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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영하 周瑛河

202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malaria78@gmail.com

 

 

 

아이오와

 

 

1

 

빌리를 먼저 만난 건 하은영이었다. 출장 겸 여름휴가로 갔던 아이오와의 한 펍에서였다. 샷도 칵테일도 놀랄 만큼 저렴해서 둘은 종류별로 돌아가며 실컷 마셨다. 벽에는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고 술잔과 테이블은 끈적거렸다. 두 사람은 밤이 깊을 때까지 함께 마시다가 다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질색했던 하은영을 생각하면 그곳은 아주 인기 없는 펍이었을 텐데, 거기가 어딘지 궁금해진 건 나중의 일이었고 훗날 아이오와에 다시 갔을 때도 찾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하은영과 빌리가 떠오를 때면 내가 모르는 그 펍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여러번 고쳐 그려보곤 한다. 내가 없으므로 온전해지는 둘만의 순간을. 장면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고, 더는 이들을 만날 수 없으므로 이 상상은 앞으로도 내게만 속해 있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이 작은 기쁨을 준다.

 

빌리는 그해 아이오와대학의 여름 창작세미나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온 젊은 시인으로 저렴한 버번을 잔뜩 사다가 자신의 숙소 주방에서 자주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이름 대신 빌리 버번이라고 불렸다. 게다가 하루 열두번쯤 기분이 바뀐다는 그의 룸메이트가 아내의 방문으로 따로 머물 곳을 얻은 덕분에 빌리의 작은 주방은 밤의 허기에 시달리는 작가들로 더더욱 붐볐고, 하은영도 어느새 마지막까지 그 파티들에 남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빌리가 하은영에게 그 노트 이야기를 꺼낸 건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함께 설거지를 하다가 정말로 자기 노트를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하은영은 전에 빌리가 노트를 보여주겠다는 걸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은영도 이번에는 진지하게, 정말로 뭐에 대한 내용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예전에도 말했듯이 옥수수밭에 대한 글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은영도 여전히 그게 흔해 빠진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냄새를 풍길 거라고. 하지만 결국 노트를 보여달라고 말했고, 그걸 읽고 난 며칠 뒤에는 내게도 메일을 보내와 아이오와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직은 거칠지만 모든 장면이 마음을 끌어요.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지고요. 프로그램은 곧 끝나겠지만 빌리와 난 한달쯤 일할 공간을 빌릴 거예요. 어떤 옥수수밭 농가인데 빌리가 잘 아는 곳이라고 해요. 구선생도 잠시 와서 쉬는 건 어떨까요.

 

메일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은영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사람에도 작품에도 거리를 두는 타입이었다. 충동적으로 굴거나 흥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해외에이전시 일을 시작한 뒤로는 더 엄격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방만한 한달이라니. 사랑에라도 빠진 건가 생각해봤지만 그야말로 당시 하은영에게는 가장 벌어지지 않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갈 수 없다고 답장했다. 몇가지 핑계를 대긴 했으나 무엇보다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지쳐 있던 때였다. 가까스로 첫 소설집을 낸 뒤로 긴긴 탈진이 찾아왔다. 쓰고 있는 장편은 몇년째 지지부진했다. 내 상태를 모를 리 없는 하은영이 이런 메일을 보내온 것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오와행 비행기표를 끊게 된 건 하은영이 재차 보내온 메일 한통 때문이었다. 하은영은 빌리의 노트에서 옮긴 긴 시 몇편을 보내왔다. 짐승을 죽이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도살자, 신을 똑바로 본 죄로 눈이 멀어버린 사제, 자기 꼬리를 베어 먹어야 살 수 있는 뱀 인간 같은 이상하고 어두운 인물들이 옥수수밭에 모여드는 내용이었다. 하은영의 말대로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는 글들이었지만, 그보다 내가 마음을 빼앗긴 건 메일 마지막에 첨부된 그 농가의 사진이었다.

지쳤기 때문일까. 기이할 정도로 빽빽한 옥수수밭에 둘러싸여 요새처럼 보이는 그 집을 보자 저기야말로 내가 도망쳐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하은영이 있을 테고, 또 눈먼 사제와 도살자와 뱀 인간을 만난들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오와로 향하는 길은 멀고 또 멀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끌고 나오자 저만치 떨어진 주차구역에서 하은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 비행에 잔뜩 구겨진 내 몰골과 달리 하은영은 얼굴과 팔이 보기 좋게 탔고, 딱 봐도 농부를 꿈꾸는 도시인풍인 지나치게 반들거리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은영은 그 모자를 조수석에 앉은 내게 씌워주며 웰컴 선물이에요, 여행길은 어땠어요? 물었다. 나는 피곤했다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은영은 별말 없이 웃었는데, 언제나 그랬듯 내가 최소한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하기를 기다려주는 듯했다.

다행히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어느정도 평정을 되찾았다. 무미건조한, 끝없는 옥수수밭 덕분이었다. 이곳을 다녀왔던 몇몇 동료들의 이야기처럼, 아무 느낌 없이 흘러가는 무수한 날들처럼, 그곳에는 옥수수가 있었고 옥수수가 있었고, 또 옥수수가 있었다. 밭들이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는 동안 나는 여러번 차를 세우고 길가에 토했다. 그때마다 하은영이 운전석에서 걸어 나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사나운 한낮의 볕이 쭈그려 앉은 우리 등 위로 내리꽂혔다.

