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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삶을 돌보는 사회를 위하여

 

존재의 염려와 산만한 돌봄의 제스처

팬데믹 이후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

 

 

조혜영 趙惠英

영화평론가, 영상문화 연구자. 주요 평론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이론과 영화적 수행성」, 공저서 『원본 없는 판타지』 『을들의 당나귀 귀』 『소녀들』 등이 있음.

visutory@gmail.com

 

 

* 이 글에는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혼자 사는 사람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스포일러가 있다.

 

 

돌봄을 경유한 세계의 급진적 재구성

 

코로나19의 발발로 돌봄은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 팬데믹 이전에도 기후위기,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지정학적 분쟁과 전쟁, 정치의 극우화, 부와 자원의 불평등 심화로 위기와 재난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돌봄은 중요한 가치로 조명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19는 세계가 돌봄의 개념과 실천을 경유해 더 급진적으로 그리고 더 시급하게 재구성될 필요가 있음을 제시했다. 사람들의 접촉을 막고 고립을 유도했으나 역설적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뿐 아니라 자연, 기계, 제도와 같은 비인간 존재와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케 한 것이다.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호의존성에 근거한 돌봄은 타자를 위한 돌봄뿐 아니라 자기돌봄(self-care)도 요청한다. 타자를 돌본다는 것은 곧 세계 네트워크에서의 자기 위치와 역량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기돌봄 역시 타자를 위한 돌봄에 연계되거나 그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이 〔장애인 이동권—인용자〕 투쟁은 비장애인에게 주는 선물입니다”라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1 소수자 포용의 실천이란 사회에서 가장 주변화된 이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중심에 가까운 이들은 자연스럽게 소수자들이 쟁취한 돌봄의 권리를 나눠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돌봄은 돌봄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부과하는 상품화된 웰빙(well-being)이나 과잉생산성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기관리와 구별된다. 그보다는 집단적인 생존을 위한 정치적 자기돌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여성학자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보호이며 이는 정치적 전투 행동이다. 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생존해야 한다.”2 로드 자신이 암을 진단받기까지 그 암이 방치되었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를 찾고 재난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이해를 소외된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기돌봄은 “자신이 어떤 특수한 역사적 폭력과 취약성의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인식”하고 “네트워크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3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기돌봄은 정치적 자기돌봄을 교묘하게 대치하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생산성과 근면성이 도덕률이 되고 소진이 일상이 되어버린 문화, 그 치유와 회복을 위한 대응으로 제시되는 체력훈련, 명상, 여행 상품, 24시간 신체의 온갖 수치를 측정하고 규율하기 위해 개인 데이터 공유를 요구하는 디지털 기기, 일정과 할 일을 관리하는 각종 생산성 어플리케이션 등은 심지어 좌파 행동주의를 실천하는 이들조차도 흔히 사용하는 돌봄 장치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처럼 정형화된 규범적 신체를 이상으로 내세우고, 돌봄을 숫자로 환원하고, 장치가 제공하는 규율에 맞춰 기업 시스템에 의존케 하는 상품화된 자기관리의 불평등한 이데올로기와 권력구조를 폭로할 필요가 있다. 돌봄의 자원은 어떻게 분배되고, 돌봄을 받을 자격은 누가 결정하며, 그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지·관리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화된 디지털 장치가 돌봄 자원을 사유화하는 문제 외에도, 주지하다시피 돌봄노동은 가족 같은 사적 영역 내에서 여전히 비가시화·저평가되어 여성, 노인, 이주노동자 같은 집단을 착취하거나, 호혜적인 정치적 돌봄의 성격을 잃고 시혜적인(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선으로 쉽게 대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존적·일상적·생태적 돌봄의 얽힘

 

