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민주주의적 감정과 새로운 문학
역사적 감정의 존재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공저서 『개벽의 사상사』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역서 『단일한 근대성』 『아메리카의 망명자』,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에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어느 동영상 프로젝트1의 첫 출연자 황인경씨는 평소 자주 집회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날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그 밤에 국회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밴드 뮤지션인 자신은 “프리랜서고 차도 있고 다음 날 부담도 없으니까, 그러면 이번엔 내 차례구나” 싶었다고 한다. 두번째 출연자는 계엄군 차량을 몸으로 막는 모습이 SNS를 통해 알려진 시민운동가 김동현씨다. 자신이 과잉대표되는 게 아닌지 염려하는 그는 그날을 복기하며 “언젠간 저희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국회 차례일 거고, 국회나 정치인들을 처리하고 나면 언론인일 테고, 또 언론인을 잡아가고 나면 시민단체나 이런 사람들을 잡아서 억압하든 가두든 통제를 하려고 했겠죠”라고 말한다. 담담한 어조에도 채 가라앉지 않은 각성의 기운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증언을 잇달아 들으며 ‘차례’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데 주목하게 된다. 얼핏 상반된 맥락에 놓인 이 말이 ‘내가 나설’과 ‘내게 닥칠’이라는 의미 사이를 진동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그날의 밤을 넘어 더 멀리 퍼지는 울림이 있는 것 같다.
맥락이라고는 없이 내려진 비상계엄이었으나 그것이 선포된 순간 수많은 이들이 5·18 광주를 떠올렸고 또 그중 많은 이들은 더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시대의 계엄들을 기억했다. 그저 한번의 계엄이 아니라 ‘이번’ 계엄이었고 그만큼의 역사를 즉각 불러오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앞선 무언가가 또 누군가가 있음을 환기하는 표현으로서 ‘차례’는 바로 그런 역사의 두께에 상응한다.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가했던 폭력이 이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차례이고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보여준 저항을 이제 내가 할 차례이다, 동학농민군을 막은 무력이 이제 남태령에서 트랙터를 돌려세우는 차례이고 농민군이 넘지 못한 그 길을 이제 우리가 돌파할 차례이다…… 내란 진압과정의 고비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있었는지 상기했고 이를 통해 우리 다음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다짐했다. 역사적 인식이 있는 것처럼 역사적 감정이라는 것도 있다면 ‘내 차례’라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물밀듯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촛불시민들에게 “내가 나서지 않고는 안 되겠다, 꼭 내가 나서야겠다,는 어떤 ‘기분’ 혹은 감정이 발동했”다고 관찰한 바 있다.2 ‘내 차례’라는 느낌은 그와 같은 주권자의 기분과 민주주의적 감정의 연장임은 물론이고, 과거와 현재의 동료 주권자를 향한 우애와 민주주의의 지난한 역사에 대한 경의까지 함축한 점에서 어떤 심화이기도 하다. 지난 몇달을 감정으로 기록한다고 할 때 내란 우두머리나 주요 가담자, 동조세력들이 발산한 지독히 부조리한 감정들이 부각되는 것은 얼마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실상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강렬했던 요체는 이렇듯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의 감정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2. 분노만도 아닌, 사랑만도 아닌
감정에 주목하여 역사적·정치적 사건의 발생과 진로에 접근하는 방식은 꽤 폭넓게 인정받는 추세이고 정동(affect, 정서로 번역되기도 한다)연구로 불리는 분야의 성과도 그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이제 인간을 움직이는 결정적 동력을 이성적 인식이나 합리적 관념보다 감정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공감을 얻는다. 프레데리끄 로르동(Frédéric Lordon)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념적이다. 인간은 그렇게 결정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을 하기를 욕망하도록 결정되지 않고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은 인간 안에서 정서에 의해,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능동적 충동의 새로운 방향들에 의해 작동”3한다. 어떤 것을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이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으며 때로는 ‘객관적으로’ 합당한 이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하도록 만드는 관념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관념의 차이가 결국 정서의 동반 여부”4라는 지적도 수긍할 만하다.
