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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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전쟁은 모두의 패배다

 

 

윤석준 尹錫俊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및 사회융합자율학부 정치학 전공 교수. 공저서 『유럽의 타자들: 구별짓기의 역사와 정치』 『세계대전과 유럽통합 구상』 『박물관으로 보는 유럽통합사』 등이 있음.

 

이동기 李東奇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 저서 『비밀과 역설』 『현대사 몽타주』 『한반도 평화번영론의 새구상』(공저) 등이 있음.

 

제성훈 諸成勳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 공저서 『신한반도체제 실현을 위한 미·중·러의 세계전략 연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엇갈리는 세계』 등이 있음.

 

황수영 黃琇暎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국제연대위원회 팀장.

 

 

왼쪽부터 이동기 윤석준 제성훈 황수영 Ⓒ 이영균

왼쪽부터 이동기 윤석준 제성훈 황수영 Ⓒ 이영균

 

 

이동기(사회) 반갑습니다. 여름호 대화의 주제는 ‘우끄라이나전쟁과 국제질서의 변화’입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끄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를 냈고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혼미합니다. 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와 영향에 대한 예측과 진단, 그리고 이번 전쟁이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와 더불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등을 두루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서양현대사를 전공했고, 강원대 대학원 평화학과에서 냉전과 평화정치, 평화사상과 이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에서 러시아 정치·경제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러시아·유라시아팀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러시아 대외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황수영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한반도·동북아 평화, 군비 축소 등을 목표로 평화군축 캠페인과 국방·외교정책에 대한 모니터링 활동을 하고 있고요, 우끄라이나전쟁 발발 이후에는 여러 시민단체들이 함께 ‘우끄라이나 평화행동’을 꾸려 3월부터 ‘금요평화촛불: 우끄라이나에 평화를’ 문화제와 집회 등을 진행하며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모아 내고 있습니다.

 

윤석준 성공회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그룹에서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의 남북경협사업 전략기획업무를 담당했는데요, 이때의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결과 중심적 ‘통일’보다 과정 중심적 ‘통합’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유럽통합과 개발협력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의 원인과 배경

이동기 우끄라이나전쟁이 시작된 지 두달이 넘었고 러시아의 주장에 의하면 2단계로 접어든 지도 한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협상은 진전이 없고 전쟁은 장기화되는 가운데 러시아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죠. 그간 러시아와 우끄라이나 간 역사에서 갈등이 없지 않았는데, 관계가 악화된다고 해서 곧장 전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거든요.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부터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제성훈 이번 전쟁은 러시아와 우끄라이나의 전쟁이 아니라, 러시아와 서방, 특히 미국과의 전쟁입니다. 우끄라이나는 전쟁의 무대일 뿐이죠. 그 원인을 러시아와 우끄라이나 양국의 갈등 또는 뿌찐(V. Putin) 러시아 대통령의 정신상태에서 찾는 것은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겁니다. 이번 전쟁은 탈냉전기 계속된 미·러 갈등,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패권 전략인 나토 확대와 러시아의 패권 전략인 탈()소비에뜨 지역통합 프로젝트 사이의 충돌이 배경입니다. 미국은 냉전이 그들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세계질서의 독점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러시아는 함께 탈냉전 시대를 열었으니 그 주도권을 공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 러시아가 경제력을 회복하면서 그러한 열망이 더 강해졌죠. 2013년 말 촉발된 우끄라이나 위기에서 본격적으로 둘 사이의 충돌이 시작됐고, 지난 8년간 진행된 돈바스내전 역시 이번 전쟁의 전조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우끄라이나전쟁을 탈냉전기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위한 패권 전쟁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준 냉전 종식 이후 짧은 단극시대를 지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시대로 규정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질서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동북아시아에 있다보니 미국과 중국의 갈등구조에만 주목하게 되지만, 유럽에서 보면 서구와 러시아의 갈등은 늘 잠재해왔죠. 나토의 동진(東進)으로 인해 이 갈등구조가 점차 활성화되고 우끄라이나와 러시아의 국내정치 요인들도 맞물리면서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러시아 갈등구조에서 미국과 함께 한 축을 구성해온 유럽이 전략적인 자율성을 확보해간다면 지금의 극단적인 구도가 조금은 완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희망적이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황수영 이번 전쟁은 명백히 러시아의 선제공격이고, 주권 침해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침공은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해온 국제사회의 노력을 망가뜨리는 행위입니다. 러시아가 느끼는 안보 위협을 외교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전쟁을 막지 않았습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점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번 전쟁은 너무 큰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어요. 앞으로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군사주의의 득세입니다. 이번 전쟁으로 여러 국가에서 군비 증강을 예고하고 있는데, 이는 전인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기후위기로 이미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잖아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여러 분쟁과 전쟁으로 수천만명의 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이런 시급한 위기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할 자원을 각국이 전쟁 준비에 낭비하게 될 게 우려됩니다. 특히 기후위기는 각국이 긴밀히 협력해 해결해나가야 하는 문제인데, 군비 경쟁과 진영 대결이 심화되면 효과적으로 다루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군사 활동으로 배출되는 탄소 문제도 있고요. 하루빨리 휴전하고 러시아, 우끄라이나, 나토 소속 국가들이 한 테이블에 마주앉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이동기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 않나요? 1990년대 러시아 옐찐(B. Yeltsin) 대통령 집권기에는 꽤 사이가 좋았고, 9·11테러 직후에도 러시아 나름의 이유로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지지하고 협력하기도 했죠. 물론 미국과 나토의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불만은 오래전부터 표출되어왔고, 미국 내 현실주의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도 나토의 동진이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 거라는 예측이 있었습니다만, 하필 왜 이 시점일까요? 일부 학자들은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드러난 미국의 세계전략상의 결함이나 후퇴 양상이 계기가 된 것 아니냐는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는데요.

