』 30면) 방식으로 서사세계를 구축해온 소설의 무대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개인의 운명이 관건이 된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은 근대소설의 기본 가정 내지는 전제인바, 그런 모험에 내재한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고시가 제시한 사례는 구체적이다. ‘석유소설’(petrofiction)로 분류되는 『소금의 도시들』(Cities of Salt, 1984)에 대한 업다이크(J. Updike)의 서평이 바로 그런 가정에 기반했다고 꼬집은 것은 서구의 근대소설이 집단의 운명과 등지는 개인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비판하기 위함이다(GD 75~81면; 『대혼란』 106~10면).

이처럼 기후위기를 배경에 놓고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에 근거하여 사실주의 소설의 한계를 논한 고시의 문장은 새겨 읽을 대목이 적지 않다. 그의 비판은 반복되는 나날의 사실과 진실의 드러냄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삶과 진리에 관한 커다란 물음과 화두를 상실해온 사실주의 문학의 퇴락을 환기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얼한 것의 은폐’라는 틀에 넣어 서양의 ‘진지한 소설’ 전체를 도매금으로 넘기는 고시의 평가방식에는 비판적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가령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에 딱 어울릴 법한—실제로 고시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오스틴의 소설만 해도 전혀 간단치 않다. 그의 텍스트는 고시에게 결혼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예절’의 모범을 보여주고 구애서사의 단계적 진행도 그러한 모범의 완결로 가는 부르주아 서사의 규칙들로 구성된 것처럼 읽힌다. ‘부르주아적 삶’을 거론할라치면 결혼의 결정적 요건으로 제시되는 연수입이 그의 작품세계에 얼마나 세세하게 기록되는가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오스틴 문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기후위기를 염두에 두고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면 그가 창조한 인물들이 날씨와 계절의 순환 및 변화에 얼마나 민감한가가—심지어 자연의 변화가 서사의 흐름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점이—실감되기도 한다. 남녀 주인공들이 거의 예외 없이 “풀과 나무와 같은 자연에 열정적으로 감응하는 ‘낭만적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점,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것이 “문명의 위선 및 인위성과 맞서는 동시에 인간다움을 가늠하는 진실성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후비상 사태 앞에서도 좀더 깊이 숙고해볼 만하다는 것이다.14

주류소설 대 장르서사의 구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그렇다고 고시가 좁은 의미의 기후소설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재난서사로서의 기후소설이 ‘인류세’가 표상하는 문제들을 종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른바 장르의 게토화 현상에 대해서도15 그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그의 결론은 “과거에도 수차례 그랬듯이 혼종적인(hybrid) 새로운 (문학) 형식들이 출현할 테고, 읽는 행위 자체가 다시 한번 변화를 겪”으리라는 (GD 84면; 『대혼란』 117면) 기대로 모아진다. 다만, 생각의 길을 더 내기 위해서라도 그가 설정한 ‘진지한 소설 대 장르서사’의 구도는 패착임을 강조해야겠다. 그렇다면 해체의 한 방편으로 고시 자신이 ‘리얼한 것’의 은폐에 복무했다고 지탄한 바로 그 사실주의 소설을 동원해보면 어떨까?

 

 

3. ‘기후소설’ 읽기

 

졸문 「기후위기와 기후소설」에서 언급했고 고시도 뛰어난 기후소설로 인정한 킹솔버(B. Kingsolver)의 『비행 습성』(Flight Behavior, 2012)은 철저하게 19세기식 사실주의 소설이다. 기후서사가 흔히 차용하는 근미래 시간배경, 묵시록적 파국, 극단적인 생존투쟁 같은 설정 없이도 기후위기를 소설로 얼마든지 다룰 수 있음을 예증한다는 뜻이다. 2010년 멕시코 중부의 한 촌마을, 제왕나비의 서식지로 유명한 앙간게오(Angangueo)가 기상이변과 진흙 사태로 초토화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소설에서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건이나 묘사는 하나도 없다. 벌목과 생태환경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제왕나비떼가 월동을 위해 (연례 행로인 캐나다가 아닌) 애팔래치아 남부 산맥에 위치한 페더타운(Feathertown)이라는 동네로 이주하는 허구의 설정조차 그렇다.

