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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K담론의 성취와 미래
중도의 재구성
유교 중도론과 동학
백민정 白敏禎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저서 『정약용의 정치사상』 『정약용의 철학』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공저서 『문명전환의 한국사상』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등이 있음.
mjbaek@catholic.ac.kr
1. 중도론의 전통과 이념
이 글은 유교 정치사에서 중도(中道)가 어떻게 등장했으며 유교적 중도론의 의미와 기능, 위기가 무엇이었는지 검토한다. 그리고 동학의 부상이 중도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중도의 정치이념은 기원전 『상서(尙書)』1와 같은 중국 고대 통치서에서부터 나타난다. 조선에서는 기득권을 몰아내고 사림(士林)이 정권을 잡은 16세기 후반에도 동서분당(1575년) 이후 극심한 계파갈등이 계속되었다. 같은 사림파 안에서도 극단적 대응이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초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상서』의 「홍범(洪範)」을 풀이한 박세채(朴世采)의 황극탕평책, 영·정조의 탕평교서 같은 중도적 정치방략이 지속적으로 제시되었다. 계엄과 내란의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한 오늘날에도 우리 내부의 자중지란이 여전히 위협적이다. 극단적 세력은 배제하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갈 지혜를 중도에서 구해야 할 때이다. 물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중도인지도 중요하다. 이에 유교 중도론과 동학의 전환적 발상을 통해 우리 시대 중도론의 의미와 지향을 짚어본다.
『상서』의 「홍범」은 유교 중도론이 등장하는 첫 대목의 하나다. 여기서 제시된 홍범구주(洪範九疇)는 고대 하나라 우임금이 천명으로 받은 아홉가지 통치강령을 말한다. 아홉 강령 중 특히 다섯째 ‘황극(皇極)’이 주목받은바, 황은 임금이고 극은 기준을 의미하며, 황극을 세운다는 것은 임금이 중(中)의 자리에서 사방(四方)의 올바름〔正〕을 취한다는 뜻이다. 「홍범」은 왕의 도를 한쪽에 편벽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며 편당이 없는 탕탕(蕩蕩), 평평(平平), 정직(正直)의 원리로 규정했다.2 훗날 주희(朱熹)의 뜻에 따라 채침(蔡沈)이 『상서』를 풀며3 편벽됨, 기울어짐, 편당성이 모두 중에 맞지 않으므로 왕이 이것을 경계 삼아 공평광대(公平廣大)하고 중정(中正)한 황극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중정한 황극이 중요한 것은 이를 기준으로 왕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고 죄를 징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부자간에 친애함을 극진히 하고 부부간에 분별을 극진히 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극진히 하면, 백성 또한 친애와 분별, 우애를 기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홍범구주에는 백성을 통치하는 세 원리 삼덕(三德)이 있다. 정직함, 강경함, 유순함이 그것이다.4 평강정직(平康正直)한 백성은 임금이 교정할 필요가 없지만, 강한 자는 임금이 강경함으로 바로잡고 유약한 자는 유순함으로 바로잡으며, 내려앉고 후퇴해서 중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강경함으로 그 유약함을 극복하게 하고, 높고 고원해서 중을 지나쳐버린 자는 유순함으로 그 강함을 누른다는 말이다.
임금이 삼덕을 알면 양극단을 피해 백성에게 중을 적용함으로써 균형을 이룬다고 보았다.
『상서』의 중도론은 올바른 신하를 선발하고 평가하는 구덕(九德)에서도 드러난다. 관리인 고요(皐陶)는 우임금에게 정치의 요체가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에 있음을 설파했다.5 전자는 올바른 인재를 알아보고 관리로 등용하는 것이며, 후자는 세금을 가볍게 하고 민생을 돌보는 것이다. 고요가 좋은 관리의 기준으로 삼은 아홉 덕목은 이렇다. “너그러우면서도 절도가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뜻이 굳건하며, 순박하면서도 예에 맞게 공손하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삼가고, 사람을 포용하면서도 결단력 있고, 강하면서도 온화하고, 처사는 간결하면서도 사사로움 없이 청렴하게 대하고, 강직하면서도 막힘이 없고, 힘이 있으면서도 의로움을 따른다.”6 구절마다 전환의 의미가 들어간 것을 두고 채침은 바로 말하고 뒤집어 응대함으로써 구덕이 치우치지 않음을 밝혔다고 했다. 관리를 평가하는 아홉 덕목에서도 편벽된 성품을 경계하며 중도의 인품을 추구한 것이다.