정치적 사태와 변화를 감정이라는 틀로 고찰한 시도 가운데 가령 ‘혐오’를 둘러싼 논의들이 비교적 잘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지난 몇년 사이 집권세력이 꾸준히 부추긴 끝에 내란과정에서 기승을 부린 반중정서도 그와 관련된 현상이다. 감정 차원의 분석을 요구하기로 치면 내란의 여파로 벌어진 서부지법 폭동도 못지않은데, 계엄군의 국회 침탈에 비견할 ‘초현실적’ 장면이 연출된 그 폭동에서 가담자들을 움직인 정서는 어떤 것이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개 ‘반(反)체제’란 억압적인 기득권세력에 맞서는 저항으로 표상되며, 법질서를 위반하는 일을 종종 수반하는 이유도 법질서가 기본적으로 기존 체제를 뒷받침하는 기제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내란이 다름 아닌 기득권의 반란이고 친위쿠데타이다보니 일반적인 공식이 뒤집히면서 기득권에 동조하는 극우세력이 저항권을 운위하고 법질서를 위반하며 체제전복을 자임한다. 하나의 글로벌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반체제 극우의 준동은 더 본격적인 분석을 요구하지만, 정치적·집단적 감정을 둘러싸고 통상적으로 이루어져온 평가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여기에는 (체제 또는 권력을 향한) ‘분노’에 저항적·해방적 특권을 부여해온 관행도 포함된다. 로르동 역시 혁명과 반란 또는 봉기의 정서적 역학을 말하면서 무엇보다 ‘격분’을 앞세웠다. 격분이야말로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어 권력이 발휘해온 정서적 헤게모니의 임계점 너머 “육체의 새로운 운동들을 결정짓는 정서의 지점”이자 “위협과 공포의 정서들을 무화하고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정서”라는 것이다.5 나치에 맞섰던 옛 레지스땅스 전사가 청년들을 향해 ‘분노하라’고 일갈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6 더 나은 정치적 변화를 만드는 주된 정서적 동력으로 분노를 소환하는 것은 꽤 일반화된 경향이다. 신자유주의가 불안을 자극하여 무한경쟁을 강제하고 종국에는 무기력과 좌절로 유도하는 식으로 정서적 지배를 시행한 점에서, 스피노자에 따르자면 일종의 ‘슬픔’인 그런 침잠된 정서로부터 사람들을 일단 흔들어 깨우기에는 분노, 그것도 격렬한 분노가 상당히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이제 분노가 기존 체제보다 더 나쁜 체제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시대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보다 법치국가(Rechtsstaat)에 더 높은 가치를 두면서 민주주의란 법치국가에 위협이 될 수 있고 따라서 필요하다면 제약할 필요가 있다”7고 생각할망정 어쨌든 ‘법치’를 내세우긴 했던 반면, 신자유주의가 위세를 잃은 단계의 기득권은 필요하다면 법치마저 내다버릴 태세로 보인다. 민주주의를 더 아무렇지 않게 제약하기 위해 반체제적 에너지를 역류시켜 분노를 부추기고 법질서의 훼손을 유인하는 것이다. 모두가 타락했고 모든 것이 엉망이니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건 이제 없다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기득권을 향한 분노를 바로 그 기득권이 전유하고, 체제를 향한 파괴욕구를 체제가 수행하는 파괴로 치환하는 방식이다.