 

숲은 그 안의 불꽃으로 온통 빛났다. “하느님,” 그녀가 말했다. 하느님과 그녀가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으므로 구원을 요청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어떤 말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입 밖으로 목소리를 그렇게 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조금 더 기울어 대지에 온기를 전해주었고 산은 빛으로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의 동요하는 표면처럼, 더욱 강렬하게 퍼지는 빛이 잔물결 속의 계곡을 들어 올렸다. 모든 나뭇가지들은 오렌지색 불꽃으로 달아올랐다. “오 하느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형언키 어려웠다. 불붙은 나무들, 그것은 불타는 떨기나무였다(출애굽 3장의 일화를 가리킴—인용자). 모세와 에제키엘이 생각났고, 성경의 말씀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더이상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살아 있는 피조물 사이에서 불타는 숯이 오르내리고 있었다.(14면, 이탤릭체는 원문)

 

두 아이의 엄마인 주인공 델라로비아가 자기 집 뒷산에서 목격한 어마어마한 제왕나비떼를 묘사한 장면이다. 수십수백만의 제왕나비떼가 그녀의 눈에 초현실처럼 비치는 것도 물론 사실적인 설정이다. 외간 남자와의 밀회를 위해 산길을 재촉하다가 이 광경과 맞닥뜨리고 발길을 돌리는 상황이 그려진다. 평소 냉담자에 가까웠지만 ‘불타는 숲’이 그녀에게 어떤 계고인 동시에 계시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묘미는 “오렌지색 불꽃”에 대한 델라로비아의 태도다. 그녀는 그것을 종교적 각성이나 회개가 아니라 이전과는 뭔가 다른 삶을 가리키는 어떤 전환의 계기로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다.

델라로비아는 고등학교 때 예기치 않은—사산으로 끝난—임신으로 결혼을 했지만 그로 인해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욕구가 좌절되었음을 의식하는 인물이다. 그같은 좌절 양상에 초점을 맞추면 『비행 습성』의 장르문학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된다. 이 장편을 가정소설(domestic novel)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인데, 가정으로 한정된 관성적 삶의 틀을 깨면서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는 여성 주인공의 고민과 성장을 다뤘다는 점에서 ‘가정서사시’의 한 전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페미니즘과의 모종의 접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콕 집어낼 수 없는 불만을 안은 채 돌봄과 가사노동, 비정규 일자리로 이뤄지는 단조로운 동선을 억척스럽게 유지하는 그녀의 심리적 상황과 새로운 삶의 욕구가 그렇다. 그렇다고 작가가 주부의 고단한 삶에서 페미니즘의 어떤 경향성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완벽한 암컷”이라는 마지막 14장의 제목과 여주인공의 결단에서 경향성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오히려 델라로비아의 인생행로가 혼전 임신으로 낳은 아기를 다른 가정으로 입양 보내야 했던 시어머니 헤스터의 사연과 겹쳐지며 작가는 그런 여성들의 삶을 페더타운이라는 공동체의 유기적 일부로 재현하는 데 치중한다. 시댁 헤스터 집안의 가업인 동시에 델라로비아와 남편인 컵도 거드는 양치기의 생생한 일과도 그렇다.

다른 한편, 『비행 습성』이 기후소설로서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데는 역시 문제적 주인공인 델라로비아의 시댁을 포함한 가정 현실이 핍진하게 재현되는 것 외에도, 페더타운이라는 마을의 생생한 사람살이도 크게 작용한다. 페더타운은 날씨와 기후는 신의 소관이라는 믿음으로 느슨하게나마 결속된 신앙공동체의 성격이 강한 사회다. 따라서 그들에게 기후위기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현상이고 정치적 용어로는 ‘가짜뉴스’에 해당한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의 페더타운에 봄비처럼 비가 연일 이어지고 심지어 홍수가 나더라도 이는 물론 신만이 아시는 일이다. 그런 그들에게 제왕나비떼는 신의 은총이자 선물이다. 여기서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왕년 트럼프 지지자들의 모습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반석 같은 믿음과 경제현실은 별개 문제다.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인 제왕나비떼에도 불구하고 돈 문제는 어쩔 수 없다. 델라로비아의 시부모는 은행 융자 빚을 갚기 위해 문중 산의 숲을 벌목하기로 한다. 나무 상태를 살피기 위해 델라로비아는 시댁 식구들을 대동한 채—그녀에게는 불륜의 장소가 될 뻔했던—‘불타는 숲’을 다시 찾는다. 나비떼의 ‘복음’은 델라로비아에서 남편과 시댁 식구들로, 교회 사람들로 퍼지고 급기야 마을 신문과 인터넷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인 뉴스가 된다. 헤스터는 나비떼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걷는다. 이러한 연쇄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1~4장을 지나면 이후 5~12장까지의 이야기는 사실주의의 정석을 밟으며 진행된다.