 

지금도 나는 그때 아이오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와 하은영은 여전히 친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귀국을 이틀 남겨두고 하은영은 말도 없이 그 농가를 떠나버렸다. 아침에 빌리와 내가 눈을 떴을 때 하은영은 없었고 침대 구석에 그녀가 아끼던 스카프만 둘둘 말려 처박혀 있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전날 작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평소의 하은영을 생각하면 그게 이유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은영이 급하게 비행기표를 바꿔 혼자 돌아갔다는 걸 알고 나서도, 어떤 이유에서건 더는 내 연락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정을 지킬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일했던 에이전시들에 연락했지만 누구도 하은영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한참 뒤 나는 그녀가 제주도에서 머물다가 서귀포시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면 성장의 비밀』 『아침형 아내, 저녁형 남편』 『프랑스 빵처럼』 같은 그녀와는 조금도 접점이 없어 보이는 출간목록을 가진 곳이었다. 서점에 갈 때면 그 출판사 신간들을 종종 찾아 판권에서 이름을 확인했지만 한두해가 지나자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이후 몇해에 걸쳐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은영이 결혼했다는 것, 아이를 낳았다는 것, 진흙탕 같은 법정소송 끝에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빌리는 언젠가 옥수수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들어가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날 하은영과 내가 그 낡은 농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공기는 석양에서 번져 나온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무수한 옥수수 그림자들이 날카로운 죽창처럼 기우뚱 붉은 땅에 꽂혀 있었다.

막상 눈으로 본 농가는 평범했다. 농가치고 층고가 꽤 높다는 것 외에 특별할 게 없는 2층 목재건물로, 여러번 보수한 듯 자재마다 결과 색이 달랐고 바람이 불면 벗겨진 페인트칠이 비늘처럼 일었다. 내 시선은 곧 포치에 앉아 있는 빌리 버번에게로 가닿았다. 그는 우리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는데 나는 그의 외양도 걸음걸이도 어딘가 이 농가처럼 무색무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밝은 금발과 눈동자 색 때문인지 마치 빛바랜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다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쾌활하고 악수를 건네는 손은 따뜻하고 두툼해서 그런 것들이 그에게 색채를 입혀주는 듯했다.

빌리는 느긋한 몸짓으로 내 짐을 받아 들었다. 주방으로 들어간 하은영은 벌써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빌리가 계단에 올라서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 방은 2층이에요. 계단이 좀 가파르니 조심해요. 그는 짐가방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나무 난간을 친근하게 툭툭 두드렸다.

처음에는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여길 오갔어요. 결국 오토바이가 말썽을 부려서 며칠이나 발이 묶였어요. 바보 같았죠. 참, 은영이 말해줬나요? 이 농가를 먼저 발견한 건 내 삼촌이에요. 한때 시인이셨죠. 오래전에 나처럼 이곳 창작프로그램에 왔다가 이후에도 여기로 쉬러 오곤 했어요. 삼촌은 우연히 저 옥수수밭에 들어갔다가 자기 미래를 봤어요.

뭘 봤다고?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아까 오는 길에 하은영이 했던, 빌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꽤 할 거라는 귀띔을 떠올렸다.

그럼 당신도 봤어요? 그 미래 말이에요. 내 물음에 빌리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봤죠. 여기 온 첫날에. 당신도 내 말 안 믿죠? 내가 애매한 미소로 답하자 그는 뭐가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빌리가 안내한 내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창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빌리가 커튼을 젖히자 순식간에 방 안으로 붉은 석양이 쏟아져 들어왔다. 층고 높은 건물의 2층에서 보는 옥수수밭 전경은 지상에서와는 또 달랐다. 저기 들어갔다가 못 빠져나오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방을 나갔지만 나는 그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걸 본능으로 이해했다. 멀리 농가 뒤쪽으로는 먼지 날리는 노후한 도로가 놓여 있고, 그외 온 사방에는 옥수수들이 어떤 틈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치밀하게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름다운 동시에 어딘가 강박적이고 불쾌했다.

아래층에서 하은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창가에 서 있다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 속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실력 발휘 좀 했는데 먼저 채갔네요. 내가 다가가자 하은영이 고갯짓으로 현관 너머 포치를 가리켰다. 탁자에 앉아 뜨거운 계란토스트를 맥주와 천천히 먹고 있는 빌리가 보였다.

어떤 펍에서 만났어요. 하은영이 가스레인지 불을 끄며 말했다. 조용히 혼자 한잔하러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작년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보이길래 좀 망했다 싶었죠.

나는 하은영이 내민 컵을 받아들었다. 술잔이 뿌옜겠네요. 하은영이 웃었다. 맞아요. 탁자도 끈적끈적했어요. 그녀는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프라이팬을 담그며 말을 이었다. 한잔은 예의니까 마시고, 두잔째 시킬까 말까 고민하는데 가게 문이 열리더니 저 친구가 들어왔어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와서는 이러더라고요. 믿지 않겠지만 자기는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나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에이, 설마? 그게 먹혔다고? 하은영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내가 그럴 것처럼 보여요?

나도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니까 이러죠. 하은영이 토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를 두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들었다.

그냥 상황이 재밌어졌어요. 다음 날 저 친구 숙소에 초대받아 갔는데, 자기가 나를 진짜 만났다는 걸 증명할 수 있대요. 자기 노트를 읽어보면 알 거라고. 그날은 읽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게 바로 내가 구선생한테 말한 그 옥수수밭 노트예요.