『상서』가 제왕의 중도적 통치론을 보여준 것이라면, 중국 송대의 유학자들이 중시한 『중용(中庸)』은 지식인 사대부가 수행할 만한 중도적 심성론과 수양법을 제시했다.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감정이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7 이에 대해 정이(程頤)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이며 천하의 바른 도라고 했고, 주희도 중은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고 과불급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보았다. 즉, 희로애락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가 어떤 치우침도 없는 본성의 모습을 보여주니, 이른바 천명지성(天命之性)의 본래 모습이 바로 중이라는 것이다. 이 본성이 드러날 때 사태에 알맞아서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으면 곧 조화로운 감정이 된다.
『중용』은 마음의 본성과 감정이 중화를 이루면 세상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고 말한다.8 주희는 감정이 드러나기 전이거나 드러날 때의 공부법으로 평상시에 엄숙한 자세를 유지하며 삿된 감정이 나의 중정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함양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즉 미발상태의 맑은 거울과 잔잔한 물처럼 고요한 중의 상태를 유지해야 사태와 만났을 때 중절(中節, 적합하게 감정이 발현된 상태)해서 타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9 다만, 성리학자들은 타고난 본성을 중이라 보면서도 수양해서 ‘중을 구한다〔求中〕’는 말은 할 수 없다고 보았다.10 이 말이 공부를 작위적으로 만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 같은 인물은 중의 마음을 ‘보존’하려는 선배들의 태도를 불교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집중론(執中論)을 두둔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끊임없이 내면을 살피는 신독(愼獨) 공부를 해서 중을 의식적으로 붙잡으라는 말이다. 이처럼 『중용』을 전거로 한 유학자들의 중도론은 심성의 이상적 모습과 그것이 사태에서 발현된 조화로운 중절의 감정을 풀이했다. 『상서』가 군주가 수행할 중도적 통치행위의 규범을 말했다면, 『중용』은 식자층이 본 인간 심성의 중정한 모습과 수양의 자세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2. 유교적 위계질서와 중도론의 위기
유교 중도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좌우한 『주역(周易)』의 논리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주역』의 음양론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과 연결된다.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말한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11는 구절을 두고, 주희는 음양은 도가 아니며 음양이 번갈아 운행하는 것은 기(氣)이고, 한번은 음하고 한번은 양하는 운동의 원리가 곧 도〔理〕라고 풀이했다.12 그는 『주역』의 음양론을 빌려와서 이기(理氣)의 관계를 해명한다. “천지 사이에 다만 동과 정이 끊임없이 순환할 뿐 다른 일이 없으니 이것을 역(易)이라고 말한다. 그 동정에는 반드시 동정하는 까닭으로서의 리(理)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太極)이다.”13
이때 『주역』의 개념으로 제시된 ‘리’란 음양의 대대(對待, 서로 다른 것이 감응·관계함)와 순환(循環)의 원리를 가리킨다. 음양으로 이루어진 만물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결국 하늘과 땅, 산과 강, 남성과 여성처럼 대조적으로 짝이 되는 것들이 서로 대대관계를 이루며, 만물의 운동과 변화도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며 한번은 밤이 되고 한번은 낮이 되는 등 순환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전자를 교역(交易)이라 하고 후자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교역이란 음양이 서로 짝을 이루어 교감하되 서로 다른 자리와 위치에서 관계맺는 것을 말한다. 역에서는 음양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을 정위(正位)라고 하는데 이것에 근거해서 현실의 차등적 명분론이 정당화되었다. 요컨대 양과 남성적인 것은 고귀한 하늘의 높은 자리에, 음과 여성적인 것은 비천한 땅의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정위라고 본 것이다.14 이것이 음양 교역관계의 실상이다.