선정적으로 합성된 델라로비아의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면서 ‘버터플라이 레이디’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타는 상황이 풍자적으로 펼쳐진다. 제왕나비를 연구하는 오비드 바이런이라는 곤충학자가 뉴스를 듣고 마을로 찾아온다. 유머와 위트가 살아 있지만 사건이 펼쳐지는 양상 자체는 새롭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가령 제왕나비떼가 처한 멸종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뉴스거리에 혈안이 된 취재진의 행태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제왕나비 멸종 상황이 조만간 인류에게 닥칠 파국의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하나하나 포석을 마련하는 작업에 열중할 뿐이다. 기후와 날씨는 신의 소관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심리와 일상을 세세하게 그리면서 그런 믿음과 일상의 방식에 점점 동조할 수 없게 되는 주인공의 점진적 인식 발전 과정에 초점을 맞춰나가는 식이다.

『비행 습성』이 기후소설로서의 실감을 독자에게 안겨주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생태환경에 대한 델라로비아의 더딘 개안(開眼)이 큰 몫을 한다. 하지만 이 개안도 기후위기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나 각성과는 좀 거리가 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한 인간으로서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계속 살 수 없다는 생활상의 자각이 제왕나비떼의 ‘뉴 노멀’ 생태에 의해 임계점에 도달한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때 바이런 박사의 과학자로서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는 주인공의 인식 확대와 심화에 가세한다. 요즘처럼 정보가 개방된 시대에 제왕나비에 대한 생생한 생태보고서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작가도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애초에 과학만능주의로부터 거리를 둔 회의적인 과학자 바이런의 고뇌는 차원이 다르다. 델라로비아 집 헛간에 간이연구소를 차리고 조교들과 ‘현장연구’에 몰두하는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모든 생명의 공속성(共屬性)과 공속적 책임이라는 진실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기후위기라는 것이 어찌하여 기술공학적 묘수가 통할 수 없는 사태인가를 차근차근 드러낸다.

그런 그가 맞닥뜨린 기후위기의 현실은 한마디로 ‘노답’이다. 기후과학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없다. 티나와 같은 앵커를 비롯한 언론매체들이야 제왕나비떼를 보러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마을 사람들 역시 기후위기 같은 거대한 문제보다는 당장의 생계에 몰두한다. 글 쓰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해본다. 2022년 5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한국의 정치현실이 이러한 소설적 상황과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나.

 

그녀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가 끊었다. “티나, 지금 과학자들이 논란을 벌이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충격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예요. 아시아의 유역(流域)을 유지하는 빙하는 무너지고 있어요. 그 정도 정보는 당신의 인턴들도 바로 찾아줄 수 있어요. 북극은 말 그대로 붕괴되고 있고.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 부르곤 했죠. 이제 과학자들은 그 카나리아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카누에 탄 채 나이아가라 폭포 끄트머리에 와 있어요. 그게 당신네 시청자들이 보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하지만 당신네들이 진짜 정신을 차린대도 굼뜬 노를 저어 배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으르렁거리는 낙하지점에 도달했어요. 그런데도 지금이 폭포가 존재하는가를 두고 입씨름이나 벌일 때라고 생각해요?”(367면)

 

이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폭력을 ‘정화하는 힘’으로 규정하고 기후위기의 시대는 간디가 아닌 파농(F. Fanon) 식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 논자가 생각났다.16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그런 폭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정화하는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근원적인 것을 묻는 사유의 자세는 더 절실해진다. 기후위기를 다룬 문학에서 그 가능성은 ‘작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리얼한 것의 드러냄’과 직결되는 쟁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비행 습성』을 통해 소설만의 방식으로, 기후위기의 시대의 ‘희망에 반(反)하는 희망’을 모색하는 면모를 짚어보자.