돌봄의 정치적·윤리적인 차원에 자기돌봄의 존재론적 차원을 연계하기 위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4에서 돌봄(care)의 라틴어 어원인 쿠라(Cura)와 관련된 우화를 소개한다. 염려의 신 쿠라가 강을 건너다 점토를 발견하고는 곰곰이 생각하다 한 덩어리를 떼어 형상을 빚기 시작했다. 쿠라는 천공의 신 유피테르(Jupiter)에게 점토 형상에 숨을 불어넣어달라고 부탁하고 그는 청을 들어준다. 쿠라가 이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 하자 유피테르가 반대한다. 대지의 신 텔루스(Tellus)도 자기 몸의 일부를 사용했다며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목격한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Saturnus)가 다툼을 중재한다. 형상이 죽으면 유피테르는 혼을, 텔루스는 육체를 가져가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쿠라가 갖는다. 그것은 후무스(Humus, 흙)로 만들었으니 호모(Homo, 인간)라 명명된다.

하이데거는 이 우화에 근거해 형상, 즉 인간이 ‘거기에 있음’(Da-sein)의 근원에는 염려가 있다고 한다. 다른 존재와 관계 맺으며 세계에 머물러 있는 시간, 즉 죽음이 오기 전까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염려에 속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염려는 자기돌봄이며, 도구에 대해 목적론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벗어나 창의적인 사용을 고민하는 배려나 타자를 위한 돌봄인 심려와 구분된다고 말한다. 자기돌봄은 실존적 돌봄으로서,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앞서 보고 유한한 시간 속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며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 및 시간의 유한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잡담, 호기심, 애매함, 몰입으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시간성을 잊으려 하지만, 곧 다시 불안이 찾아와 자기 존재를 질문하게 된다.5

하이데거가 정초했던 것처럼 자기돌봄은 필히 실존적 질문을 포함한다. 그러나 실존적 자기돌봄은 정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자기돌봄과 분리되지 않는다. 로드가 말했듯이 정치적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와 돌봄을 주고받으며 함께 생존하고 실존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자기돌봄에서 잡담이나 호기심 같은 일상성을 제거하려 했지만, 일상적 실천으로서의 돌봄과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돌봄은 다시 연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쿠라의 우화로 돌아가보자. 쿠라가 여신이자 창작자이며 인간존재의 돌봄노동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하이데거는 산만한 호기심 같은 것들이 실존적 자기돌봄을 방해한다고 했지만 쿠라는 강을 건너다 호기심에 의해 새로운 도구인 점토를 발견한다. 쿠라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점토를 활용해 인간 형상을 만든다. 쿠라의 행위는 비인간-도구의 배려, 즉 물질의 창의적 사용인 예술적 실천이다. 양육, 간병, 가사노동 등의 돌봄노동은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타자를 향한 염려를 표현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돌봄/쿠라는 새로운 것을 산파하면서도 살아 있는 삶을 유지하는 데 마음을 쓴다. 오랜 시간 돌봄노동을 여성의 일로 부과해왔던 가부장제는 돌봄을 저평가하고 여성의 덕성과 연계하며, 이러한 호기심과 염려를 ‘산만함’ ‘집중력 부족’ ‘잔소리’ 같은 부정적 언어로 낙인찍어왔다. 그런 점에서 여신 쿠라가 산만한 호기심으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을 찾고 ‘염려/잔소리’로 인간 존재의 생존/실존을 실현한 것은 실존적 성찰과 돌봄 노동의 제스처가 분리되어서는 안 됨을 말해준다.

이 우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쿠라가 홀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쿠라가 주도하긴 했지만 인간존재는 상호의존과 협업을 통해서 탄생한다. 존재는 자기 존재의 취약성을 인식하는 상호의존적 돌봄이라는 조건, 그리고 텔루스(흙)라는 물질적 매체의 성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기서 형상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은 후에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하는 텔루스는 비가시적이지만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제도적·관계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한 돌봄/돌아봄(looking after) 역시 존재의 조건이다. 이처럼 존재가 가능하기 위해선 실존적·일상적·생태적 돌봄이 얽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인 작업 또한 이러한 돌봄의 얽힘 속에서 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세편의 한국 독립영화를 통해 죽음을 경유한 실존적 자기돌봄이 타자돌봄으로 이어지는 양태를 살펴보고 영화의 자기돌봄이 궁극적으로 영화제작 환경의 돌봄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죽음을 돌보기: 「밤의 문이 열린다」 「혼자 사는 사람들」