나는 참지 못하고 킥킥댔다. 역시 시인은 좀 다른가?

두 사람, 내 얘기 해요? 빌리가 미심쩍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은 다음 웃음을 참으며 포치로 나갔다. 빌리가 자꾸 그러면 자기도 러시아말만 하겠다고 말했다. 하은영이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구선생이 웃으니까 나도 좋은데요. 여기 있는 동안 가끔은 그렇게 웃어줘요.

 

그날 우리는 군데군데 탄 토스트로 배를 채웠지만 적어도 내가 진짜 채우고 싶은 건 위장이 아니었다. 첫날부터 새벽이 올 때까지 잡히는 대로 마시고, 내키는 대로 떠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일산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한줄이라도 더 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떠들면 떠들수록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빌리가 자기 어금니, 그리고 자신과 달리 일편단심 보드카 파였던 어머니 얘기를 해준 것도 그날이었다.

나는 어금니가 안 났어요.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나한테 부드러운 음식을 주는 대신에 뭐든 천천히 먹는 습관을 들이도록 했어요. 보드카를 많이 마셨을 때를 제외하면 현명하고 다정한 분이었죠.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어요. 밥을 먹고 나가보면 다들 나를 빼고 무리를 지어 있었어요. 열두살쯤부턴가. 삼촌을 따라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더 인기가 없어졌죠. 그러다가 입 가볍기로 유명한 어떤 바보한테 어쩌다 입안을 보여줬더니 뭔가 엄청난 걸 본 눈치였어요. 조금 거짓말을 덧붙였거든요. 시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금니가 없다고. 우리 삼촌도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니 정말로 난 학교에서 시인으로 불리고 있었어요. 그때 어렴풋이 알았죠. 시 쓰는 일도 없는 어금니를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거요.

왜 어금니가 안 나냐고 내가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깊이 숨어 있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멀쩡한 어금니가 나오지 않는 게 나를 가졌을 때 당신이 보드카를 마셔서라고 생각해요.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많이 우셨죠.

기다려봐요. 좀더 크면 날 거니까. 하은영의 농담에 빌리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처럼 서른살이 한참 넘으면요? 정말 궁금한데 서른살이 넘으면 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요?

하은영이 감자칩을 빌리에게 던졌고 셋 다 낄낄대며 웃었다. 하은영이 차가운 맥주캔을 하나 더 따며 말했다. 구선생이 와서 또 하나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이제 저 괴상한 소리들을 나만 듣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의 생활은 느슨하게 자리를 잡았다. 저녁에는 큰일 없는 한 셋이 모여서 떠들고 먹고 마셨다. 졸리거나 피곤하면 각자 원할 때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는 이른 아침이 되면 뜨거운 차를 만들어 포치로 나갔다. 희미한 숙취와 그 시간의 옥수수들이 좋았다. 이슬에 젖어 부드럽고 혼곤한 습기를 뿜어내는 새벽녘의 옥수수들은 위압적인 존재만은 아니었다. 나는 뿌연 습기 위로 천천히 빛이 내려앉다가 어둡던 옥수수밭이 순식간에 황금색 햇살로 차오르는 풍경을 기도하듯 지켜보곤 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글을 쓰려고 애썼다. 그렇게 낮 시간이 흘러가면 또다시 포치의 저녁이 돌아왔다.

시내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먹을 것이나 술이 떨어져야 다들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내로 향했다. 목적이 분명한 외출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셋 다 요리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어서 샌드위치, 토스트, 소스를 들이부은 파스타면 충분했다. 너무 질릴 때는 아시안마트에서 채소와 쌀, 매운 양념을 사다가 밥을 짓고 정체불명의 볶음이나 탕을 만들면 됐다. 다만 술만큼은 버번을 중심으로 넉넉히 종류별로 사들였다.

나는 쇼핑이 끝나고 나서 빌리가 반쯤 고장 난 낡은 차 트렁크를 힘주어 열어젖히는 모습도 좋아했다. 단호하고 빠르게 술병들이 담긴 봉투를 먼저 깊숙이 밀어넣고, 그 앞쪽에는 식료품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술병도 보호할 겸 무료함을 달랠 겸 여기저기서 무료로 배포되는 잡지나 기념엽서들도 던져넣었다. 그런 다음 한껏 늑장을 부리며 왔을 때와 달리 서둘러 농가로 차를 몰았다. 도시는 돈 냄새 풍기고 시끄럽고, 도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고, 어서 빨리 고향 집으로 돌아가 엄마 밥을 먹고 싶다는 식의 뻔하고 뻔한 노래들을 부르며.

 

그러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는 빌리를 보게 된 건, 내가 두 사람 모르게 몇번쯤 마음의 고비를 넘긴 후였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날들을 보내면서도 책상 앞에 앉으면 가끔 견디기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신선한 공기처럼 주변을 둘러싼 이 모든 변화와 호의에도 내가 여전히 써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간신히 써낸 문장들은 토막이 나 있었다. 모든 의미와 맥락들이 일제히 도망친 것 같았다. 어떤 날은 놀란 개에 대한 장면을 썼다가 한 문장만 남겼다. 네 다리가 잘린 줄도 모르고 개는 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빌리가 속도를 내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내게 작은 불안감을 일으켰다. 그는 노트 놓을 자리만 있으면 어디서든 차곡차곡 적어 내려갔고, 노트는 곧 풍성한 필기체 글씨로 가득 찼다. 그걸 보면 빨리 쓰고 싶어졌고 동시에 두려워졌다.

