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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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安相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안동소주』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등이 있음.

artandong@hanmail.net

 

 

 

가문비나무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가도

몸이 따라 아프면 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겨울이 길어야겠습니다

고통을 새기려면 거센 바람에 오래 흔들려야겠습니다

슬픔을 아로새기려면 거친 눈보라가 제격이겠습니다

 

슬픔의 소리가 노랫말을 얻을 때까지

고통의 소리가 선율을 얻을 때까지

 

마음에 지지 않으려면 몸에 울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몸에 지지 않으려면 마음에 신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길고 긴 밤의 시간을 건너고 건너서

수없이 많은 겨울의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거짓말같이 봄이 오고 믿을 수 없는 여름이 오고

도둑같이, 다시 겨울을 부르는 가을이 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던지겠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잘라서 고통을 보자 하면 선율을 내놓겠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쪼아서 슬픔을 보자 하면 노래를 내놓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소리를 아픈 몸이 노래합니다

아픈 몸의 소리를 아픈 마음이 노래합니다

 

마음이 못내 아파서 죽을 생각을 하다가도

몸이 못내 아파서 다시 살 마음을 내었습니다

 

 

 

안동숙맥 김승균

 

 

내 집 마당은 흰민들레, 흰노랑민들레, 노랑민들레, 삼종세트 토종 민들레 지천이다. 권정생 선생 오두막에서 얻어온 두세뿌리가 번지고 번지고 열두해를 번진 것이다. 족탈불급 번식력을 자랑하는 서양 민들레는 보이는 족족 뽑아버리고, 토종은 어디에 뿌리 내리든 절대 뽑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마당은 물론이고 화단과 심지어는 텃밭까지 버젓이 자리 잡고 때 되면 피고 때 되면 날아간다. 텃밭을 갈아엎을 때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상추 고추 부추와 함께 산다. 백합 매발톱 복수초와도 어울려 산다. 올봄도 무진 무장 무진장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한바탕 꽃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오월 어느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 모란이 좋다는 소식에 모란주나 마시자며 내앞마을 사는 위인이 막걸리를 이고 지고 찾아왔다. 옳다구나 싶어 안주를 장만하는 사이 마당에 나간 이 위인은 술상을 다 보도록 가물치 콧구멍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가보았더니 그만 아연실색, 마당 가운데에 민들레 초분(草墳)이 솟아 있는 게 아닌가. 풀무덤을 쓴 장본인은 제법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로, 마당에 풀이 여간 눈에 거슬려야지, 어쩌고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는 뿌리째 뽑혀 늘어진 민들레를 흔들어 보이며, 또 한 손으로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제 스스로 공치사가 늘어지는 게 아닌가. 오호애재,

 

권정생 선생 오두막 민들레는 이미 사람들의 잦은 발걸음에 사라진 지 오래인 까닭에 작금의 우리 집 마당 민들레는 다만 그냥 민들레가 아니라 적어도 내게는 권정생이고 그의 오두막이고 강아지 똥이고 별인 것을, 오호통재, 숙맥 같은 위인이 제 딴에는 잘한다고 한 일을 두고 뭐라 말은 못하고 하릴없이 앙가슴 두드려가며 애꿎은 모란주만 작살냈다. 곁하고 선 모란은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지 아닌지 그저 불콰한 얼굴에 헤픈 웃음을 너풀거리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