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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명전환의 세계감각과 문학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

『꿈에서 만나』 『스노볼』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으며

 

 

강수환 姜受芄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콤플렉스는 나의 힘」 「시가 다시 노래가 되었을 때」 등이 있음.

xysnp@hotmail.com

 

 

1. 디지털 시대, 주체의 분열과 연결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 너를 만나고 싶어 이제.”1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의 세계관은 독특하다. 이들은 현실세계의 ‘에스파’와 가상세계의 아바타에 해당하는 ‘아이’(æ)로 구분된다. 분리된 두 세계에 놓인 이들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지만,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광야’를 떠돌고 있는 ‘블랙맘바’라는 존재가 이를 가로막는다.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두 세계의 존재를 연결하고자 블랙맘바를 찾아 광야로 떠난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설정이다. 일반적으로 가상세계의 아바타는 현실의 사용자에게 종속된 것으로 여겨지나, 흥미롭게도 에스파와 아이는 각자 다른 두 세계에 자리하고 있을 뿐 위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즉 이들은 서로의 ‘나’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다. 이들이 서로를 또다른 ‘나’가 아닌 ‘너’로 부르며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노래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다.

게임 줄거리 같은 요약이지만 마냥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 역시 스마트폰 액정 너머로 소셜미디어 속 저마다의 ‘아이’를 보며 비슷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네가 아닐까. 일그러져버린 환영인 걸까.”2 특히 가상세계 속에서 구성된 ‘나’의 모습과 현실의 ‘나’ 사이의 틈이 클수록 우리는 스크린(거울)에 비친 ‘나’를 의심하고 더 나아가 환영으로 감지하기에 이른다. 마치 에스파와 아이의 관계처럼, 이때 두 세계의 ‘나’는 모두 부정할 수 없는 ‘나’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있는가? 쉬이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나’의 이미지와 현실세계의 ‘나’ 가운데 무엇이 진짜에 더 가까운가? 현실세계의 ‘나’는 젊은 인터넷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자기(내면)의 분신으로 삼는 ‘자캐’나 ‘오너캐’3보다 더 진정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 팬데믹 이후 가상세계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적·사적 논의와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진정한 ‘나’가 위치한 장소는 어디인가? 이 질문에 흔쾌히 답할 수 있기까지, 저마다의 광야를 떠돌며 분리된 각각의 ‘나’를 연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무한히 지연된다.

한편 필사적으로 두 세계의 ‘나’를 연결하려는 에스파의 세계관을 조금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이는 가상세계 속 또다른 내가 통제 바깥에서 따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내가 로그아웃한 후 잠자리에 든 사이, 정지되었으리라 생각했던 가상의 ‘나’가 몽유병이라도 앓듯 온라인 이곳저곳을 배회한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단지 우리의 정체성이 분열된 상태라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 역시 놀라운 일인 것만은 아니다. 비록 현실의 ‘나’는 연결을 끊었더라도, 수많은 불특정 다수와 연결된 가상세계의 ‘나’는 그곳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웹에 남긴 반응들(게시물, 좋아요, 리트윗 등)은 해당 반응과 접속한 또다른 사용자의 알고리즘에 개입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이용자의 활동은 가상세계 속 ‘나’의 타임라인의 질서와 배치를 시시각각 재편한다. 그러므로 잠든 두 세계의 ‘나’가 꾸는 꿈의 형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실의 ‘나’는 기억과 무의식적 욕망처럼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꿈을 길어 올리지만, 가상의 ‘나’는 다른 접속자의 반응과 같은 외부로부터 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을 희망했던 에스파의 가사에서 방점은 ‘연결’이 아니라 ‘너’라는 정확한 대상 위에 찍혀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 세대에게 전지구적인 연결은 마치 자연환경처럼 이미 주어진 상시적인 배경이다. 이들의 불안은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타자와의 연결 가운데 각자가 남긴 행위, 반응, 표출 등으로 인해 ‘나’의 꿈의 형상과 성질이 실시간으로 변형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정작 ‘너’(나)와의 싱크는 이루지 못한 채 분열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티글러(B. Stiegler)의 말처럼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은 우리를 더는 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al) 의미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나누어지고 데이터화되는 가분체(dividual)적 존재로 이끄는 듯하다.4 조각나고 분열된 형태로서의 개인. 이 지점에서 주체는 이미 상징적 정체성 그 자체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오랜 명제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분열과 연결에의 강박 사이에서 분투하는 세대를 위시하며 이들에게로 향하는 문학은 과연 어떤 말을 건네고 있을까? 조우리 박소영 현호정의 소설5을 읽으며 그 단서를 찾아보려 한다.