어떤 날은 그런 조급한 마음도 견딜 만했다. 하은영이 원고를 읽는 모습을 볼 때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날아오는 일거리들을 살피면서도 빌리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고를 볼 때 하은영의 표정은 느슨하지만 집중을 잃지 않았고, 탁자 위에 편안하게 뻗은 연갈색 팔은 건강해 보였다. 한때 쓰는 사람이었던 하은영은 이제 온전히 읽는 사람이 되었구나. 종종 생각했다. 나도 읽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빌리는 일을 마치면 빠르게 흘려 쓴 글씨를 다른 종이에 깨끗하게 옮겨 적어 하은영의 방을 찾거나 포치에서 따로 그녀를 만났다. 그럴 때 모른 척 지나치다보면, 어쩌다 한번씩 서로에게 쏘아붙이거나 웃거나 달래거나 가끔은 변명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제와서야 돌이켜보곤 한다. 하은영과 둘이 있을 때 멀찍이서 본 빌리는 대개 기분 좋게 웃거나 때로는 무표정하거나 아주 상심한 얼굴이었는데, 어떤 표정이건 그 눈에는 무방비 상태의 너무 연약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건, 그 무렵 내가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는 빌리를 똑똑히 보고도 달려나가서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날 밤 빌리는 우리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농가 끝 쪽의 옥수수밭 앞에 서 있었다. 울창한 옥수수밭은 무섭게 자라 그의 키를 한참 넘어서 있었다. 그 앞에 선 빌리는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땅을 툭툭 차면서 주저하는 듯하다가 갑작스럽게 옥수수밭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소스라쳤다. 하은영을 깨워야 할까, 함께 그를 찾으러 가야 할까 생각했지만 빌리가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걸 곧바로 직감했다. 나는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는 처음 이 농가에 도착한 날부터 저곳에 들어간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삼촌도.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창가를 서성였다.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분명히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될 즈음 내가 하은영을 깨우기 위해 창가를 떠나려 할 때였다. 먼 옥수수밭 너머로부터 긴긴 물결이 천천히 이는 게 보였다. 그 물결은 포치 처마의 불빛 쪽으로 일직선으로 향하다가 옥수수밭이 시작되는 거친 돌들이 깔린 데까지 이어졌고, 이윽고 빌리가 어두운 옥수수밭에서 빠져나왔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들어갈 때와 달리 주저하지 않는, 심지어 힘차 보인다고도 할 만한 걸음걸이로 그는 농가 쪽으로 오고 있었다. 마치 맞서듯이, 또는 너무 바쁘다는 듯이.

이윽고 그가 농가에 다다랐을 때 나도 모르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1층에 있는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긴장이 풀어지며 털썩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았을 때였다. 빌리의 방에서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2

 

구선생, 잘 지냈어요?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분했다.

피로 속에서 듣는 그 목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잠기운을 털어내기 위해 애쓰며 누구냐고 물었다. 전날 밤을 새우고 간신히 낮잠에 든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잠을 깨웠냐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목소리가 하은영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몇시죠? 대답이 돌아왔다. 7시 27분이에요, 아침 말고 저녁 7시. 지나간 육년쯤의 시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전히 부드럽게 채근하는 목소리였다. 희미하게 웃는 그 얼굴까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주방으로 걸어가 전기주전자 스위치를 올리는 그 짧은 동안 수많은 질문들과 의문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뒤엉켰다. 기계적으로 커피를 찾았지만 원두는 떨어지고 없었다. 인스턴트커피 뚜껑을 열었다.

빌리 버번 기억하죠. 나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친구가 죽었어요. 스푼 끝에서 오래된 커피가루가 조용히 떨어졌다. 하은영이 말을 이었다.

굳이 전화를 한 건 구선생한테 국제택배가 하나 와서예요. 그리고…… 우리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적절한 질문도 대답도 찾지 못한 채 끓어오르는 주전자가 스스로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택배를 빌리가 보낸 건지만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수많은 말들은 씹어 삼켰다. 전화기를 더 붙잡고 있다가는 뭔가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잠시 후 전화는 끊어졌고, 하은영은 문자 창에 자신의 사무실 주소와 두마디를 남겼다.

 

꼭 와줘요. 할 말이 있어요.

 

그 전화를 받은 뒤로 나는 한동안 자고 먹지 못했다. 순식간에 몸무게가 줄어들 만큼 복잡했고 슬펐다. 빌리가 죽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은영이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둘 다 이유가 됐다. 내 일부가 그 농가에서의 시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걸 결국 인정해야 했다.

며칠 뒤부터는 일상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몸이 좀 회복되고 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미뤄둔 일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이오와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소설 쓰기를 포기했다. 누구도 내가 포기했다는 것조차 알 리 없는, 사실상 나는 그런 소설가였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아이오와 이후 답신은 없었어도 나는 하은영이 생각날 때면 종종 메일을 보내곤 했다. 소설을 그만두고 나서는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더는 사용하지 않는 메일 계정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다시 인증을 하고 들어간 편지함에는 스팸들만 가득 쌓여 있었다. 돌이켜볼 때마다 구차해지는 메일들을 나는 이 계정으로 보냈었다. 특히 그해 아이오와에서 돌아와서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 하은영에게 보낸 편지들은 의문과 원망으로 가득했다. 모든 게 엉망이었던 어떤 날은 씨발년, 하고 짧은 욕설만 써서 보냈다.