그 과정의 혼란과 폐허를 틈타 한층 야만적인 형태의 지배를 수용하게 만들 속셈일 테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법질서나 ‘헌정’의 수호만으로 대항할 수는 없다. 최고사법기관이라는 대법원에서 최근 내놓은 ‘희대의 선고’8가 보여주듯 기득권은 내팽개친 법치의 탈을 언제든 도로 주워다 쓰기도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감정의 역학에 있다. “정서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더 강력한 어떤 정서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9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로, 변화를 향한 대담하고 열렬한 시도만이 퇴행의 에너지를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범의 안정화를 겨냥하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정치적 감정 논의가 갖는 한계도 여기에 있다. 누스바움이 감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감정이 결정적 동력이라 믿어서라기보다 유용한 도구라고 판단해서인데, “내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정치적 원칙과 제도들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것”10이라고 스스로 밝히다시피 감정을 통해 정치적 질서와 규범을 뒷받침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둔다. 정치적 저항이나 전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로르동과는 지향점이 다르고 이 차이는 기존의 ‘원칙과 제도’를 어떤 성격으로 규정하는가의 차이와 연동된다. 누스바움이 애국심과 동정심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정치적 ‘사랑’을 통해 안정성을 부여하려 한 정치적 규범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질서’이다. 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단언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미 가진 것을 잘 지켜내자는 누스바움식 감정론이 새로운 더 나쁜 체제로 퇴행하려는 현재의 들끓는 시도들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고, 새로운 더 좋은 체제를 마련하는 데 미치지 못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문제는 분노냐 사랑이냐 하는 선택으로 귀결되지 않으며 분노든 사랑이든 상투적인 감정이 접어놓은 ‘주름’에서 벗어날 것을 전제로 한다. 앞서 언급한 ‘내게 닥칠’ 차례라는 느낌 속에 익숙한 두려움과 함께 담겨 있던, 더는 누구에게도 닥쳐선 안 된다는 마음은 분노인 만큼 사랑이기도 하다. ‘내가 나설’ 차례라는 기분에는 누군가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하겠다는 결의가 서려 있고 그 역시 사랑이기도 분노이기도 하다. 역사적 감정을 구성한 그 색다른 배합이야말로 파괴와 봉기만도 아닌 또 안정과 수호만도 아닌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과제에 어울리는 동력이다. 지금 우리는 체제가 자행하는 파괴를 막아서는 방식으로 체제를 파괴하는, 모든 것을 바꾸는 방식으로 많은 것을 지키는 감정의 발동이 필요한 역사적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3. 『대온실 수리 보고서』와 (탈)성장의 정서
세계의 변화에 동반되고 어쩌면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감정을 감지하고 예비하는 일에 문학은 오래 또 깊이 관계해왔다. 문학에서 그런 일은 양식상의 파격 같은 것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파격 자체가 상투적일 가능성도 상존하며 새로운 감정의 존재양식은 새로운 문학적 양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와 그 변화의 동력이 될 감정의 성격을 생각할 때 그런 단순한 일치는 더욱이 가정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장편소설의 전통적 형식을 한층 정교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대부분의 요소를 ‘감정적으로’ 탈구시키는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2024)의 방식은 흥미롭다.
소설의 서사는 장편소설 형식의 내적 교란처럼 보일 만큼 드물게 다층적이고도 치밀하다. 창경궁 대온실을 중심에 두고 화자 ‘영두’를 포함한 바위건축사사무소 팀의 수리작업이 현재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몇겹의 과거가 덧대고 포개어진다. 수리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영두가 자료를 통해 알게 되는 대온실 자체의 역사, 대온실과 이어진 주요인물 및 동·식물 비인간들의 역사, 석모도에서 상경하여 창경궁 인근 낙원하숙에 기거했던 영두 자신의 역사, 시미즈 마리코였다가 박진리였다가 낙원하숙을 운영하는 안문자가 된 할머니의 역사가 그런 것들이다. 여기에 영두가 되돌아가 살고 있는 석모도에서 친구 은혜의 딸 산아가 수행하는 또다른 ‘수리작업’의 현재가 한편에 걸쳐진다. 일본의 근대화, 조선의 식민지화,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그 이후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간대가 포함되고 공간적으로도 일본과 유럽, 미국까지 일정하게 들어와 있다. 시공간 스케일만이 아니라 공문서나 사료, 도감, 회고와 작문과 증언 등 스타일 면에서도 여러 층위를 오가는 가운데 이만큼 높은 응집력을 유지한 것만으로 작가의 역량은 잘 드러난다.