 

제성훈 물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영향도 있지만, 좀더 직접적인 이유는 러시아가 우끄라이나 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작년 11월 초부터 러시아가 군사적 시위를 벌였는데, 첫번째 목적은 우끄라이나의 나토 가입 저지였습니다. 우끄라이나는 유로마이단(2013년 11월 우끄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촉구하며 발생한 시민혁명) 이후 2017년 개정 헌법에 나토 및 유럽연합 가입을 국가적 목표로 명시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왔죠. 이에 러시아는 우끄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포기시키는 한편 나토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해서 안보적 위협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두번째 목적은 2014년부터 8년간 진행되어온 돈바스내전 관련해 민스끄협정(2014년 4월 발발한 돈바스내전의 정전협정) 이행을 촉구하고, 돈바스 지역의 특별지위를 보장받아 우끄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두가지 목표의 달성이 어려워졌습니다. 우선 러시아가 올해 1월 중순에 미국과 나토에 각각 안보조약 및 협정 초안을 전달했는데, 미국은 이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유사한 상황이던 1997년과 2002년에는 타협책을 제시한 반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미국이 어떠한 타협책도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침공예상일을 지목하면서 러시아의 침공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또 나토가 명목상 가입을 원하는 국가를 막을 수 없다는 개방정책을 고수하는 가운데 우끄라이나도 나토 가입을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고요. 마크롱(E. Macron) 프랑스 대통령이 타협안으로 중립화를 제시하고, 미국과 나토가 파병은 없다고 공언했음에도 그랬습니다. 젤렌스끼(V. O. Zelenskyy) 우끄라이나 대통령은 오히려 침공 이전인 2월 19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한 고강도 제재를 요청했고, 이를 촉구하기 위해 핵무기 포기 재고를 암시하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2월 17일을 기점으로 돈바스 지역의 교전이 격화되고 우끄라이나의 군사적 공세가 계속됐는데, 우끄라이나정부는 민스끄협정 이행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요. 러시아정부로서는 370만명에 달하는 친러 성향의 주민을 남겨두고 또다시 물러서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 시점에서 뿌찐은 이렇게 확신했다고 봅니다. 우선 미국·나토와의 협상에서 진전을 기대할 수 없고 우끄라이나도 나토 가입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 우끄라이나는 민스끄협정을 이행할 생각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우끄라이나의 군사력은 더 강해지고 민족주의는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선택지는 두가지입니다. 외교적 해결에 기대를 걸거나, 우끄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신속하게 제압하고 서방과 협상을 하는 것이죠. 불행히도 러시아는 후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동기 이번 침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제성훈 저는 돈바스 지역에서 교전이 격화되더라도 러시아가 제한적으로 개입할 것이지 이처럼 전면 침공은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러시아의 우선적 목표가 우끄라이나, 특히 그 국민을 포섭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목적에서 뿌찐은 2021년 7월 ‘러시아인과 우끄라이나인의 역사적 통합에 대하여’라는 글을 러시아어와 우끄라이나어로 발표했죠. 두번째로, 인구가 4천만명에 달하고 영토도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우끄라이나를 러시아군이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번째로 지난 8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우끄라이나군의 전투 능력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제기한 나토 확대의 부당성과 러시아가 수행한 대응조치의 정당성이 국제사회의 공감을 어느정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침공이 이루어지면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침공 직전까지 러시아의 수많은 고위인사가 침공을 부인했고, 정말 몰랐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침공 결정이 뿌찐을 비롯한 매우 협소한 범위의 핵심 인사들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동기

이동기

이동기 다른 측면에서 원인을 살펴보면, 1987년 탈냉전 분위기가 조성된 이후 대안적인 유럽 안보 질서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당시 고르바초프(M. Gorbache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유럽 공동의 집’ 구상을 언급했죠. 독일 통일을 계기로 유럽연합이 이루어질 때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지 못하고 유럽 안보 질서의 흐름이 나토 동진으로 귀결된 것이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윤석준

윤석준

윤석준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유럽 통합은 두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전쟁 없는 대륙을 만들겠다는 성찰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제안했던 ‘유럽 공동의 집’은 사실 당시 유럽에서 폭넓게 공감대를 얻지 못했어요. 유럽 통합 과정에서 ‘과연 유럽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에 대해 숱한 논의가 있었지만, 지리적·문화적·정치적 그 어떤 정의로도 러시아는 유럽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유럽사회 일각에 은밀히 내재해 있는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를 고려하면 러시아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았을 겁니다.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달려온 유럽 통합의 여정은 엄밀히 말하면 냉전시기에는 서유럽 국가들만의 프로젝트였고, 탈냉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전쟁이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통합을 통해 진척시켜온 유럽의 평화프로젝트 실패라기보다는, 미국과 러시아 간 근본적인 갈등구조 속에서 유럽이 전략적 자율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기 그렇다고 미국의 책임만 강조하기에는 1989~91년 탈냉전 당시와 1990년대의 여러 ‘잃어버린 평화의 기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 유럽 내 여러 정치세력들이 새로운 안보 내지 평화체제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펼쳤음에도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나토 중심의 안보 질서에 고착했고, 나토의 동진을 원했습니다. 나토가 이번 전쟁 발발의 중요한 맥락이라 볼 때, 지금 상황을 미국의 일방주의 문제로 보는 것 역시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우끄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나서고 있어 논란인데요. 직접 참전하지는 않지만 이는 전쟁에 발을 더 깊숙이 담그는 것이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입니다. 유럽연합은 평화프로젝트로서는 유럽 영내의 평화를 추구했지만, 동시에 ‘평화열강’을 자임해왔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에 유럽연합의 주요국들이 무기를 제공하면 그런 지향과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요?