그전에는 몰랐다.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누군가의 세상에서 송두리째 쫓겨난다는 건 닫히지 않는 지옥문 앞에 서는 일이었다. 분노가 사그라들고 나면 그 자리에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끝없는 복기만 남는다.

이를테면 소설 쓰기 모임에서 하은영을 처음 만난 여름과, 네살 차이인 그녀가 스무살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던 어떤 순간들이 밥을 먹거나 양치를 하다가도 떠올랐다. 술에 취해 낯선 동네를 헤매다가 울면서 전화를 걸었던 날들, 지금 데리러 가겠다고 대답하던 목소리, 공모에서 떨어지고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마음들이 끝없이 살아 돌아왔다. 내가 짜증을 부리며 말 좀 놓으라고 했을 때 하은영이 어떻게 웃었더라. 어떤 순간들은 바스러져 떠올릴 수조차 없다.

그 끝에 내 기억은 늘 하은영이 더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 날까지 다다른다. 하은영은 프리랜서 번역 일을 접고 한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했다.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못 쓸 거예요. 어느날 하은영은 막 마감을 마친 어떤 책 이야기를 하다가 말했다. 이제 쓰는 건 그만하고 싶어요.

누군가가 애써 내린 결정을 한때의 슬럼프라고 여기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있을까. 그 멍청함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나는 하은영에게 금방 다시 쓰게 될 거라고 가볍게 지껄였다. 신간 소설들을 골라 하은영의 원룸으로 줄기차게 보냈다. 그런 끔찍한 일들을 나는 했었다.

이제는 그녀가 자신의 한 페이지를 닫기 위해 지불해야 했을 마음을 안다. 나도 더는 쓰지 않으므로.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개조되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충만한가.

하은영이 알코올중독 치료센터에 자기 발로 걸어가 입원했던 일도 떠오른다. 내가 오랜 투고 끝에 첫 소설집을 냈을 즈음 하은영은 일하던 출판사에서 해고당했다. 그 무렵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술을 마신 뒤 마스크를 쓰고 일했다. 원고에는 모호한 교정부호를 남겼다. 주머니와 가방에는 양철캔에 담긴 민트사탕이 덜거덕거렸다.

이후 몇번의 경고 끝에 하은영은 한동안 술을 끊었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중독자들도 몇개월쯤은 참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잠시의 냉각기일 뿐이라는 것. 하은영도 그랬다. 다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점에 문제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한 작가의 출판기념회 날, 사회자였던 하은영은 그 자리에 술을 마시고 들어갔다. 그날 벌어진 일은 다른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날 하은영이 스크립트를 무시하고 작가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해. 칼로 어떤 규칙도 없이 베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하은영은 그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나는 그녀가 센터에 들어간 지 두달이 지나서야 면회를 갔다. 하은영은 전보다 건강해진 얼굴로 내가 사 온 하리보 젤리 봉지를 뜯어 색깔별로 하나씩 책상 위에 열을 지었다.

여기 있다보면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어쩌다 술독에 빠졌는지 다들 이유가 분명하다는 거예요. 새빨간 거짓말이죠. 그냥 마시고 싶을 뿐이면서.

하은영이 젤리 한알을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옛날에 단도박회에 인터뷰를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기 회장이 그랬는데, 도박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다고요. 그 구덩이는 사랑도 돈도 아니고 오로지 도박만으로 채워진다고. 그걸 채우려다보니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게 된대요. 도박 참아서 좋은 건 도박을 안 해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돼서라고.

그녀답지 않게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옆에 둔 가방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내 소설집이 한권 들어 있었다. 하은영이 축하를 건네온 건 끝내 그걸 건네지 못한 채 면회가 끝나갈 때였다.

참, 소설집 나온 거 봤어요. 표지 예쁘던데요.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다. 구선생이 잘해낼 줄 알았어요.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읽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대체 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요. 하은영이 다시 젤리 한알을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 그게 내 문제인 것 같아요.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하은영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뚜렷하고 분명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혼자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 나와 함께 발을 헛디뎌주길 바랐다. 글을 쓰면서는 더 그랬다. 하나가 아닌 둘이라면 그다지 외롭지 않을 거라고, 하은영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내가 하은영의 마음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있기나 했을까. 나는 하은영이 발등에 죽은 동생의 이니셜을 새겨넣은 것을 안다. 손이 아니라 발인 건 자기가 땅을 보고 걷는 사람이라서. 하은영이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그 이니셜의 이름이 ‘하진영’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녀가 여러번 고쳐서 들고 다녔던 낡은 학생용 필통에 쓰여 있었다. 보라색 사인펜이 희미하게 번진 채로.

나는 그녀가 집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다는 것도 안다. 차근차근 짐을 싸놓고 어느 새벽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둑처럼 떠났다. 그뒤로 부모와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그리고, 빌리가 죽었다. 역시 내가 모르는 영역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오와에서 헤어지고 일년 뒤쯤 나는 빌리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날 우리가 옥수수밭에서 보았던 것, 그걸 여전히 믿느냐고. 그게 정말 나쁜 미래라고 생각하냐고.