모색은 세겹으로 진행된다. 킹솔버는 한편으로는 ‘완벽한 암컷’이 살아남아 제왕나비 개체군이 완전히 사멸하지는 않는 (그 나름으로) 엄연한 생태적 순환 싸이클을 묘사한다. 생물학을 전공한 작가다운 그 자세한 묘사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의 끈질긴 생존욕구를 증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왕나비떼를 돈벌이로 삼고 빚을 갚기 위해 벌목을 강행하는 사람들과 자연의 기현상을 미디어 흥행을 위한 도구로 삼는 언론인들을 풍자하면서, 제왕나비의 생태를 연구하는 바이런 박사를 포함한 일군의 연구자들의 일상을 부각시킨다. 이 두 갈래의 서사는 궁극적으로 델라로비아의 삶으로 수렴된다. 바이런 박사의 연구를 도와주면서 제왕나비떼의 출현이 신의 뜻이 아님을 깨닫는 델라로비아는 자아를 인습적인 가정생활로부터 과감하게 탈피시킨다. 바이런에 마음을 (잠시) 빼앗긴 그녀의 갈등이 정리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작가의 마지막 포석이 델라로비아의 독립에 맞춰지는 것 역시 그러한 탈피의 과정이다. 삶의 방위를 좀더 확실하게 깨달은 주인공은 ‘마마보이’ 남편과의 별거를 결심하고 못다 이룬 학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이처럼 가정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한 서사가 탈가정의 비전으로 끝나는 결말에서 여성주의의 승리를 읽어내는 논자도 분명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런 비전조차 장르적 관성의 반복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여성주의의 해방적 의의도 그만큼 제한되는 꼴이다. 이렇게 읽으면 델라로비아의 결단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홍수라는 재난도 기후소설의 또다른 장르상 도식에 가깝다. 주인공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는 상징적 사건임을 암시하지만 정해진 포석이라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비행 습성』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평가한 한 논자는 결론적으로 “우리 시대의 사실주의는 인류세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혁신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17고 썼다.

이런 진단에 동의할 때도 ‘것처럼 보인다’는 유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킹솔버는 기후위기가 결국 모든 이의 가장 내밀한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진실을 시종 설파한다. 동시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델라로비아처럼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라는 사실도 명확히 한다. 그 점에서 델라로비아의 각성의 여정은 개인과 집단의 차원을 동시에 아우른다고 해야 맞는다. 아프리카 콩고의 신식민주의 문제를 포함하여 페더타운보다 훨씬 넓은 세계의 현실을 이야기로 담아온 킹솔버의 창작의 궤적 자체가 그런 진실/사실의 드러냄도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주는 바도 있다. 요컨대 기후소설로서 『비행 습성』의 소설적 성취는 정석의 힘에서 나오며, 이는 사실주의 장편문학의 여전한 위력을 방증한다. 다만, 기후소설이라는 장르서사의 미래가 사실주의와 장르문학의 유산을 현대 작가들이—근대의 거장들이 그러했듯이—얼마나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가에 달려 있고, 『비행 습성』의 의의도 바로 그 점을 환기하는 선에 멈춰 서 있다는 점은 짚어두어야 하겠다.

 

 

4. 맺음말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인류세니 술루세니 자본세니 하는 학계의 신조어들이 넘쳐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지식이나 담론이 부족해서 기후 문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 기후위기와 문학이라는 주제에서도 결국 핵심은 무엇보다 각자의 삶이 먼저 달라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말이 담백해지는 일이라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고 설계하지 않는 한 에너지대전환의 시대도 가능할 법하지 않다. 대전환에 도달하기까지의 이행기는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기후변화의 가속이 인류의 적응 속도를 이미 추월했다는 진단마저 나와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적응도 어디에서의 무엇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여러 차원이 있을 듯하다. 기후위기에 관한 한, 적응은 생태적 내핍에 대한 적응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대로라면 대다수 민중들에게 ‘안빈’이나 ‘청빈’도 사치에 불과한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소용돌이’를 초래한 모든 근대주의 관념들에서 탈피하는 작업이야말로 극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따르지 않는 어떤 기후정의 전략도 온전히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본다. 그간 창비가 꾸준히 개진해온 이중과제론을18 기후위기시대에 자기각성과 생태친화의 담론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반(反)생명적 삶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과 ‘비물질적 실재’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근대문학의 탁월한 성취도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근대문학의 면면을 충분히 변별하지 못한 채 내린 고시의 유죄 선고가 단견인 것은 그런 맥락이다.

