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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이라는 서사

 

미중 패권경쟁 시대, 다시 돌아보는 동아시아론

 

 

백지운 白池雲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조교수. 저서 『항미원조』 등이 있음.

febwtly@snu.ac.kr

 

 

1. 중국의 부상과 동아시아론의 위기

 

지금 우리는 훗날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중대한 전환기를 살고 있다. 우끄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남중국해 및 대만해협에서 고조되는 긴장은 강대국의 충돌을 관리해온 차가운 평화의 체제가 근저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1940년대 미·영·소 세 강대국이 세계질서를 관리하는 얄타체제의 구상은 1950년대 미소 ‘평화공존’의 네오 얄타체제로, 1970년대 이후에는 미중 적대적 공조체제1로 변형을 거치며 지속되었다. 그러나 미중관계가 전략경쟁체제로 전환되고 러시아 변수까지 가세한 지금, 미래의 향방을 예측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 두 거대한 지역전략이 대결체제를 잡아가는 목전의 형세는 적어도 다가올 미래가 미중 양국간 경쟁을 넘어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을 행위자로 불러들이는 전면적이고 복합적인 아레나가 될 것을 예고한다.

이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여 지난 30여년 지적·실천적 운동으로서 학계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아시아 담론의 평가와 전망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의 변화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응하는 데 동아시아론이 여전히 적실한가 아니면 청산의 수순에 접어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느 쪽이든 동아시아론이 위기를 맞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창비가 발신했던 동아시아론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쇄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방향을 잃었던 한국사회의 저항담론에 새로운 창을 열어주었다. 사회주의권과의 국교 수립, 세계화의 바람 등으로 일상적·인식적 시야가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동아시아론은 학문적 범주를 넘어 시민운동, 국가정책 담론으로까지 폭넓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담론으로서의 동아시아론이 어느샌가 일상 속 포화상태가 된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진전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정체상태에 들어선 것이 사실이다. 미중간 패권경쟁체제가 동아시아에 예의 냉전시대의 분열과 대결의 기억을 불러내는 지금, 탈냉전이라는 시대의 전환을 맞아 한국 지식계가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동아시아론에 대한 점검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동아시아론이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무거운 질문의 타래를 푸는 두서를 2022년 『동방학지』 특집좌담에서 잡아보고자 한다. 잡지 200집을 기념하는 좌담2에서 창비 동아시아 담론의 발신자 중 하나였던 백영서는 최근 동아시아론이 위기를 맞은 원인을 두가지로 간추렸다. 첫째는 시대적 분위기의 변화이다. 동아시아론이 제기된 시기는 냉전적 대결을 넘어 탈냉전 화해의 분위기가 한국사회에 넘쳐흐르던 때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았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관심도 컸으며 남북관계 또한 호전되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제 미중 경쟁체제가 본격화되고 기층에서도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혐오의 감정이 증대하면서 동아시아론이 급격히 설 자리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두번째 요인은 중국의 부상이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중국은 한반도의 남쪽에 갇혀 있던 반국(半國)이라는 지리적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창이었고, 또 그런 중국을 상대화·역사화하는 데에도 동아시아론은 유용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중국의 급격한 팽창과 그것이 야기한 국제질서의 구조변화는 동아시아론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백영서는 중국이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 문제가 된 상황에서 동아시아론 또한 지역적 시야에 더해 지구적 시야를 아우르는 갱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좌담의 다른 참석자들의 지적도 경청할 만했다. 한기형은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이 중국의 지식인과 사상적 접점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한 쑨 거(孫歌)의 글을 빌려, 동아시아론이 혹 한국에 안주하여 동아시아 지식계와 의미있는 교감을 주고받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이러한 지적은 지난 30여년 동아시아 학계와 시민운동의 활발했던 교류와 연대활동의 성과를 평가절하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랜 교류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일원인 중국의 지식계에 동아시아가 무게있는 화두로 자리잡지 못했다면 그 역시 진지한 성찰을 요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담론 자체의 한계라기보다 동아시아에 거하되 동아시아를 훌쩍 넘어서는 중국의 존재를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감당할까라는 동아시아론 본연의 난제이기도 하다.

