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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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오끼나와, 토오꾜오 그리고 후꾸시마

지난호 대화 「후꾸시마 문제, 원전사고부터 오염수 방류까지」를 읽고

 

 

사끼하마 사나 崎濱紗奈

오끼나와 및 일본근현대사상사 연구자. 토오꾜오대 동양문화연구소 동아시아예문서원(EAA) 특임조교. 저서 『이하 후유우의 정치와 철학(伊波普猷の政治と哲学)』, 공저서 『냉전 아시아와 오키나와라는 물음』 등이 있음.

 

 

동일본대지진과 후꾸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나는 대학교 3학년으로 한창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났지만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오끼나와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에 진학하며 토오꾜오에 와 그뒤 지금까지 계속 토오꾜오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후꾸시마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저절로 오끼나와에서의 경험과 토오꾜오에서의 생활이라는 내 안에 혼재하는 두가지 입장이 엇갈린다.

2011년 3월 11일, 나는 구직활동을 위해 나고야의 한 회사를 방문했다. 로비에서 면접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닥쳐왔고, 잠시 후 뉴스를 통해 일본 동북지방에서 거대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그 지진은 중부지방인 나고야에서도 진도 4를 기록했다). 원래 나고야에 하루 더 머무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토오꾜오로 곧장 돌아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날 토오꾜오에서는 전철과 버스가 모두 멈췄고, 많은 사람들이 자택으로 돌아가지 못해 ‘귀가난민’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다음 날 신깐센을 타고 토오꾜오로 돌아가 시나가와역에 내렸을 때, 평소라면 형광등으로 눈이 부신 역 안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지진이 단순한 재해가 아님을 실감했다. 실제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원전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나를 덮쳤다. 오끼나와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했고, 같은 고향 출신 친구들과 함께 기후현에 사는 이모 집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오끼나와 친구들과 함께하기로 한 것은 공항 사정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다들 곧바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오끼나와에 돌아간 친구들도 있었고, 멈춰버린 토오꾜오에 계속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피난을 떠났다는 죄책감은 지금도 내 안에 큰 응어리로 맺혀 있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지금 나는 임신 중이고, 그때 피난을 가지 않았다면 태아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니(지난호 대화 참석자들이 지적했듯 원전사고의 영향은 바로 측정할 수 없고 긴 세월에 걸쳐 밝혀지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때 판단은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나처럼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후꾸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대피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후 후꾸시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갑상선 수치에 이상을 보인다거나 그와 비슷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오끼나와 출신으로서 늘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일본의 군사적 안전보장을 위해 왜 오끼나와 땅이 주일미군기지의 약 70%를 부담해야 하는가? 평화헌법에 규정된 기본적 인권은 같은 국민인 오끼나와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텐데 왜 이런 구조적 불평등이 수십년에 걸쳐서 계속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평등을 고발하는 편’에 서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후꾸시마를 놓고는 처지가 완전히 역전됐다. 토오꾜오 시나가와역의 전기가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공급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완전히 정전된 것은 틀림없이 원전사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열여덟살 때부터 후꾸시마를 착취하는 토오꾜오 사람이었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 이야기 하나는 결국 토오꾜오의 전력을 위해 지방이 희생된 것”이라는 지적처럼(308면), 계속 토오꾜오에 사는 이상 그러한 내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후꾸시마 오염수 방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오염수는 수도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전기의 부산물이기에 후꾸시마 앞바다가 아니라 토오꾜오만에 방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도권에 의한 후꾸시마 착취는 사라지지 않고 오염수 방류라는 사태 그 자체가 지니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지만, 토오꾜오가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처럼 느껴졌다.

이모 집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멍하게 텔레비전 뉴스만 보았다. 반복적으로 송출되는 쓰나미 영상과 원전 폭발 장면, 그리고 국민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등장한 왕. 나는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했고 취업준비를 잠시 중단한 것을 넘어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3월 12일 이후에도 기업이나 구직 사이트가 잇따라 보내는 수많은 메일을 보며, 엄청난 이상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체하고 일상생활을 계속하려는 일본사회에 질려버렸다. 3월 12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면접시험도 분명 취소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회사 측의 연락이 왔을 때 이상사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 사회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때 한번 멈춰 서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어서 나는 그후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이어갔다.

