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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김보나
1991년 서울 출생.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의 모험 만화』 등이 있음.
officiallybonakim@gmail.com
111근짜리 깃털
새해 복 많이 받아. 왠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1월이네. 비록 오늘은 눈길을 걷다 자빠졌지만, 한순간 몸이 가벼워졌어. 허공에 붕 뜨는 찰나, 잠시 깃털이 된 것 같았어. 그건 아마 얼음이 내게 가르쳐주려던 느낌이었을 거야.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 그건 깃털이 잘 아는 기분일 테고. 창피해서 벌떡 일어났어. 빙판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만 축축해지잖아.
신 아니면 내 오른쪽 신발이 나를 주저앉혔을 때, 나는 볼 수 있었어. 내 몰골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바라클라바를 쓰고, 배낭은 묵직하고, 사슴 가죽을 덧댄 장갑에 트래킹화까지 신은 차림이었지. 그럼 뭐 해? 그 무엇도 강원도의 눈길에서 날 보호해줄 수 없었는데. 엉덩이는 시리고, 어떻게든 버티려고 디딘 손목은 점점 시큰해져. 난 알아. 이게 겨울이야. 한걸음만 실수해도 어딘가엔 금이 가. 엉덩이뼈 아니면 빙판에라도.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내 마음? 예끼, 이 사람아. 몸이 아픈데 왜 마음 생각을 하나.
쿵, 차가운 얼음장에 사정없이 내던져지던 그때, 출렁이는 뱃살을 느꼈어. 위로 올라갔다 철썩, 돌아오던 살덩어리(시소 탈 때, 떨어질 곳이 있어 다이빙할 때, 놓친 버스 잡으러 전속력으로 달릴 때, 그런 때 들려오는 철썩, 철썩, 철썩 파도 소리).
지금은 겨울이고, 나는 111근이야. 내 뱃살은 참치나 대방어처럼 제철이야. 아까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았을 몸속 장기들을 떠올렸어. 8센티미터 그리고 또 합쳐서 8센티미터라는 자궁근종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살덩어리 문제인데, 너는 왜 자꾸 마음 생각을 하냐고.
의사들은 자꾸 임신 계획이 있냐고 물어. 없다거나 모르겠다고 하면 “그래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해. 당신들이 봤잖아. 지금 내가 뱃속에 품은 건 근종들인데. 난 뭘 낳은 적이 없어. 그런데 뭔가를 낳아봐야 한다면, 자궁근종을 낳고 싶어. 8센티미터와 8센티미터로 이루어진 쌍둥이 근종과 그 동생들을 줄줄이.
그게 내가 111근짜리 깃털로 변신해서 마주한 생각. 지구에 잠시 발생한 검고 어둡고 얼음으로 된 점 위에 내려앉아, 몸 안에 생긴 거무스름한 얼룩 생각. 의사랑 가까워서 목을 길게 빼고 훔쳐봐야 했던 내 골반의 측면 사진은 멀리서 본 얼음호수 같았어. 세개의 우묵한 호수 그리고 척추로 된 등고선. 혹은 우주선에 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여정을 시작한 사람이 내려다보는 지구 같기도 했어. 검고 흰 지구의 얼룩
뭘 먹고 이렇게 컸어? 내가 물으면 내 몸은 아무 답이 없는데 사람들이 끼어들어 내 근종에 대해 말한다. 너 밀가루 좋아해서, 평소에 두유 마셔서, 석류나 홍삼 먹어서. 이상하다. 지상의 음식들을 먹었는데 나는 언제 이렇게 지하로 끌려와 있나. 근종을 발견하고, 수술을 예약한 뒤로 가끔 눈앞에 모르는데 알 것 같은 어둠이 펼쳐질 때가 있다. 올라가는 줄 알고 탄 엘리베이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지하층으로 안내한 것처럼, 부드럽게.
그럼 나는 몸속의 어둠에 대고 이렇게 불러보기로 한다
어이, 근종(어이—어이—).