김성보 역시 동아시아론이 직면한 곤경에서 중국 요인을 지목했다. 동아시아역사교과서 모임 등의 경험에 기반하여 그는 동아시아 지식인과 시민사회, 청소년들의 교감과 연대활동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거대해진 중국의 존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사고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지 우려를 내비쳤다. 아울러 중국의 팽창과 미중 충돌로 대표되는 21세기의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과연 동아시아론이 존재 의미가 있는가라는 그의 문제제기는 현재 동아시아론이 직면한 곤경의 정곡을 찌른다.

『동방학지』의 좌담은 동아시아론이 위기에 이르는 길목에 중국의 부상이 있음을 새삼 일깨운다. 필경 동아시아론은 냉전시기 견고했던 인식적 장벽으로 격절되었던 타자를 발견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주체적 탈근대의 상을 모색하는 열정이었다. 동아시아론에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주변과 소수자의 시각으로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질의하는 원심력과 더불어, 지난 세기 동아시아인의 시야와 사고를 제약해온 서구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각지의 생생한 역사적 경험과 실천을 상호 거울 삼아 새로운 주체성을 구축하려는 구심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팽창하는 중국과 그로부터 자라나는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갈등의 조짐에 대해, 동아시아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원인을 중국의 부상으로 귀결 지을 수는 없겠지만, 중국 문제가 동아시아론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아킬레스건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의 부상이 야기한 미중 전략경쟁의 세계질서가 동아시아를 또 한번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적인 장소로 만들 것이라는 점 또한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대전환의 시대에 학문적·실천적 범주로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며, 동아시아의 시야에서 한반도의 문제를 분석하고 전망을 찾는 작업 역시 그럴 것이다. 물론 기존의 동아시아론이 지금의 거대한 전환에 제대로 개입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 동아시아론이 등장한 배경 자체가 1970,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시각으로는 탈냉전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전환에 대응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창비의 동아시아론은 민족문학론의 태내에서 자라나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것으로서, 그 자체가 사상의 유연성과 자기혁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1970년대 민족문학론에 내재된 중대한 사상적 계기였던 제3세계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3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론이 학계와 시민사회의 다기한 층위에서 꽃피웠던 연대운동의 인식론적 연원은 민족문학론이 품었던 제3세계 민중연대의 열망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사상의 계승이란 반드시 의식적·연속적이 아니라 때로 자기부정과 극복이라는 단절의 계기를 통해 무의식적·비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동아시아론의 위기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지금이야말로 사상담론으로서 동아시아론을 진정으로 계승할 전기를 찾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동아시아론이 민족문학론을 극복함으로써 계승했던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가 동아시아론의 껍질을 깨고 탄생하기를 고대해야 하는 때다.

 

 

2. 전환시대 리영희의 극동아시아론

 

동아시아론의 극복과 계승의 길을 찾는 사유의 여정에서, 19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와 의미를 궁구했던 리영희 선생의 중국 및 극동 관련 글은 많은 계발을 준다. 1971~73년 사이 여러 저널에 기고되었다가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로 출간된 그의 논설은 냉전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던 한국사회에 예고 없이 도래한 데땅뜨의 충격에 대한 실감, 그리고 반공체제에 안주하여 국제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예견치 못한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고 있다.

 

한국국민은 닉슨의 중공 방문에 하늘이 무너질 듯 놀랐다. 중공을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던 한국국민은 그 보도가 있은 순간부터 한국의 안위와 국가적 방향과 자기 이해관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최근 앞을 다투어 극동정세의 해빙의 불가피성을 알고 있었음을 자랑하는 지식인과 언론이 평소 그 소임에 10분의 1만 충실했더라도 국민들은 국제정세 진전의 어느 정도의 낌새라도 알아차리고 있었을 것이다.4

 

1990년대 동아시아론의 출현이 탈냉전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부응이라고 하지만, 리영희는 1970년대 초 데땅뜨에서 탈냉전의 서광을 감지하고 있었다. 1969년의 닉슨독트린은 1947년 트루먼독트린 이래 대중공 고립주의를 축으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한 것으로서, 1972년 닉슨의 방중과 중일수교는 그에 따른 결과에 불과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지구적 탈냉전은 물론 동아시아의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데땅뜨의 기운으로부터 기이할 정도로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리영희가 소리 높여 경고했듯, 데땅뜨가 가져올 세계질서의 재편은 무엇보다 극동(동아시아)과 한반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는데도 말이다.5