 

제성훈

제성훈

제성훈 저도 이번 나토 확대 움직임으로 인한 상황 악화에 유럽 국가들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안정한 동유럽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었고 러시아의 잠재적 위협도 막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 주도의 기존 안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동의했겠지만요.

 

윤석준 유럽을 다른 대륙의 국가나 지역과 동일하게 생각하면 종종 오해가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유럽 정치에는 이중의 층위가 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유럽 통합을 심화·확대해오면서 오늘날 유럽연합으로 이어져온 유럽 층위의 정치가 있고, 또 개별 회원국들의 주권국가 층위에서의 정치가 있습니다. 나토 동진과 관련해 ‘유럽에 책임이 있다’고 하면 유럽을 지나치게 단순화·일반화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마크롱은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한 외교적 계기를 만들고자 올초부터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반면, 최근 4연임에 성공한 오르반(V. Orbán) 헝가리 총리는 우끄라이나전쟁은 헝가리의 일도, 유럽의 일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국가마다 상이하게 접근하고 있죠. 유럽 통합은 오히려 이렇듯 주권국가들의 다양한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던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초국가적인 정치 동학의 결과물입니다. 유럽 차원의 외교·안보정책이 처음 제도화된 건 1993년 마스트리히트조약부터고, 이것이 더 안정적으로 정비된 건 2009년 리스본조약 발효부터입니다. 유럽연합으로 이어져온 유럽의 평화프로젝트는 반세기 넘게 역내 평화를 만드는 데 주력해왔고, 이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역외 평화에도 기여하기 위한 제도적·정치적·정책적 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유럽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험 문제를 받아든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수영

황수영

황수영 그러나 무기 문제는 확실히 염려가 됩니다. 2014년 러시아의 끄림반도 강제 합병 이후, 이미 유럽연합은 러시아로의 무기 수출 금지 등 제제를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15~20년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등 10개국이 약 5천억원 규모의 군사 장비를 수출했다고 합니다. 끄림반도 합병 이후에도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전쟁 준비를 도왔던 셈이죠. 이번 전쟁을 명분으로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각종 무기 도입이나 국방예산 증액을 공식화하고 군비 증강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도 염려됩니다. 이 전쟁으로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지도 점점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방산업체의 주가가 연일 상승하고 있는데, 가령 대전차미사일 재블린 등을 생산해온 록히드마틴의 주가가 14% 올랐고, 탈레스는 38%, 레이시온은 14% 주가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무기 공급으로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요? 휴전을 위한 중재보다 무기 지원을 앞세우는 것은 전쟁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동기 전쟁의 배경을 논할 때 외부적 요인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끄라이나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두 국가의 복잡한 관계, 내부적인 요인도 배경이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제성훈 우선 소련 해체 이후 우끄라이나는 국민국가로서 통합된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끄라이나 남동부 지역과 북서부 지역의 차이가 큰데요, 역사적으로 남동부 지역은 러시아제국에 일찍 편입되어 상당히 ‘러시아화’되었고, 두 지역 간에 종교적·산업적 차이도 존재합니다. 두 지역에서 생각하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지향도 다르죠. 이렇듯 정체성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패권 전략이 충돌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는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상당히 보수화되기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서구 문명, 특히 유럽에서 찾으려 했다면, 2010년대부터는 독자적인 문명과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어요. 2020년 개정된 러시아 헌법이 단적인 예입니다. 헌법에 최초로 ‘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가 하면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정의하고, ‘러시아는 소련의 계승자’라고도 명시했죠. 이렇듯 보수주의가 확대되는 가운데 자신들이 생각하는 문명적 국경이 물리적 국경과 다르다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러시아 말로 ‘루스끼 미르’라고 하는, 이른바 ‘러시아 세계’의 경계는 지금의 국경보다 더 넓은 것이고, 이 관점에서면 우끄라이나는 ‘루스끼 미르’로 ‘복귀’해야 하는 거죠. 이러한 인식이 대외적으로는 신수정주의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탈냉전기 서방이 수정한 세계질서를 다시 수정해야 하고, 우끄라이나에 대한 지정학적 야심은 곧 물리적 국경과 문명적 국경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신수정주의적 노력인 것입니다.

 

이동기 시기적으로 2010년대가 러시아 보수화의 분기점이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성훈 우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나토의 계속된 확대와 유럽 미사일방어체계(MD) 구축 등 외부적 위협이 계속됐죠. 2012년 5월 뿌찐이 대통령직에 복귀하면서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문명적 특성을 강조한 영향도 있었다고 봅니다. 과거 ‘냉전의 설계자’로 불린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나토 확대가 ‘아마도 열전으로 끝나게 될 신냉전을 야기하고,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의 기회를 앗아갈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 현실이 되는 듯합니다.

