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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에디 『잘하면 유쾌한 할머니가 되겠어』, 창비 2023

편견과 혐오가 과거의 유물이 될 때까지

 

 

조수미 趙秀美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anthrosumi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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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유쾌한 할머니가 되겠어: 트랜스젠더 박에디 이야기』는 1987년생 트랜스젠더 박에디가 나다운 삶과 몸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첫 페이지부터 “언제부터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묻는다.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4면)라고 반문하지만, 친절하게도 서른여섯해 자신의 삶을 유쾌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놓는다. “언제부터 동성을 좋아했어요?” “언제부터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했어요?” 등 성소수자에게 예사롭게 던져지는 질문들을 비성소수자에게 돌려보면, 자기 존재를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이가 ‘너의 존재를 나에게 증명하라’고 주장하는 무례한 질문임이 드러난다.

저자가 성별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유년기부터 ‘남자이지만’ ‘남자답지 못한’ 몸이나 태도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 끼기 힘들었던 학창시절, 대학, 군대,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게이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와 성소수자 인권단체, 바리스타 생활, 그리고 호르몬 트랜지션과 성확정 수술, 성별정정 절차를 거쳐 새 이름을 가지고 언젠가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대로 다시 호주를 찾기까지. 저자의 표현처럼 “100명의 트랜스젠더가 있다면 100가지의 트랜스젠더 인생이 있다”(12면)고 할 만큼 각각의 동기와 경험과 치열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대표 트랜스젠더’의 경험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를 직접 만난 적 없이 미디어나 온라인에서 접한 고정관념만을 가지고 아름답든 흉하든 그들을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로 상상하고 있었던 독자라면, 한명의 트랜스젠더가 가족, 학교, 군대, 직장 등 남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는 삶의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남다른 고민이나 아픔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투성이의 희생자로 머물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중대장이 보는 곳에 하리수의 사진이 나온 신문을 올려놓는 일화에서는 소소하게라도 자기 긍지를 지키려는 단단함이 드러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자신보다 더 여리거나 상처 입은 이들을 헤아리고 품으려는 그의 세심함이다.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면서 저자가 가장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꼈던 대상은 세 조카들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직접 돌본 어린 조카들에게는 성별이 무엇인지, 성전환이 무엇인지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어렵지만, “나를 온전히 바친, 내가 사랑으로 돌본 존재가 나를 부정”(35면)할 가능성은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망설이면서도, 서로의 속도에 맞춘 느린 커밍아웃 과정을 통해 “옷감 전체에 아름다운 색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48면) 존재 자체로 조카들의 마음에 스며들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박에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발군의 재치와 유머감각도 책 전반에 흩뿌려져 있다(그의 유머를 아직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유튜브 연분홍TV 채널의 ‘퀴어 고민해결 서비스 퀴서비스’ 시청을 추천드린다). 그런데 그 ‘웃김’은 사실, 성장기에 고립과 배제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갈고닦은 ‘생존의 무기’라고 고백한다. 이제는 유머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웃겨주”(60면)는 데 쓰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때 간절하게 원했던 이해와 지지를 지금의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하는 장면에서도 아픔의 기억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한때 자신과 같았던 존재들로 향하는 저자의 넉넉함이 돋보인다.

저자는 성소수자로 산다면 잃게 될 것—부모나 친구와의 진실한 관계, 고향 등—을 적어보다가 그것들은 이미 잃은 것이라는, 숨기고 살아서 더 잃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당사자 역시 자기부정이나 자기혐오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트랜스젠더에 씌워진 변태적이고 음험한 이미지에 두려움을 느껴 우선 게이 커뮤니티를 찾았다가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영화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경우도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들이 먼저 동성애자로 정체화했다가 자기탐색을 계속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드물지 않다). 혹시라도 숨겨진 스스로의 남성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희망하며 입대를 하고 나서도, 내적인 탐색과 정보 검색 끝에 제대 후에야 비로소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찾게 된다. 마침내 소속감을 느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안에서도 성별이분법과, ‘여성보다 더 예쁘고 여성다워야 하는’ 고정관념이나 위계가 존재했다. 선배 트랜스젠더 언니들이 비성소수자의 기준에 맞춰 자기혐오와 억압을 하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런 모습마저 편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내려는 치열함의 흔적인 것도 읽어낸다.

호르몬 트랜지션과 성확정 수술, 성별정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불편함과 통증 속에 변해가는 몸의 감각, 트랜지션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모순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읽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드는 통증을 견디면서 그는 계속 질문한다. 왜 내가 원하는 몸이 아니라 사회가 인정하는 몸으로 바꿔야 하는가. 수술 후 ‘아픔보다 큰 행복감’이 찾아온다던 선배 트랜스젠더 언니들의 말은 어쩌면 몸의 통증보다 더 컸던 사회의 족쇄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성별정정 후 퀴어 활동가들과 함께 12년 만에 다시 찾은 호주에서 저자는 ‘월드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드디어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영광의 상처’(수술흔적)에 당당하게 크림을 바르고, 수술 전 이루고 싶었던 꿈은 다 이루었다고 되뇐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해피엔딩도, ‘박에디 이야기’의 끝도 아니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 공격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불길처럼 일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때이른 죽음으로 떠나는 퀴어 친구들이 있다. 편견과 혐오가 여전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라떼는’을 거듭 이야기하는 증언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나 때는 말이야,를 입버릇처럼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편견과 혐오 속 고통은 믿기지 않을 만큼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에디와 함께 유쾌한 할머니로 늙어가면서, 현재의 고달픔을 견뎌내는 이들에게 “앞으로 나아질 거야”(‘It Gets Better Project’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자살을 예방하고 그들을 지지하기 위한 글로벌 캠페인이다)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자기만의 보물지도를 펼쳐서 “내가 정한 보물을 찾아서”(235면) 살아가자는 에디의 메시지처럼. “다 괜찮습니다. 가슴이 두개든 세개든, 다리 사이에 뭐가 있든 없든 간에 그대가 온전해질 수 있는 몸이면 충분합니다. 그 몸과 마음으로 계속해서 살아갑시다.”(24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