리영희의 논설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데땅뜨를 물밑에서 추동한 시대적 논리를 헤쳐나가는 그의 눈이다. 리영희는 데땅뜨가 미국이 주도한 것도, 1970년대 들어 갑자기 발생한 것도 아니며, 전후 25년의 세계정세의 변화, 특히 1960년 이래 10여년의 변화가 만든 귀결이라고 보았다.6 냉전의 긴장이 한층 드높았던 1950, 60년대에도 ‘평화공존’ ‘중립비동맹’ 등 냉전 논리를 이반하는 다원화의 힘이 국제사회 저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1970년대 초 거대한 원심력으로 가시화된 것이 데땅뜨라는 것이다.

그 흐름 한가운데 있는 것이 중국이었다. 인공위성 발사 성공, 대외원조 사업으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 건설, 런민비(人民幣)의 국제금융시장 진입, 유엔 대표권 획득, 전세계 수교국 55개국 달성 등 중국이 1970년 한해 동안 국제사회에 보여준 성과는 ‘죽(竹)의 장막’이 미국이 만든 신화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된 것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이 고립시키려 한 중공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미국 내에서 나올 정도였다.7 리영희가 볼 때, 미국의 대중공 고립정책의 실패는 냉전시기에도 강대국의 힘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질긴 추세가 국제사회에 존재했음을 반증한다. 그가 글을 쓰던 1970년 시점에 중공을 승인한 55개국 중 42개국이 비공산권이었으며 그외에도 수십개국이 국교수립을 타진 중이어서, 머잖아 미국의 반공체제에 편입된 아시아 국가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된 유럽의 미국 동맹국 대부분이 중국과 수교를 맺을 전망이었다.8 리영희가 볼 때 이같은 역류는 냉전 초기부터 존재했다. 그 예로 그는 1957년 영국이 대중공수출통제위원회(CHINCOM)의 일방적 파기를 선언한 이후 대부분의 나라들이 줄지어 떨어져나간 상황을 들었다.9 관련 연구를 살펴보면 미국이 1952년 CHINCOM을 결성한 배경 자체가 한국전쟁 중에도 중국과의 무역을 멈추지 않았던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을 통제하기 위함이었으니,10 냉전이라는 인위적 논리가 생활세계의 실상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리영희의 논설이 새삼 일깨우는 중요한 사실은 냉전체제가 결코 획일화된 양분 구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미소간에 맺어진 ‘평화공존체제’, 1969년 정점에 이른 중소 분열, 중립노선을 추구하는 제3세계 국가들 및 미국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유럽 선진국들의 독자 노선 등 국제사회의 끈질긴 “정치적 다원화”11의 지향은 미국이 놓은 냉전 궤도의 지반을 갉아먹고 있었다. 미중 세력경쟁체제의 형성으로 ‘신냉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또다시 우리의 인식체계를 엄습하는 지금, 냉전체제 저변의, 그것을 이완하고 해체하려는 거대한 원심력에 주목했던 그의 혜안은 다가오는 대전환의 시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즉 세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대국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포장된 허상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를 움직이는 다기한 동력에 실사구시적으로 착목함으로써 시대의 참된 논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영희가 시대 전환의 한 축으로 중국에 주목했던 점도 지금 시점에 중요한 참조가 된다. 중국의 혁명역사와 현실 간의 괴리를 간과하고 정치체제와 지도자의 평가에 있어 균형을 잃은 점은 한계이지만, 국제정세 속에서 중국을 읽어내는 리영희의 눈은 지금 시각에서 보아도 매우 날카롭다. 그가 중공을 높이 평가했던 핵심 이유는 중국이 냉전의 표층에 감춰진 원심력을 읽어내고 그 편에 섰다는 데 있었다. 미소 냉전의 이분법에 지배되지 않는 광대한 ‘중간지대’가 있으며 그 중간지대의 힘에 의지하는 한 시간은 중국 편이라는 마오 쩌둥(毛澤東)의 낙관주의야말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포위망을 버텨낸 힘의 원천이었다. 1960년대 소련과도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간지대론은 미소 제국주의(제1세계)와 세계 약소민족(제3세계) 사이 제2세계의 범위를 한껏 넓힌 ‘삼개세계론(三個世界論)’으로 대체된다. 중간지대론-삼개세계론으로 이어지는 냉전시기 마오의 세계인식은 리영희가 데땅뜨의 시대적 논리를 읽었던 시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양자가 착목했던 것은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다원화의 힘이었다. 냉전의 논리로 중국을 옥죄었던 미국, 그리고 미국이 만든 냉전 궤도의 지반을 흔드는 원심력에 기탁했던 중국의 긴 싸움은 결국 중국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가 바로 닉슨의 방중으로 상징되는 미중 데땅뜨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다시 한번 크게 선회했다. 닉슨독트린으로 아시아에서 한발 물러섰던12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을 선언한 오바마 행정부 이후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 쿼드(QUAD) 등을 앞세워 대중국 포위망을 재구축하고 있다. 50년 전에 그러했듯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변화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으며, 한반도는 그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옥고를 치렀던 리영희가 「상고이유서」에 적었던바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안전 및 번영을 보장하는 중요한 길”13이라는 인식은 지금도 더없이 적확하다.