 

최근 몇년간 한국 독립영화에 죽음과 돌봄을 함께 서사화하는 영화들이 부상하고 있다. 「밤의 문이 열린다」(유은정 2019), 「아워 바디」(한가람 2019), 「벌새」(김보라 2019),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 「혼자 사는 사람들」(홍성은 2021), 「다음 소희」(정주리 202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팬데믹 이전에 나온 영화들도 있지만 모두 팬데믹이 제기한 돌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타자의 죽음과 조우하고 그 죽음을 돌보면서 자기의 실존과 생존을 돌아보게 된다.

「밤의 문이 열린다」 「아워 바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혼자 사는 사람들」은 사실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면서도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유령을 등장시켜서 사라진 것, 비존재, 죽음 같은 것을 둘러보고 보존하고 심지어는 회복시키려 한다. 「밤의 문이 열린다」의 주인공 혜정(한해인 분)은 도시 외곽 공장에서 일한다. 혜정은 겉으로는 독립적이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존에 몰두하느라 친구나 애인을 사귈 여력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날 혜정은 영문도 모른 채 자기 방에서 유령이 되어 눈을 뜬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놓이게 된 혜정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간다. 혜정은 자신이 죽기 전날 밤 골목길에서 도움을 외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외면했다. 유령이 된 혜정은 그 목소리의 주인인 수양(감소현 분)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수양이 갑자기 사라진 아빠 광식을 기다리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외로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 앞에 효연(전소니 분)이 사채업자 광식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광식과 혜정을 죽였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는 가운데(혜정은 동생 효연이 사채를 썼다며 돈을 빌려달라는 옆방 지은의 부탁을 거절한 바 있다), 수양과 혜정은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또다른 죽음을 막으려 노력한다.

자기 생존만이 중요했던 혜정은 모든 관계를 차단하며 고립을 자처해왔으며, 거기서 실존적 자기돌봄은 질문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령이 되어 비존재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던 것은 타인과 상호연결되고 서로 의존했기에 가능했다는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혼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혜정은 살아 있을 때 더 유령 같은 존재였기에 그녀의 죽음을 어느 누구도 막지 못했던 것이다. 호감이 있던 직장동료가 사귀자고 고백했을 때 혜정은 연애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밤길을 늘 함께 걸어주던 사람이었지만 혜정이 죽던 날 밤엔 혜정의 거절로 함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혜정을 탓하기보다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회복 가능성을 믿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수양은 유령이 된 혜정의 목소리에 유일하게 응답한 이다. 혜정은 효연의 살인을 막아 광식이 죽지 않게 노력하고, 따라서 수양도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다. 그렇다고 혜정이 돕는 자이고 수양이 도움을 받는 자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수양은 유령인 혜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돌봐주는 존재이며, 혜정은 자기 존재의 조건이 수양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자기 죽음의 원인을 알아보려던 혜정은 단순히 미스터리를 푸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이 유지되던 조건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영화는 살인 미스터리의 해결에 집중하지 않고 지은, 효연, 수양, 광식의 서사를 산만하게 개입시킨다. 자기 삶에 개입하려던 타인들의 시도를 생존과 독립을 방해하는 귀찮은 잔소리나 소음처럼 느끼던 혜정은 유령이 되어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통해 자기 존재의 조건을 돌아본다. 그리고 실존적 자기돌봄이 효연, 광식 같은 타자를 위한 돌봄, 방치된 수양을 살피는 일상적 돌봄과 얽혀 있음을 깨닫는다.