 

 

2. 꿈의 감염과 주체의 틈

 

청소년소설가 조우리의 『꿈에서 만나』는 감염처럼 전파되는 꿈을 서사화한 작품이다. 소설은 학생들 사이에서 하나의 질병이 배회하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병명은 ‘NARC-19’로, 기면증(narcolepsy)에서 착안한 듯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약 2~3주 동안 발작적인 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이 증상이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잠에 빠지는 이 질병은 겉보기에는 심한 기면증처럼 보이지만, 환자의 혈액에서 공통 바이러스가 발견되어 전염병으로 분류된다. 소설이 의도하는 바는 자명하다. 코로나19로 등교할 수 없고 친구와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현실 속의 청소년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설은 지친 이들에게 잠을 선물하고 멀어진 친구들을 “꿈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팬데믹 상황을 새롭게 고쳐 쓴다. 하지만 꿈을 다루는 만큼, 작품은 이 세대의 꿈과 현실을 둘러싼 어떤 무의식을 드러낸다.

주인공 ‘니나’는 이름보다는 ‘전교 1등’으로 불린다. 싱글맘으로 성공한 엄마를 본받아 “전문직 여성”이 되리라는 포부를 안은 채 “전 세계가 전염병에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1등급의 길을 가겠다”(21면)며 다짐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NARC-19에도 굳건했던 니나의 세계는 학생회장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학교의 NARC-19 대처 방안을 안내하는 교내 홍보물을 제작하게 되는데, 서둘러 작업을 마친 뒤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싶은 니나와 달리 회장은 며칠에 걸쳐 포스터 디자인에 정성을 기울인다. 고작 교내 포스터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며 마무리를 종용하는 니나에게 회장은 반문한다. “그럼 중요한 게 뭔데?”(36면) 그날 이후 니나의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회장이 던진 물음이 불쑥 솟게 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자기 내부의 틈을 자각한다. 니나는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나도 안 읽어 봤어. 엄마가 내 이름을 그 책의 주인공한테서 따 왔다고 했어. 자기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강인하고 총명한 여성이라고, 내가 그렇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 읽으라고 했어. 대학에 간 다음에 읽으라고……. 요새 나는 내가, 중요한 걸 다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일까?”(55~56면)

 

여기서 말하는 책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다. ‘니나’라는 이름에 담긴 엄마의 염원대로 니나는 분명 강인하고 총명한 여성 청소년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중요한 걸 다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니나는 학업을 이유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기 이름의 출처를 살피는 것조차 가로막히고, “읽어 보고 싶지만 읽어 보고 싶지 않아”(56면)라는 진술에서 보듯 본인 역시 그 실체를 마주하기가 두려운 상태다. 이때 꿈은 그러한 불안을 우회하여 자신의 틈과 대면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

공식적인 감염 경로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넷상에는 기이한 가설이 퍼진다. “발병자가 수면 상태에서 만난 꿈속의 인물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옮게 된다는”(41면) 내용이다. 당연히 그럴 리는 만무하다. 바이러스는 접촉을 매개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그러한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이 꿈에 나타날 확률도 높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꿈을, 꿀 것이다. 비밀스럽게”(44면)라고 기대하는 십대 청소년 사이에서 이 가설은 믿고 싶은 것이며, 그렇기에 사실로서 전파된다.

이것은 가짜뉴스의 확산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가짜뉴스의 핵심 또한 그 뉴스를 믿고 싶은 이들의 마음과 신체를 숙주 삼아 각자의 연결망 내부로 빠르게 전파·확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출처나 사실 확인 없이 유포되는 가짜뉴스가 사람들을 붙드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그 비공식성에 있다. 그것은 미디어의 공식적인 언어가 제공하지 않는, 도저히 심정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지금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꿈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뉴스 형식의 가설이 가닿는 곳은 합리가 아닌 우리의 정서와 무의식이다. 논리적인 비판만으로 가짜뉴스의 소비가 중단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소비의 본질은 세계의 소식을 ‘나’가 수용하는 방향을 뒤집어, 세계에 ‘나’(의 무의식과 정서)를 기입하려는 욕망이므로.

이렇듯 우리가 바깥에서 날아든 꿈같은 말에 기대고자 할 때, 그것이 비추는 것은 다름 아닌 각자의 무의식적 소망일 따름이다. 작품 속에서 청소년들은 단순히 어려서, 세상을 잘 몰라서 그 가설을 믿는 것이 아니다. 원인조차 알 수 없는 감염병으로 인해 송두리째 변해버린 현실을, 적어도 받아들일 만한 무엇으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말이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감염병으로 난리통인 현실은 그 가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뜻밖의 핑크 기류”(43면)가 불어오는 장소로 전환된다. 그렇게 꿈은 하나의 뉴스가 되고, 현실은 그 뉴스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어느날 학생회장이 NARC-19에 감염되어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니나는 자신도 그 병에 감염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감염은 곧 회장이 자신의 꿈을 꾸었다는 증례가 될 것이므로. 이제 니나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더는 모르지 않는다. 그의 바람은 회장을 향해 있다. 니나의 소망이 실체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바깥에서 꿈이 날아들어야만 한다. 문득 깊은 잠에 빠지게 된 니나는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기쁨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62면)았음을 고백한다. 정말 회장은 니나의 꿈을 꾼 것일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접촉, 연결, 반응을 증거하는 감염이라는 뚜렷한 징표가 니나를 사로잡았을 때, 니나는 그 꿈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현실을 새롭게 구성해나가기 시작한다.