백영서는 1950, 60년대 『사상계』와 『청맥』에서 1990년대 창비 동아시아론으로 이어지는 사상계보의 징검다리로서 리영희를 배치했다. 1970, 80년대 한국 지식계의 제3세계 인식지도에서 비껴나 있던 사회주의 중국과 베트남의 실상을 전달하여 냉전의 우상에 갇힌 한국사회의 병든 구조를 깨고자 했던 리영희의 노력은 한중수교 이후 변화된 현실에 대응하는 지적 책무로서 동아시아론의 길을 일찍부터 준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14 다만 당시 창비의 동아시아론이 리영희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의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한때 중국혁명에 희망을 기탁했던 많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리영희 역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받았을 환멸을 사상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대목을 동아시아론이 숙제로 받아 안지 못한 점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사상의 계보화란 시대가 한차례 순환하여 또다른 전환기에 들어서고 위기가 엄습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보이지 않던 자신의 족적과 조우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다시, 사상의 중간지대를 찾아

 

1970년대 전환시대의 의미를 투시했던 리영희의 안목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국과 세력경쟁에 돌입한 지금 중국의 전략이 냉전시기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적 이분법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는 중간지대와 연대하여 미국의 포위망을 서서히 무력화했던 것처럼, 현재 중국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일대일로’의 거대한 띠로 미국의 포위망을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다. 1970년대 리영희가 주목했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중앙아프리카 잠비아를 연결하는 탄자니아-잠비아 철도(TAZARA)는 지금도 중국-아프리카 우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노선의 후속으로 2015년 서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잠비아 국경에 이르는 철도가 중국철도공사에 의해 완공되었다. 가운데 비어 있는 잠비아 횡단노선까지 완성된다면 아프리카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가 중국의 자본으로 놓이게 되는 셈이다.15 단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이는 ‘일대일로’의 역사적 연원이 냉전시기 중국의 제3세계 원조로 거슬러올라가며 그 저변에 작동하는 논리 역시 예의 중간지대론임을 암시한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 중간지대론과 그 후신인 삼개세계론이 제국주의에 대한 세계 약소민족의 저항이자 세계혁명이라는 이념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면, 지금의 ‘일대일로’에는 그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념의 빈자리를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막강한 중국 자본이 메우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 명칭부터가 고대문명의 교융과 번영을 상징하는 ‘실크로드’를 참조한 데서 보이듯, ‘일대일로’가 모색하는 새 이념은 필경 모종의 문명론적 지향을 감추고 있다. ‘일대일로’를 자본주의 경제 양식을 극복하고 중국의 역사문명과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탈근대적 문명기획으로 풀이했던 왕 후이(汪暉)의 작업은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16 중국정부는 ‘일대일로’가 경제개발 프로젝트에 불과하다고 공언하면서도 그것에 이념적 살을 붙이는 작업은 꾸준히 모색 중이다. 흥미롭게도, 유라시아대륙을 중심에 두고 인도양과 태평양을 양편에 거느리는 ‘일대일로’와 미국의 대중국포위전략으로 제출된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의 지도는 양자 모두 인도양과 태평양을 지정학적으로 주시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겹쳐진다. 일본의 아베(安部晋三)정부가 제안하여 바이든(J. Biden) 행정부가 받은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의 기초를 제공한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은 앵글로-아메리카가 지배하는 대서양-태평양에 대항하는 권역으로, 독일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가 창안한 것이었다. 태고적부터 하나의 ‘생활권’(Lebensraum)으로서 서구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대항적 바다로 탄생한 ‘인도-태평양’은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는 물론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와 쿄오또학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17 전간기(戰間期) 독일의 반서구적 지정학의 산물인 ‘인도-태평양’이 미국의 대중국전략으로 돌아온 점도 역설적이거니와, 태평양 중심의 근대지도를 초극하는 “문명 재창조의 기획”으로서 ‘일대일로’ 역시 인도양과 태평양을 ‘하나의 바다’로 재규정한다18는 점이 공교롭다. 두 거대한 지역전략이 경합하는 미중 패권경쟁에 문명대결의 가능성이 잠복해 있다는 예감을 떨치기 어려운 이유이다.

