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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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陳恩英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등이 있음.

dicht1@daum.net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을 뜯어먹는 토끼들이 보인다

바다에는 바다보다 큰 배가 보인다

시간이 주름 가득한 흰개의 얼굴로 짖는다 내가 지나가는

모르는 고장의 동맥이 또 끊어진 것 같다

쏟아지는 피에 거구의 여신이 드레스를 깨끗이 빨고 있는 것 같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 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3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

할머니가 발가락처럼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기차바퀴가 끽끽, 마찰음으로 울었다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카잘스

 

 

음악은— 밤의 망가진 다리

하느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신다

 

음악은— 영혼의 가느다란

빛나는 갈비뼈

물질의 얇은 살갗을 뚫고 나온

 

음악은— 호박(琥珀)에 갇힌 푸른 깃털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심장 속에서

시간의 보석을 부수고 있다

 

음악은— 무의미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부드러운 달의 날개 아래서

길들은 펼쳐졌다 잠이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