박사과정 1년 차 때, 중국 쓰촨성대지진 자원봉사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 선생님과 함께 후꾸시마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남긴 기록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다.

 

11월 23일, 카와우찌무라 시찰. 이와나 마을, 영화 「귀로」(家路) 촬영지, 텐잔문고, 오오쯔베 가치장, 아레꼬레 직판매장, 고샤노모리 지원센터, 코도모에너지 카와우찌공장을 견학했고 이 공장이 관리하는 시설 ‘양망암’에서 머무름. 11월 24일, 카와우찌무라에서 토미오까마찌로 이동 중에 후꾸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를 멀리 다리 위에서 바라봄. 토미오까마찌, 나미에마찌에서 원전사고 및 쓰나미 재해 상황 시찰. 이와끼시에서 토미오까쵸 피난민들이 거주하는 가설주택 시찰.

 

나는 말 그대로 ‘시찰’만 했을 뿐이었다. 피해를 입은 장소들로 발길을 옮기긴 했지만 사람들이 떠나 인기척이 사라진 마을이나 쓰나미의 여파로 흘러들어와 방치된 수많은 잔해들, 피난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간중간 방사선량 측정기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문한 곳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오쯔베 가치장(仮置場)이다. 거기에는 잔해 처리물을 담은 봉투들이 녹색 시트에 덮인 채 수북이 쌓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오염된 흙이 들어 있었다. 봉투 수명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신속하게 소각하고 중간저장시설에 보관해야 하는데, 당시 중간저장시설 건설은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소각시설은 이미 몇군데 건설되었지만 반대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며 실제로 ‘소각로 건설 반대’라고 쓰인 입간판을 곳곳에서 봤다. 이곳은 언젠가는 철거될 예정이라며 ‘가치장’(임시 보관소)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없애기까지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펜스로 둘러싸인 가치장의 너른 부지를 보며 오끼나와 미군기지를 떠올렸다. 오끼나와 미군기지에는 대체로 ‘캠프’(Camp)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명칭에는 미군이 오끼나와에 일시적으로 주둔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의미가 있을 텐데, 이 캠프들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오끼나와에 머무르고 있다. ‘가치장’이나 ‘중간저장시설’도 같은 운명이리라 직감했다. 물론 반환된 부지가 있긴 하지만, 오염이 심각해 그 땅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부지 정화에 몇년이 걸릴지 모르고, 지금까지 근처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조차 알 수 없다.

군사기지와 원자력발전소를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두 국가나 거대자본이라는 커다란 규모의 사건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며, 개개인의 생명이나 존엄성과 관련된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호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에너지, 특히 전력 문제는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므로 “국가나 테크노크라트들에게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전략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자본, 이윤, 국가 간 논리들에 끌려가게 되”며 그 개입을 할 때 “국제연대가 중요한 매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04면).

그 국제연대를 위해서는 “우리도 이 체계 안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언제든 유사한 사고를 겪게 될 수 있음을 자각”(309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한다. 이는 “사고 지역을 사람과 분리시키는, 타자화하는 경향”(307면)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점과 통할 것이다. 오끼나와를 타자화하지 말자고 늘 생각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인데, 후꾸시마에 대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무력감과 죄책감을 변명 삼아 후꾸시마 사람들을 타자화해왔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후꾸시마를 둘러싼 문제가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이 사태의 보편성을 인지한다면, 국가나 거대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을 만들어낼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비핵지대를 계속 강조해야”(305면) 한다는 주장을 되새기게 된다. 당장 국가적 수준의 협조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재의 국면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실천들을 떠올려본다.

번역: 와따나베 나오끼(渡辺直紀) / 한국문학 연구자

 

* 이번호 현장은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대화 남상욱·송기호·오은정·이헌석 「후꾸시마 문제, 원전사고부터 오염수 방류까지」를 읽은 일본 현지 독자의 목소리를 담았다. 본문의 모든 인용은 같은 글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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