오늘날의 기후위기 사태는 예견하지 못했다 해도 이 환란의 시대에 문학으로 맞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가는 드물지 않다. 사회가 아닌 자연의 일원으로 남고자 했던 소로우도 그중 하나다. 그는 ‘스스로 그러한 것’에 순응하며—종이 위에서만이 아니라—땅 위에서도 생태적 내핍 생활이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가를 예증하는 시인이자 사상가, 자연관찰자, ‘시민불복종’의 행동가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필자는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 1854)을 읽으면서 “소로우가 살려낸 그 무수한 동식물들의 생태와 자연의 풍경을 온전히 읽어내기에는 너무도 도시화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고백한 바 있다.19 기후위기의 시대에 자연은 무엇이며 문학은 또 어떻게 자연과 공감하고 말의 시원(始原)적 감각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숙제로 남기는 그의 문장 한 토막을 맺음말로 부기해둔다.

 

자연을 표현하는 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공감하는 믿음직한 독자를 위해 바람과 시냇물을 부려 그 대신 말할 수 있게 하는 사람, 봄에 서리가 밀어낸 말뚝을 박듯이 말들을 그 시원적인 감각에 못 박는 사람, 말을 사용하는 만큼 캐내서 그것을 그 뿌리에 묻은 흙과 함께 종이에 옮겨 심는 사람, 서가의 퀴퀴한 책갈피에서 반쯤 질식해도 너무나 참되고 신선하고 자연스러워 봄이 도래할 때 꽃봉오리처럼 부푸는—아, 해마다 본성에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그런 말을 부리는 사람은 시인이리라.20

 

 