얼마 뒤 빌리는 언제 찍은 건지도 모를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 포치에 있는 하은영과 내 뒷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하은영과 나는 약속한 것처럼 나란히 뒷짐을 지고 서서 옥수수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래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쁠지는 몰라도 그 미래들도

우리가 간절히 바란 거라면요.

 

 

3

 

질문 하나 할게요.

빌리가 옥수수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쳐요. 문제는 그게 내 인생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나쁜 미래라면요, 어떨 거 같아요? 그래도 보고 싶을까요?

새벽에 비 예보가 있던 밤이었다. 우리는 조금씩 거세지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포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처마 아래 먼지 쌓인 램프로 날벌레들이 몰려들었다. 나방 한마리가 내 와인잔에 빠져 미세한 분가루를 떨어뜨리며 흘러다녔다. 그러자 짙은 와인색 물결이 둥글게 일었는데 그 필사적인 날갯짓을 보면서도 생각은 먼 곳을 헤맸다. 부엌의 나무 찬장에는 아직 충분한 음식과 술들이 남아 있는데, 이제 우리가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꼭 이런 날이어야 해요? 이런 날에는 뭘 봐도 악몽 같겠어요. 나는 가라앉는 기분을 다스리며 말했다. 옥수수밭이 바람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빌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옥수수밭은 생각보다 너그럽거든요. 조건은 하나예요. 너무 깊이 들어가서 두려워지고 그래서 더는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한걸음 더 가는 거예요. 내 삼촌은 너무 깊이 들어가야 해서 정말로 길을 잃을 뻔했죠. 용감한 사람이었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들어가보고 싶은데요. 난 얼마나 용감할지. 내가 말했다. 빌리가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던 밤이 떠올랐다. 그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애써 참는 흐느낌은 곧 멈췄지만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래로 내려갔을 때 빌리는 포치에 앉아 있다가 나를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바보 같아요. 나와 빌리는 동시에 하은영을 쳐다봤다. 미래를 보다니, 자기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빌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죠. 원치 않는 미래를 본다면 덕분에 전력을 다해 도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본 걸 모른 체하고 살아가게 되겠죠. 당신 삼촌은 저 옥수수밭에서 뭘 봤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했죠? 말하지 않았으니 누구도 영원히 모르게 되고, 그러니 자기가 본 미래에 자신이 졌다는 걸 인정할 필요도 없었겠죠.

좀 서운한데요. 빌리가 말했다. 내 작품을 읽어주는 사람인데 조금도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네요.

하은영이 말했다. 나도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당신이 꾸는 꿈들이 종이 위에서 아름답게 태어나길 바라고요. 하지만 작품과 삶은 별개의 문제예요.

하은영이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미로를 빠져나가는 중이에요. 언젠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겠죠. 그런데 이런 순간에 구선생은 옥수수밭에 들어가고 싶어하네요.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하은영은 빌리가 아닌 내게 실망하고 화가 난 것 같았다.

언젠가 아침나절에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나란히 포치에 앉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곳이 구선생한테 어떤 돌파구가 돼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 된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말했다. 하은영이 웃었다. 그러게요. 힘들 때 여기 시간이 생각날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좋겠죠. 우리, 다시 돌아와요. 그때는 비즈니스 타고.

사실은요. 하은영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빌리의 노트에서 나와 구선생을 닮은 인물들을 봤어요.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하은영이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아니 구선생이 여기 오지 않겠다고 했다면요. 우리는 여기 함께 있을 수 없었겠죠. 결국은 모두 우리 의지인 거예요.

 

그날 밤, 하은영은 내게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그냥 좀 춥네요. 먼저 들어가볼게요. 그녀는 현관 쪽으로 걸어가더니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빌리가 위로하듯 내게 술을 건네주었다. 글쎄요 뭐랄까, 아무래도 은영은 당신에 대해서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무슨 뜻이에요? 나는 조금 곤두서서 되물었다.

당신이 오기 전에 당신은 어떤 소설을 쓰냐고 물었더니 끝까지 대답 안 해주던데요. 칭찬을 할 수 없다면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을 사람인데도요. 평소에도 당신 작품에 대해선 어떻다 말 안 해요?

그렇죠.

과연 은영 같은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을까요? 빌리는 잠시 골똘해지더니 말했다. 내 생각에는 할 수 없는 것 같은데요. 빌리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당신은 바보 같아요. 그러니까 마셔요. 그가 잔을 부딪쳐왔다.

늘 받는 쪽은 그게 뭔지 잘 모르죠. 나도 그랬어요. 빌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는 이제 러시아로 돌아갈 거고, 가까이에 은영 없이 내 작품을 써나가야 해요. 어쩌면 아주 힘든 일이 될 것 같아요. 힘들 때 연락해도 돼요?

나는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타박했다. 우리는 다시 잔을 부딪쳤다. 내가 물었다. 당신 삼촌 말이에요. 왜 끝까지 뭘 봤는지 말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빌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르겠어요. 다만 어떤 직감 같은 건 있었어요. 삼촌이 시 쓰기를 그만둔 게 나 때문일 거라는…… 술 냄새가 나서 한밤중에 눈을 떠보면 삼촌이 나를 꽉 껴안고 내 머리에 입을 맞추고 있었어요. 그래도 시를 그만두고 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전보다 훨씬 즐겁게 사셨어요. 그걸로 된 거예요.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가요, 우리. 미래 보러. 빌리가 내 얼굴을 살폈다. 취했어요? 진심이에요? 그의 눈에 작은 의심이 어렸다. 나는 포치에서 일어나 빙글빙글 몇바퀴 돌아 보였다. 봤죠? 멀쩡해요. 하지만 가기 전에 꼭 듣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처음 저기에서 뭘 봤는지.