음양은 중의 개념과는 어떻게 연결될까. 송대 유학자 이정(二程) 형제(형 정호程顥와 동생 정이程頤)는 음과 양이 대대의 교역으로 맺어진 모습을 중으로 간주했다. “중의 이치가 지극하다. 음만으로 사물을 낳을 수 없고 양만으로 사물을 낳을 수 없다. 음양이 치우치면 금수와 오랑캐가 되고, 중을 이루면 사람이 된다. 중이 되면 치우치지 않고, 항상적이며 변하지 않는다.”15 정호는 음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교역의 모습을 중으로 서술했는데 이것은 음양 교역의 원리인 리의 성격을 말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동생 정이도 말했다. “리라는 것은 반드시 짝을 기다리는 것〔對待〕이니 이것이 생생(生生)의 근본이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바탕이 있으면 무늬가 있으므로, 하나만으로 홀로 설 수 없고 둘이 있어야 문채(文采)를 이룬다. 도를 터득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 이치를 알겠는가?”16 이들의 발언에서 음양의 이상적 관계를 중으로 이해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음양 대대와 교역은 기본적으로 양존음비(陽尊陰卑) 관념을 함축했다. 이미 『주역』의 괘효사(卦爻辭)가 이 점을 방증한다. 건괘(乾卦)는 양이 하늘을 통어하는 존재라고 했고, 곤괘(坤卦)는 음이 하늘에 승순하는 존재라고 했으며, 그것을 각자의 몫에 부합하는 올바른 역할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음은 양이 선창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순하게 화답하는 존재이며, 만약 음이 양보다 앞서거나 자신을 드러내면 혼미하고 어긋나게 된다. 곤괘 상육(上六) 효사는 음이 가장 극성하게 자라난 상태를 “용들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붉고 누렇다”고 묘사하며 음이 자신의 도리를 망각하고 양과 맞서 싸우려고 하는 사태를 비판한다. 음양 대대론은 대등하거나 평등한 관계가 아닌 위계적 존비의 질서로 구성된 것이다. 유학자들은 군신·부자·부부의 정해진 상하 지위와 역할을 지키는 것을 각자 맡은 바 소임을 행하는 ‘각득기소(各得其所)’로 표현했다. 그리고 군신에서 가족, 친척, 벗에 이르기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상이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때 인륜관계가 화순하고 형통하게 된다고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역에는 교역 외에도 변역의 의미가 있다. 변역은 음이 되었다가 다시 양이 되며 이 과정이 무한히 순환 반복되는 유행(流行)의 원리이다. 음양 교역의 관점에서 보면 음과 양은 위계적 관계라고 해도 어느 것 하나 없앨 수 없는 존재이지만, 변역의 관점에서는 강건한 양이 자라는 것을 북돋아주고 격려하며 음이 자라는 것을 경계해서 억누르는 부양억음(扶陽抑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음양이 순환하고 유행할 때 양은 생명의 기운이며 군자의 도로 작용하는 반면 음은 죽음의 기운이며 사특한 소인의 도로 작용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주희는 『주역』의 ‘서리를 밟으면 머지않아 단단한 얼음이 언다(履霜堅冰至)’는 말을 두고 하나의 음이 생겨나는 것은 하나의 도적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풀이했다.17 이에 따라 상호공존하는 중의 원리로 묘사된 음양의 관계는 하나가 하나를 억누르고 이기는 배제의 논리로 전환된다. “천지 사이에는 함께 양립하는 이치가 없으니, 음이 양을 이기지 못하면 곧 양이 음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물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다.”18 『주역』의 「계사전」에서 제시한 천존지비와 양존음비의 원리는 이제 소인의 부류에 해당하는 음의 영역을 극복하고 군자의 부류에 해당하는 양의 영역을 부양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렇듯 음양론이 자연의 질서를 넘어 군자와 소인, 선과 악의 대립적 관계의 근거로 자리잡으면서 유교사회의 차별과 억압의 명분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중용』의 심성론은 치우침이 없는 중의 상태를 강조했지만, 유교사회가 설계한 현실은 차등적 위계질서와 명분에 따른 각득기소를 원만한 중절의 상태로 용인했다.