일례로 감염 이후 니나에게는 “간절히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64면)이 솟구쳤는데, 이는 과거처럼 학업에 대한 조급함 때문이 아니었다. 회장이라는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감염 이전과 이후 학교의 모습은 변함없으나, 이처럼 꿈이 현실의 학교를 바라보는 니나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비록 외부로부터 온 꿈이지만, 이를 통해 니나는 분열된 자기 틈 사이에 감춰져온 욕망을 확인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현실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었다.

결국 ‘나’의 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타자가 ‘나’를 꿈꾸는 것에 있다. NARC-19에 대한 기이한 가설을 믿는 한 감염은 타자의 꿈속에 내가 연결되었다는 확인과 그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전달되는 타인의 어떤 반응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장이 니나를 꿈꾸고 접속했을 때 비로소 니나의 꿈도 현실을 전환하는 힘을 갖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거 주체가 라깡(J. Lacan)의 말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였다면, 지금과 같은 즉각성과 초연결성의 시대 속 주체는 타자의 반응에 의해 구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일시 등의 원리로 해명되어온 꿈의 생성은, 이제 접촉에 따른 정동의 감염과 전파에 의해 이루어진다.

꿈에서조차 감염을 피할 수 없는 소설 속 상황은 “유일한 투쟁은 좋은 감염과 나쁜 감염 간의 싸움뿐”6이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니나는 감염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좋은 감염’을 원했다. 하지만 좋은 감염과 나쁜 감염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앓기 전까지 우리는 이를 분간할 수 없지 않은가? 예전 같았다면 이 문제는 그것을 좋은 감염으로 기꺼이 떠안으려는 주체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니나의 결단은 찾기 어렵다. 니나는 단지 꿈에 감응할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짝사랑의 씨앗”(47면)이 마음에 심긴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한그루의 사랑이 움트기를 바라게 된다.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토양 삼아 조금씩 관계의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이 생장하다가 마침내 열매를 맺는 순간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개체적 형태의 사랑을 이들에게 기대해도 되는 걸까? 이곳에서 사랑은 개체가 아닌 바이러스의 형태로 확산된다. 더구나 이들은, 특히 니나는 그토록 열망하는 상대를 이름 대신 ‘학생회장’이나 ‘전교 1등’과 같은 부분적 특징으로 지칭한다. 이 모습은 두 세계 간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분할된(dividual) 존재의 조각 사이의 마주침에 가깝다. 결국 니나의 마음에 심어진 것은 정확히는 사랑의 씨앗이 아닌 조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만약 이 소설이 디지털 세대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고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단지 코로나19 사태를 새로 쓴 작가의 의도가 전해진 것만이 이유는 아니겠다. 그보다는 가분체가 된 지금의 주체가 꿈을 꾸는 방식을 보다 정밀하게 포착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꿈의 감염으로부터 분열된 ‘나’의 틈을 들여다보는 것은, 다시 너(나)와 연결되기 위해 주체가 거쳐야 할 첫번째 단계다. 하지만 우리는 감염과 같이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행로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타자의 외부적 반응으로 생성된 꿈에 의존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는 걸까?

 

 

3. 좋았던 그때 그 시절로

 

제1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작인 박소영의 『스노볼』은 새롭게 재건된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상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종말 이후를 상상하는 이 소설 곳곳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현시대의 기술적 무의식이다.

인류 문명이 전쟁으로 인해 종결된 이후 평균 영하 41도의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소설 속 세계는 돔 형태를 한 ‘스노볼’의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 따뜻하고 온갖 상품이 즐비한 스노볼 내부와 그런 스노볼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가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내는 혹한의 바깥 세계. 안팎으로 구획된 스노볼의 상황은 한눈에도 불평등하지만, 이 구조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스노볼의 내외부가 서로 적절히 상응하는 교환을 나누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다.