 

이동기 조금 다른 관점에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은 더 적극적으로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쪽도 있습니다. 우끄라이나가 진작 나토에 가입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성훈 일단 현실적으로 우끄라이나는 나토 가입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나토 가입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수준, 부패 문제 등 국가 안정성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우끄라이나는 그에 미치지 못했죠. 또 나토는 군사동맹이기 때문에 기존 회원국의 연루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 또는 군사 분쟁 가능성이 큰 국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러시아와의 갈등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가입을 받아주었을까요? 2008년 당시 미국의 끈질긴 설득에도 프랑스, 독일 등이 우끄라이나의 회원국 가입을 반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황수영 말씀대로 현실적으로도 어렵지만, 만약 우끄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했다면 오히려 문제가 그만큼 더 빨리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끄라이나는 나토에 있지 않았지만, 나토는 이미 우끄라이나에 있었다’는 평가가 있죠. 이미 나토 국가들이 돈바스내전 당시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우끄라이나 군대와 함께 군사훈련을 하는 등 여러 역할을 하면서 분쟁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계속 높여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민스끄협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서로의 안보 이해나 양쪽의 입장은 다르기 마련인데, 이를 평화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이 가장 뼈아픈 점입니다. 나토 회원국 확장 문제에서 보듯이, 군사동맹이 있는 한 동맹의 테두리 밖에 있는 국가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적과 ‘우리’를 구분하게 됩니다. 그간의 역사에서도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방식으로는 실제 안전을 보장해오지 못했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군사동맹에 의존하는 것보다 각국의 안보 이해를 고려하면서 군사적 수단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에 의해 조율하는 것, 대화와 제도로 뒷받침되는 일종의 ‘공동 안보’를 추구하며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뿌찐이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며 위협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뿌찐이 제정신이 아니라고만 말할 일이 아니에요. 국제적인 핵군축체제 자체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특정 국가에게 대량 살상을 목표로 하는 무기 개발을 허용하고, 해당 정부의 ‘선한’ 의지나 운에 의해서만 통제되게끔 하는 무책임한 군축체제가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전쟁에는 승자가 없고, 군사적 대응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목격하고 있다고 보는데 각국의 해법이 주로 무기 지원, 군비 증강과 같은 형태로 나오고 있어서 답답하고,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 전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동기 이번 전쟁을 세계질서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냉전구조가 무너지면서 일부 지역의 국민국가가 해체되고, 국가가 전유했던 무기가 사유화되어 이를 기반으로 해당 지역에 실효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무장집단이 등장했습니다. 9·11테러를 기점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의 테러주의가 빈번해지면서 알카에다, ISIS 등의 초국가적 집단이 무력분쟁이나 전쟁의 행위자로 나타나기도 했죠. 이렇게 국가 간의 갈등이 주변화되고 새로운 종류의 갈등이 드러나는데, 국제정치학자 메리 칼도어(Mary Kaldor)가 ‘새로운 전쟁’이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상황이 1990~2000년대 크게 문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간 최소한 잠정적으로나마 해결된 것으로 여겨졌던 국가 간 갈등이나 전통적인 대결도 여러 곳에서 재연되고 있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고요.

 

황수영 21세기에 있었던 여러 분쟁과 전쟁으로부터 인류는 대체 무엇을 배웠나 하는 회의감도 듭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직후, 국제 평화운동 네트워크의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들 패배감과 절망감을 크게 느끼는 듯 했어요. 지난 3월 23일 프란치스꼬 교황이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전쟁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패배할 뿐입니다. 주님,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전쟁이 인류의 패배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새삼 크게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이미 세계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에서 승리가 없는 현실을 똑똑히 목격해왔습니다.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쟁이 남긴 것 중 하나가 ISIS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제성훈 사실 인류에게 패배감을 주는 사건은 그동안 수없이 많았는데 이번만큼 관심이 집중되지는 않았어요. 특히 유럽 국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유럽에서, 이른바 ‘백인들’ 간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도 서구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아프리카 내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도 서방이 민간인 희생에 이렇게까지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윤석준 한국사회 역시 이번 전쟁에 특히 더 주목하는 것이 지금 한국사회가 이 전쟁을 지나치게 ‘서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는 아닌지 성찰이 필요합니다. 국제정치는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 언론의 보도는 서구 사회와 언론의 시각에 지나치게 동조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국제정치학 수업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뿐 아니라 중동, 중국, 러시아의 국제방송 영상을 함께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이 전쟁을 바라보는 세계 곳곳의 시선이 상당히 다르거든요. 그런데 한국사회는 서구의 입장에서 선악 구도로 너무 단순화시켜 인식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동기 세계화 이후 교통수단이나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과 대응 양상이 이전과 매우 달라진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정보 수용 환경과 삶의 초국적 연루로 타 지역이나 국가에서 일어난 폭력과 갈등을 실시간으로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9·11테러 이후 세계 전역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긴장 상황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세계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각지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살피는 수용 민감성이 높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내외 시민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전·평화운동 역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황수영 우선 참여연대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면서 병력 철수와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고, 더불어 어떤 전쟁이든 군사적 해법은 불가능하며 외교적·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국내외 시민사회에서도 전쟁의 원인, 종전 방법, 경제 제재, 비행금지구역 설정, 무기 지원 등 여러 쟁점에서 이견이 많습니다. 어찌 됐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휴전 요구입니다. 강력한 경제 제재로 당장에는 산업에 타격을 주고 전쟁 비용 조달을 어렵게 만들어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제와 금융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 인권이사회 퇴출 등으로 러시아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것이 결국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봅니다. 러시아는 제재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세계 경제구조가 진영에 따라 분리되는 현상이 심화되면 역효과도 클 거예요. 역사적으로 봐도 평화적 결과는 적대나 고립이 아니라 대화, 협상, 군축 조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와 연대하고자 하는 분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 같아요. 군사적 지원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도 많고요. 다른 분쟁 이슈에 비하면 일반시민의 참여가 많고 관심도 높지만,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갈립니다.