빌리는 묵묵히 자기 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은영을 봤어요. 어떤 펍에 앉아 있는. 벽에 먼지 쌓인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었어요. 내 얼굴에 서서히 번지는 장난기와 의심을 느꼈는지 빌리가 두 손을 내저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빌리의 등을 찰싹 쳤다.

아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좋잖아요. 그런 게 악몽이라면 나는 천번이라도 꾸겠는데요.

나는 슬리퍼를 벗고 포치 구석에 놓아둔 산책용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빌리도 무릎을 덮었던 모포를 걷었다. 슬리퍼를 벗어 의자 아래 가지런히 놓은 다음 작업화를 꿰어 신었다.

준비됐어요? 그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때리는 빗줄기가 따가웠다. 모든 게 폭풍 치는 밤에 벌어질 법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들뜨기까지 했다. 잠시 후 그가 내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리는 옥수수밭 앞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4

 

아이오와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글을 쓸 수 없는 불안한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빌리가 보내온 메일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또 몇년이 흘러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가던 시점에 다시 메일 한통을 받았다. 그는 이번에는 치아 파노라마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잇몸을 뚫고 나기 시작한 어금니가 선명한 사진이었다. 그는 올해 서른두살이 되었고 서른이 넘는다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제야 자신이 갓 태어났다고 느낀다는 것, 동시에 죽어간다고 느낀다는 것, 놀랍게도 어금니가 날 때는 잇몸이 엄청나게 가렵다는 것, 그리고 최근 시를 쓰는 일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 그외에 몇가지 이야기들을 적었다. 그는 말미에 덧붙였다.

 

요즘 들어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산다기보다는 어떤 인생이 우리를 지나갈 뿐이에요.

 

하은영의 사무실을 찾아간 건 전화를 받고 석달이나 지나서였다.

사무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잘 끓인 된장찌개 냄새가 복도까지 풍겨 나왔다. 사무실 중앙 테이블에서 배달음식 포장을 뜯고 있는 하은영이 보였다. 그녀는 머리가 희끗해졌고 그 머리를 예전과 달리 대충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맞은편의 직원들을 향해 미안한데 자리 좀 만들어줄래요, 말했다. 직원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엉거주춤 의자 하나를 가져왔다.

밥때를 놓쳤어요. 2시 넘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은영이 내 앞에 플라스틱 수저와 나무젓가락을 놓아주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먹고 왔어요. 저기서 기다릴 테니 편하게 식사해요. 나는 파티션으로 반쯤 가려진 창가의 소파를 가리켰다. 그럴래요? 그럼 거기 앞에 히터 켜고요. 하은영이 자리에 앉더니 허기진 듯 곧바로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를 떠먹기 시작했다.

사무실은 단출했다. 화분이 제법 많고 구석구석에 자잘한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자리를 잡은 지 꽤 시간이 흐른 듯했다.

하은영의 것일 게 분명한 책상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지난여름의 손 선풍기와 휴대용 마사지기, 그리고 산더미 같은 원고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원고뭉치 옆에 놓인 작은 EMS 택배상자.

나는 저걸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은영도 저걸 건네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세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한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간간이 웃음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연이어 내린 눈 때문에 끈적거리는 진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은영이 내가 있는 파티션 안으로 들어선 건 20분쯤 흘러서였다.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걸까요? 그녀가 작은 택배상자를 귀에 대고 조금은 장난스레 흔들었다. 거의 잊고 있던, 슬픔이나 실망을 감출 때 보이던 하은영 특유의 몸짓들이 떠올랐다. 상자는 곧 하은영의 손을 떠나 내게로 왔다. 나는 손에 든 상자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너무 가벼웠고, 그 한없는 가벼움이 이상한 슬픔을 몰고 왔다.

가볼게요.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갈 때 하은영이 나를 불렀다. 좀 이따 차 한잔 같이 할까요.

나는 돌아보지는 않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빌리와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채 포치로 뛰어들었다. 옥수수밭에서 빠져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시시한 농담을 하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옥수수 이파리에 베인 상처에 빗물이 스며들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 이마와 뺨까지 온통 따가웠지만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빌리가 포치 의자에 앉아 빗물에 푹 젖은 작업화를 벗었다. 그러자 커다란 분홍빛 발이 드러났다. 그가 두 발을 흔들어 물기를 털더니 씩 웃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죠?

나는 약간 넋이 나간 듯 웃었다. 그러게요. 태연한 척했지만 낯선 불안과 흥분이 내 안에서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내 마음은 곤두서고 숨죽인 채 그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너무 많이 오는데요. 안으로 들어가요. 빌리가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천둥소리가 둔탁하게 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가 번갯불 때문에 순간적으로 환해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더 마시면 천벌 받을 거 같지만. 그전에 딱 한잔만 더 해요. 우리는 킥킥대며 농가 안으로 들어섰다. 습기 찬 공기 때문에 거실은 묵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빌리가 찬장에 남아 있는 술을 뒤지다 주류상점에서 끼워준 샘플 술병들을 가져와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병뚜껑을 비틀어 따서 조금씩 입술을 적시면서 마셨다.