세밀하게 짜인 ‘역사들’의 서사에서 ‘나’ 영두의 개인사라는 가닥을 풀어내어보자. 중학교를 마치면 강화 읍내나 인천의 상급학교로 가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나’는 오히려 서울로 곧장, 그것도 더 빨리 진입하게 된다. 외할머니 친구였던 안문자 할머니가 영두를 거두며 기왕이면 중학교 마치기 전에 오는 편이 적응하기 나을 거라 조언한 것이다. 엄마를 잃고 고투하는 아빠의 사정을 헤아릴 만큼 속 깊은 아이였음에도 “아빠와는 다른 미래를 낚고 싶어”(26면)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의 상경 경위는 전형적인 성장서사의 도입부를 연상시키고, 이후 서울에서 겪는 일은 성장의 결정적 계기로서 주인공이 치르게 마련인 역경인 듯 보인다.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가 지적했듯이 성장소설(Bildungsroman, 교양소설로도 번역된다)의 ‘고전적인’ 형태는 주인공의 ‘젊음’이 시련을 통해 일정한 사회화를 거쳐 ‘성숙’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사회도 ‘젊음’의 요구를 수용하며 일정하게 변화하는 행복한 화해를 구현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고 또 설득력 있게 재현될 수 있던 역사적 시기는 극히 일시적이었다고 생각된다.11 그럼에도 우리는 성장서사를 그 일시성에 가두는 대신 균형 잡힌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점, 다시 말해 성장서사가 고전적으로 구현될 수 없다는 점을 또다른 틀로 삼아 서사를 보는 데 익숙하다. 성장소설이 근대성 자체의 상징적 형식으로 불리는 것도 그런 ‘범용성’에 기인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의 범용성에 착안하되 그것을 내재적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말하자면 대온실의 수리에 필적하는 성장서사의 ‘수리’ 보고서이다. “유리창을 다 떼어내고 기둥의 나사 하나까지 모두 풀었다 조립하는 과정이었다.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우는, 중수와 중창과 재건 모든 차원의 일이었다”(288면)는 대온실 수리가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수리들은 해체하고 대체하고 보강하는 총체적인 변화를 통해 ‘본모습’을 찾는 과정이다. 성장서사에 그런 수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은 영두가 수집한 자료 속의 대온실 설계자 후쿠다 노보루의 일생에서도 확인된다. 그 나름의 고투와 시련과 불만도 있으나 그의 일대기는 개인의 성장과 나라의 문명개화가 거의 ‘화해’조차 불필요하게 일치한, 고전적 성장서사를 지나치게 말끔히 베낀 ‘탈아입구’ 버전으로서 영두의 이야기(그리고 물론 할머니의 이야기)와 대비된다. 후쿠다의 성장의 성격이 그러했기에 그가 “철과 목재가 조화된, 동양에서는 유례없는 근대 건물이라고 자부했”던(260면) 대온실은 근대적인 것이 갖는 근본적 폭력성을 ‘지하 배양실’에 은폐한 장소였고 “좋은 마음으로 안 보게 되”는 꺼림직한 “일제 잔재”(33면)로 남은 것이다.
영두의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을 시험한다는 성장서사적 틀에서 출발하지만 그에 밀착된 정서는 시작부터 탈구된다. ‘서울 유학’ 소식을 들은 친구 은혜의 절교선언에도 그 점이 드러난다. 연락하자는 막연한 약속이나 아쉬움 섞인 축하 같은 것이 대략 어울릴 그 순간, “남겨지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매정하기가 쏜물 같은 년”(30면)이라는 절교의 말은 은혜 자신의 서운함이나 질시가 과장되어 터져나온 결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단호함의 효과는 상경 사실을 임박해서야 전하는 영두의 마음에 잠복한 것이 무엇인지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은혜를 통해 발화된 ‘예의 없음’에는 그저 매정함으로 해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함축되어 있다. 떠남과 남겨짐에 통상적으로 매겨진 암묵적인 가치, 떠나는 사람에겐 ‘성장’의 기회가 있으니 기회를 갖지 못한 남은 사람에게 미안해지는 마음, 바로 그같은 마음의 무례함에 대한 반발이기에 절교라는 격렬함이 자연스러운 것이다(이 ‘자연스러움’은 다시 이어진 영두와 은혜의 관계에서 재확인된다).
