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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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라 혼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엘리 2023

죽은 유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donnar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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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People Love Dead Jews, 2021, 서제인 옮김)라니! 미국의 유대인 작가 데어라 혼(Dara Horn)은 기막힌 제목을 찾아냈다! 즉각 대구로 떠오르는 문장은 ‘사람들은 산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실제로 작가는 열두편의 크고 작은 에세이들에서 죽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살아 있는 유대인에 대한 무관심 내지 혐오와 짝을 이루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개운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젊은 직원이 유대인 특유의 둥근 모자를 쓰자 박물관 측에서는 그것이 안 보이게 야구모자로 덮어 쓰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을 향한 박물관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데어라 혼은 이것이 『안네를 일기』를 대하는 서구 일반 독자들의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일기의 편집과정에서 유대 관습과 관련된 여러 부분이 잘려나갔고, 안네의 집안은 서구사회에 동화되기를 선택했으며 이는 독자들이 안네 프랑크에게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숨기는 사례들이야말로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가 순식간에 성공과 명성을 얻게 된 비결이다.”(28~29면)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말은 유대인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안네 프랑크가 사랑받기 위해서 그녀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만일 안네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그녀의 바람대로 작가가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녀는 결코 일기 속 무구한 소녀로서 세상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수용소의 경험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을 고발한 이웃을 위시해 서구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녀의 책은 결코 널리 읽히기 힘들었으리라는 게 데어라 혼의 추측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36면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에 저자가 삐딱한 시선을 던지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살해된 소녀의 입을 통해서 나온 이 말 덕분에 집단학살을 자행한 서구문명에 대해 용서받는 기분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말은 끔찍하지만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서부 개척기 어느 미국 장군의 발언과 같은 함의를 가질 수도 있다. 최근 미국에서도 유대인을 향한 폭력적인 범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 열린 대규모 홀로코스트 전시회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회는 철저하고, 전문적이며, 고상하고, 마음을 끌어당기고, 포괄적이며, 명료하다.”(284면) 하지만 작가는 이 전시회에서도 불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우선 홀로코스트를 외설적으로 세세히 재현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적 혐오의 경계라는 본래의 취지를 흐리게 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이 안 된다면 최소한 홀로코스트는 아닌 것이다! 전시된 피해자가 당신일 수도 있었다는 식으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방식 역시 피해자의 정체성을 지워버릴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작가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전시회에서 의도한 듯한 안이한 교훈이다. 그녀는 전시회에서 피해 생존자가 남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이라는 말을 강조한 걸 두고 불쾌해한다. 이쯤 되면 비유대인 일반 독자는 작가의 태도가 너무 까탈스러운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도대체 어쩌라고? 우리한테 뭘 바라는 건데?

죽은 유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어떤 서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 십상인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와 관련해 데어라 혼은 이디시어 문학을 다루는 장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5장). 서구의 유명한 비평가에 따르면 문학에서의 스토리텔링은 종교적 가르침과 비슷하며 세부사항들은 전체의 커다란 의미에 기여한다. 그래서 작품의 결말이 중요한데 독자들은 선한 인물이 ‘구원’받기를 바라거나 그게 아니면 중심인물이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하거나 최소한 작품에서 ‘은총의 순간’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데어라 혼은 이것이 전형적인 기독교식 논리이며 이디시어 문학에는 결말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주장한다. 과문한 탓에 이런 주장이 어느정도 신뢰할 만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의 윤리적 함의만큼은 사뭇 공감이 간다. 그녀에 따르면 유대인의 스토리텔링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가 세상을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만드는 척하는 동안에는 인간의 경험에 진실할 수 없다는 앎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리얼리즘이다.”(138면)

죽은 유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을 잃었던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에 의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화두로 타자의 존재, 구체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이 우리를 주체로 서게 만든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 그에게 “윤리는 보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은 스펙터클한 구경거리가 아니며 이런저런 맥락에서 설명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통받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을 멈추려는 실천적인 의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데어라 혼이 안네 프랑크가 생존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녀의 입을 빌려 말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일 것이다. “나는 전쟁을 저지른 죄가 권력자들에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 절대 그렇지 않다. 평범한 사람도 똑같이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전 세계 민족은 오래전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35면)

안네 프랑크에 대한 가상의 부고에 나오는 “위선이라는 주제에 신중히 초점을 맞춘 명민한 예언자”(34면)라는 표현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상적 자아가 투영된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명민한 작가가 종종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너무 쉽게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유대인이 핍박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녀가 옹호하는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하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향해 미사일을 높이 쏘아올리는 일”(288면)이 홀로코스트에 준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장벽과 정착촌, 미사일과 폭격의 악순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면모가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타자의 얼굴’은 도처에 있다.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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