3. 동학 그리고 중도의 재구성
우리는 『주역』의 차등적 음양론이 예치(禮治)사회에 적용된 모습을 조선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음양론을 근거로 군자당·소인당을 판별했고 상대 정파를 제거해야 할 소인배로 지목했다. 당시 음양론은 당쟁에서 정적을 비판하는 명분이었고, 반상(班常)과 적서(嫡庶), 남녀의 위계와 차등을 강화하는 논거로도 작용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도 주목한 것처럼19 조선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심했다. 상하귀천을 엄격하게 나눈 차등적 예(禮) 조문들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국왕의 탕평책으로 그나마 외견상 유지되던 중도정책이 정조가 사망한 후 서교 탄압을 빌미로 특정 세력에 편중되었다. 19세기 들어 더 심화된 사회적 차별, 광범위한 농민 수탈에 이어 중국-유럽 사이의 전쟁(아편전쟁)이 서민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무기로 싸우면 대적할 자가 없는 서양인이 중국을 침략했으니 조선도 곧 무너질 수 있다는 순망치한의 위기감을 피력했다.20
1860년 무렵 동학의 창도는 각지의 농민 저항이 빈번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수운 역시 임술민란(1862)의 배후 중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다. 민란에서 싹튼 민의 각성과 변화, 차별적 신분질서의 압박을 체감한 서민형 지식인 수운의 자각과 득도가 동학의 구상으로 이어졌다. 수운은 밖으로 보국안민의 계책을 고민했고, 안으로 예교(禮敎)사회의 차별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동학은 천주(天主)로 일컬어진 한울의 존재론을 통해 조선의 위계질서를 일거에 전복하는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낳았다. 지기(至氣)·심령(心靈)·성령(性靈) 등으로 불린 이 영적 기운을 매개로 나도 한울이며 너도 한울이라는 존재론적 평등안이 제시된 것이다. 이 점은 시천주(侍天主,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다)에서 양천주(養天主, 내 안에 한울님을 기르다)로, 그리고 각천주(覺天主, 내 안의 한울님을 깨닫다)로 이어지는 수행의 보편 가능성에서도 드러난다.21 시대의 위기를 고민하며 등장한 동학은 유교적 중도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단초를 열었다.
이 장에서 동학이 제시한 중도의 새로움을 세 측면에서 소개하려 한다. 첫째, 동학은 전통적 위계질서와 명분론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유교의 도덕성을 계승한 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동학은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선사(仙史)』에 수록된 것과 같은 풍류도와 신선(神仙)사상, 즉 선도(仙道)를 이었다. 해월은 동학이 유불선(儒佛仙)을 이은 듯하지만 유불선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통과 새로움 사이 동학의 중도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번째로 서교, 즉 천주교의 천주 개념을 과감히 빌려와 시천주를 말한 점에서 알 수 있듯 동학은 서교의 신앙과 전통적 상제관, 유교 천명(天命)사상의 접점을 모색했다. 이 대목에서 신앙적 태도와 진리의 깨침 간의 중도, 마음과 육체의 균형을 중시한 의암 손병희의 성신쌍전(性身雙全, 마음과 몸을 함께 완전하게 함)의 수행법이 제시되었다. 세번째로 신앙과 생활, 신앙과 정치 간의 균형을 도모한 동학 이래 천도교의 교정쌍전(敎政雙全, 종교·도덕과 정치·행정이 조화를 이루어 완전하게 함)의 정신을 언급할 수 있다. 의암이 교정쌍전을 통해 강조한 것은 개인수양과 정치가 서로 닦아가는, 수행과 정치의 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교정일치를 말한 적도 있기는 하나, 양자가 한쪽에 치우치면 정교유착이 될 것이므로 종교와 정치의 공존을 위해서도 중도가 필수적이다.