한편 영두의 서울생활은 성장서사의 또다른 형태인 성장의 좌절과 불가능함으로 주조되는 듯 보인다. 문자 할머니의 배려도 있고 같이 하숙하는 유화언니의 격려 같은 것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순한 남자친구 순신과의 따뜻한 시간도 있었으나 ‘나’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딘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다. “하숙집 사람들”은 “기이하게 불행”하고 “어떤 병든 습벽”(47면)을 지녔으며, 할머니 손녀라는 또래 리사는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미움”(391면)과 “공격적인 우울”(28면)을 오가면서 누구보다 영악하게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지로 ‘촌애’인 영두에게 인간의 차가움이 무엇인지 기어코 실감하게 해준다. 리사를 그렇게 만든 요인이기도 할 학교는 “이따금 출몰하는 강화 바다의 해파리처럼 독을 품은 애들이 천지”이고 “네가 괴로워야 내가 산다는 막무가내의 악의들”(202면)이 창궐하는 곳이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나에게,라고 더 정확히 되뇌면 그 차가운 말에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하면서도 곧 그것에 지지 않겠다는 미약한 저항감”(84~85면)을 품을 만큼은 단단했던 영두에게 결정타가 된 것은 정확히 자존감을 겨냥하여 가해진 모욕이다. 리사가 전략적으로 추종하는 전교 일등의 미움을 산 끝에 시험지 유출의 수혜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부정행위’라는, 영두와 같은 심성의 아이에겐 내밀한 핵을 오염시키는 그 계략은 “불신과 고립과 경계와 냉소, 분노와 비루함 그리고 가장 나쁘게는 자포자기를”(216면) 맛보게 했으나 사건 자체는 어찌어찌 수습이 된다. 하지만 리사의 거짓과 악의에 더해 전교 일등의 사과 요구까지 들어주어야 했던 억울함을 누를 도리가 없는 영두는 강화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성장은 좌절되고 이제 ‘나’는 기회를 잃은 쓰라린 패배자로 남겨지게 되는 것인가? 영두의 귀향이 갖는 독특함은 두가지 ‘감정적’ 사실을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가 시비를 가려 진실을 밝히자고 제안하자 영두는 “그토록 원하지 않던 용기가 나는 것”을, “한번 싸워보고 싶은 용기, 그렇게 해서 억울함을 바로잡고 여기 남아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욕심”(224면)을 느낀다. 강화까지 할머니가 다시 찾아왔을 때도 “마음 저편에 밀어넣었던 의욕이 아프게, 마음이 깨어지듯 아프게 올라오”고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나도 하고 싶은 욕심”(255면)이 솟는다. 그러니까 영두는 용기와 의욕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발산하는 매혹을 누르며 떠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귀향은 포기가 아니라 결단이고 그 결단의 정서적 경위는 이러했다.
나는 리사를 망치고 싶었다. 구길 수 있다면 구기고 싶었고 얼릴 수 있다면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강화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리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성되는 악의에서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게 내가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살길이었다. (219면)
영두는 이긴다 한들 싸움 자체가 ‘해파리처럼 독을 품는’ 과정이며 지면 지는 대로 ‘기이하게 불행한’ 또 한명의 인간으로 사는 일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나를 구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텅 빈 내 눈 안으로 들어와 정신을 차갑게 깨우는 사랑이라는 걸” 알고도 문자 할머니의 손을 잡지 않은 이유가 당시의 영두에게 “사람을 믿을 힘이 없었기 때문”(278면)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서로의 성장을 견주고 있었”(104면)던 리사와의 대결을 끝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출구가 없고 결국 서로를 완전히 나쁜 미래로 몰아넣을”(37~38면) 그 ‘성장’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된다. 영두가 체념하지 않고 결단했다는 점은 강화로 돌아간 이후의 삶이 환멸과 침잠으로 고여 있지 않고 “시간이든 생각이든 한번 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남겨두었다가 거기에 다시 시간과 생각을 덧대 뭔가 큰 걸 만들어가는 사람”(163면)으로 자라는 시간이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렇듯 영두가 해체함으로써 보존한 (탈)성장의 서사와 감정은 다음 세대 산아와 (서울에서 괴롭힘을 당한 끝에 강화로 전학 왔다가 다시 서울로 보내지는) 산아의 친구 스미의 관계에서 변주되고 재건된다.