이 대목에서 30년 전 동아시아론이 처음 제기되던 때의 문제의식이 떠오른다. 당시 문제의식의 핵심은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에 직면하여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대안문명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낙청이 1993년 지적한바, 생산양식의 변화에 치중했던 사회주의와 정신문명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공허한 문명론을 넘어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인간의 감정과 정서,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살이의 예의범절과 수양법”의 근본 변화를 아우르는 대안적 생산양식을 동아시아의 문명자산으로부터 쟁취하여 “세계사적인 문제해결에 동원해보자”는 것이 창비 동아시아 담론의 출발점이었다.19 같은호에서 최원식은 “현존사회주의의 붕괴야말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 차원의 민중세상을 여는 제3세계론의 진정성에 더욱 핍근”할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함으로써20 동아시아론이 1970년대 민족문학론을 견인했던 ‘제3세계적 시각’21에 인식론적 기반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했다. 그가 동아시아론의 화두로 견지했던 ‘제3세계’란 특정 지역이나 장소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지양하면서 냉전시대의 사고를 지배해온 이분법을 극복하여 세계를 주체적으로 바라보자는 인식론적 의제였다. 이후 “지적 실험”과 “실천적 프로젝트”를 결합한 백영서의 작업 속에서 동아시아론은 구체적 삶의 현장과 결합한 살아 있는 담론으로서 생명력과 확장성을 얻게 되었다. 그가 제기한 “이중적 주변” “핵심현장” “복합국가”는 운동의 현장에서 서로를 참조하면서 연대의 경험을 사상화한 결실로서,22 동아시아인의 연대야말로 동아시아 담론의 실존적 기반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렇게 하여 동아시아론은 사상적으로 대안문명의 모색, 인식론적으로 제3세계적 시각, 실천적으로 타자/주변부의 연대라는 정족의 구조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론이 학문적·실천적으로 번성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는 대안문명의 모색이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에 대한 절박성이 형해화된 면이 없지 않다. 미중 패권경쟁이 자칫 위험한 문명론적 대결로 비화하지는 않을지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지금, 생산양식이나 체제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재 방식, 인간과 자연 및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부터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대안문명을 모색하는 동아시아론의 문제의식이야말로 지금의 현실에 뒤떨어지기는커녕 근원적인 차원에서 가장 예리하게 현실에 핍근하는 것이 아닐까.