스노볼 바깥 사람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댓가로 “스노볼 드라마를 마음껏 시청”(1권 26면)할 수 있고, 스노볼 안에서는 전력과 각종 혜택을 누리는 대신 ‘액터’로서 의무적으로 ‘스노볼 드라마’를 찍어야 한다. 수많은 카메라에 노출되어 자신의 일상을 빠짐없이 녹화해 바깥으로 송출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골자다.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는 폐지되고 해당 액터와 디렉터는 스노볼을 떠나야 한다. 따라서 디렉터는 더 많은 관심을 유발하고자 액터의 삶을 자극적으로 편집하고 때로는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한편 전력 생산이나 사생활 공유와 같은 “시민의 기본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있다. 스노볼 최고 권력자인 이본 미디어그룹 가문이 바로 그들이다.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듯하지만 “지금의 스노볼 시스템을 만든 재건 가문으로서 이 시스템을 유지하고, 액터와 디렉터를 보조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1권 107면, 강조는 원문)이라는 이유로 스노볼 안과 밖 모두는 이들을 용인한다.

정리하자면 스노볼은 세가지 항의 순환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체제를 제공하는 이본그룹, 노동을 제공하는 스노볼 바깥 사람들, 드라마를 제공하는 스노볼 거주자들. 다시 보아도 이들 사이의 교환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가 공들여 건축해낸 이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균열의 가능성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작품이 강한 몰입감을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웹(카카오페이지) 연재소설이라는 속성을 반영한 역동적인 전개와 속도감 있는 문체도 한몫했을 테지만, 소설의 흡인력은 무엇보다 주인공 ‘전초밤’의 여정에 따라 도통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스노볼에 뜻밖의 틈이 생기고 그 간격이 점차 벌어지는 과정을 빠르게 좇아 읽는 경험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전초밤은 두차례에 걸쳐 스노볼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다. 한번은 바깥에서 안으로. 이는 우리가 니나와 함께 이미 경유한 행로다. 전초밤은 한차례 더 나아간다. 안에서 바깥으로.

소설의 1권은 전초밤이 동료들을 모아 스노볼 내부로 진입하여 생방송이 진행되는 방송국을 점거해 ‘고해리 프로젝트’를 폭로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고해리 프로젝트란 스노볼 최고의 스타 고해리의 드라마가—액터의 변심, 부상, 실종, 죽음 등의 이유로—중단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예비용 고해리들’을 유전자 복제기술로 생산해 스노볼 바깥에서 비밀리에 키워온 계획을 의미한다. 전초밤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길러진 아이였다. 스노볼 바깥 세계에서 스크린 너머로 또다른 ‘나’인 고해리를 보며 꿈을 키우던 전초밤은 막상 스노볼이라는 ‘꿈의 세계’ 내부로 진입한 이후에야, 니나가 그러했듯 그 세계 전반과 자신을 되돌아본다.

드라마 속 고해리가 본질로 취급되고 혹독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온 이들이 도리어 허구의 대용품처럼 여겨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스크린 속 ‘나’로 나타나는 욕망의 환시가 다양한 잠재성을 지닌 현실의 ‘나’들을 제한하고 압도하는 모습처럼 읽힌다. 이렇듯 가상이란 단순히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환상을 대리 충족해주는 꿈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이 전파하는 꿈의 내용과 경로가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재귀적으로 새로이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역습을 가하기 위해 전초밤은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스노볼 바깥의 (고해리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또다른 ‘나’들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분할된 ‘나’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을 마주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신시내, 걸핏하면 총을 들이미는 명소명, 출세를 위해 무엇도 서슴지 않는 배새린 등 전초밤은 이 세계가 추방한 ‘나’들을 모아 스노볼로 향한다. 마침내 방송국을 점거한 이들은 생방송에서 각자의 존재를 이 비윤리적인 프로젝트의 증거로서 비추고,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고해리가 총 몇 명인지 몰라요. (…) 우리 만나요. 다 모여요. 다 같이 목소리를 내서 망가진 삶을 되찾아요.”(1권 425면)

 

흩어진 채 혹한의 현실에 던져진 ‘나’들을 연결하여 꿈의 자리로 향했을 때, 스노볼이 비추는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의 ‘나’들이 잠식되는 이 전도된 관계를 공중에 폭로했을 때, 심지어 아직 발견조차 되지 않은 미지의 ‘나’들을 꿈속으로 불러 모으고자 할 때, 스노볼 체제는 일차적으로 흔들린다.