4. 역사적 감정의 새로운 존재양식
영두가 수리 보고서 일을 매개로 창경궁과 낙원하숙을 다시 찾는 것 역시 구도로만 보면 묻어둔 상처를 비로소 대면하여 치유하고 자신의 멈춰선 시간을 움직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트라우마로 가로막힌 성장이 비로소 완수된다는 식의 익숙한 구도 말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흐름과 달리 그것은 오히려 멈춰선 과거들을 자신이 구축한 ‘다른 시간’의 힘으로 수리하여 새로이 흘러가도록 돕는 계기이다. 창경궁 대온실이 소설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는 대온실 수리가 띠는 성격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어 일반에 공개한 것은 왕실과 나라, 그리고 창경궁 자체에 역사적 치욕이지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서도 그런 역사적 맥락과 장소에 지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수난을 겪는다. “식물원의 미적, 교육적 가치”(168면)가 실현되어 “황실 정원이면서 국제교류의 장이 되고 원예 문화가 퍼져나갈 기반이 되기를 바랐다는”(260면) 애초 설계자 후쿠다의 소망은 식민지배의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작문에 그려지듯이 태평양전쟁 와중에 사육사와 직원들이 선제적으로 동물들을 대량학살하는 참사가 벌어지며, 이후 한국전쟁으로 창경원 동식물들은 또 한번 훼손되고 방치된다. 갖은 풍파를 거치며 대온실은 한번도 온전히 대온실이지 못한 채 겨우 “생존 건물”(33면)로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대온실이 그것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은 대온실에서 역사를 지우고 지하 배양실에 묻힌 뼈들을 그대로 덮어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209면)라는 영두의 짐작처럼, 복원이란 후쿠다가 그랬듯 믿고 싶은 모습을 투영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왔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영두가 쓰는 수리 보고서는 어느새 대온실의 역사를 하나하나 시굴하는 작업이 된다. 대온실에서도 가장 숨겨진 공간인 지하 배양실에 문자 할머니의 삶의 중요한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내지인이자 해방 후 ‘잔류 일본인’이 된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존재였음을 환기한다.
일본인 시미즈 코하루가 아픈 어머니를 돌보느라 일본에 남은 사이 어린 딸 시미즈 마리코는 조선인 양부 기노시타 코주(박목주)를 따라 동생 유마와 조선으로 온다. 마리코는 일본에서 원예 유학을 했던 양부가 식물원 주임을 맡은 덕에 창경원을 뛰어다니며 씩씩하게 자랐으나 열살 때 종전을 맞으며 상황은 급변한다. 조선에서는 “기어서라도 일본으로 돌아가라”(291면)는 벽보가 나붙지만 일본은 일본대로 “조센카에리”들을 “본토가 겪은 수난에서 비껴난 열외자이자 어려운 조국에 폐를 끼치는 불청객”(298면)으로 멸시하기에 엄마의 당부에 따라 마리코는 양부 곁에서 ‘박진리’라는 이름으로 숨죽이며 살아간다. 결정적인 시련은 한국전쟁기 1·4후퇴 때 닥쳐온다. 어린 마리코를 진작부터 눈독 들이던 상관 이창충(가마야마 마사시)은 피난채비를 마친 박목주에게 억지 심부름을 맡기고,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아이들을 챙기러 돌아온 그를 기어이 살해한다. 양부가 심부름 간 사이 동생과 대온실 지하 배양실에 숨어 있던 박진리는 동생의 약을 구하러 나갔다가 이창충이 양부를 죽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어 자신마저 이창충에게 위협받지만 가까스로 벗어나 도망친다. 여기까지만도 충분히 기구한 마리코의 삶은 이후로도 순탄치 못하다. 어찌어찌 피난지 부산에서 리사네 집안의 양녀 안문자가 되지만 그 집안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영두가 목격했듯 할머니를 향한 리사의 차가운 무시에서도 알 수 있다. 원치 않은 결혼과 이혼, 재산 사기 등 여러 고난을 잇달아 겪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양부의 고향이었던) 강화로 갔다가 영두의 할머니를 만나면서 겨우 기운을 얻고 재기한 것이다.
창경궁 역사만큼이나 굴곡진 문자 할머니의 일대기는 후쿠다의 일생처럼 말끔한 문명개화의 진로가 아니며 오히려 후쿠다가 이따금 느끼고도 한사코 덮어둔 “무언가 불쾌한, 기묘하게 불편한 감정”(265면)의 원천에 가까이 있다. 그렇다고 일본과 조선의 대립이 엄밀히 적용되기에도 너무 구체적인 생활현장의 역사에서는 인간적 됨됨이나 본바탕 같은 것이 더욱 본격적으로 시험받는다. 마리코네 조선인 가정부가 곤경에 처한 일본인 여성에게 보여준 따뜻함이나 어린 마리코에게 아버지라 불리지도 못한 박목주가 끝까지 다하려 했던 책임감이 있는가 하면,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 멸시에 열심”(302면)이던 이창충은 해방 후에도 겁박과 살인과 왕실 재산횡령을 자행한다. 역사의 이런 차원은 은폐되기 쉬운 법이라서 이후 이창충은 마리코네 가족의 은인 행세를 하고 사학재단 이사장에 언론사 사장까지 지낸다. 그가 끝내 거짓된 삶을 이어간 것은 문자 할머니가 사망 전에 호적정정을 통해 마리코라는 본명을 되찾으려 했던 모습과 정확히 대조된다. 바로 그 일본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문제삼은 리사의 농간 때문에 낙원하숙 건물을 기부하려 한 할머니의 유지(遺旨)는 ‘수리’를 요구하는 또다른 사안으로 남았다.