이 돌봄들은 위계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협업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쿠라, 유피테르, 텔루스를 중재하고 권한을 나누었던 것이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였음을 상기해보자.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으며 여러 돌봄의 시간은 서로 얽히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존재는 죽은 것들, 죽어가는 것들, 살아 있으면서도 유령처럼 사는 것들을 포함한다. 살아 있으면서도 유령처럼 살았던 혜정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존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유령이 되어서야 돌봄의 제스처를 부여받고, 주변을 보살피는 제스처, 산만한 돌봄은 마침내 타자인 수양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이처럼 죽음을 돌보는 제스처는 사라지는 것들마저 새롭게 만들고 회복시키고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거의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콜센터 직원인 진아(공승연 분)는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밥을 먹는다. 진아는 자신이 맡은 일은 누구의 도움 없이 똑 부러지게 수행하지만 그외 모든 관계는 차단한다. 하지만 옆집 남자가 자꾸 말을 걸어오고,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직원 수진(정다은 분)은 자신과 친해지려 노력하고, 어머니가 죽은 후 혼자 사는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오면서 진아의 독립적인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진아는 그들을 삶에 침입하는 약한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영화는 단순히 혼자 사는 것을 넘어 진실로 ‘혼자 존재’하는 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진아는 말을 걸어오던 옆집 남자가 사실은 이미 고독사한 유령이며 유령처럼 사는 자신을 돌봐주고 있었다는 사실, 아버지는 실제로 자기 일상을 잘 돌보고 있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 약하다고 느꼈던 신입사원 수진이 자신이 외면했던 콜센터 노동환경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용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대면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진아는 취약해 보이는 타인의 돌봄을 혼자 떠맡게 될까봐 두려워했지만 진아야말로 그들의 도움으로 자기돌봄이 가능했다. 마침내 콜센터의 착취적 노동환경으로 자신 역시 상처받고 취약한 상태였음을 인정하고 상사에게 사과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진아는 자신의 취약성을 대면하면서 수진에게 자신이 안긴 상처에 대해 사과할 수 있게 된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진아는 드디어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스트리밍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비로소 홀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취약성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다. 죽음과 취약성은 돌봄이 한 개체를 넘어 초개체적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취약하기에 서로 의존함으로써 홀로 존재할 수 있다.

 

 

영화적 자기돌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 즉 한국영화를 돌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제작되는 환경을 살피는 일일 수 있다. 비가시적이었던 텔루스가 뒤늦게 존재 생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제도나 매체적인 환경을 돌보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박송열 감독의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2022)는 제작환경을 돌보는 일이 창작 방식에 흥미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 박송열과 제작자 원향라는 실제 부부이고 영화에서도 부부로 출연하는데, 영화는 둘의 현실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외부 기금이나 투자를 받지 않고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영상촬영, 특활교사, 공사장, 택배, 대리운전, 마트, 식당 할 것 없이 알바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영태와 정희 부부의 불안정한 삶을 그린다. 아슬아슬하지만 최소한의 삶의 질을 챙기면서 삶을 이어나가던 부부는 경제적이고 관계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영태는 믿었던 선배에게 사기를 당하고 생활비가 모자란 정희가 사채를 쓰면서 그들은 넘지 말자고 했던 ‘선’을 넘게 된다. 불안정한 노동계급, 즉 프레카리아트인 그들은 제목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일거리와 예측 불가능한 경제상황에 자신들의 일상과 존재감각을 적응시키려 한다. 심각한 주제에도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톤을 만든다.

이 영화는 주어진 환경과 불화하고 적응하기 힘든 불안정한 노동 리듬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처한 영화제작의 조건을 영화미학으로 기입한다. 즉 영화(제작)의 자기돌봄의 미학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음악을 거의 쓰지 않고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생활소음이나 개천가의 소리를 입체적으로 담아내는데, 동시녹음 사운드기사로도 일해왔던 박송열 감독은 보유한 장비로 사운드를 풍부하게 채집할 수 있었다. 반면 시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움직임을 지향한다. 직접 촬영까지 담당해야 하는 조건에서, 특히 부부 모두가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오퍼레이터 없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놓고 자동촬영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가시화한다. 심지어는 초점 이동이 어색하게 이뤄지거나 자동초점으로 설정되어 있어 초점이 오락가락할 때도 있다. 이러한 촬영방식과 그에 맞춘 편집은 영화의 리듬이 불연속적이며 뚝뚝 끊어지고 어색하다는 느낌을 준다.

