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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이라는 서사

 

변화하는 한국학

본질주의를 넘어서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 전공 교수. 저서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호혜와 협동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공저) 『백년의 변혁』(공저) 등이 있음.

devius@aks.ac.kr

 

 

들어가며: 1990년대의 한국문화론

 

최근의 한국학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 어느덧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의 시점이 되어버린 1990년대 말의 상황을 살펴보자.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구호가 요란하던 당시 한국사회는 전통문화 혹은 이른바 민족문화를 보는 관점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계화와 정보화 담론이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문화’는 “전지구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시대에 시장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불가결한 요소”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1 그 조짐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감지된 바 있다. 1993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 공원」의 일년 흥행 수입이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다2는 말이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 역시 문화산업에 투자하여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정책기조에도 반영되어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내내 이어졌다.

물론 이때 강조된 ‘문화’와 ‘문화산업’은 영화나 음악, 게임 등의 형태로 곧바로 상품화하여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을 가리켰다. 이렇듯 문화의 개념과 위상 자체가 변화하고 있던 시점에서 전통문화와 민족문화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인류학자 권숙인은 문화의 상품화가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통과 민족문화, 나아가 한국문화를 둘러싼 담론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세계화가 야기하는 문화적 동질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이 “생산하는 상품이 민족적 정서와 가치를 담고 있을 때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담론”이 등장했고, 그런 배경 아래 한국의 전통문화 역시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언설이 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전 시대인 70년대나 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대안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적 정서”와는 전혀 다른 위상과 가치가 문화에 부여되었다.3

그에 따르면 1990년대 한국문화론의 주요 흐름은 크게 경제논리에 입각한 민족문화론과 ‘우리 것 찾기’로 상징되는 민족문화의 재정치화로 나누어진다. 전통문화의 상품화 시도가 전자를 대표한다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토불이 문화론이나 민족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는 후자를 예시한다. 영화 「서편제」(1993)를 향한 사회적 관심, 그리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초판 1993)나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초판 1996)와 같은 책들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현상은 이같은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는 은연중에 문화를 향한 본질주의적 시각과 관념이 강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에 대해 권숙인은 1990년대 당시의 민족문화 담론에서 그 이전 시기의 문화 관념이 갖고 있던 “계급적 성격이나 대항적 성격이 제거되거나 완화, 혹은 전치(displacement)되”는 양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4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니 출생지와 무관하게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한국문화의 미학과 감수성을 이미 지니고 태어난다는 본질주의적 관점에 근거한 한국문화론은 현실에 대한 성찰을 저해하는 반동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해외에서 유래한 문화의 상품화라는 흐름과 본질주의적 문화론에 근거한 전통문화에 대한 강조의 결합은 자칫 배타적 국수주의의 등장과 한국사회 내에 실재했던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 한국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이같은 분석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 속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이 증대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는 근래 들어 급증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바탕으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요구받고 있는 한국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국학의 기원과 전개

 

‘한국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엄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시도는 소모적일뿐더러 크게 유익하지도 않은 작업이다. 한국학에 대한 정의 자체가 정의 내리는 사람의 학문적 위치와 주관적 입장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국학에 관한 최근 논의들에서 개진된 유연한 관점을 따라 한국학을 “한국에 관한 지식의 체계”5 일반, 혹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유동하면서 진화 중인 개념”6 정도로 간주하여 다루고자 한다.