뭘 봤는지 오늘은 안 물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묻지 말아요. 내 말에 빌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악몽은 숨겨놔야 제맛이죠. 우리는 좀 허탈하게 웃었다. 한동안 술만 입으로 털어넣을 뿐 침묵이 이어졌다. 빌리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에 걸려 있던 수건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본 걸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누구도 모르죠. 같이 들어가줘서 고마워요. 나를 믿어줘서.

그때였다.

2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와 빌리는 동시에 문소리가 난 곳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이 2층 복도 위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하은영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주저하듯 그 문은 닫혔고, 이어서 방문 밑으로 흘러나오던 불빛이 탁 하고 꺼졌다.

 

맞은편 노래방 건물에서 하은영이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은영은 곧바로 까페로 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횡단보도 옆 붕어빵 수레로 다가갔다. 나는 그녀가 허리를 구부리고 신중하게 붕어빵을 고르는 것을 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그사이 횡단보도의 파란불은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잠시 후 하은영은 못 참겠다는 듯 봉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는 붕어빵 하나를 꺼냈다. 분명히 꼬리 쪽일 부분부터 크게 베어 무는 흡족한 얼굴. 너무 낯선, 저 부드러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까페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은영은 자리에 앉으며 내게도 봉지를 내밀었다. 그때 잘 먹었어요, 김치. 그 말에 나는 잠시 불에 덴 듯 놀랐다. 잊고 있었다. 하은영의 출산 소식을 들은 나는 하은영이 갓김치를 좋아한다는 걸 떠올리고 그녀가 있다는 산후조리원에 보냈다. 부치기 직전까지 망설였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산모는 한동안 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하은영이 핸드폰을 열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때 태어난 애가 얘예요, 젖 먹다가 김치도 먹은 애. 하은영의 길쭉한 눈매를 그대로 닮은 어딘가 예민해 보이는 네댓살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이 친구 때문에 술은 끊었어요. 워낙 성가셔서요.

진동벨이 울리자 하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눈앞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오래전 아이오와에서 봤던 그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은영이 곧 자리로 돌아와 머그잔을 내려놓고 가져온 냅킨으로 탁자의 물기를 닦았다.

혼자 도망친 주제에 그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는 안 물을게요. 그 정도 염치는 있으니까. 나는 뭐가 들었건 상관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거짓말 못하네요, 구선생. 하은영은 고개를 숙인 채 물에 젖은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빌리와는 가끔 연락했어요. 빌리는 구선생을 걱정했지만 내게 왜 그랬냐고는 끝내 묻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연락이 끊어졌어요. 빌리는 어느 시점엔가 자기가 그 노트를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뜨거운 커피가 탁자 위에서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하은영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날 밤에 나도 두 사람 뒤를 따라갔어요.

하은영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옥수수들이 무너진 길을 따라서. 하지만 나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어요. 가장 먼저 도망쳤어요. 그 옥수수밭으로부터.

하은영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미래에는 구선생이 있었어요. 지친 얼굴이었어요, 그리고 뭔가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구선생을 보며 기쁘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어요.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했죠. 왜 그게 나쁜 미래인지.

나도 하은영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진눈깨비가 그쳐 있었다.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었어요. 아주 중요한 뭔가가. 가짜 삶, 망가진 저울,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구선생의 고통이 내게는 웃음이 되는 일. 내 시선 끝에 늘 구선생이 있게 되는 일. 그게 뭐건 간에 난 무서워졌어요. 그렇게 도망쳐 다니면서 덕분에 한가지는 알게 되었죠. 미래는 노력하고 노력해서 이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요.

나도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닫아야 한다. 까페에서 나와 헤어지면서 하은영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가끔씩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구선생이 내 옆에 없는 동안 나도 구선생이 없는 그 자리에 내내 있었다고. 빌리도 우리에게 그랬을 거라고 믿어요. 나는 하은영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힘주어 잡았다. 앞으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하은영이 그랬던 것처럼 상자를 귓가에 대고 흔들어보았다. 달그락달그락 작고 외로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어둠 속에서 빌리 버번을 생각했다.

 

하은영이 먼저 떠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예정대로 이틀 더 그곳에 머물렀다. 공항에도 함께 도착했지만 출국시간보다는 일찍 헤어졌다. 비행기 시간이 서로 달랐고, 빌리는 차를 반납해야 했다. 사실은 핑계일 뿐 헤어지는 게 힘들어서였다. 농가에서의 시간은 지나갔다. 미래는 무한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두가지 가능성만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중간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메일주소를 교환했다.

그날 당신은 뭘 봤어요? 빌리가 차 트렁크에서 내 캐리어를 내려주며 무심한 듯 물었을 때 나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본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 내가 결코 그것을 쓰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고, 그게 나의 가장 나쁜 미래라고 말했다. 빌리 버번이 다정하게 내 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내가 뭘 봤는지도 말해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금니요. 나보다는 우리 엄마가 좋아할 일이죠. 그 말에 나는 울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빌리 버번의 상자를 열었다. 작고 하얗게 빛나는 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그건 내 책상 밑으로 들어갔고, 나는 바닥에 엎드려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더듬고 더듬어 끝내 찾아냈다. 빌리 버번의 갓 태어난 일부를.

나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를 폈고, 아주 느린 속도로 한자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