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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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李蓮姬

1973년 경북 성주 출생. 2018년 영남일보문학상·구상시문학상 신인상으로 등단.

jamanta@naver.com

 

 

 

검은 개는 눈이 검다

 

 

검은 개는 눈이 검다

털옷을 입고 덧신을 신고 간다

여름의 걸음걸이로 가로수를 지나간다

눈을 안고 걷는다

 

목줄의 양끝에서 개와 주인이 자리를 바꾼다

 

주상복합 건물의 출입구 쪽으로

이삿짐 트럭이 도착하고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린다

쏟아지는 눈 속으로 사다리가 올라간다

 

사다리에 실려 간 빈 바구니들은

내려오지 않는다

가로수를 지나 횡단보도 쪽으로

상자를 옮기듯

나는 나를 옮긴다

 

검은 개는 눈이 검다

가다 말고 서서 떨어지는 눈을 본다

 

주인의 손에서 개의 목까지

목줄은 녹지도 얼지도 않는다

개와 주인을 한꺼번에 몰고 간다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고개를 젖힌 사람이

사다리의 끝을 향해 고함을 친다

쳐든 얼굴 위로

벌어진 입 속으로

눈송이가 떨어진다

 

검은 개가 간다 흰 눈이 내려온다

 

 

 

 

떨어진 사과를

 

 

사과를 고르는 손바닥으로

달콤하고 차가운 과육을 맛본다

사과를 쥔 손에서 사과가 넘친다!

 

눈치를 살피면서 나는 사과를 주워

사과 위에 올린다

 

언제나 사과는

떨어진 사과에서 시작된다

지구가 시작되고 달이 시작되고

 

관계가 시작된다

 

질량과 거리

비례와 반비례 같은 건

사과에 있던 것도 내 것도 아니지만

 

창고형 할인매장의 진열대 위에서도 사과는

떨어진다

사과와 한 인간에게서 시작된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떨어진 사과를 사과 속에 두고 온다

 

둥글고 단단한

사과의 부피감이 빈 손바닥을 채운다

 

사과를 피해 나는 큰길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