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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평범한 일상을 위한 고군분투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문과 교수. 저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올 상반기는 인류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전지구적 전염병의 터널을 빠져나온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바이러스의 위협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이들, 그 죽음을 마음에 묻은 가족과 친구들, 멈춰버린 도시에서 망연자실했던 자영업자들…… 그 삶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한번 각인된 상처를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일상의 회복이란 단순히 재난 이전 상태로의 원상복구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개별 인간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좀더 익숙한 방식으로 그 흐름을 견디려는 인간의 생존본능이 다시금 발동되는 국면이라 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게 된 지금, 이 계절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평범한 일상을 위한 고군분투를 따라 읽어보기로 하자.

 

 

백수린 『눈부신 안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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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의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는 유년기에 언니를 잃은 후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충격에 더해 ‘나’는 전날 언니와 싸우면서 학교 수업 ‘땡땡이도 못 치는 범생이’라 놀렸던 사실을 떠올린다. 가스 폭발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언니는 왜 하필 그날 아프다며 조퇴를 했던 것일까. 언니의 죽음 이후 ‘나’의 일상은 죄책감과 대면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자꾸만 다투는 부모의 목소리, 사고로 죽은 아이의 동생이라는 주변의 눈초리가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더이상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감추면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거짓말이 쌓일수록 내쳐지고 소외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은 사라져도 괜찮다는 태도. 물론 ‘나’는 이런 태도가 장차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눈부신 안부』는 1960, 70년대 ‘파독간호조무사’가 되어 독일로 떠났던 한국인 여성들의 생애를 주요 서사로 도입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의 생계비와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낯선 나라로 떠난 가난한 개발도상국 누이들의 역사, 현대판 효녀 심청의 상징이 바로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떠난 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왕년에 파독간호사를 지원하여 독일에 정착한 언니를 의지처 삼아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희생과 헌신의 대명사인 실존인물들의 생애와 무조건 착한 아이가 되기로 결심한 어린 소녀의 삶은 어떻게 결합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찌감치 자기 몫의 삶을 개척한 이모들의 현명함은 결국 ‘나’를 거짓말과 비밀의 방에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일에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당부와 더불어서 말이다.

『눈부신 안부』가 역사적 사건과 존재들을 다루는 방식은 흥미롭다. 작가는 특정한 사건을 겪은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전형성을 염두에 두고 인물을 그려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간 언론이나 매체에서 다루어온 프레임을 극구 회피한다는 뜻이다. 집단적 맥락에서 개인의 삶을 분리한 뒤 저마다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고, 가난·애국·희생 같은 수사에 짓눌렸던 개인사를 생생하게 복원하려 한다. 작중 ‘나’의 이모는 고국의 가족에게 급여를 송금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결과 의사가 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족질서를 벗어나기 위해 독일로 건너온 마리아 이모는 유럽을 누비며 연애의 자유를 만끽했다. 선자 이모는 동성 연인과의 행복한 삶을 꿈꾸며 독일행을 선택한 경우다. 이들이 계속 한국에 살았더라면 이런 삶이 과연 가능했을까.

『눈부신 안부』가 역사를 인용하는 방식은 모국의 우월함과 우선성을 강조하곤 하는 통념을 벗어난다. 과거의 젊은 세대와 현재의 젊은 세대의 욕망을 같은 눈높이에 두고 지난 역사를 이해한다. 그로부터 역사에 휩쓸리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형성되는 역사를 그려내려 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자기 의지에 따라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의 긍정적 에너지, 아마도 『눈부신 안부』는 독자들에게 그 힘을 전하려는 듯하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건너와 뇌종양에 걸려 죽어가는 선자 이모의 삶은 ‘객관적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그녀의 항변은 조용하지만 단호하다. 자신은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른 사람이라고,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303면)이라 단언한다. 인간이란 가장 불행한 조건에 놓였을 때조차도 어떻게든 가능성을 찾아낸다는 것, 그리하여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본능적 힘이 있다는 것. 아니, 그런 힘을 보여주기에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겠다.

 

 

신경숙 『작별 곁에서』(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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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시계에 맞추어 흐르는 절대적 시간과는 별도로 개인의 내면에는 상대적 시간이 흐른다. 이 내면의 시간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놓은 지점에 고여 있기도 하고 그로 회귀하기도 한다. 소설은 언제나 이러한 내적인 시간의 흐름을, 또는 내적인 시간이 기계적인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균열을 이야기해왔다. 내면의 시간에서 나오는 언어는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묘사할 때 겉돌기도 하고, 내면의 시간에 자리한 고향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실제로는 너무나 낯선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로부터 생겨나는 이질감과 외로움이 바로 신경숙의 연작소설 『작별 곁에서』의 기저에 놓인 감정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독일, 한국 등 각기 다른 세 국가를 잇는 인연과 이별을 다룬 세편의 작품이 담긴 이 책은, 디아스포라가 빚어낸 언어와 시공간의 감각을 섬세하게 살핀다.

이 가운데 「봉인된 시간」과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이다. 전자는 현재 뉴욕의 한인 문단에서 활동 중인 K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허구화한 것으로, 그녀의 가족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뉴욕에 정착했다. 현역 군인이었던 남편이 10·26사건의 관련자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교관 가족의 신분에서 갑작스레 불법체류자가 되고 한인사회에서도 외면당했던 고단한 정착과정에 대한 회고가 담겨 있다. 후자는 2018년 독일에서 독자들의 곁을 떠난 허수경 시인과의 마지막 대화를 다루었다. 마지막 만남을 한사코 거부하는 친구, 그런 친구를 어떻게든 만나려는 ‘나’의 설득이 오간다. 언제든 서로에게 갈 수 있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연락을 미루었던 시간에 대한 자책과 회한이 배어 있다.

