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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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金惠順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불쌍한 사랑기계』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등이 있음.

michaux@hanmail.net

 

 

 

체세포복제배아

 

 

아기를 더이상 낳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정부는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추측 생산 공표했다.

가임 여자들 문제가 제일 크다고 공표되었다.

아빠가 죽고 엄마는 반짇고리를 들고 퀼트 학원 문을 두드렸다.

등이 굽은 최고령 학생인 엄마를 선배 학생들이 깔봤다.

할머니! 바늘에 실은 꿸 수 있겠어요?

엄마는 만들었다.

상처를 꿰매듯이.

깊은 강 양쪽을 봉합하듯이.

내 필통, 내 핸드백, 내 노트북 가방, 내 책가방, 내 등산 가방, 내 신발 가방, 내 물병 가방, 내 담배 가방.

우수한 학생이 된 엄마가 퀼트 선생에게 말했다.

밤이 되면 힘들어요. 생각이 많아요.

선생님이 물었다.

어떤 생각인데요?

이 새끼 죽는 생각, 저 새끼 죽는 생각. 나는 방정맞은 밤이 무서워요.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도 가방을 만들었다.

만들면서 말했다.

욕조에서, 서랍에서 자꾸 죽은 사람이 나와.

아빠가? 하니 아니! 그런다.

그럼 누가? 물으니

그 사람이 땅속에 있지 않고, 여기 왜 있어? 한다.

퀼트가 자꾸만 엄마를 다음 가방으로, 다음의 다음 가방으로 데려간다.

두 팔을 안으로 숨긴 가방, 머리마저 집어넣은 가방

엄마는 꿈속의 인물도 꿈밖의 인물도,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똑같이 취급한다.

가위 달라 할 때도 거기 걔 좀 줘, 한다 가랑이 빨간 거! 한다. 모두 인간 취급한다.

엄마는 시인들보다 말을 잘한다.

우리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다 죽음과 삶 중간에 있는 거라고 한다.

이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환자라고 한다.

엄마의 매트리스 밑에는 엄마가 놓친 바늘과 실밥이 가득한데

엄마는 자꾸만 바늘을 더 사 오라 한다.

급기야 엄마의 바느질은 여기를 꿰매면 저기가 터진다.

그러다 엄마가 가방 속으로 숨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엄마를 여행가방처럼 취급하는 순간이 온다.

엄마가 떠난 다음

장미꽃 장식 달린 가방들을 열어보니

가방에서 양수 냄새가 난다.

양수 냄새는 유령 냄새와 같다.

나도 엄마처럼 노트북 가방에게 엄마 엄마 부르며 인간 취급해본다.

엄마는 알았을까. 결국 이렇게 된다는 것.

태어난 다음 결국 가방이 된다는 것.

어떤 가방의 우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가방에 얼굴을 넣고 아 아 아 아 하자 한참 있다가

아 아 아 아 메아리가 돌아왔다.

엄마 집에 가서 유품 정리를 하다가

아직 손잡이를 달지 못한 가방을 뒤집어보았다.

아기의 씨눈들이 쌀알처럼 한땀 한땀 박혀 있었다.

홍시 한개를 다 먹고 난 다음 내 허기가 씨마저 가르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이의 눈물 한방울.

입김으로 주조한 숟가락같이 볼록한 얼굴.

나는 그것에 한없이 눈 코 입을 그리려 했다.

내가 그 바느질 땀 하나를 고이 안아 눈먼 새처럼 품어

잠잘 때도 쉬지 않고 흥얼거렸더니

몇달 만에 흐릿한 알 같은 것으로 자라났다.

살아 있으면서도 내내 숨을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

숨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엄마 없는 세상의 수많은 내일, 내일 날씨들 같은.

 

햇빛 속에 얼굴을 들면 바늘을 든 피투성이 따뜻한 손이 내 얼굴을 더듬었다.

 

나는 아직 내가 키운 알을 헝겊 속에서 꺼내지 않고 숨겨두고 있다.

아기를 낳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난

첫 아기가 될까봐.

 

 

먼동이 튼다

 

 

늙은 엄마가 자기보다 더 젊은 엄마를 부르네

 

우리의 얼굴은 누군가의 무덤입니다

 

엄마의 얼굴 속에서

엄마의 엄마의 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엄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쌀 때

손바닥에 달라붙는 찐득찐득한 엄마의 엄마의 태반

 

죽음을 임신한 엄마가 복대를 풀면

쥐구멍보다 따뜻한 구멍에서 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태반은 아기의 것일까 엄마의 것일까)

 

(나는 기억해 엄마가 나에게 생리대를 빌리던 때를)

(나는 기억해 엄마가 나보다 인형놀이 좋아하던 때를)

(나는 기억해 엄마가 나를 낳고도 키가 자라던 때를)

(나는 기억해 나보다 어린 엄마가 백발이 된 날을)

 

내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면

손가락을 비집고 삐져나오는

또 하나의 얼굴

내 손가락엔 그 얼굴을 죽인 으스스한 촉감

 

백년 전의 모녀와 천년 전의 모녀를 생각해

이 모든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생각해

 

늙은 엄마들이 자기보다 더 젊은 엄마를

엄마 엄마 부르며 죽어가는 이 세계

 

눈썹을 파르르 파르르 매미의 날개처럼 떨다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 젊은 엄마가

늙은 딸의 얼굴을 불태우고 가는 이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