해월은 천도(天道)와 유불선을 비교하며 우리 도가 유불선과 같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유불선과 다르다고 했고,22 동학의 천도가 곧 유불선의 본원(本原)이라고도 했다.23 그는 수운이 제시한 진리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천지·음양·귀신·조화를 관통하는데, 그 핵심은 우주의 근본이 되는 기운 즉 ‘절대원기’ ‘절대성령’의 존재라고 보았다. 그에게 이 절대원기란 곧 한울이고 인간이며(인시천人是天), 인간의 마음(심즉천心卽天)이었다. 이기(理氣)와 성리(性理)라는 표현이 해월과 의암의 발언에 자주 등장하긴 하나 유교적 개념과 확연히 다른 것은 이들이 우주 원기를 신비한 천령, 심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울의 영이 곧 나이며 내가 곧 한울이라고 할 때 이 성령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의 근원이므로, 동학의 언설은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불교적 관점과도 같을 수 없다. 다만 수운의 발언은 전통적 사유와도 여전히 맥이 닿는데, 그가 유교적 가족주의, 즉 효제(孝悌)를 근간으로 한향촌운영의 규범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수운이 제시한 동귀일체(同歸一體, 함께 돌아가 한몸이 됨)도 효제를 가족-향촌-국가로 확장한 유교적 유대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해월은 「도결(道訣)」에서 ‘건칭부 곤칭모(乾稱父 坤稱母, 하늘이 아버지, 땅이 어머니)’라 한 것은 앞선 성현의 말이지만, 천지를 부모처럼 여겨 섬기라 한 것은 스승이 창시한 것이라 했다.24 이 또한 효제의 규범을 우주의 감응론으로 확장한 것이다.
동학이 선도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점도 흥미롭다. 동학에서 신선은 도인이며 선녀는 도통한 부녀에 해당하니, 동학은 고대의 신선사상이 대중화된 민중적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가령 고구려의 전사와 국선(國仙)으로 불린 신라의 화랑이 엘리트 신선이며 선택된 고귀한 족속이라면, 동학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백성이 천민(天民)으로 공경받고 한울과 합일할 수 있는 존재로 부상되었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在世理化, 이 세상에서 깨우쳐 변화시킴)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구현된 첫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의 발언에 정성과 믿음이 독실한 자 누구라도 지위와 성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도통할 수 있다는 말이 수시로 등장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동학의 중도론은 전통을 딛고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치우친 차등적 명분론을 변혁한 점도 간과할 수 없으니 이 점을 통해 비로소 중도의 재구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동학의 중도적 성격은 모심과 신앙의 대상인 천주, 그리고 자각적 깨달음의 대상인 성령 사이의 균형감각에서도 드러난다. 스승 해월의 발언에 담긴 의도—“신인합일(神人合一)이 곧 자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모실 시(侍)의 근본이다”—를 잘 포착했던 의암은 『무체법경(無體法經)』에서 ‘성심신(性心身)’을 풀이하며 신앙과 자각적 깨침 사이의 중도를 표방한다. “혹자가 말하기를 ‘한울을 마음 밖에 두고 다만 지극히 정성을 다해 감화를 받아 도를 얻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한울이 내게 있으니 어느 곳을 우러러보고 어느 곳을 믿으랴. 다만 내가 나를 우러러보고 내가 나를 믿으며 내가 나를 깨친다’고 말한다. (…) 무릇 천지만물에 주객의 형세가 없지 않으나 한울을 주로 보면 내가 객이고 나를 주로 보면 한울이 객이니,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치도 아니고 도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객의 자리를 두 방향에서 판단한다. 사람의 권능이 한울을 이기면 한울이 사람의 명령 아래 있고 한울의 권능이 사람을 이기면 사람이 한울의 명령 아래 있으니 이 양단은 다만 권능의 균형에 달려 있을 뿐이다.”2526 이『해월신사법설』 「기타편」 11조목.는 신을 섬기는에 몰입해서도, 스스로 진리를 깨치는 것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또한 한울과 내가 같으면서도(인내천人乃天) 양자 주객의 위치는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수행법 역시 중도적 균형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동학의 출발은 수운 대선사의 신비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안으로 상제가 내리는 강화(降話)의 가르침이 있었고 밖으로는 지기(至氣)와 만나는 접령(接靈)의 경험이 있었다. 이 점에서 ‘시천주’라는 신앙적 태도는 유교의 전통적 상제관, 천명론과 달랐다. 한편 수운은 서양의 천주교가 실제로는 천주를 모른다고 의심했는데, 그 이유는 천주의 무극대도가 다름 아닌 무위이화(無爲而化,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히 조화를 이룸)라는 점을 서양인이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월은 스승 수운의 가르침이 ‘수심정기(守心正氣)’와 ‘무위이화’인데, 전자가 끊어진 우주의 정기(精氣)를 회복하는 공부라면 후자는 사람이 만물과 더불어 천리에 따르는 이상적 모습이라고 했다.26 그는 한울을 섬기는 것이 허공을 향해 상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공경하는 것이라 했고, 한울만 공경할 뿐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면 농사의 원리만 알 뿐 실제로 종자를 땅에 뿌리지 않는 것이라 비유했다. 그래서 하늘처럼 사람을 섬기라는 뜻을 강조한다27.