날씨가 사람에게 그러하듯 제작조건의 한계는 미학에 영향을 미친다. 자원이 없을수록 그 영향은 커진다. 여기서 두 창작자는 그 영향에 압도당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자기 미학을 돌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를 만든다. 무언가 끊어지고 뚝딱거리고 어색하고 긴장되기도 하는 리듬은 불안정한 비정규직 프리랜서로 사는 극 속 등장인물의 삶의 리듬이자 창작조건의 리듬이다. 그 취약성의 표현은 이 영화가 어떠한 물질적·매체적 조건에서 생산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극 중 부부는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어떤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다독인다. 그 선은 타자의 돌봄과 자기돌봄의 역량이다. 영태는 끝까지 사기 친 선배를 믿어보려 하고 정희는 안 좋은 상황에서도 후배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 한다. 관계를 쉽게 끊어내지 않고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는 자기돌봄의 제스처이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끝내 선배는 영태를 속이고 돈을 갈취한다. 영태는 선배가 자랑한 비싼 차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옹졸한 복수를 감행하려 하지만 폭력의 선을 넘기 직전 영태가 프레임 바깥으로 빠지며 영화는 급작스럽게 끝난다. 상호의존적 돌봄은 늘 친절하거나 호혜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불안과 긴장, 배신과 폭력을 포함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런 혹독한 돌봄의 조건 또는 제작환경을 숨기고 매끈하게 포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취약하고 불안정한 제작조건을 존재/미학 양식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돌봄의 의미를 더 확장하면 영화창작의 돌봄은 현재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 생성되고 있는 제도적 조건을 돌보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한국영화계에서 벌어진 미투운동 이후 한국영화는 스스로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성폭력, 위계폭력으로 영화 현장에서 일하기 힘들어진 이들 혹은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일부 제도적 노력을 보면 영화진흥위원회의 공적 기금으로 운영되는 제작지원 심사기준에서 ‘성평등 지수’를 도입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연출, 배우, 촬영, 작가가 여성인 경우 심사에서 최대 5점을 가산해주는 이 제도는 2021년 처음 도입되었다. 그러나 도입 직후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역차별’이라 지적되며 논란이 일었다. 이후 이들은 성평등 관련 정책을 폐지하라고 국민청원을 올리고 기관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고 있다. 흔히 말하는 백래시 현상을 겪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창작의 돌봄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제도가 잘 시행되고 효과가 있는지 질적·양적 조사를 실시하기, 제도 자체의 취약성은 없는지 살펴보고 보완·유지하기, 대중을 설득할 전략 고민하기, 기관 내의 실무자들이 스스로 정책의 취지를 납득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교육하기 등으로 확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도입은 늘 선언과 시행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화창작의 자기돌봄은 실무적이고 행정적인 차원, 기관(임원과 실무자) 스스로의 재교육, 민원처리 고충의 해소까지를 포함하며 산만하게 연결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돌봄은 자기 존재조건을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성찰은 내적 사유로의 집중을 넘어서 세계 내의 다른 존재들, 도구들, 더 나아가 환경을 산만하게 둘러보고 배려하는 것으로 연계된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상호 연결되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건조 「박경석: “이 투쟁은 비장애인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애증의 정치클럽 2023.10.27.
  2. Audre Lorde, A Burst of Light, Firebrand Books 1988.
  3. Hi’ilei Julia Kawehipuaakahaopulani Hobart and Tamara Kneese, “Radical Care: Survival Strategies for Uncertain Times,” Social Text, Vol. 38 No. 1, 2020, 1~16면.
  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269면.
  5. 같은 책 248~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