 

이동기 반전·평화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과 비교하면, 침략 국가를 명확히 규정해 평화의 이름으로 저항하는 큰 흐름을 만들어내기에 이번 전쟁은 성격상 어려운 면이 있는 듯합니다. 언론의 서방 편향적 보도로 ‘평화의 적’이 명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평화운동 영역에서 보면 이번 전쟁은 어떤 일방의 입장에 동조하며 개입하기 난감한 지점이 있죠.

 

황수영 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스펙터클이 이미 벌어져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그럼 우끄라이나 사람들은 그냥 죽으라는 거냐’며 항의하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그런데 무기를 지원하면 사람의 목숨을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나요?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목숨 걸고 더 싸우라는 의미죠. 우끄라이나 국민들이 각국에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해되고 존중받아야겠지만, 다른 국가 입장에서 무기를 지원하는 건 또다른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당연하게도 모든 우끄라이나 국민의 생각이 단일한 것도 아닙니다. 우끄라이나의 평화단체인 ‘우끄라이나 평화주의자 행동’(Ukrainian Pacifist Movement)은 양측의 즉각적인 휴전과 평화회담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윤석준 우리가 전쟁을 바라볼 때 국가 중심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쉽지만, 그러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언론과 담론장에선 마치 체스게임을 중계하듯 지금 전황이 어느 나라에 유리하냐는 식의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더 중요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건 바로 전쟁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민간인의 문제죠. 전황에 대한 세세한 정보 전달과 분석은 일차적으로 전쟁을 취재하는 언론과 분석하는 전문가의 몫입니다. 시민사회는 여기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전쟁에 대한 담론을 근본적으로 국가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민간인들의 피해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고, 민간인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또 이미 벌어진 전쟁이라면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으니까요.

 

우끄라이나전쟁이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이동기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민간인 희생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 멈춤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얼른 전쟁이 끝나야 할 텐데요. 전쟁은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까요?

 

제성훈 지난 3월 29일 이스탄불 평화회담에서 우끄라이나가 제안한 사항을 보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부차 지역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를 계기로 우끄라이나의 입장이 매우 강경해지면서 협상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개 과정을 보면 마치 평화회담을 방해하려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우선 개전 당시 러시아는 빨리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돈바스 지역과 끄림반도에 완충지대를 만들고 우끄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거나 정권을 교체시킬 생각이었을 텐데, 전쟁이 길어지다보니 평화협상으로 일부 목적이라도 달성하고자 방향을 전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협상이 진전되지 않으니 러시아의 목표가 또다시 달라졌어요. 우끄라이나 남동부 지역의 친러벨트를 부활시키고 최대한 영토를 점령해서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반면 우끄라이나는 확전을 감수하더라도 전쟁에서 완전히 이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이 지속되어서 러시아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완전히 소진하길 바라고 있고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번 전쟁이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러 양국의 결단 없이 전쟁을 끝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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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영 지난 3월 폴란드에서 바이든(J. Biden) 미국 대통령이 뿌찐을 겨냥해 정권 교체 추진을 시사했습니다. 뿌찐에 대해 맹비난하는 것을 보며 바이든은 휴전이나 중재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전쟁 중단을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주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가장 답답합니다. 프랑스, 터키 등이 노력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아요. 정말 끝내고자 한다면 바이든과 뿌찐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일이죠. 우끄라이나에 미사일 보내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상 이미 승자는 없다는 것을 서로 인지하고 협상의 계기를 만들어내면 좋겠습니다.

 

이동기 이번 전쟁이 우끄라이나가 미국의 대리전을 치르는 형국이라고 한다면, 유럽연합이나 유럽 특정 국가가 중재자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윤석준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마크롱의 외교적 중재 노력이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4월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했으니 6월에 있을 총선에서 승리하거나 최소한 대패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로 마크롱이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설 수 있을 겁니다. 프랑스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맥락은 전장이 몰도바로까지 확대될 위험이 생겨서입니다. 우끄라이나와 인접한 몰도바 지역인 뜨란스니스뜨리아에도 친러 성향의 미승인국가가 있습니다. 돈바스 지역과 유사한 상황이지요. 그런데 몰도바는 프랑스 언어 및 문화권 국가들의 모임인 ‘프랑코포니’ 회원국이면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입니다. 몰도바까지 전쟁이 확전되면 우끄라이나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프랑스는 이를 원치 않죠.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굉장히 안타깝고 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프랑스가 우끄라이나의 분단을 인정하는 방향의 중재안을 들고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기 이번 전쟁은 국제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30년만에 국제질서의 큰 전환이 시작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이번 전쟁이 신냉전을 구조화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제성훈 저는 이번 전쟁이 세계질서 변화를 야기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우선 이번 전쟁은 미국 단일패권 체제에 맞서 주요 강대국이 수행하는 최초의 군사적 도전입니다. 그동안 미중 갈등의 심화에도 군사적 충돌은 없었는데, 우끄라이나전쟁은 비록 대리전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미국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실질적인 군사적 도전이거든요. 이것이 ‘신냉전’이 될지 ‘세계대전’이 될지 몰라도 미국·유럽 대 중국·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규범적 차원에서는 이번 전쟁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주요 강대국 간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은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되어도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력 사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이른바 ‘야만의 시대’가 부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듭니다.

