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산문

 

평화주의자 강만길 선생을 그리며

 

 

허은 許殷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저서 『냉전과 새마을』 『한국현대 생활문화사』(공저) 등이 있음.

heoeun@korea.ac.kr

 

 

1. 사표가 되어주신 선생님

 

2023년 6월 23일 강만길 선생이 돌아가셨다. 1933년 10월 2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 분단과 6·25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를 직접 겪었다. 1960년대 초부터 식민사학 극복에 힘썼으며 이후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분단시대와 통일시대에 관한 역사연구를 진전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분단국가의 민주화와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선생은 역사연구를 통해 갖게 된 신념에 부합하는 실천을 한 학자셨다.

1967년 모교인 고려대 사학과에 부임한 뒤, 1970년대 말 박정희정권하에서 분단시대 극복을 제기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10·26사건 이후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당했다. 해직 시절 창작과비평사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역작으로 평가받는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84)를 저술하셨는데, 아침에 출근하듯이 자택 2층으로 올라가 종일 집필을 이어가면서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 시기 그를 포함한 여러 해직교수와 언론·출판계 지식인들은 신군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문의 자유와 공론장을 지키고자 힘썼다.

해직 4년 만인 1984년, 어렵사리 복직한 선생은 그동안 쌓은 학문적 성과, 특히 일제강점기하 좌우 항일운동 세력이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힘썼고, 이러한 경험이 해방 직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으로 이어진 역사를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강의하며 상세히 알려주시고자 했다. 1980년대 후반은 신군부가 개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탄압하며 정권 연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이다. 교내에 난입한 백골단을 보고 광주학살 규탄 대자보를 읽으며, 그리고 고문, 의문사, 분신과 관련된 소식들을 접하며 울분에 차 강의실 밖 광장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학생들에게 역사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생 같은 분들이 계셔 강의실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을 경험하며 나는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1990년 대학원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처음 뵙고, 학부 때 겪었던 민주항쟁을 제대로 알아보자 하는 생각에 현대사를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단순한 제자의 말에 역사공부를 제대로 하려나 생각하셨을 것이다. 역사학자를 천직으로 여기고 역사 쓰기의 기쁨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무엇보다 학자로서 사표(師表)가 되어주신 선생님이 없었다면 역사학자가 되기는 불가능했으리라.

고려대에서는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제자뿐만이 아닌 다른 많은 학생이 선생님을 사표로 삼았다. 이는 대단한 학문적 업적 이전에 존경스러운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답사 후 뒤풀이 자리에서 자신의 여러 경험을 들려주시고 때론 굵은 톤으로 한 곡조 부르시며 흥을 돋우시기도 했다. 수업시간에는 학생에게 끽연까지 허락하며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해주셨다. 권위를 내려놓고 학생들과 소통하며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주고자 한 분을 지도교수로 모신 것은 큰 행운이었다.

선생은 대학원생의 경제적인 처지를 잘 알고 여러모로 지원한 분이셨다. 예나 지금이나 직업으로서 대학원생, 특히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의 생활 여건은 어렵기 마찬가지겠지만, 1980, 90년대는 사실상 장학제도도 없어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은 더욱 빠듯했다. 이를 잘 아셨던 선생은 관행으로 이어지던 별도 학위논문 심사비를 받지 않고 돌려주셨다. 그러나 처지가 어려운 학부생들의 등록금을 마련해주고, 대학원생의 심사비나 연구를 지원한 일들을 자랑 삼아 말씀하시는 걸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자료조사차 미국에 갔을 때 나이 지긋한 선배로부터 선생께서 학부 등록금을 마련해주어 졸업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기도 했다. 어찌 이뿐이랴. 선생은 당신이 쓴 모든 저서의 인세도 2007년에 설립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에 모두 넘기셨다. 자서전에 상세히 쓰셨듯이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은 문중의 재산 중 받게 된 재부의 상당을 공익재산으로 판단하고 그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만드신 단체다.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은 2008년부터 우수한 학문적 성과를 거둔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가 박사학위 논문 제출 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좌면우고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연구기금을 지원했다. 선생은 재단 운영과 연구기금 수여자 선발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수여식에만 참석해 진심 어린 축하를 하신 게 다였다. 수여자에게는 ‘우리 역사학의 현장성과 대중성에 이바지하는 것’ 하나만을 바라셨다. 벌써 15명이나 되는 연구자들이 축하 속에 연구기금을 받았고,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정된 수여자들은 학계의 중진·신진 연구자로 자리 잡고 있다. 과문하지만 선생의 이러한 재단설립과 운영방식은 역사학계를 넘어서 학계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찾기 어려우리라 본다.