수운의 천주 모심에서 해월과 의암의 심령·성령의 깨침으로 이어진 중도적 수행의 흐름은 한울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의 심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관건이다. “기(氣)가 마음을 부리는가, 마음이 기를 부리는가. (…) 화생하는 것은 기요 작용하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이 화하지 못하면 기도 도수를 잃고 기가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궤도를 이탈하니, 기를 바로 해서 마음을 편히 하고 마음을 편히 해서 기를 바르게 하라.”28 신체의 바탕인 기와 마음작용을 양단에서 해명한 해월의 수행법은 의암에게도 이어진다. “성품이 있어야 몸이 있고, 몸이 있어야 마음이 있는데, 성품〔性〕과 마음〔心〕과 몸〔身〕 세가지에서 어느 것을 먼저 할 것인가. 성품이 주가 되면 성품의 권능이 몸의 권능을 이기고, 몸이 주가 되면 몸의 권능이 성품의 권능을 이긴다.
성품을 주로 보고 닦는 사람은 성품의 권능으로 비고 고요한 경지를 무궁히하고 그 원소를 확충하여 불생불멸을 도라 하고, 몸을 주로 보고 닦는 사람은 몸의 권능으로 활발하고 거리낌 없이 현 세계에서 모든 백성을 함양함을
도라고 한다. 성품과 몸의 두 방향에 대한 수련을 보여 도 닦는 사람에게 밝혀 말하려 하노라.”29 의암은 ‘성심신’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한울의 능력을 때에 맞춰 쓰는 것은 결국 수도자가 중을 잡을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30
의암의 성신쌍전은 공부의 차원에서 마음(혹은 본성)과 몸의 균형을 지향한 수행법이다. 동학은 수운 이래 보국안민이라는 나라와 민을 위한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천도교에서도 도를 깨닫는 대도견성(大道見性)의 자각에 바탕해서 덕을 온 세상에 펴는 ‘포덕천하(布德天下)’와 민중을 널리 구하고 살리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정치적 비전을 제시했다. 『천도교창건사』를 작성한 이돈화(李敦化)는 의암의 강설을 소개하며, 성신쌍전의 원리가 확장되어 세상을 이롭게 함에 정신교화를 존중하고 동시에 물질적 제도를 중시해서 양자를 병행하도록 하는 교정일치의 원리로 발현되었다고 풀이했다.31 이른바 정신함양을 위한 교화와 물질적·제도적 삶의 운영을 위한 정치를 함께 닦는다는 교정쌍전의 논의이다. 수도자가 중을 잡음으로써 비로소 ‘성신심’ 삼단을 균형있게 연마할 수 있다고 보았고, 한울과 인간의 권능 역시 양단의 균형이 관건이라고 보았던 만큼 의암에게 정치와 교화 역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수렴되거나 치우치는 영역이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정쌍전도 신앙과 생활, 신앙과 정치가 서로 연마하며 공공의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양방향의 원리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암 손병희의 중도적 감각은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문명개화의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판단에도 반영되었다. 「삼전론(三戰論)」(1902)도 이런 성찰의 산물이다. 일본에 체류하며 서양문물을 접한 의암은 세계정세를 살펴보건대 무기나 병력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지향할 만한 바람직한 사상과 학문(도전道戰), 재정능력(재전財戰), 강대국 사이에서 존립할 수 있는 외교력(언전言戰)이 필수라고 보았다. 특히 민심을 통일하고 인화를 이루기 위해 그 나라에 알맞은 사상으로서 도가 필요한데 이것이 곧 근본적인 보국안민의 계책이라고 생각했다.32 이 점은 사람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 살리는 도덕을 강조한 해월의 가르침을 이은 것이면서, 전통과 개화 사이 균형을 잡고자 한 의암의 노력을 보여준다.33 『준비시대』(1905)에서도 의암의 중도적 전략과 태도가 엿보이는바 그는 타인과 강대국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 부강함, 문명함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연마하고 갖춰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의 학술과 응용지식에서 장점을 취하고 우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근면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강조한다.34 흥미로운 점은 뒤에 붙인 「향자치」라는 소고에서 향자치가 주민이 스스로 정치하는 것이라 소개한 점이다. 