여자들은 석류 조심해야 돼. 페르세포네 언니한테 못 들었어
근데 석류가 문제인 거면, 너도 페르세포네처럼 살아가면 안 될까? 봄여름엔 꽃향기 맡고, 헤엄도 치고, 가을엔 산도 탔다가, 겨울엔 따뜻한 몸속에 잠깐 들어오는 거지. 괜찮아. 의사선생님이 나한테 “아픈 걸 잘 참으셨네요”라고 했거든. 같이 오래 살았으니, 한 계절만 있겠다면 감지덕지지.
배꼽도 안 째고 수술도 안 받고 싶다
그게 내가 서울 가는 버스 놓칠까봐 헐레벌떡 일어나 바삐 걸으며 한 생각(철썩 철썩 철썩).
김근종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글을 씁니다
어이, 근종
나다 김보나
그래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말고 좀
작아져줄 수 있겠나 근데 작아져도 어차피
째야 한다아이가 그러니까 좀
나가줄 수 있겠나 부부싸움하는 어른들처럼 세간살이 다 때려 부수지는
말고 그래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빚진 어디 집처럼, 눈 감았다 떴더니 감쪽같이 내뺀 어느 집처럼, 그래 그렇게 야반도주해줄 수는 없겠나 그래
내 몸에 로봇 들이지 말고(그래)
인간 손목처럼 섬세하게 움직인다는 로봇 팔 두개 배꼽 째고 들어와서 원래는 표주박만 하다는 내 자궁 육쪽마늘마냥 둘러싼 그래 니한테 칼질하게 하지 말고(좋다!)
그래 뱃속에서 자꾸 찌리찌리 하지 말고
그래 나 수술실 침대에 또 눕게 하지 말고
그래 “널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우리 엄마 그런 말 하게 하지 말고 나보다 작은 엄마가 나 얼싸안고 등 두드리게 하지 말고
늘 말이 없던 우리 아빠 언제나처럼 “그래 잘하고 온나” 마른손으로 내 손 한번 쥐고 등 돌리게 하지 말고(그래, 가라)
그래 안 되겠나?(니 집에 가라, 이제)
니도 나라서
성질머리 한번 옴팡지게 부리고 나가야겠다고?
(너는 왜 생일 때마다 아프니) ← 이건 엄마가 한 말
(그러니까 마음을 좀 곱게 써 평소에)
← 이건 제 친오빠의 말입니다
그래
니 어디 한번 해봐라
내 김씨 집안 장녀다(여긴 내 집이다!)
근데 내 사투리 좀 하네?
아마 대구 살다 올라온 아빠 피가 흘러서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거는 현대차 다니는 남자랑 결혼한 울산 큰이모 말투랑 닮은 거 같았고요
그래, 안 되겠다고?
그래, 그럼 내가 너 한번 낳아볼게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이
안 그래도 시가 레드오션인데
같은 근종 있는 사람들끼리
별 다섯개 주고 그래서
아 이 시 좋다!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 몸을 뒤트니 밝은 빛
수술실 뷰네요
그리고 잘려나간 근종이 손바닥 위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근종 시점에선 모든 것이 백지입니다. 막 나왔거든요.
근종에게 이름을 지어줍시다. 어? 근종도 사람 이름이라고 하네요. 김근종. 보나가 김씨니까 김근종입니다. 근종은 근절해야 하나? 왜 생겼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따뜻한 뱃속이었어요.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을까요? 그래서 자꾸자꾸 커지고 징징거렸습니다. 자궁을 둘러싸고 방광을 누를 때까지요. 족히 8센티미터가 될 때까지요. 의사선생님이 어 이건 너무 큰데? 깜짝 놀랄 때까지요. 그래서 보나가 근종을 알게 됐습니다. 근종은 기뻤을까요?(기뻤니?) 근종은 기쁨 몰라. 근종은 네 마음도 몰라. 근종에 대해 알아봅시다. 근종은 여자한테만 생깁니까? 근종은 노래를 좋아합니까? 자장가도 한번 안 불러줬는데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근종은 멋있습니까? 잘 자랐는데 자랑할 곳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긴 했는데 자랑하긴 좀 그러니까 글로 남겨줍시다. 이렇게까지 잘 자랄 줄은 몰랐어요. 서러워 말아요. 잘 가요 근종. 김근종.
어 간다,
보자 어디까지 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