 

윤석준 저도 신냉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공감합니다. 다만 신냉전을 규정할 때 과거 냉전시기의 구도에 기반해 미국 대 소련에서 치환된 미국·유럽 대 중국·러시아의 구도로만 논의하기보다는, 1980년대 이후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로 인한 상호연계성 강화 양상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G2로 규정하면서 무력충돌을 포함해 여러 갈등이 분출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음에도 그것이 대부분 현실화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냉전에 들어선다고 해도 이러한 상호연계성을 생각하면 과거 냉전과는 다른 모습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고,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신냉전을 규정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서구의 정체성이 균열되는 지점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냉전을 단순히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라고 이해하지만, 사실 미국과 유럽이 함께 ‘더 웨스트’(the West)로서 대응했습니다. 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서방 자유진영이라는 단일한 정체성 블록이 있었던 거죠. 탈냉전 이후에는 이러한 단일한 정체성이 조금씩 약화되어왔고, 특히 지난 미국 트럼프(D. Trump) 행정부 들어 기후변화나 자유무역 관련해 미국과 유럽이 다른 행보를 보이면서 관성적으로 작동해왔던 단일 정체성에 균열이 갔습니다. 메르켈(A. Merkel) 전 독일 총리가 임기 후반에 ‘우리 유럽이 타자에게 안보를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얘기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으로 다시 미국과 유럽이 서구로서 단단하게 재결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가입 의사를 적극 표명했고, 덴마크는 유럽연합 공동안보방위정책(ESDP)에 합류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제성훈 저는 미국과 유럽의 동맹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는 시각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미국의 패권 기반 약화가 이 전쟁으로 가속화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우선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이 커지는 양상입니다. 미국은 이번 전쟁을 방지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병력 파견 등 직접적으로 지원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러시아 견제를 위해 우끄라이나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유럽 국가들을 향해서는 우끄라이나를 지원하고 대러 제재에 참여하라고 사실상 강요하고 있죠.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으로 미국의 경제적 패권 기반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이 일시적으로는 천연가스나 무기를 수출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겠지만, 달러표시자산의 신뢰성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는 미국 대외정책에 따라 달러 이용이 제한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라, 많은 국가가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의 비중을 높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역대금 결제에서도 달러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본격화됐습니다. 과연 이번 전쟁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독점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서방의 균열이 점차 가시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동기 전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 중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난민 문제입니다. 20세기 이후 전쟁의 역사는 곧 난민의 역사기도 한데요.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의 수는 4월 29일 현재 530만을 넘었습니다.

 

제성훈 지금 우끄라이나 난민의 절반 이상인 약 300만명이 폴란드에 있고, 다른 유럽 국가에도 많은 수의 난민이 유입됐습니다. 이들 난민 다수는 전쟁이 끝나도 우끄라이나로 돌아가지 않거나 못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향후 유럽에서 우끄라이나 난민 문제가 큰 이슈가 될 것 같아요.

 

윤석준 유럽의 난민 수용 태도의 이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시리아 난민 문제에 다소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럽이 이번 우끄라이나 난민은 상대적으로 환대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정치인들보다 시민들에게서 이러한 온도 차이가 확연한데, 여기에는 종교적·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유럽은 양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번영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치 등 ‘가치’ 중심적 통합을 전개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통합된 유럽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기독교적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정체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왔죠.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이 우끄라이나 난민에 대해서 시리아 난민과는 조금 다른 수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난민의 수가 워낙 많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폴란드를 중심으로 난민 수용 국가들의 피로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란민 상당수가 돌아가지 않거나 혹은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 유럽이 어떤 수용성을 보일지는 또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동기 독일은 그간의 경험이 있어 시민들의 수용성이 높은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평화도시로 알려진 오스나브뤼크에서는 전쟁이 발생하자마자 시민 500여명이 자체적으로 난민 정착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시청에 제안했다고 해요. 독일어 교육, 직업 교육과 견습생 프로그램, 축구 등 다양한 발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난민 수용과 공생의 문제는 국제 규범을 넘어 혼종사회의 현실적 삶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독일 내의 기존 우끄라이나 이주민뿐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현재의 난민 문제는 이웃이나 친척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자신의 생애사와 중첩되어서든 화급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한국에도 난민 수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국제적 차원에서든 사회 내부에서든 높아지고 있는데요, 지금 한국사회가 난민을 원만하게 수용할 수 있을까요?