두편의 소설은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하필 두 작품이 모두 이국에 정착한 ‘시인’의 삶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디아스포라 시인의 글쓰기, 다시 말해 디아스포라의 문학언어라는 고유하고도 무게감있는 주제가 생겨난다. 낯선 땅에 정착한 시인들에게 고국과 분리된 시간은 모국어의 구체성을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는 생존을 위해 분투하며 익혀나가는 이국의 언어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모국어는 죽었다고 해야 할까. 세상과 함께 호흡하기를 멈춘 언어로 쓰인 시란 결국 모놀로그가 되는 것은 아닌가. 뉴욕의 시인은 모국에서 온 누군가가 “특정한 단어를 집어내며 이 말은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사라진 말이라고”(73면) 할 때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말한다. 독일의 시인 또한 고민했다.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장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 걸까.”(99면)

작가는 이방인 시인의 고독이 고국과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 생겨난 증상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이유를 들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동네나 도시는 이미 그들이 떠나왔고 그리워하던 ‘그곳’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국어를 잃었듯 살아 있는 공간 또한 사라졌다.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존재들, 모국어와 고향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가장 익숙했던 존재들이 낯선 대상이 되어가는 현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함이 이방인의 진짜 고독이고 슬픔이다. 이방인의 외로움은 되레 낯익은 것에서 온다는 아이러니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편의 소설은 디아스포라 특유의 상실감을 섬세하게 살핀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마지막에 수록된 「작별 곁에서」는 이국에 나가지 않고도 이방인이 된 자의 이야기이다. 작중 ‘나’는 삶의 전부였던 딸과 오랜 의지처였던 친구를 잃고 세상에서 고립되어 자기 안에 갇혀버린다. 이런 사연은 작가로서의 근간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시간을 보내온 작가의 자전적 심경과 공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소설의 배경이 하필 제주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수많은 죽음을 마음에 묻은 이들의 땅, 그리고 자책감과 상실감에 빠져 세상으로 나갈 출구를 잃은 작가. 주지하듯 신경숙은 슬픔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뛰어난 작품을 써내는 작가다. 만약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비롯된다면 이 소설은 연작의 끝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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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두 작가의 소설이 누군가의 죽음이나 역사적 사건 때문에 일상이 뒤바뀐 이들의 서사라면 이서수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은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만드는 것이 과제인 이들의 분투를 다룬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청년세대를 짓누르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대변한다. 장래가 불투명한 계약직으로 직장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임금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 홀몸도 버거운데 돌보아야 하는 가족도 있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 나이에는 원래 취직,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가족부양 등을 감당하게 되니 그리 유난 떨 것 없다고 충고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젊은 날의 고생’을 더이상 낭만적인 회고만으로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런 고생 끝에 맞이할 미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주거, 일자리, 교육, 소득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일해도 제자리라는 의미이고, 간극이 벌어진다는 것은 제자리라는 개념조차 소용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희망 없는 노동이 기꺼울 리 없다.

이 때문에 소설집의 화두는 ‘젊음’ 그 자체이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그것. 이 두 마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주제이다. 꿈과 열정만으로는 가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냉정한 계산법에 따르면, 청춘이란 자립할 방법을 마련해야만 하는 고단한 나날을 가리킬 따름이다. 하지만 젊은 나날을 누리지도 못하고 흘려보내는 심정은 편치 않다. 「연희동의 밤」의 ‘나’는 여직원이 치마를 입어야 회사가 번듯해 보인다는 상사의 성희롱까지 참아내며 근무기간을 채워나간다. 목표는 단 하나, 회사생활 2년을 마치고 ‘내일채움공제’의 목돈을 수령하는 것이다. ‘족쇄’가 된 통장에 끌려다니는 형국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드라마 작가가 되려던 꿈을 포기한 뒤 우울해하는 언니에게 ‘나’는 단언한다. 언니가 각본을 쓰는 것은 “열심히 산 게 아니라 재미있게 산” 것이며 “그러는 동안 소모되는 건 언니의 인생. 정확히는 시간”(180면)이라고. 누군가의 소중한 ‘꿈’을 이처럼 단정해버리는 태도는 가혹해 보이지만 사실 그 가혹함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마음속엔 이미 노인이 들어앉았다”(170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미 늙은 젊음’에서 생겨나는 자기연민을 단호하게 끊으려는 것이다.

청년세대의 고단함이나 이들 세대에 강요되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분노는 최근 한국소설이 가장 관심을 보여온 주제이고, 그만큼 유사한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도 많다. 그중 이서수의 글쓰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비판을 담되 그 구조 속에 놓인 인간들의 삶과 관계가 소설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 하겠지만,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 언제나 정답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서도 쉽다고 할 수 있을까. 「미조의 시대」에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웹툰을 그리는 언니가 등장한다. 성적 대상화의 수위가 높을수록 언니의 임금은 올라간다. 「젊은 근희의 행진」에는 필요하지 않은데도 굳이 노출을 하면서 구독자를 끌어들이는 유튜버 동생이 등장한다. 그들의 친구이자 가족인 ‘나’는 그들을 손쉽게 비난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고 보호하려 든다.

이서수의 소설집에는 불합리하고 혐오스러운 사회적 관습과 편견을 떠받치는 그 자리,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 자리에 놓인 이들이 곧 가족이자 친구일 수 있고 혹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다. 작가에게는 사회적인 문제 자체보다는 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험난한 세상살이 때문에 가족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질까 노심초사하고,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자를 자처한다.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속물이 되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마음에 노인이 들어앉는 젊은이의 형상은 그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이서수 소설의 본령이 아닐까 싶다. 가족의 무게를 짊어진 젊은 가장의 존재론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