19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를 냉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는 힘에서 발견했던 리영희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가오는 미중 패권경쟁체제에도 이분법의 우상이 가리지 못하는 광대한 중간지대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소 대결에서 미중 대결로 모습을 바꾼 양자택일의 논리에 또다시 지배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오의 중간지대론을 상대화하는 사상의 중간지대를 개척하는 일이다. 우리의 시야는 두 강대국의 어느 한편에 서기를 거절하는 지구상의 수많은 국가들과 협력함은 물론, 국가이성을 넘어 연대를 필요로 하는 광활한 사유와 실천의 영역을 향해야 한다. 다가오는 미중 패권경쟁시대는 냉전시대와 다르다. 적대적으로 치닫기엔 생활세계가 이미 너무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기후환경 및 생태위기와 글로벌 팬데믹의 공포,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지구적 현상이 된 혐오 문제, 핵전쟁의 불안 등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인류사적 난제에 공동으로 직면해 있다. 이 압도적인 지적 사명에 부응할 사상의 이름이 꼭 동아시아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론이 지금 현실에 유효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30년 전 동아시아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의 영역을 개척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다. 거대담론이 부재했던, 아니 거대담론을 거부했던 한 시기를 지나, 한반도의 운명을 세계사적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야가 다시 요구되고 있다. 담론이나 사상은 결코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앞세대 한국의 지적 계보를 제대로 잇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론을 어떻게 딛고 넘어설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1. 이남주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새로운 지역협력의 모색: 샌프란시스코체제의 동학(動學)을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2020년 봄호.
  2. 백영서·도현철·한기형·김성보 좌담 「동방학, 국학, 동아시아론: 동방학을 다시 기록하다」, 『동방학지』 제200집, 2022, 1~27면.
  3. 백지운 「민족문학, 제3세계, 동아시아: 최원식의 동아시아론의 계보와 구조」, 『동방학지』 제190집, 2020, 300~309면.
  4. 리영희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 2006, 21면.
  5.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같은 책 84면.
  6.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같은 책 504면.
  7.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같은 책 55면.
  8.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같은 책 55면,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같은 책 512면.
  9.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같은 책 70면.
  10. Frank Cain “The US-led trade Embargo on China: The origins of CHINCOM, 1947-52,” Th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8, No. 4, 1995, 49~51면.
  11.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같은 책 496면.
  12. 구체적 조치는 대만해협에서 제7함대의 대폭 축소, 주한미군 감축, 베트남과 필리핀으로부터 단계적 철수, 오끼나와 반환, 일본의 재무장과 아시아 주둔 미군의 핵전력 중심으로의 재편 등이었다. 리영희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앞의 책 503~32면.
  13. 백영서·최영묵 엮음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리영희 선집』, 창비 2020, 311면.
  14. 백영서 『동아시아담론의 계보와 미래: 대안체제의 길』, 나남출판 2022, 146~47, 185~86면.
  15. Patrick Mulyungi, “Angola-Tanzania railway line construction in the offing,” Construction Review, 2021.8.14; Martina Schwikowski, “Is Africa’s ambitious railway project running late?”, Deutsche Welle, 2022.10.2.
  16. 백지운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제국의 지정학」, 『역사비평』 2018년 여름호, 220면; 汪暉 「兩洋之間的文明」, 汪暉 外 『新周期: 逆全球化, 知能浪潮與大流動時代』, 遙寧人民出版社 2017, 254면.
  17. Hansong Li, “The ‘Indo-Pacific’: Intellectual Origins and International Visions in Global Contexts,” Modern Intellectual History, Vol. 19, No. 3, 2021; 김일년 「오래된 미래: 미중 냉전과 인도-태평양의 형성」, 『역사학보』 253집, 2022, 510면.
  18. 汪暉, 앞의 글 238면; 백지운 「일대일로와 문명론적 지정학」, 윤대영 엮음 『아시아의 20세기 지역변동과 지역상상』, 진인진 2023, 225~26면.
  19. 고은·백낙청 대담 「미래를 여는 우리의 시각을 찾아」, 『창작과비평』 1993년 봄호, 24~30면.
  20. 최원식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 『창작과비평』 1993년 봄호, 213면.
  21. 최원식은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가장 의미있는 성과를 “제3세계 문학과의 올바른 연대를 인식”한 것이라 짚었다. 최원식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 『민족문학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1982, 364~70면.
  22. 백영서 『동아시아담론의 계보와 미래』, 나남출판 2022, 201~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