그는 향이 정치기관으로는 최하급이지만 향 정치가 먼저 확고하지 않으면 나라의 정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향 주민이 자율법에 의거해서 자치하는 향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주민이 향회에서 선거로 관리를 뽑는 방법도 제안한다.35 의암은 세계정세를 살피면서도 향회에 기반한 자치제를 모색하는 등 한반도 실정에 맞는 정치적 전략을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4. 20세기와 변혁적 중도론
민본주의를 내세운 유교도 정치의 정당성을 민심에 두었지만, 동학에 이르러서 비로소 만민의 존재 의미가 주목받고 민중의 주체적 역량도 실질적으로 높아졌다. 민의 정치적 목소리가 공공의 장에 드러나게 된 것도 동학의 유포와 집회(민회), 교조신원운동 같은 대중행위를 통해서였으며, 그 정점에 19세기 말 동학농민전쟁이 있었다. 관의 무능과 부패, 외세의 침입으로 동학의 정치실천은 심각한 타격을 겪었지만 그 정신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3·1운동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거치며 보국안민과 포덕천하를 지향한 동학의 이념은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임형택은 3·1운동이 갖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이 거족적 운동 이후 악화된 좌우대립이 양자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는 신간회 운동을 주도한 홍명희(洪命熹)의 중도주의,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를 중요한 사상운동으로 소개했다.36 「신간회의 사명」에 따르면, 홍명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중간 길, 단순한 절충이 아닌 진정한 바른 길로서 ‘정도의 중간길’을 좌우대립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의 대작 『임꺽정』도 문학으로 구현된 좌우합작의 중도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37 임시정부의 정치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한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당의 해석」38에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할 ‘신민주국’은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적 방식도, 무산자 독재를 표방하는 소련식 사회주의도 아닌 전민적(全民的)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세계정세를 주시하며 한민족이 나아갈 중도의 바른 길로 삼균주의를 제시했다.
심성의 이치와 정치 양면에서 드러난 동학, 천도교의 중도적 지향은 해방정국에 구성된 『천도교의 정치이념』 『천도교 청우당론』 등에서 직접적으로 발현된다. 전자는 남북한 천도교 이론가들이 함께 집필한 천도교 이념서이고, 후자는 천도교 청년단체 청우당의 교육교재로 마련된 것이다. 천도교 이론가들은 ‘조선적 신민주주의’가 민족해방이나 계급해방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되고 ‘쌍전완수’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했다.39 『천도교 청우당론』도 인민 자치를 위해 민주적 중앙집권 기관이 필요한데 이곳에 민주적 도덕이념에 해당되는 교(敎)와 규율을 실천하는 정치권력〔政〕 양자가 필요하며 도덕성 함양과 규율의 권력 모두 쌍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 해방 후 『건국론』에서 중도주의를 관건으로 제시한 원불교 2대 지도자 정산(鼎山) 송규(宋奎)의 발언에서도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건국론』은 글의 요지가 중도정책이라는 점을 명시했다.41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정치적 중도주의는 단순히 정책 입안이나 강령에 머물지 않고 그들이 상정한 심성론과 세계관을 우리에게 남겼다.