한국학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1960년대 후반 이래 학계를 중심으로 보급되며 통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 그 배경에는 2차대전 이후 미국에서 출현한 지역연구(area studies) 분야의 확산이 있었다.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시선과 밖으로부터 한국학의 실행은 자족과 폐쇄, 때로는 국수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던 당시 한국에 자리 잡은 ‘국학’의 자기인식에 영향을 미친 주요한 타자로 기능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경일은 비록 한국학이라는 용어가 외부에서 부과되는 양상을 띠었다 하더라도, 한국사회 내에서 그 개념이 통용되는 계기를 만들어낸 추동력은 한국사회 스스로 ‘한국’을 찾고 자아를 탐색하고자 하는 관심과 당위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즉 한국 내 한국학의 보급은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더불어 자아에 관한 탐구로서 ‘국학’에 대한 열기가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정은 한국사회에서 자리 잡아간 한국학 연구가 그 용어의 일반화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서구의 안티테제로서 ‘국학’의 형태를 취”하는8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배경이 된다. 보편적인 지역학으로서의 학문연구보다는, 한국의 고유성 내지 독자성에 천착하는 특수 학문으로서 한국학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입장과 관점이 한국사회 일반에 통용되어온 현상도 상당부분 여기에 기인했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의미로 한국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를 불문하고 ‘한국적인 것’을 고정된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김경일의 지적처럼 이같은 본질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것, 한국의 전통이나 개성, 혹은 특수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은 한국사회 내에서 매우 강렬하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유지”해왔다.9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90년대 세계화와 문화의 상품화가 휘몰아친 상황에서 전통과 민족문화를 매개로 한국사회가 보인 복고적 반응 역시 뿌리 깊은 본질주의에 따른 반작용이기도 하다. 아마도 한국 밖으로부터의 또다른 자극이 없었다면 이런 경향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문화산업을 향한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2000년대 들어 발생하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밖으로부터의 자극과 한국학의 변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2010년대 초반, 국내 언론사가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연예인이나 외국인을 취재할 때 던지는 질문으로 “두 유 노우 ○○○?” 좀 그만하면 좋겠다는 여론이 형성된 바 있다. 여기서 ○○○은 박지성과 김연아, 싸이 등 2000년대 후반 이후 해외에서 이름을 알린 한국인 스포츠선수와 연예인뿐만 아니라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 김치, 떡볶이, 독도까지 다양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 관한 관심과 호감을 확인하기 위해 기자들이 즐겨하던 질문의 식상함을 비꼰 이런 여론은 세계 속 한국의 위상 변화를 바라보는 한국사회를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설명해준다. 먼저 일반 대중의 반응과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언론의 속성을 고려할 때, 많은 한국인이 ‘해외에서 실제로 한국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해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얼마나 촌스럽고 창피한지 자각할 정도의 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한국인 역시 상당히 늘어났다는 것도 사실일 터이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 ‘한류(韓流)’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한국의 드라마와 대중음악이 인기를 끈 이후에도 한동안 해외에서 한국에 관한 관심이 실제로 높은가에 대해 한국사회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발표하는 곡마다 빌보드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BTS와 넷플릭스 인기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한국 드라마,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에 한국 영화인들이 참석해 수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지켜본 2020년대 한국인들의 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현재의 한국학이 직면한 변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을 향한 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연구주제와 성과가 다양화하는 현실은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논의하기 어렵다. 그에 따라 ‘한국적인 것’에 관한 탐구로서 국내 한국학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한국의 연구자가 한국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 관한 관심이 대중문화의 인기로부터 촉발된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는 더이상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일차원적으로 그려내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본질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존의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한국인 자신을 대상으로 자문화(自文化)의 고유성을 탐색해 답하는 단계를 넘어, 한층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둘러싼 복합적인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진단하고 분석해 한국뿐 아니라 한국 바깥에서 온 질문에도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과제가 부여된 것이다.