하지만 타격을 입은 것은 고해리 프로젝트에 관여한 일당 정도이지 스노볼이라는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아직 건재했으므로, 전초밤은 한번 더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바깥으로. 2권에서 전초밤은 스노볼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지하발전소에 잠입해 이를 폭파함으로써 스노볼의 운영체계를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이때 전초밤과 일행은 ‘나’들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고해리와 만난다. 현시되지 못한 현실의 다양한 ‘나’들을 연결해 꿈의 자리에 등록하려는 모험이 1권이었다면, 2권에서 이들은 꿈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나’들의 근원인 고해리와 만나는 데 성공한다. 스노볼이라는 체제하에 다층적으로 분열된 ‘나’들 간의 연결이 완수되었을 때, 비로소 전초밤의 여정은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소설은 부조리한 세계를 전복한 영웅의 모험담인 동시에 분열되고 억압되어온 자기를 실현해가는 한 여성 청소년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전초밤의 모험에는 늘 여성 조력자들이 곁에 자리했다. 일상 전반을 지배하는 오늘날 미디어의 영향력은, 작품에서 보듯 더 많은 잠재성과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기존의 성차별적 응시와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비록 같은 얼굴이지만 순종적이지 않고 계산적이며, 폭력적이거나 야심적인 ‘나’가 현실에서 소거되고, 오직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누군가의 딸이자 여자친구인 형상만을 승인받는 상황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젠더는 중요한 변수로 기능한다. 상대적으로 더 큰 보여짐과 연출에의 압력에 시달리는 여성 간의 연대와 저항이 이루어지고, 끝끝내 이들의 손에 의해 불평등한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을 때, 소설이 전하는 진정성과 장르적 즐거움은 배가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눈여겨볼 점은 소설이 스노볼 체제가 내파된 이후의 결말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다. “제2의 이본이 나타나”(2권 462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세계는 나름의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은 결말에서 한편을 제외한 모든 스노볼 드라마를 종방시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유일한 드라마는 그전까지 촬영의 의무가 없었던 이본 미디어 가문을 담아낸 「투명 감옥」뿐이다. 처벌의 의미를 담은 처분일 테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존 액터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수의 드라마만이 송출되는 20세기 매스미디어의 풍경이 복원됨으로써 세계의 안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도 없고, 잡지 『TV 가이드』를 뒤적이며 채널 편성표를 살피는 등 스노볼 체제의 미디어 풍경은 이미 매스미디어 시절의 그것과 근사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설이 매스미디어로의 회귀를 대안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은 모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스노볼의 기존 생태계는 수많은 콘텐츠의 난립으로 다중적 세계를 구성하는 유튜브의 풍경 일부와 오히려 더 닮아 있다.7 이는 미디어 통제에 기대어 불평등한 체제를 통치하는 설정의 또다른 텍스트인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시리즈8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 판엠의 독재자 스노우는 매해 캐피톨 바깥의 각 구역에서 소년 소녀를 한명씩 선발해 데스게임을 시키며 이를 TV로 방영한다. 이것은 일반인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형식상 『스노볼』의 드라마와 유사하다. 그러나 스노우의 미디어 통치 전략의 목표는 공포에 질린 대중이 희망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9 이를 위해 미디어는 하향식으로 프로그램을 제작·송출하고, 대중은 꼼짝없이 스크린 앞에 모여 방송을 시청해야만 한다. 이 광경은, 집단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흥미, 관심사와 생각의 공유체(shared body)”를 통한 집단적 기억에 있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알박스(M. Halbwachs)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10 즉 ‘헝거 게임’이란 공포와 무력감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신체로서의 대중을 생산하는 미디어 장치다.

하지만 스노볼은 정반대다. 이곳의 통치자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을 액터로 기용해 역으로 꿈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데 주력한다. 액터들은 “열과 성을 다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쉬지 않고 사건 사고를 만들어”(1권 125면) 각자의 채널에 송출하고, 그 액터 수만큼의 채널들이 모두 연결될 때 비로소 스노볼이라는 사회가 구성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미디어의 관점에서 본 스노볼 내부의 세계는,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형태이기보다는 무수한 개성을 지닌 ‘나’들이 모일 때에야 소급적으로 실체를 갖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소셜미디어 시대의 세계상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스노볼의 세 항은 이렇게 고쳐 쓸 수 있겠다. 플랫폼을 제공하는 이본그룹, 구독·조회수·후원으로 참여하는 스노볼 바깥 사람들, 콘텐츠를 게시하는 인플루언서로서의 스노볼 거주자들. 이렇듯 저 스노볼이라는 세계의 출처는 먼 미래도 지난 과거도 아닌 바로 작금의 미디어 현실이다. 결국 『스노볼』은 매스미디어적 통제의 외피를 두르고 있을 뿐, 실은 지금의 소셜미디어 체계가 만들어내는 모순에 저항하고 분열된 ‘나’들을 잇는 이야기다. 앞서 매스미디어로의 ‘회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11 매스미디어 시대를 그리는 중에도, 디지털 시대의 독자와의 접속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 소설의 무의식은 소셜미디어의 체계 아래에 뿌리를 두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묻게 된다. ‘진정한’ 매스미디어로의 회귀를 통해 디지털 시대 속 주체의 분열이라는 문제는 해소될 수 있는 걸까? 유명인의 드라마를 시청하는 ‘관객’의 자리로 돌아가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이상을 복원한다면, 전초밤이 분열된 자신의 조각들과 재회했듯 우리도 다시 너(나)와 연결될 수 있을까? 이미 20세기를 거쳐 지금 이곳에 도달한 경험에 따르면 전망은 밝지 않다.