일본인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 세워진 대온실과 일본인으로 태어나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온 마리코 사이의 운명적 유비는 선명하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어째서 대온실과 마리코의 이야기와 만나야 했을까? 이 질문은 서사의 논리나 개연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충분히 주어져 있다) 역사적이고 감정적인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영두는 문자 할머니가 제안한 연대와 사랑을 알아보면서도 그에 기대 ‘구해지는’ 대신 스스로의 결단에 충실하기를 택했다. 영두에게 낙원하숙은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17면) 곳이었다지만, 그걸 망각하고서는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는 아니다. 거듭 확인하자면 영두가 창경궁과 낙원하숙을 다시 찾은 것은 구원에 대한 부채의식과 성장을 막은 트라우마가 발동시킨 감정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다. 이 소설이 배치한 여러 역사들의 중첩과 만남에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정서가 있다. 영두와 할머니의 연대는 ‘연대’가 원래 그러해야 하듯이 어느 쪽의 구원도 아닌 방식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실현된다. 대온실의 수리와 영두의 수리 보고서는 서로에게 침투함으로써 더 깊은 역사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일찍이 김수영은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니는 ‘현대식 교량’에 대한 시를 썼다.12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심장을 중지시키는 ‘나’의 “반항”보다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르는 “나이 어린 사람들”의 “나에 대한 사랑” 또는 “신용”이 문제인데, 이들의 사랑과 신용이란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며 ‘나’는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을 “새로운 여유”를 느끼는 한편으로, 완전히 수긍하지는 못한 채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본다. 이 시가 “‘건설되려고 하는 역사’가 어떻게 ‘역사에 대한 회고적 쓰라림’을 지워가는지에 대한 증언”13이었다면, 그 현대식 교량처럼 식민지적 근대화로 이식된 대온실을 두고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다른 역사 건설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는 역사의 쓰라림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수리’의 역사이며 이를 통해 ‘적’과 ‘형제’는 더욱 섬세하게 구분된다. 수리 보고서가 근대적 성장서사를 내파한 ‘나’의 ‘여유’를 전제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403면), 많은 이들이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404면)음을 아는 여유야말로 역사와 제대로 만나게 해준다. 이 소설은 자신의 ‘차례’에서 바로 그런 역사적 감정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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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비상계엄 증언 채록 프로젝트: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시리즈. 유튜브 채널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www.youtube.com/@KBS1203)에서 시청할 수 있다.↩
- 졸고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56면. 해당 글은 정동연구와 달리 감정, 정념, 기분, 정동, 정서, 느낌 등을 크게 구분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 프레데리크 로르동 『정치적 정서』, 전경훈 옮김, 꿈꾼문고 2020, 23~24면. 로르동은 주로 스피노자의 『에티카』(1677)에 담긴 정동(정서)론에 기대어 논의를 펼친다.↩
- 같은 책 29면.↩
- 같은 책 153, 168면.↩
-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1 참조.↩
- Perry Anderson, “Idées-forces,” New Left Review 2025년 1/2월호.↩
- 2025년 5월 1일 대법원은 이재명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을 전례없는 속도와 절차를 거쳐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정리 7, 로르동, 앞의 책 60면에서 재인용.↩
-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2019, 49면.↩
-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참조.↩
- 김수영 「현대식 교량」, 『김수영 전집 1』, 이영준 엮음, 민음사 2018, 309~10면.↩
- 졸고 「김수영과 근대의 ‘이중과제’」, 강경석 외 지음 『개벽의 사상사』, 창비 2022, 297면. 이 대목은 “역사의 쓰라림은 어떤 차원에서는 또 어느 만큼은 지워져야 마땅하기에 ‘나’는 건설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를 도외시한 채 ‘회고주의자’의 반항을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변화까지 포함한 전체 사태를 증언함으로써 그 쓰라림의 흔적을 간직한다”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