 

황수영 한국은 일단 난민협약 가입국이기 때문에 책임을 같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전쟁 발발 직후 법무부에서 국내 거주 우끄라이나인을 대상으로 한 인도적 체류 조치를 바로 발표하기도 했죠. 한국이 난민 수용성이 낮은 것은 맞지만, 유엔난민기구의 난민 인식 변화 조사에 따르면 2018년 이후 이해도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특별기여자’ 명목으로 수용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울산 정착 과정과 같이 좋은 사례도 많이 생겨나고 있고요. 지금 우선 필요한 것은 한국의 해외 공관에 난민이 찾아오면 신속하게 비자를 발급하고, 국내에 있는 우끄라이나 이주민들이 난민 보호를 요청할 경우에 빠르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난민 관련 인도적 지원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고요. 유엔난민기구의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도 2015년부터 일년에 30명 안팎의 재정착 난민을 받아왔는데, 이 규모도 늘려야 합니다. 재한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중에도 전쟁 반대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전쟁 반대로 난민 보호 조치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윤석준 한국사회의 난민 수용성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왔을 때 그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했는데, 우끄라이나 난민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높으리라고 예상합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난민 수용 문제를 논의할 때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우리도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난민 문제가 ‘혐오’와 연결되어 국내정치에 악용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합니다. 유럽에서도 국내정치 구도가 난민 수용에 영향을 미쳐왔어요. 프랑스만 해도 극우정당 ‘국민연합’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는데, 인종주의나 파시즘에 기반을 둔 극우정당들은 난민 문제를 국내정치 차원에서 쟁점화하고 혐오를 조장할 때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악용의 흐름이 언제든 나올 수 있어 경계해야 합니다. 최근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대하는 정치권의 모습에서도 그런 우려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었고요.

 

황수영 예멘 난민 수용 당시 많은 논쟁이 있었고 실제 혐오의 흐름도 있었지만, 어쨌든 많은 시민들이 난민 문제에 직면하고 관점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수용 당시 한국에 기여한 사람만 데려온다는 선별적 수용정책을 시행한 것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그렇게라도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고 보고요. 지금 이것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말하자면, 우리가 미국의 대테러전쟁 지원을 위해 파병한 국가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아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아랍에미리트 파병에 대한 국가 수준의 반성적 성찰이나 평가 과정을 한번도 제대로 거친 적이 없고, 높아진 국제사회 영향력이 무색하게 정부나 의회도 이들 전쟁으로 인한 난민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최근 한국의 무기 수출 규모가 세계 9위까지 올라갔고, 그만큼 한국이 알게 모르게 관여하는 분쟁이나 군사적 긴장 상황도 많아지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히 선진국이어서, 착한 마음으로 받아준다는 생각을 넘어 책임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동기 한국사회가 난민에 대해 당장의 수용 여부를 따지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친 평화·공생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하게 토론하고 합의하는 학습 과정이 필요하겠습니다. 지난 3월 울산광역시교육감이 울산의 아프가니스탄 난민 중 처음 학교에 가는 학생들과 등굣길을 동행한 일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듯 정치와 행정이 수용과 지지를 명료하게 표명하는 용기와 단호함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시민사회가 그것을 받아 난민 수용과 공생이 21세기 세계사회의 기본 실천과제임을 알고 집단적 학습을 주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생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길 바라봅니다.

 

한반도 평화는 어디로 가는가

이동기 이번 전쟁으로 한반도 평화도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이 한반도와 그를 둘러싼 국제정세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제성훈 우선 동북아에서 미국·일본 대 중국·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은 줄어들었죠. 지난 30여년간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한국정부는 북방 삼각(북·중·러)과 남방 삼각(한·미·일) 간 대립 구도의 약화를 추진했는데, 이것이 수포가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하면 이 대립 구도가 더 심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둘째로 북한의 핵무기 포기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에 러시아와 중국이 신경 쓸 여력도 당분간은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콘셉트가 바뀔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전제로 하는 평화프로세스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사회에서 ‘균형외교론’이 힘을 잃고 ‘동맹강화론’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두 논리 간 균형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동맹강화론에 지나치게 힘이 실리면 전쟁의 위협은 역설적으로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윤석준 그래서 한미정상회담 개최 시점이 너무 빠른 것은 아닌가 노파심도 듭니다. 언론 일각에서는 역대 대통령 중 취임 이후 가장 빨리 한미정상회담을 하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도하던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회담에 임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필요해요. 우끄라이나전쟁과 관련해 무기 지원이나 대러 제재 강화 등의 요구가 의제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의제화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황수영 저도 지금 상황에서 한국 외교·안보정책의 축이 한미동맹 쪽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국이 나토정상회의에 한국을 초청하려는 것도 시민사회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응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윤리적·평화적 차원까지 갈 것도 없이 현실적으로도 러시아와 계속 대화를 해야 하거든요. 개전 이후 한국이 제재에 동참하는 와중에도 지난 3월 한국과 러시아 북핵 수석대표 간 유선협의가 있었고, 러시아군과 우리 군이 해·공군 직통망 개설을 앞두고 있기도 합니다. 러시아는 방공식별구역 개념을 인정하지 않아서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고 카디즈(KADIZ, 대한민국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것이 계속 문제가 되었는데, 수년간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만든 것이죠. 이렇듯 러시아는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나라고, 끊어서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제성훈 러시아가 국경을 접한 나라는 14개국입니다. 그중 이번 전쟁을 계기로 대러 제재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가 8개국인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당사국인 우끄라이나와 유럽연합 회원국인 핀란드, 그리고 한국을 제외하면 제재에 참여한 국가는 모두 나토 회원국이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재에 동참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어느정도 책임있는 역할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끄라이나에 무기 지원까지 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시도입니다.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우끄라이나, 그리고 미국 및 나토가 무기 지원을 촉구한다고 해서 무작정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끄라이나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이 우리에게 기회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봅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는 유럽에서 압박이 심해지면 동북아로 눈을 돌려왔습니다. 지금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특히 동북아 국가들과 경제협력 확대를 원할 텐데, 미국과 강한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과의 관계는 이미 파탄 났고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장기적으로 근심거리가 될 수 있어 한국과의 협력을 더 확대하고 싶을 겁니다. 당장 러시아가 제재 참여국을 모두 ‘비우호국가’로 규정하고 비자 간소화 조치를 중단하면서도 한국만 예외로 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로 인해 섣불리 움직이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차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동기 우끄라이나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치러진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선제공격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북한의 선()비핵화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동아시아 평화 전망에도 우끄라이나전쟁이 영향을 미칠 텐데,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황수영 긴장을 고조하는 발언이나 태도가 생각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전쟁을 통해 실감하게 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중에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을 보면 ‘평화’라는 단어는 딱 한번 나옵니다. 평화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는 것 아닌가 우려가 들었습니다. 특히 새 정부의 국방·외교 분야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명박정부 인사가 다수 복귀하는 모양새인데, 그때의 대북정책목표 ‘비핵개방3000’은 실패하고 말았죠. 적어도 판문점합의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번 전쟁을 보면서, 전쟁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국가적으로 언제든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전부터 적대가 계속 강화되어오고, 군비 지출이 늘어나고, 미국이 우끄라이나의 무장을 도와주는 등 전쟁 준비를 해온 결과가 지금 상황이 아닌가 하고요. 정세나 지정학적 요소, 동학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전쟁의 배경을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평화 수호’라는 헌법상 대통령의 의무를 잘 지켜내며 ‘성공하는’ 정부가 되도록 시민사회에서도 역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윤석준 새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은 ‘구조’를 형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발생하면 손해를 보는 행위자의 범위가 대폭 늘어나도록,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발생할 이익을 공유하는 행위자와 그 이익의 규모가 늘어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냉전시기에도 환경 협력을 진행했던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북유럽에서 대기환경 오염물질 문제가 발생하자 소련이 영국과 북유럽 국가 사이의 갈등을 공조하고 중재해서 환경 협력을 현실화했던 경우가 있고, 냉전시기부터 탈냉전 이후까지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이뤄진 환경 협력도 있죠. 국제정치학적 개념으로 얘기하면 ‘절대적 이익’과 ‘상대적 이익’의 차이인데요, 안보 협력은 상대적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구조라 협력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게 이론적으로 일반화된 인식입니다. 그런데 환경 협력 같은 경우는 절대적 이익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여서 냉전시기에도 가능했다는 것이죠. 한반도에서도 절대적 이익이 다양한 행위자들에게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해야 합니다.