 

 

4. 접속의 정향을 뒤집기

 

회귀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여기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또다른 텍스트가 있다. 제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인 현호정의 『단명소녀 투쟁기』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여성 청소년의 투쟁기’로 새로 쓴 연명설화(延命說話)다. 열아홉살 ‘구수정’은 용하다는 점쟁이 북두에게 “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12면)는 예언을 듣는다. 열아홉의 나이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억울하거니와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그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연명하고자 북두가 일러준 대로 남동쪽으로 떠난다. 그 길에서 수정은 죽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안’, 커다란 개 ‘내일’을 만나 함께 저승으로 향한다. 이들의 여정은 육화된 죽음이라 할 저승의 신을 죽임으로써 종결된다. 단명의 운명을 짊어진 주인공이 절대적 존재를 찾아 연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물리치고 본인이 절대자의 자리를 자임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설은 연명설화의 현대적 재해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을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서사라 말한 건, 우선 수정의 모험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다름 아닌 꿈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수정은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다. 손목을 긋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오히려 꿈속에서 연명에의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꿈에서 저승의 신을 물리치고 꿈 바깥의 현실로 살아 돌아온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치 전초밤이 스노볼의 가장 밑바닥에 숨겨진 지하발전소로 향했던 것처럼, 수정이 마지막에 다다른 곳 역시 정확히 말하자면 꿈속의 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정의 꿈속에서 꿈을 꾼 이는 본인이 아닌 이안이었다. 반복되는 꿈속에서 이안은 자신과 수정이 병실에 나란히 누운 모습을 본다. “만약 그게 현실이고 이게 꿈이면 어떡하지?”(91면) 하는 불안을 토로할 만큼 꿈은 생생하다.

수정은 “이게 꿈이고 그게 현실 같으면, 여기서 깨어나 보라”며 “깨지도 못하는 꿈이 어떻게 꿈이냐? 그건 정말 꿈이어도, 꿈이 아닌 거야”(92면)라고 이안의 말을 날카롭게 부정하지만, 정작 수정의 귀환은 자신이 부정했던 이안의 꿈을 현실화한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병실에서 깬 수정은 이안이 맞았다는 사실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수정은 틀리지 않았다. 깨지 못하는 꿈을 꿈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는 없을까? 수정이 도착한 현실이란 꿈의 반대말이 아니라 차라리 꿈속의 꿈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아픈 이들이 서로의 생을 나지막이 응원하는 병실이 바로, 온몸으로 생사를 건 투쟁기를 쓰던 이안과 수정이 꾼 꿈이었노라고.

지금까지의 독해를 수정의 말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깨지 못하는, 그래서 현실과 쉽게 분리되기 어려운 가상(꿈)은 가상이어도 가상이 아니라는 말로 바꿔 써볼 수 있겠다. 이는 ‘나’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닌 형상을 스크린(거울) 너머에서 마주하는 디지털 세대의 당혹감을 살피면서 이미 한차례 거쳐온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은 한발짝 성큼 더 내디딘 셈이다. 우리가 발 디디는 현실을 의문에 부치며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가상이 우리의 현실 저편에 자리하는 꿈의 세계이듯, 어쩌면 현실 또한 가상세계가 꾸는 꿈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안에서 바깥으로라는 표현은 정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안에서 또다른 안으로 향하는 소설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여정을 살펴보면 우선 수정과 이안은 연명과 죽음이라는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저승의 신이 부여한 임무를 따른다. 그 임무란 저승의 신이 준 명부 속 인물들을 찾아 죽이는 일이다. 둘은 장소를 이동하며 명부에 떠오르는 이들을 찾아 차례대로 처치한다. 이 대목은 윤경희가 평했듯 “동시대의 디지털 미디어에 기반한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창작 기법”을 “응용하고 혼종”12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의 말처럼 “서사가 진행되는 데 있어서 장소 단위의 변화가 중요 요소로 설정되고, 장소마다 인물이 특정 과제를 수행하고,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료할 때마다 생명-시간이 연장되고, 다음 장소로 이행하여 다음 임무의 수행을 반복하는 단선적 구조는 스테이지 공략형 게임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연상시킨다.”13

