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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갈무리 2022

환원 금지: 예술의 자율성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김미정

金美晶/문학평론가 metano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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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간 주체의 특권성을 질문하고 인간-비인간 혼합체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상정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공히 ‘물질로의 전회’를 표방하는 이 논의는 근대의 주체-객체의 구도 속에 온존되어온 인간중심주의를 기각시키고, ‘평평한 존재론’의 사유를 역설하고 있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가령 망치라는 사물의 ‘존재’ 혹은 물러나 있던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망치가 부러지거나 망가져서 도구로서의 기능(목적)을 멈추었을 때라고 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다사다난도 바로 기존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상이 잘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환기하게 된 존재들의 일면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도 한낱 객체라는 것,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 동등하다는 사유는 새로운 존재론이 주는 소중한 깨달음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론이 예술과 만나면 어떤 논의가 전개될 수 있을까.

객체지향존재론의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의 『예술과 객체』(Art and Objects, 2020, 김효진 옮김)가 바로 이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자 칸트(I. Kant)와 하이데거, 그리고 미술비평가 그린버그(C. Greenberg)와 프리드(M. Fride)를 경유하여 형식주의와 자율성을 소환한다. 언뜻 의아함이 생기기도 한다. 우선 형식주의나 자율성이란, (주로 문학 쪽에서의 인상일지라도) 각 분야를 막론하고 이미 충분히 질문과 도전에 직면해온 개념 아닌가. 또한 그 논쟁사와 별개로, 오늘날 예술의 자율성과 대비되는 상호작용성, 관계성 등의 개념이 부상하는 흐름도 뚜렷하지 않은가.

하지만 미리 적어두건대, 하먼은 이 책을 통해 칸트적 의미 그대로의 형식주의와 자율성으로의 회귀(환원)가 아니라, 그것을 재개념화하고 포스트 ‘근대’ 예술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작품도 감상자도 객체지향존재론의 입장에서는 모두 한 평면 위의 동등한 객체들이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소위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객체)에는 반드시 감상자(객체)가 필요하고 그것들이 혼성된 제3의 객체가 바로 하먼이 말하는 예술작품이다. 유기화합물 구성에 탄소가 필요한 것처럼, 혹은 수소가 물의 한 요소인 것처럼 예술에는 늘 감상자가 필요하다. 얼핏 인간의 특권성이 다시 상정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하지만 이때의 감상자 객체는 예술의 한 성분으로서의 인간이지, 특권적 감상의 위치에 있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목화솜이 불에 의해 연소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객체지향존재론의 관점에서 이 연소란, 평상시 목화솜의 물러나 있던 특정 성분이, 역시 불의 물러나 있던 어떤 성분과 만나 변형되는 사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제3의 객체(재, 유독가스 등)는 둘 다로부터 자율적인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먼이 자율성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자주 보충하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모든 객체에 인과적/구성적 배경 이야기와 더불어 주변 환경과 주고받는 수많은 상호작용이 있지만, 이들 인자 중 어느 것도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경 이야기 대부분을 대체하거나 배제하게 될 객체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22면, 강조는 인용자) 혹은 “어떤 다른 것의 영향을 받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322면, 강조는 인용자) 이 진술들은 공히, 어떤 객체를 그것의 속성으로(undermining) 혹은 영향관계로(overmining) ‘환원’해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하먼이 말하는 자율성이란 이 ‘환원’의 사유방식과 대조시킬 때 보다 오해 없이 이해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이라는 객체야말로 이러한 특징, 즉 본질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장악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잉여물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어야 한다. 강조컨대 평평한 존재론에 의하면 물, 공기, 새, 숲, 고양이, 인간 등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실재이지 외부의 지각에 의해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공평하게 물러나 있고 서로 간에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자율성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과는 별개의 실재를 갖춘 무언가”(139면)를 환기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본질을 명료하게 포착하고 진술하는 것과 예술은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하먼이 예술작품에서 사회적·정치적 내용을 추방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러한 메시지가 선험적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만 메시지가 예술의 ‘부수효과’는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예술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그가 예술의 자율성을 말하는 것은, 근대 지식 전반의 ‘환원’적 사고방식에 대한 저항에 가깝다.

한편, 앞서 말했듯 예술작품이 작품과 감상자의 마주침을 경유한 제3의 객체라면 이때 감상자의 미적 경험이란 그 작품에 연극적으로 결합하는 경험이다. 이는 수행성과도 관련되어 보인다. 하지만 하먼은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사적 행위나 사건이 아닌, 산출된 명사적 성격(객체)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객체』는 20세기 후반 철학의 주된 흐름을 대변해온 생성·사건 철학과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 예술 경향에서도 물러서며 존재(being)의 철학 쪽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예를 들어 그가 반형식주의 등 비평이론을 비판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십수년 전 한국에서 후기식민자본주의의 살풍경을 담은 영화(「괴물」)가 천이백만 관객을 동원한 다음 해 노골적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영화평론가들은 그 심상치 않은 어긋남을 불길하게 이야기했다.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에 다 같이 공모된 이들의 잔혹극(「기생충」 「오징어게임」)이 K-영화, K-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열광시키자, 이제는 평론가는 물론 모두가 그 어긋남을 알아차렸다. 예술의 비판이 비판 대상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혹은 그러한 비판의 내용 자체가 자본주의 문화상품의 클리셰이자 유망한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 등을 말이다.

이는 하먼의 논의를 과도하게 구부린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율성 테제를 굳이 다시 예술의 핵심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데서는 분명 그 작업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시대와 사뭇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예술의 문제에 접근할 다른 전략의 필요성, 즉 예술의 ‘매혹’과 ‘몰입’ 메커니즘을 재점검할 동기를 강하게 부여받게 된다.

물론 하먼이 말하는 예술이 또하나의 준거가 될 필요는 없다. 그는 좋은/나쁜 예술을 판별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먼이 제기한 ‘기이한 형식주의’의 의미를 지금 이곳의 예술 현장에 비추어보는 것은 필요하다. 가령 작품과 감상자의 결합 과정 자체가 양쪽 객체의 형질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오늘날 문학 독자들의 논의에 어떤 식으로건 실마리를 줄 것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 문화예술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재현과 표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마주치는 곤경이라든지, 연대나 상호작용의 실시간 현장 자체가 예술이 되고 있는 무수한 장면 앞에서 이 책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