  1. 최근 사례만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특집에 실린 백영경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및 이현정 「기후정의의 정치적 주체 되기」; 『문학인』 2021년 겨울호 특집 ‘기후위기 시대와 문학적 대응’; 김보경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하기」, 『문장 웹진』 2021년 8월호; 전영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지구 생존 가이드」, 『문학동네』 2021년 겨울호; 김기창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민음사 2021.
  2. 탈성장, 채식주의, 지구 절반 야생화 기획 등에 관한 녹색 질문들은 특히 Lola Seaton, “Green Questions,” New Left Review 115 (2019년 1/2월), 105~29면 참조.
  3. 한마디 토를 달면 문학과 기후위기라는 논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우리 평단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일에 골몰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체하는가에 못지않게 해체 이후에는 어찌해야 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만물의 지배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순간에도 인간만이 떠맡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과제는 엄연하기 때문이다.
  4. 한편 인과의 기계적 사슬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서양의 철학도 오늘날 기후위기를 성찰하고 해결하는 데 풍요로운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함직하다. 필자가 흥미롭게 참조한 사례는 Ruth Irwin, Heidegger, Politics and Climate Change: Risking It All, Continuum 2008.
  5. 그런 맥락에서 동양의 ‘자연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의 생태의식에 비견할 만한 자연친화적 감수성과 인간중심주의 비판을 ‘작품’으로 축적해온 서구문학 나름의 면면도 더 공부가 필요하다. 그 필요성은 결론에서 소로우(H. D. Thoreau)의 문장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다시 언급하겠다.
  6. 졸고 「기후위기와 기후소설」, 『현대영미소설』 28권 1호, 2021, 35~65면 참조.
  7. The Great Derangement: Climate Change and the Unthinkab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 한국어판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이 저작은 졸문 「기후위기와 기후소설」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고시의 시카고대학에서의 강연(2015)을 정리하여 3부(이야기들·역사·정치)로 묶은 것이다.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원서와 번역본을 각각 GD와 『대혼란』으로 약칭하고 면수를 병기한다. 번역본을 참조했지만 인용문은 필자 나름의 번역이다.
  8. Amitav Ghosh, The Nutmeg’s Curse: Parables for a Planet in Crisi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1 참조.
  9. 고시는 기후위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서도 (신)식민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선결 과제로 인식하는 인상이다. 물론 그가 제국이나 제국주의를 비판의 준거점으로 삼는 것은 일면 이해가 된다. 다만, 기후위기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탈식민 담론 특유의 관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점은 다른 문제다. 가령 그는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산업화를 정체시킴으로써 기후위기의 시작을 늦춘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진다. 이에 대한 답은‘그렇다’이다(GD 109면; 『대혼란』 148면). 고시의 자문자답은 약간 어리둥절한데, 서구 제국들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면 기후위기도 그만큼 늦춰질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때문에 기후위기가 더디게 찾아왔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식민지의 ‘자연’을 착취하여 자국 지배계급의 배를 불리고 발전주의를 주도한 제국주의 자체가 자본주의 근대의 생태적 모순으로 귀결된다.
  10. 백낙청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창작과비평사 1985, 468~69면.
  11. James Fenimore Cooper, The Pioneers 〔1823〕, Penguin 1988, 248면.
  12. 삶의 서사적 구축을 논하는 과정에서 고시가 주로 의존하는 논자는 모레띠(F. Moretti)인 것 같다. 고시는 모레띠의 필러(filler) 개념을 “소설의 세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시도”로, “즉 소설의 세계를 놀라움이 거의 없고 모험은 그보다 더 없으며 기적은 아예 없는 세계로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GD 19면; 『대혼란』 32면). 가령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서사세계에서 훌륭한 예절(good manners)은 필러의 기능을 수행한다.
  13. 고시는 그 배제 양상을 자신의 독서 실감에 입각해 이렇게 쓴다. “나는 당시의 문학에 일반인이 느끼는 불안이나 불길한 예감의 징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또한 인류가 종말에 대한 직감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할 뜻도 없다. 종말에 대한 직감은 분명 처음 이야기가 생겨났을 때 못지않게 지난 몇십년 동안에도 넘쳐났다. 나 스스로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을 자각한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을 통해 우리 환경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변화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느낌을 전달한 작가를 떠올리려 안간힘을 쓸 때였다. 나는 영어로 글을 쓰는 소설가 가운데 몇몇의 이름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GD 124면; 『대혼란』 166면) 그가 거명한 작가는 밸러드(J. G. Ballard), 애트우드(M. Atwood), 보니것(K. Vonnegut), 킹솔버(B. Kingsolver), 레싱(D. Lessing), 매카시(C. McCarthy) 등이다. 기후위기를 소재 차원으로 한정한다면 작가의 이름이 이처럼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4. 제인 오스틴에 관한 인용 대목은 졸고 「제인 오스틴과 근대적 남성」, 『영미문학연구』 41호(2021년 12월), 80면. 물론 낭만적 감수성과 자연의 문제도 간단치 않다. 필자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논한 세 차원의 자연을 소개하면서 거기서 빠진 루쏘(J. J. Rousseau)의 자연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루쏘가 자연 운운하는 취지를 이렇게 풀었다. 그것은 “복고적 관념의 부활이라기보다는 근대의 질곡 속에서 망각된 영성(靈性)의 현대적 재해석을 요구하는 문제로 남아 있으며 서구 학계에서는 여전히 방치된 상태다. 이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사상적 유산을 답사해서 자기변혁의 계기로 활용해야 할 쟁점일 듯하다. 동학과 원불교의 가르침을 기후위기 및 체제전환과 연결하는 논의가 국내에 없는 것도 아니며 기후변화를 자기 문제로 삼고자 한다면 누구나 떠안아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졸고 「기후위기와 기후소설」 59면, 각주 18 참조.
  15. 여기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썼다. “장르문학 고유의 성취는 게토화된 장르문학 자체의 극복에 다름아니다. 물론 ‘게토’에서도 꽃이 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적 해방구로서의 게토가 문학 특유의 창조성이 발화되는 기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따로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졸고 「장르의 경계와 오늘의 한국문학」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창비 2013, 205면. 2000년대부터 맹렬하게 생산되는 기후소설은 게토화가 한창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를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기후문학의 가능성을 그려보게 하는 인상적인 작품도 없지 않았다. 기후재난의 전세계적 살풍경과 모친을 살해한 한 조울증 소녀의 황지(荒地)와도 같은 내면이 어떻게 조응하는가를 범죄 프로파일러를 방불케 하는 시각으로 파헤친 젠슨의 장편도 그중 하나이다. Liz Jensen, The Rapture, Bloomsbury 2009 참조.
  16. Andreas Malm, How to Blow Up a Pipeline, Verso 2021, 161면.
  17. Adam Trexler, Anthropocene Fictions: The Novel in a Time of Climate Chang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5, 229면.
  18. 이와 관련된 논의는 『이중과제론』, 이남주 엮음, 창비 2009 참조. 이중과제적 문제의식을 더 본격적으로 정리한 최근 사례로는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참조.
  19. 졸고 「『월든』과 근대세계」, 『안과밖』 2014년 하반기호 435~36면 참조.
  20. H. D. Thoreau, “Walking,” Thoreau: Collected Essays and Poems, The Library of America 2001, 2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