역사학자 조원희가 분석한 최근 해외 한국학의 연구 동향 변화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10 역사학을 중심으로 전근대 한국사회에 관한 연구 위주로 진행되어온 과거의 해외 한국학과 달리, 2010년대 이후 근래의 해외 한국학은 연구대상으로 다루는 시대와 전공 분야에서 큰 폭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2017년부터 2022년까지 6년 동안 개최된 미국아시아학회(AAS, Association of Asian Studies) 연례 학술대회의 한국 관련 발표들을 보면 그 절대다수가 20세기와 21세기, 즉 근현대 한국사회를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사학과 문학 등 전통적인 인문학 분야의 비율이 전체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사회학과 인류학, 문화연구, 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에 대해 조원희는 이러한 최근 해외 한국학의 연구 동향이 여타 지역학과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북미 영어권에서는 역사학 위주의 과거 한국학을 넘어, ‘한국학의 일반적인 지역학화’를 보여주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AAS 학술대회를 대상으로 진행된 이 조사가 북미 지역의 한국학 연구 동향에 초점을 맞춘 결과라는 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역사학 비중이 높은 유럽한국학회(AKSE, The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in Europe)에 대해 같은 조사를 진행한다면 다소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때 한국사회가 대중문화 분야에서 자신에 대한 외부의 관심을 확신하지 못했던 시기를 지나 또다른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듯이 국내 한국학 분야 역시 시야와 관점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향후 한국학 연구의 과제로 ‘민족문화’에서 이문화(異文化)와 아시아라는 가치를 포괄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제시한 정치학자 김원의 논의는 주목할 만하다.11 그에 따르면 한국학에 관한 기존의 좁은 시각은 한국학을 둘러싼 상상력을 제약하여 역설적으로 연구대상으로서의 한국을 서구의 지역학이 창출한 ‘대한민국’이라는 민족국가 범주에 가둬버릴 수 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건 자국학과 일국적 시야를 넘어 한국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12

 

 

변화하는 한국학: 선택의 기로에서

 

그렇다면 이렇게 한국학을 둘러싼 내·외부의 환경 변화 속에서 앞으로의 한국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동하고 있는 만큼 그 해답은 단순할 수 없으며 가능한 선택지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필자의 전공 학문인 인류학을 경유하여 한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인류학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연구대상으로서의 지역 혹은 ‘필드’(field)이다. 민족지적(ethnographic) 사례연구를 통한 이론 생산을 중시해온 인류학의 특성상 대표적인 연구대상 지역을 꼽아 특정한 연구주제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유럽의 식민지배에 놓여 있던 아프리카는 친족이라는 연구주제,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에 관한 연구는 신화 분석, 멜라네시아 지역연구는 선물교환과 경제인류학의 이론적 원천으로 여겨져온 경향이 강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해당 지역을 대표 삼아 특정한 이론 생산의 원천으로 작용한 경우를 찾기 힘들다. 이들 동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 연구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 연구들이 인류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주요 이론이나 개념 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고 보는 건 무리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연구성과가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한국의 경우는 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올라가고 해외에서의 한국학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2000년대 이후, 지금의 한국사회는 오히려 현대 인류학의 이론 생산을 위해 훌륭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인류학계의 주요 이론적 동향 중 하나인 이른바 ‘존재론적 전환’과 관련한 작업들이 주로 라틴아메리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지대한 영감을 받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3 서구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인간중심주의 등이 야기한 과학기술 맹신과 환경파괴 등에 대한 대안으로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에서 살아가는 선주민 집단의 존재론에 주목한 연구들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학에서는 특정한 연구주제가 특정한 지역과 친연성을 지니는 경향이 강하다. 현시점에서는 인류학적 연구대상으로서의 라틴아메리카(특히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가 해당 지역을 배경으로 했던 기존의 학문적 관심사인 후기식민주의를 넘어,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 이론 생산의 무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체제의 전지구적 확산이 초래한 여러 모순과 복합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는 연구대상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사람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 사회 변동과 급변하는 가족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쇼비니즘에 가까운—의 결합, 고도로 산업화된 대중문화의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경험하는 양면성, 기술과 자본에 대한 맹신이 야기하는 다양한 문제 등은 현대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민족지적 사례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점차 많은 국내외 인류학자들이 한국을 세계가 직면한 동시대적 문제를 드러내는 연구대상으로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사회를 자본주의 병폐가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으로 단순화하고 새로운 한국학을 또다른 형태로 ‘본질화’하자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과 결과가 우리 사회만의 문제를 넘어 세계가 공감하는 현실 문제와 사회갈등의 분석에 기여 가능한 보편적인 연구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얼마 전까지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한류를 이끌어온 장르와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 장르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지적한다. 과거 한류의 주역이 「대장금」(2003)과 「주몽」(2006) 등 “한국 고유의 내셔널리티를 강하게 드러내는 역사물이나” 「겨울연가」(2002) 등 “특유의 서정에 기반을 둔 로맨스물이었다”면, 최근 흥행한 「오징어 게임」(2021)과 「지옥」(2021)은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물론 “죄와 형벌, 정의의 관계를 둘러싼 형이상학적인 물음까지 흥미롭게 연출해”냈다는 것이다.14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역시 현대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절묘하게 드러내어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갑작스레 외부로부터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 앞에 한국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국학연구자 유영주의 언설처럼 현재 한국학은 한국을 향한 관심을 “서구에 대한 변방의식에 뿌리를 둔 ‘국뽕’의 관점에서 해소하는 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중심부 국가와 달리 한국이 식민지와 저발전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공감과 수평적 연대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의 갈림길”15에 서 있다. 당연히 둘 중 옳은 선택은 후자의 길이다. 이는 결국 우리의 어두운 측면을 세계 앞에 드러내어 직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영화학자 이남은 미국에 초대된 영화감독 봉준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부조리’라고 답한 게 인상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16 ‘한국적인 것’이라 했을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한국의 전통이나 유·무형의 문화유산, 흥과 한(恨)의 정서와 같은 것이 아니라 부조리야말로 한국을 드러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거친 한국사회가 단기간에 이뤄낸 경제성장과 제도적 민주화라는 밝은 빛의 이면에는 극심한 경쟁과 성장주의의 폐해, 양극화의 심화, 불평등한 젠더 관계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차곡차곡 쌓여 온갖 부조리를 자아냈다. 이같은 어두운 부조리를 면밀히 살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바깥에서 온 질문에 답하는 건 ‘한국적인 것’에 천착하는 학문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변화하는 한국학에 요구되는 건 한국이 과거 거둔 문화적 성취를 넘어, 외부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과제를 자·타의로 받아들여 지금의 한국을 이루어낸 과정에서 생겨난 어둠과 마주하는 일이다.