 

제성훈 사실 저는 이번 전쟁을 보면서 우리가 ‘합리성’을 너무 과신하지 않았나 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성’을 상대도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는 에너지 협력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탈소비에뜨 국가들은 러시아로부터 이른바 ‘우호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았고, 우끄라이나의 대러시아 무역 규모도 상당했죠. 이렇듯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높았지만,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경우는 물론 러시아와 경제협력 수준이 낮은 미국이 변수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제적 이익이 아무리 크더라도 안보 딜레마 상황에서는 결국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죠. 이를 남북관계로 생각해보면, 남북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높여도 안보 딜레마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전쟁이 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말하면 외교적으로 과장된 수사를 사용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 상대에게 잘못된 신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요. 국내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제공격’ ‘선()비핵화’와 같은 강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윤석준 남북 간 상호의존성을 생각해보면,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전개한 대북 포용정책에 기반한 남북경협사업에서 부족했던 부분은 이 협력사업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자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 상호의존성 강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생각해야 하고, 가령 비군사적인 생태·환경 영역에서 협력을 도모하는 ‘그린 데땅뜨’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이명박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유산이나 문재인정부가 주창한 ‘그린 뉴딜’의 정책적 유산도 있는 만큼, 실용적으로 이들 간의 접점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남북뿐 아니라 주변국 정부나 기업들에까지 이익이 되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평화 구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새 정부가 대국적인 차원에서 중지를 모아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국가 간 승리와 패배의 구도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전쟁의 유혹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 중심으로 평화 논의에 접근하는 담론이 확산되어서 ‘전쟁으로 인한 승자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시민사회가 먼저 이러한 담론을 선도하고 학계와 언론이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끄라이나전쟁이 전세계는 물론 우리 한반도에 주고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기 올초만 하더라도 우끄라이나전쟁이 실제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고 예상되는 합리적 근거가 있음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쉽게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가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소와 동서유럽 간 데땅뜨는 여러 한계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양 진영은 적대적 갈등 상황을 비적대적 갈등관계로 전환하고 화해협력의 실험장을 구축했습니다. 그때도 더러 위기상황이 없지 않았지만, 1989~91년 탈냉전이라는 의미있는 성과를 냈죠. 성공적인 갈등 조정의 역사적 성취와 그 기억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우끄라이나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보며, 평화란 결국 몇차례의 극적 행위나 일시적 조정으로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탈냉전 후 안보 동맹이나 공동의 경제 이익에만 주목하다 평화 질서의 근본적 재창출을 놓친 것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갈등과 위기가 자가 상승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이 전쟁이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반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겠고요. 갈등의 고조와 적대적 분위기를 억제하는 장치들을 새롭고 다양하게 발견하고 발명해야 합니다. 화해나 평화는 적대나 갈등과 달리 손쉽게 발생하지도 않고, 한번 개시되었다고 그대로 자가 상승하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전 서독 총리가 말한 경구, ‘100시간 동안 협상해서 아무 성과가 없더라도 1분간 총을 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에서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토론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22.4.29.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