나는 선생께서 평생 모은 서적을 북측에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분단국가에 사는 역사학자로서 지녀야 할 또다른 자세를 배웠다. 자료를 찾고 글을 쓰는 역사학자는 소장한 서적에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전재산과도 같은 책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보내시는 선생님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만길 선생은 지연과 학연, 그리고 분단의 벽을 넘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나눠주신 학자셨다.

 

 

2. 학문적 엄격함과 역사학의 힘

 

학자가 이른바 ‘대가’라 불릴 정도가 되면 자신을 중심으로 무슨 학파니 하며 줄을 세우기 십상이다. 하지만 선생은 오히려 제자가 지도교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좋게 보지 않으셨다. 자신의 역사학은 이것이니 따라 배우라고 말씀한 적도 없다. 그 대신 제자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역사학자가 되기로 했으면 사학사에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을 동원하거나 부담을 주는 일을 매우 꺼리셨다. ‘강만길 저작집’의 발간비용조차 선생께서 전부 부담했다. 제자들은 너무 송구하여 발간을 도왔을 뿐이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학자가 ‘강만길 역사학’에 영향받거나 그를 따른 이유는 선생이 한국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역사학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특징을 정리할 때 ‘현재성’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선생은 역사학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가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재성을 강조한 강만길 역사학의 대표적인 예는 1970, 80년대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제창하여 분단사학과 냉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선생의 역사관은 널리 알려진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작과비평사 1978)과 이보다 2년 앞서 발표한 ‘국사학의 현재성 부재’를 비판하는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석사생 때 선생님 수업에서 중국 관내 민족운동 자료를 강독하고, 박사생 시절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편찬사업과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간행에 참여하며,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운동의 흐름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성을 중시하는 역사학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것 같다.

내게 지금까지 감명 깊게 읽은 전공 책을 하나 꼽으라면 선생의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창작과비평사 1987)를 들겠다. 이 책은 사실의 나열로 일관된 무미건조한 전문 연구서이다. 하지만 석사생 때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으며 절제된 서술에 담긴 역사학자의 따뜻한 시선을 배우고, 입만 열면 추상적으로 ‘민중’을 거론하며 맥락 없이 날 선 비판을 하던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1973년 발간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고려대학교 출판부)의 서문에서 “피지배 대중이 박해와 수탈을 극복하고 스스로 생활환경을 개선하며 역사의 표면에 부상해오는 줄기찬 과정”을 밝히는 데서 ‘기쁨’을 구하고 싶다고 밝히셨는데, 역사학자 강만길이 평생 탐구한 주제와 학자로서의 태도를 이보다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문장은 없는 것 같다.

공부하면 할수록 거시와 미시, 장기와 단기, 구조와 주체를 아우르고 여기에 지정학적 위치 변화까지 고려하는 스승의 역사 쓰기가 매력있게 다가왔다. 역사학자는 거시 구조적 접근으로 역사 주체를 정형화하는 한계와, 미시적 접근으로 일상에 매몰되어 거대한 역사 변화를 놓치는 한계를 모두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다양한 내외적 요인을 고려하며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거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분단시대와 통일시대를 논구한 선생의 글들은 내게 ‘총체적 역사학’의 필요성과 그 역사학의 힘을 보여주는 전범과도 같다.