 

 

  1. 권숙인 「소비사회와 세계체제 확산 속에서의 한국문화론」, 『비교문화연구』 제4호, 1998, 183면.
  2. 1990년대 중반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이 말이 처음 시작된 건 1994년 5월 17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보고에서부터였다. 이 비교는 이후 문화·미디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무수히 언급되었다.
  3. 권숙인, 앞의 글 185면.
  4. 같은 글 189면.
  5. 김경일 『한국의 근대 형상과 한국학』,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29면.
  6. 김성문·백민정·백영서·유영주 좌담 「새로운 한국학과 개벽이라는 화두」, 『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100면.
  7. 김경일, 앞의 책 345면.
  8. 김성문·백민정·백영서·유영주, 앞의 좌담 101면.
  9. 김경일, 앞의 책 343면.
  10. 조원희 「AAS 발표 자료를 통하여 보는 최근 해외 한국학의 동향 분석」,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제학술회의 <흐름과 성찰: 한류와 한국학> 발표자료집, 2022.
  11. 김원 「냉전, 민주화 이행 그리고 한국학 연구」, 『한국학』 42권 2호, 2019.
  12. 같은 글 46면.
  13. 근래 한국에도 번역·소개된 『식인의 형이상학』(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지음,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2018)이나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와 같은 저작이 그 예이다.
  14. 한영인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63~64면.
  15. 김성문·백민정·백영서·유영주, 앞의 좌담 127면.
  16. 「가장 한국적인 것 묻자, 봉준호 답변은 ‘부조리’… 신선했다」, 중앙일보 202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