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새로운 체제를 여는 간절한 마음

 

 

유난히 어둡고 길게 느껴진 겨울이 지나갔다. 봄이 올 듯 말 듯 유독 늦게까지 지속되며 애태우던 꽃샘추위처럼, 추악한 권력자를 몰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긴 겨울 추위 속에서도 광장을 지키며 버텨낸 시민들의 힘으로 우리는 어렵사리 봄을 맞았고, 어느덧 여름에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이젠 살 만한 날이라고 자신하기엔 아직 현실이 너무 위태롭다. 산불로 검게 그을린 국토와 무너진 삶의 현장에서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재난사고들, 여전히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 되풀이되는 산재 속에서 목숨을 잃는 이들, 또 섣부른 개입으로 엉망이 된 의료현장이나 국가기관이 나서서 혐오를 조장하는 동안 되돌리기 어려운 피해를 당한 이들. 비상식이 일상화된 지난 몇년의 시간은 우리의 삶을 더욱 망가뜨렸음이 분명하되, 윤석열정권의 퇴진만으로 문제가 사라지리라 믿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이게 나라냐”는 외침의 역사는 길다.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멀리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으로, 가까이는 4·19, 5·18, 그리고 87년 6월항쟁으로 우리 역사 곳곳에 새겨져 있다. 가장 생생한 기억은 세월호참사 이후의 염원이다. 당시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는 절규와 함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다만 그 간절함은 현실의 벽 앞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벽을 마주한 소망은 좌절과 분노가 되었고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다시 광장을 채웠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이 보여주듯 분노만으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정권교체를 넘어 삶의 방식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또한 그렇게 변화된 모습을 지켜가려면 말로 하는 것 이상의 연대도 필요하고, 묵은 과제를 정리할 실력도 필요하며, 이를 밀고 나갈 지혜와 끈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전의 다짐이 엎어진 자리를 짚고 우리의 열망을 굴복시킨 힘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인적 청산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교체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한 때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마음을 모아 현실을 제대로 바꿔볼 다시 한번의 기회이다.

현실에서 ‘간절함’의 내용이 저마다 다를 수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안전한 일터, 먹고사는 문제, 죽음 앞의 돌봄일 수 있고, 또다른 이에게는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이나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라는 이름일 수도 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을 공유하더라도 연금개혁, 노동정책, 부동산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시민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릴 일도 많다. 모두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해도 각자 희망하는 나라의 모습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와 갈등 역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마주하게 될 것이고, 실제로 마주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진정한 중도란 어중간한 타협이나 온건함의 추구가 아니며, 단순히 수적으로 다수를 규합해가는 길도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변화를 이뤄내고자 함께 길을 걷는 일이다. 그것은 뜨거운 열정을 품되 희망을 잃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꾸준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희망의 시대라 해도 그 희망이 누구에게나 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두에게 암담한 시대보다 희망이 조금씩 보이는 시대가 오히려 소외감을 더 키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도 가벼운 판단으로 중요도를 매기거나 해결을 뒤로 미루자고 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내란사태의 책임을 묻고 민생과 평화를 우선 돌보는 큰 원칙은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덜 중요해 보이는 문제가 전체를 풀어내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희망은 함께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 힘이 세지지 않겠는가.

따라서 정권교체 이후에도 시민의 참여와 감시, 연대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없는 엘리트들의 전문가주의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가령 민주주의의 회복이 단지 법치주의의 강화로만 수렴된다면 중요한 사회적 판단이 사법 엘리트들의 손에 휘둘리는 작금의 현상이 되풀이될 것이다. 시민이 진정 나라의 주인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와 실천, 공부가 필요한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해나가야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거나 한번의 경쟁에서 낙오되면 끝나는 비정한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 기회가 가진 자의 특권이 아니며 모두의 권리인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그간 우리는 ‘이 정도면 끝이겠지’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일들을 반복해서 경험해왔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문제의 심각성과 그 뿌리의 깊이를 과소평가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게 나라냐”는 절규를 반복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공들여 희망을 짓고, 그 희망이 지속될 수 있도록 바탕을 튼튼히 다지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간절함이 다시금 분노로 치환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내는 노력도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회복은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목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부터 변화를 일구어가는 모두의 참여인 것이다.

 

이번호 특집 ‘민주주의적 감정과 새로운 문학’에서는 12·3 내란사태 이래 더욱 주목하게 되는 우리의 ‘민주주의적 감정’이 어떻게 문학과 접속하고 새로움을 일구는지, 그 감정의 서사학을 분석한다. 황정아는 지금 이 순간의 책임, 자신의 ‘차례’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이 갖는 역사적 깊이를 의미화하는 가운데 감정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풍성하게 논한다. 김금희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서 인간의 감정과 역사를 ‘복원’하고 ‘수리’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전하며, 새로운 성장서사의 가능성을 밝힌다. 전기화는 최근 한국문학 속 애도의 서사들이 단순히 상실을 어루만지는 것을 넘어 독자들을 애도의 자리로 호출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겨진 자들의 위치에서 상실을 돌아보는 문학적 실천이 설득력 있게 전해진다. 황규관은 김해자 시의 언어가 가진 공동감정을 포착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타인과 세계와의 연결을 시에서 어떻게 되살리고 있는지 펼쳐 보인다. 김해자 시 속 ‘니’라는 호명 방식을 빌려와 근대의 파괴적 주체성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맺음의 가능성이 시사된다.