유교 전통을 포함해서 동학, 그리고 20세기 이후 우리 삶터에서 표출된 다양한 중도적 사유는 중간·중립과 같은 기계적 균형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최제우가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용담유사』에서 읊었듯이 유교의 중도론은 명이 다한 때를 맞았지만 그 역시 시대가 요구한 이념과 명분을 제시했다. 다만 어떤 이념과 명분이 더 타당하며 우리가 추구할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엄정히 따져볼 일이다. 이 점은 동학과 20세기 이후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도론은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제시하고 그것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때 각자가 마주한 시대의 급무와 난제를 해결하려는 변혁적 문제의식, 적실한 해법이 필수적이다. 체제변혁의 전망과 해법이 없다면 중도란 오히려 나와 뜻이 다른 이들을 멀리하는 무관심의 수사적 표현이 될 수 있다. 백낙청은 변혁적 중도에서 분단체제의 변혁이라는 이 변혁성이 빠지면 결국 의미없는 말이라는 점을 되짚었다. 그는 변혁적 중도론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급무가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점을 밝혔다.42 한반도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변혁적 목표를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 시대 새로운 중도의 재구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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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서』는 『서경(書經)』을 말하며, 중국 고대 제왕들의 언설과 행적이 담긴 가장 오래된 정치 역사 서의 하나다.↩
- 『상서』 「홍범」 14장.↩
- 주희가 『상서』를 다 주석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의 제자인 채침이 주석서를 집필했다.↩
- 『상서』 「홍범」 17장.↩
- 『상서』 「고요모(皐陶謨)」 2장.↩
- 『상서』 「고요모」 3장.↩
- 『중용』 제1장.↩
- 같은 글.↩
- 『주희집(朱熹集)』 64권, 「여호남제공론중화제일서(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호남의 학자들과 중화에 대해 논함 1)」.↩
- 『주희집』 46권, 「답여사첨(答呂士瞻)」.↩
- 『주역』 「계사상전」 5장.↩
- 『주자어류(朱子語類)』 74권.↩
- 『주희집』 45권, 「답양자직(答楊子直)」.↩
- 『주역』 「계사상전」 1장.↩
- 『이정전서(二程全書)』 「명도어록(明道語錄)」.↩
- 『이천역전(伊川易傳)』 분괘(賁卦), 단전(彖傳).↩
- 『주자어류』 65권.↩
- 같은 책.↩
-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33. 포덕(布德)」.↩
- 『동경대전(東經大全)』 「논학문(論學文)」.↩
- 시천주, 양천주, 각천주는 각각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그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 동학을 천도교로 계승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의 핵심사상이다. 김용휘 『손병희의 철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74면 참조.↩
- 『해월신사법설』 「13. 천도교와 유불선」. 이하 동학 경전의 인용은 원문을 토대로 필자가 현대말 로 풀어서 쓴 것이다.↩
- 『해월신사법설』 「기타편」 16조목.↩
- 『해월신사법설』 「3. 도결」.↩
- 『무체법경』 「2. 성심신 삼단(三端)」 1조목.↩
- 『해월신사법설』 「기타편」 11조목.↩
- 『해월신사법설』 「21. 삼경(三敬)」.↩
- 『해월신사법설』 「4. 천지인·귀신·음양」.↩
- 『해월신사법설』 「2. 성심신 삼단(三端)」 5조목.↩
- 『해월신사법설』 「2. 성심신 삼단(三端)」 7조목.↩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 1970, 67면↩
- 「삼전론」의 제5조목.↩
- 김용휘, 앞의 책 102면.↩
- 손병희 『준비시대』, 손윤 옮김, 오늘Korea 2015, 19~20면.↩
- 같은 책 48~49면.↩
- 임형택 「3·1운동, 한국 근현대에서 다시 묻다」, 백낙청 외 『백년의 변혁』, 백영서 엮음, 창비 2019, 62~72면 참조.↩
- 같은 글 65면. 한편 홍명희의 작품 『임꺽정』의 의의를 비평하는 대담에서 최원식은 이 작품을 좌우합작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하면서, 신간회 운동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통일협동전선을 추구한 배경을 상술했다.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재조명』, 임형택·강영주 엮음, 사계절출판사 1988 참조.↩
- 『소앙선생문집(상)』, 삼균학회 엮음, 횃불사 1979. 조소앙의 신민주주의론, 삼균주의를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해석한 다음 글이 좋은 참조가 된다. 백영서 「변혁적 중도로 다시 보는 삼균주의」, 『창작과비평』 2025년 가을호.↩
- 김병제·이돈화 외 『천도교의 정치이념』, 임형진 해제, 모시는사람들 2015, 52면. 이 책은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해당하는 『천도교의 정치이념』 『당지』 『천도교청우당론』을 각각 현대어로 편역했다↩
- 같은 책 203면.↩
- 『건국론』 제8장 결론; 허석 편저 『박중빈·송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한국사상선 20), 창비 2024, 26~28면 참조.↩
- 백낙청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해법으로 변혁적 중도론을 제시했다. 그간의 변혁적 중도에 관한 글을 새롭게 엮어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창비 2025)를 세상에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