자기 운명을 걸고 투쟁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주체의 꿈으로 읽히기 쉬운 이 소설로부터 디지털 미디어의 흔적을 발견하는 윤경희의 안목은 분명 탁월하다. 다만 장소 이동과 임무 수행을 반복하는 단선적 형식을 이유로 이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영향이라 규정하는 것은 어딘가 허전한 면이 있다. 시험이 부여되고 이를 통과하는 과정 끝에 목표를 성취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미 많은 설화에서 폭넓게 발견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스테이지 공략’ 형식의 투쟁기를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추정컨대 명부에 떠오른 인물들은 현실 속 수정이 자살을 시도한 이유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수정과 이안이 가장 처음 죽인 인물은 악사(樂士)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추문을 노래하는 자였다. 악사를 죽인 후, 수정은 그가 자신의 담임교사와 닮았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젊은 교사였던 그는 평소 자신의 친구들과 유흥가를 배회하곤 했고, 종종 그곳을 지나던 수정과 마주칠 때마다 수정의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었다. “모멸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그의 가족을 상상하곤 했다”(68면)는 수정의 기억을 미루어 본다면 이것은 필시 수정을 모욕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추문을 노래하는 자와 닮은 그가 읊었을 말들의 내용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다음 이들이 죽인 인물은 청소부다. 그는 질서에 어긋나는 얼룩 같은 존재들을 청소하려는 자다.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청소부는 수정과 이안을 죽이려 하나 역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가 처치되자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명부의 한 페이지가 날아올라 사라진다. 앞서 죽은 악사/담임교사가 구체적인 인물인 것에 비해 청소부는 조금 더 추상적·상징적이다. 청소부는 본인들이 세운 기준과 잣대만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기성세대 일반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후 명부에 등장하는 이들은 점차 사람의 형태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눈-인간, 모기-인간, 허수아비-인간.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체의 부분이자 기괴한 조각이다. 이 부분 대상들은 아마도 수정을 응시하고(눈), 빨아들이거나 소진시키며(모기), 제자리에 서서 방관하는(허수아비) 추상적 존재 일반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정의 여정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떠벌리는 자, 기성세대의 폭력적인 억압, 그런 상황에 놓인 수정을 응시하고, 소진케 하며, 방관하는 이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들을 물리치던 중, 다시 말해서 스테이지를 옮겨가며 임무를 완수하는 가운데 문득 수정과 이안은 자신이 죽인 자들을 생각하며 슬피 운다. 일반적인 민담이나 게임의 문법에서 이 죽은 괴물들은 주인공이 통과해야 할 시험의 일부에 불과하며, 문제를 풀고 나면 이들의 이야기는 대개 다시 펼쳐질 일이 없다. 하지만 수정과 이안은 자신이 죽인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린다. 수순대로 다음 스테이지를 기다리던 독자라면 당혹감을 느낄 법한 전개다. 이는 마치 이미 보고 넘겨버린 타임라인의 게시글이 새로운 의견과 함께 공유되어 재차 스크린에 나타난 상황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정과 이안이 자신과 접속했던 이들이 남긴 슬픔의 정동에 감염되어 더 나아가지 못할 때, 그렇게 이미 지나간 죽음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현재의 타임라인 위로 반복적으로 되돌려놓을 때, 단선적 시공간은 점차 비선형적으로 휘기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수정과 이안의 명부에 그려진 초상화는 바로 서로의 얼굴이었다. 살거나 죽기 위해 이들은 함께 싸워온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 이안은 죽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죽기를”(37면) 바라며 학대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명부 속 인물들이 모두 수정의 자살시도와 관계되어 있었다면 이안도 그러할 것이다. 뒤로 갈수록 명부 속 인물의 화소가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에 가까워지는 것을 고려하건대 이안은 수정 안의 죽고 싶어하는 또다른 내면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죽여 없애고 삶을 이어가라는 것이 저승의 신이 말하는 질서일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이안이 아닌 죽음에 칼을 겨누기로 한다.

저승의 신을 쫓던 수정은 죽은 모든 이들이 있는 지하감옥으로 떨어진다. 이곳에는 수정과 이안의 손에 의해 죽은 이들도 갇혀 있다. 자신이 죽인 자들을 위해 울었던 수정은, 비록 복수당할지도 모를 테지만, 그들이 반갑다. 이때 갇힌 자들이 외친다.

 

—우리를 풀어 주면 우리가 살아날 텐데. (…)

—우리가 살아나면 다른 이들을 풀어 줄 텐데. (…)

—모든 이가 되살아나면 질서가 무너질 텐데. (…)

—그럼 저승의 신이 죽을 텐데.(106~107면)

 

지난 고통스러운 관계, 기억, 존재들을 죽이고 지우는 일은 ‘나’의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죽지 않고 다만 깊숙한 심연 아래 갇혀 있을 뿐이므로, 수정은 좀더 근원적인 해결책을 강구한다. 죽은 자들을 모두 풀어내 되살리고 저승의 신을 죽여 질서를 무너뜨리는 편을 택한 것이다. 수정은 게임이 제안하는 행로를 질서있게 답습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무질서와 혼란이 야기하는 불안에 맞서 세계를 재편하고자 한다. 최초 장소를 이동하며 단선적으로 관계 맺었던 이들과의 접속의 정향은 조금씩 비선형적으로 휘어가다가 이윽고 무질서하고 무차별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과 마주친다.

