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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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 『오늘도 자람』, 창비 2022

그의 ‘이 잘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황선우

黃善宇/작가, 인터뷰어 iam.hwangsunw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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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운 좋게 이자람의 판소리 공연을 몇번 봤다.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의 공연은 다양한 무대예술 장르의 감상자로 느껴본 최대치의 즐거움까지 틀림없이 데려다준다. 또 내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 그래서 번역이나 해석의 덜컹거림 없이 곧장 이 극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만든다. 판소리라는 형식 속으로 들어간 이야기들이 한국말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때, 그 언어의 물줄기를 뒤집어 맞는 상쾌함은 모국어로 된 예술만이 주는 축복이다. ‘이자람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걸 해내지?’ 그가 행하는 경이의 근원들을 발견하겠다는 작정으로 에세이 『오늘도 자람』의 표지를 열고 책장을 넘긴다.

예술가의 자전 서술에서 기대하듯 이 책은 독자/관객들이 궁금해하는 무대 뒤를 개방한다. 그의 글에서 묘사되는 일상의 디테일은 공연자를 바다와 같이 추앙하는 팬에게 줍고 놀 수 있는 조개 조각들을 실컷 던져준다. 휴대폰을 간신히 떼어놓고, 자기 성대의 볼륨으로부터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귀마개를 낀 채 옷방으로 들어가 방 안에 걸린 옷들을 관객처럼 상상하며 노래하는 소리꾼의 연습 장면을 다른 어디서 엿볼 수 있을까. 소리도 근육으로 내는 거라 자신의 소리가 무거워 허리를 삐기도 했으며 여덟시간 완창을 마치고는 열꽃이 오른 채 앓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예술가 당사자만이 알 구체적인 고단함을 토로하면서도 이자람은 자기연민과는 거리를 둔다. 자신의 무식함과 허세스러움을 웃음거리로 삼으며(아는 것이 많고 소탈한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먹고, 자고, 싸는 매일의 반복에 진지하다. 아픈 몸이나 석연찮은 기분을 민감하게 살피는 것도 그에게 중요하다. 퍼포먼스는 몸을 쓰는 일이고, 몸은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자람』의 독특한 복합성은 곧 이자람이라는 사람의 복합적인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여기 묶인 글들은 독보적인 한 아티스트가 열어 보여주는 예술관이고, 선후배 동료 소리꾼에게 발신하는 전우애의 메시지이기도 한데, 특히 나는 극장을 주 일터로 삼는 프리랜스 공연 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일을 지속해나가는 방식의 기록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조직에 속하지 않고 혼자 일하는 40대 여성은 눈에 잘 띄지 않고, 목소리가 서로에게 좀처럼 닿지 않는다. 나 역시 유한한 체력과 시간 자원을 아껴 쓰고 또 때로는 낭비하며 나와 내 일을 잘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40대 여성이기에 그의 이야기가 반가웠다. 가령 어떤 제안을 받고 수락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담은 글(「거절」)은 어느 자기계발서보다 실질적인 조언으로 가득하다. 스스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명료하게 거절하거나 조정해서 수락하는 방식을 담은 예문들이 후배 아티스트들을 나쁜 선택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이런 노하우가 쌓인 것이, 애초엔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던 사람이 경계선을 하나씩 그으면서 자신을 지켜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뭉클하기도 하다. 이 책은 너무 이른 나이에 큰 인지도를 얻어버린 ‘셀럽’으로서(그렇다. 이자람은 「내 이름(예솔아!)」를 부른 ‘국민 꼬마가수’이자 최연소 「춘향가」 완창기록자였던 것이다) 그 유명세에 먹혀버리지 않고 자기 세계를 착실히 건설해온 생존과 성장의 서사이기도 하다.

출간은 처음일지라도 이자람이 평생 말과 글을 다뤄온 작가라는 점은 문체에서 드러난다. 자기 생각을 한 방향으로 성급하게 펼치는 경우가 없이 요모조모를 살피고 이짝저짝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친절하게 풀어놓는 솜씨의 능란함이 묘하게 판소리와 닮았다(실제로 판소리의 화법을 구현한 것 같은 부분도 눈에 띈다. “어디, 지금부터 여러분을 수년 전의 한 극장으로 안내해보겠다”(54면) 같은 문장). 딱딱하거나 어려운 표현이 없고 입에 착 붙게 자연스러운 동시에 대목마다 장단이 바뀌는 것 같은 리듬을 음미하다보면 종종 학이 나는 것만 같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전통문화의 전수자인 그는 자신이 배워온 판소리 속 언어와 다투기도 한다.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이다. 「심청가」 속의 가부장적 요소를 고쳐나가다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남은 그것을 ‘심청가’라 부를 수 있을까? 오래 축적되어와 현대와 충돌하는 가치체계를 한 사람의 힘으로 수정한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는 국악 콩쿠르에서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가산점인 ‘바지점수’에 대해 언급하고, 스승들을 존경하지만 서로의 가치관이 다른 시간 위에 서 있음을 인정한다. 답이 없을지라도 의문을 제기하는 이자람의 용기는 자신이 속한 전통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과거에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고 현재적 생명력을 지켜가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추임새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관객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옳거니!” 육성으로 감탄을 터뜨린 대목이 있다. 예술가는 무대 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비장한 말에 의문을 표하지만 무대 위에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한계를 느껴보기도 한 이자람이 객석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나의 이름은 한국 판소리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남을 것이니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이라도 내 작품을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 이자람 공연 봤어! 나 이자람 살아 있을 때 객석에서 같이 추임새 했어!’ 하고 자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84면) 그가 자신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 그것이 불멸로 남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예정된 소멸 앞에서 쓸모를 잘 발휘하고자 하는 바람이라는 점에서 특히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자기 문장을 세상에 내놓아본 여성이라면 짐작할 것이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쓰게 될 때까지, 겸손해야 한다는 자기검열과 얼마나 싸우게 되는지를. 이자람은 억압으로 작용하는 사명감에는 환멸을 표하고 무대 위에서 신격화되기를 거부하지만 자기 이름을 손사래 치며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분야, 하고 있는 장르 자체까지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다. 한 분야에서 오래 경력을 쌓아온 여성들에게서 더 보고 싶은 태도다.

이 책을 요약하는 설명을 또 보탤 수 있겠다. 잠재적 관객에게 던지는 책 한권 분량의 초대장, 그리고 먼 미래 한국 판소리 역사에 중요하게 남을 인물이 직접 기록한 사료. 책을 덮으며 관객으로서 나의 태도가 틀려먹었음을 깨닫는다. 보장된 무대 같은 건 없다. 사람의 몸과 마음으로 만드는 무대에서 연주자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관객의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그러니 언제고 흔들림 없는 최고치의 공연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이 예술가의 성장과 변화를 잘 따라가면서 그 다름 자체를 충분히 감상하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잘함’이 공연 바깥에서 매일을 살아나가는 일에 단번의 도약 대신 정직한 축적이 보인다는 점은, 평범한 일상을 되풀이하는 사람에게도 퍽 위안이 된다. 지리멸렬 속에서도 매일의 다름을 옳게 쌓는 과정 자체가 삶이고 예술이라는 걸 깨닫는다.

황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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