백낙청 이남주 특별대담 「2025년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새로운 체제 건설을 위한 사유와 실천방향을 생생하고 깊이있게 전한다. 윤석열 내란정권의 획책 속에서 87년체제의 시효가 다했다는 인식이 확장되고 있는 이때,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경로가 무엇일지 담론의 장을 열어가기 위해 앞으로도 주요하게 참조가 될 글이다.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새 정부의 과제와 실천적 방안, 실효성 있는 개헌의 방식과 2025년체제 만들기가 집중 논의된다.

대화는 해방 80주년을 맞이한 한반도의 상황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김도민 문미라 허은 홍석률 네명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한반도 분단 전후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진단해 교양적 차원에서도 읽는 재미가 크다. 해방 직후 실현되지 못한 나라만들기의 염원을 앞으로 어떻게 실현해나갈 것인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논단란에서도 새로운 나라만들기 구상에 도움이 될 만한 긴요한 글들을 소개한다. 한상희는 최근 내란사태 및 주요 재판과 관련한 사법부 대응의 문제점으로 글머리를 열며 그간 누적된 사법부의 문제점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본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의 문제점과 법원행정처의 권력집중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법의 민주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해 사법개혁의 긴요성에 값하는 글이다.

한반도 현실에 뿌리를 둔 실천적 개혁 담론의 계보를 다시 쓰고자 하는 본지의 야심찬 기획 ‘K담론을 모색한다’는 여섯번째 연재를 맞았다. 박정희정권의 개발지상주의 발전모델에 대항해 민족경제론을 제기한 독보적 경제학자 박현채의 삶과 사상을 이일영이 깊이있게 재조명한다. 빨치산 경험에서 시작해 인혁당사건을 거쳐 재야 경제학자로서 활동하기까지, 박현채의 치열한 삶이 어떻게 한국적 대안 경제사상의 원형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단순한 회고를 넘어 그의 민족경제론이 오늘날 한국경제 상황에서 갖는 의미와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며, 현재적 실천의 지평을 제시한다.

현장란에서 홍석환은 최근 영남지역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빈발하는 대형 산불의 배경에 잘못된 산림정책의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숲가꾸기 사업’이 오히려 산불에 취약한 숲을 만들어왔다는 충격적 진단과 함께, 재난 이후 진행되는 ‘복구’가 어떻게 피해 주민들을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박석진은 국방정책에 대한 시민참여를 확대하는 혁신적 시도를 소개한다. 12·3 내란사태를 거치며 군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화두가 되는 상황에서, 시민의 직접참여로 만들어진 첫 시민국방백서의 발간과정과 의의를 생생한 현장의 기록으로 만난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 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온기 어린 희망으로 살피며 돌봄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는 산문 기획 ‘내 삶을 돌본 것’이 두번째 편을 맞았다. 시인 안희연이 엄마와 할머니의 곁에서 깨닫게 된 돌봄의 의미를 특유의 따뜻한 필체로 담았다. 할머니의 시골집 마당에서 엄마의 아파트 발코니로, 그리고 시인 자신의 ‘시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정원의 상징을 통해 돌봄이 어떻게 순환하며 삶을 지탱하는지 사려 깊은 사유가 전해진다.

창작란에서는 12명 시인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삶의 크고 작은 깨달음 그리고 시대의 상처와 희망을 노래한다. 김혜진 문소이 문진영 박민규 최은미의 공들인 신작 단편도 독자를 반긴다. 작가조명에서는 평론가 김나영이 최근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을 출간한 백수린을 만났다. 작가가 포착한 미세한 감정의 기척들이 어떻게 삶을 수선하며 지속하는 힘으로서 소설 속에 펼쳐지는지 섬세하게 추적하고, 자신과 타인,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몸과 마음의 낙차를 살피며 그 공백을 어루만져온 작가적 노력에 빛을 비춘다.

문학평론에서 하혁진은 그간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온 부녀서사를 독창적 시각으로 의미화한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통해 부상하는 딸의 주체성을 주목하며 세대·젠더를 둘러싼 새로운 독법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주목할 신작을 논평하는 문학초점에서는 김태선이 ‘소란’과 ‘고요’라는 열쇳말로 고선경 박준 시집을, 민선혜가 ‘파열과 접속의 자리에 돋아난 솔기’라는 상징으로 성해나 박선우 소설을 다룬다. 오연경은 한기욱 유희석의 글을 통해 비평이 수행해야 할 우리 문학에 대한 ‘상속행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촌평은 개벽사상을 통한 문명전환의 가능성을 살피는 인문서부터 평전과 세계문학까지 다채로운 도서를 소개한다. 책의 미덕을 정성스럽게 살피고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점들을 전하는 서평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엄중하기에, 본지가 이제까지 해온 일을 내세우기보다는 앞으로의 역할에 더 집중할 때다. 다만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걸음을 진전시키는 일에 작은 힘을 보태왔고, 국민의 뜻에 맞지 않는 정권은 임기를 채우기 어려우며 전환의 그날을 앞당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만은 독자들께서도 알아주시리라 믿는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을 깊이 새기며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본지의 역할일 것이다.

『창작과비평』은 간절한 마음들이 모여 대화하는 장이 되고자 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가진 이들이 토론하고, 서로의 절실함을 이해하며, 공통의 방향을 모색하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세계와 한반도의 현실을 면밀히 살피며 2025년체제를 기획해가는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대안적 비전을 모색하는 담론의 장으로서, 우리는 계속 질문하고 소통하며 실천할 것이다.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하자. 이번에는 그 간절함이 실현되는 모습을 함께 만들어가자. 희망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공들여 지어가는 것이기에.

백영경

백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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