 

소셜 네트워크, 메시지, 그리고 일상의 모든 업로드는 미디어 생활의 배면에 숨어 잠재적인 재발견, 재연결, 재조정을 기다리다가 (우리 스스로와 타자의) 잠재적·준잠재적 연결을 재활성화해 과거 관계를 변형시키는, 다중의 (역설적이지만) 실시간 및 휴면 기억을 연속해서 축적한다.14

 

축적된 과거의 조각들은 언제든 연결되고 재활성화되어 그 관계를 변형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수정은 죽여 없애거나 묻어버리고 싶었던 (일종의 휴면) 기억과 존재를 다시 끄집어내, 그들과 ‘나’ 사이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접속의 정향과 연결점을 새롭게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꿈의 세계를 새롭게 재편한 셈이다. “모든 이가 되살아나면 질서가 무너질 텐데.” 무너지는 것은 정확히는 저승의 질서다. 수정이 기존의 접속 구조를 허물고 꿈의 질서를 주관하는 자리에 스스로를 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꿈이 그토록 꿈꾸던 삶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더이상 이곳에 전통적 주체와 개인은 없다고, 가분체로서 데이터화되고 알고리즘에 의해 처리되는 존재만 있을 뿐이라고. 일종의 묵시록적 예언처럼 들리는 말이기도 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너(나)와의 연결을 포기할 수 없다. 만약 이 시점, 존재의 분열이 발생하는 근거지가 우리의 가상(꿈)에 있는 것이라면,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주체화의 가능성이 새롭게 점화되는 자리 역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안에서 안으로 이르는 길은, 다시 말해 가상(꿈)의 토대 위에서 종전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계획하기 위한 도정은, 감염의 논리와 경로를 흐트러뜨리고 꿈의 질서를 주도하려는 주체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돌고 돌아서 결국, 문제는 다시 주체다.

 

 

  1. aespa 「Black Mamba」(2020)의 가사.
  2. 같은 곡.
  3. 자캐란 ‘자작 캐릭터’의 준말로 개인이 특정한 설정을 갖추어 창작한 캐릭터, 오너캐란 ‘오너 캐릭터’의 준말로 캐릭터의 주인인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캐릭터를 뜻한다.
  4. Bernard Stiegler, The Age of Disruption, Polity Press 2019, 190면.
  5. 이 글이 다룰 텍스트는 조우리 『꿈에서 만나』(사계절 2021), 박소영 『스노볼』(전2권, 창비 2021), 현호정 『단명소녀 투쟁기』(사계절 2021)이다. 세 텍스트는 모두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청소년소설, 영어덜트 소설, 일반소설로 범주를 각기 달리 표방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여기서 각 장르의 정의와 개념상의 차이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영어덜트물, 청소년소설, 장르소설 이 세 갈래가 하나로 모이는 청소년소설의 장르화 경향”(오세란 「청소년소설다움을 넘어서」,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60면)으로 서로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작금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점은 오늘날 디지털 세대 독자군을 의식하며 쓰인 텍스트로부터 발견되는 어떤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6.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 104면.
  7. 실제로 소설 속 스노볼 드라마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찰 예능’과는 조금 다르다. 관찰 예능의 재미는 무대 위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의 평범한 일상을 시청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스노볼 액터는 애초에 평범한 거주자이며 그들에게는 스노볼 내부의 세계가 곧 무대다. 무대와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이들의 드라마는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은 유튜버들)의 ‘브이로그’(vlog)에 더 가깝다.
  8. 수잔 콜린스(Suzanne Collins)의 ‘헝거 게임’ 시리즈는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 2008), 『캣칭 파이어』(Catching Fire, 2009), 『모킹제이』(Mockingjay, 2010)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어판 이원열 옮김, 북폴리오 2009, 2010, 2011.
  9. 주인공 캣니스 애버딘은 ‘헝거 게임’을 이렇게 요약한다. “똑똑히 봐둬. 우리가 너희 아이들을 데려다 희생시켜도,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너희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박살내버릴 거야.” 『헝거 게임』 23면.
  10. Maurice Halbwachs, The Collective Memory, Trans. Francis J. Ditter, Jr. and Vida Yazdi Ditter, Harper&Row 1980, 118면.
  11. 이는 전초밤 일당이 생방송 방송국을 점거한 시도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발견된다. 전통적인 방송 미디어가 진실과 정의를 실현하는 통로로 채택된 점이나, 생방송 뉴스가 마치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식의 비장한 감각을 선사하며 기능하는 모습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Todd Gitlin, The Whole World is Watch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참조.
  12. 윤경희 해설 「연명담의 현대적 재구성과 재해석」, 『단명소녀 투쟁기』 139면.
  13. 같은 글 144면.
  14. Andrew Hoskins, “Memory of the Multitude: The End of Collective Memory,” Digital Memory Studies, Ed. Andrew Hoskins, Routledge 2018, 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