지금의 중·고등학생 나이에 해방 직후 좌우대립과 뒤이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선생은 ‘평화’를 역사를 평가하는 핵심적인 가치로 삼았다. 학도의용대와 하역노동자로서 겪은 전쟁참상과 정전 후 군대에서 겪은 부패상 등이 선생에게 반전 평화주의자의 씨앗을 심은 것 같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참석 이후에는 평화주의 역사학자임을 분명히하며 자신의 역사관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자 힘썼다. 이를 위해 『통일시론』 『내일을 여는 역사』와 같은 대중적인 잡지를 발간하거나, 평화통일에 주안점을 둔 근현대사 개설서들을 쓰기도 하셨다. 선생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공동체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한반도를 주변 열강의 안보적 이해가 상충하는 완충지대가 아닌 열강의 경제적·문화적 역량이 모이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18년 9월경 선생님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국제평화’ 주제 강연을 부탁드렸더니, 팔십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속초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주셨다. 미래세대를 위해 지혜를 나눠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만길 역사학’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선생 자신께서 평생 자신의 논지를 끊임없이 고치고 심화해간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학은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넓고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선생이 ‘총체적인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추구한 사상도 강만길 역사학을 간단치 않게 만든다. 선생은 우리에게 반식민 민족주의자,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 반전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었다. 다만 분단대립 극복과 민족 문제 해결을 최우선시했으나, 국가주의로 경도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했지 혈연·문화의 동질성을 중시하며 민족주의를 강조한 적이 없기에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회주의체제를 지지한 적도 없다. 내게 역사학자 강만길은 억압받는 자들인 민중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공산주의가 낳은 이념적·체제적 폐단을 넘어서고자 한 ‘평화주의자’, 그 자체였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폭과 깊이는 식민지배와 6·25전쟁 경험, 성향과 경험이 다른 스승들로부터 배움, 좌우대립 극복의 역사 재발견, 지식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2000년대 남북교류 참여와 주도 등 여러 경험이 맞물리고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나는 어느날 스승과 함께한 귀갓길에서 들은 당부 말씀, ‘무릇 학자는 쉼 없이 정진하여 새로운 연구를 이어가고, 자신의 학문을 토대 삼아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지금 내게 ‘강만길 역사학’은 여전히 지혜를 길어올려야 할 역사학의 호수이자, 새로운 역사학을 찾아 가로질러가야 할 바다와 같다.

 

 

3. 경종과 희망의 메시지

 

선생께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1999~2000), 정부 통일고문(1998~2008)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위해 정력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신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에 역사학자로서 유일하게 배석하며 그 감격과 기쁨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다. 이후 선생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양측의 역사학자들과 함께 여러 사업들을 벌이셨다. 협의회의 활동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속된 덕분에 2015년 선생님과 함께 개성에 방문해 만월대를 본 기억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

선생이 2005년부터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이끄신 것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후대 사가들은 20세기 한국사회가 21세기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여러 주요한 계기 중의 하나로 진상규명위원회의 설립과 활동을 예외 없이 언급하리라.

정년을 앞둔 1990년대 말 선생님은 한 수업에서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제3의 길’ 모색 문제, 냉전체제 해제와 민족주의 대두 등에 관해 언급하시고 국내외 논저들을 소개하며 일독을 권하셨다. 이때 일본어 책 한권을 샀기에 잘 기억한다. 이후 여러 사회활동으로 바쁜 중에도 수업에서 말씀한 고민을 계속 이어가셨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하신 뒤 자서전 집필에 집중했다. 2010년 발간한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에서 정년 무렵 주목한 신자유주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시면서 21세기 새로운 공동체의 등장은 “사회적 연대 의식을 결여한 인간성 파괴 현상을 낳고, 인간의 성선적 본성이 보전된 자연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가능하다고 적으셨다. 이는 노학자가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 낳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할 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정치적·사회적·생태적 위기에 직면하리라고 크게 우려했음을 보여준다. 우려 섞인 견해를 밝힌 지 벌써 13년이 지났으나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경종을 크게 울리는 것 같다.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다가 선생님 별세 후 다시 자서전을 읽으며 확인했다. 이제 선생님께 여쭐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절감하며 때늦은 자성을 한다.

남과 북이 70년째 이어지고 있는 정전체제를 끝내기 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사회 내적으로 각자도생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남북 대화의 단절과 군사적 대립 고조, 사회불평등과 산업현장에서의 안타까운 죽음들,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친 참사, 그리고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왜곡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옹호까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1991년 남과 북이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극복하고 공동번영을 모색하자고 합의한 후 힘들게 쌓아온 평화통일의 기반, 그리고 한국사회가 새로운 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 쌓아온 통합과 연대의 기반까지 다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답답하고 때론 절망적인 현실 속에 거대한 변화를 위한 가능성도 분명히 있으리라. 역사학자 강만길은 21세기가 “홀몸으로 광야에 팽개쳐졌던 인간들이 ‘내’가 아닌 ‘우리’의 귀중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신자유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류공동체”가 조성되는 시대가 되리라고 내다보았다(『역사가의 시간』, 창비 2018, 318면). 역사적 성찰에서 나온 선생의 메시지를 부디 남과 북 모두가 숙고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나침반으로 쓰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

 

선생님이 영면에 드신 지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이제 평생 감당하신 역사의 무게를 내려놓고, 오래전에 타셨던 ‘회상의 열차’를 그리던 지우들과 다시 올라타 휴전선을 훌훌 넘어 북녘으로, 블라지보스또끄로, 중앙아시아로 마음 편히 주유(周遊)하시기를 바라고 기원한다.

삼가 은사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빈다.

허은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