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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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김상희 金相希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202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nagi2001@naver.com

 

 

두나

 

 

두나는 닦는다.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책상을 닦고 싱크대를 닦는다. 닦고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굴로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없는 먼지를 닦는다. 인간이 되자, 인간이 되자 두나에게 말하면 두나는 금세 투명해진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닦여버린다. 지워져버린다. 나는 두나를 사랑해서 매일 밤 고전소설을 읽어준다. 아름답지? 두나의 눈알이 깜빡거린다. 나는 두나를 사랑해서 주말마다 전시회에 데려간다. 두나, 두나? 부르면 두나는 전시관의 벽을 타고 올라 창문에 낀 먼지를 닦는다. 전시관 벽에 있는 두나의 두발을 잡고 끌어내린다. 두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는다. 플라스틱 일회용 컵을 줍는다. 씹다 만 껌을 뭉쳐놓은 종이를 줍는다. 인간이 되자, 인간이 되자, 중얼거려도 두나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어느 밤 두나와 손잡고 산책한다. 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도시. 로드킬당한 짐승을 피해 걷는 밤의 발걸음들. 두나의 컨트롤러 안의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두나에게 물어볼까? 두나, 지구는 무엇이야? 그렇게 물어보면 두나는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대답을 내놓을까? 거실에 놓인 꽃병을 닦다가 꽃 냄새를 맡는 두나. 아니다. 꽃 위에 쌓인 먼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두나를 불러서 두나는 두나가 된 것인데 내가 두나를 부르지 않으면 두나는 두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나의 어깨를 붙잡는다. 새로운 종과 처음 닿는 것처럼 깜짝 놀라 두나를 본다. 나는 두나를 놓친다. 두나는 더 멀리 간다. 두나 없는 두나가 고개를 든다. 두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구적인 면모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생각한다 그 언니는 왜 자살을 했을까? 이 라텍스 매트리스는 오년 전 자취를 시작하면서 구매했다 그 언니의 추천이었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이 라텍스 매트리스는 가장자리에 앉아 있으면 꺼지기 시작하는데

 

꺼지다가 천천히 꺼지다가 계속해서 꺼지다가 가장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나도록 하는 그런 느낌 이런 사람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사람을 몰다가 천천히 몰다가 계속해서 몰다가 손도 안 쓰고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의 가장자리에 서서 생각한다 그 언니가 올해 몇살이더라? 올해부터는 그 언니의 나이를 세지 않기로 한다 이제는 언니가 아니다 나보다 동생이 되었다 그애는, 걔는,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언니의 이름이 뭐였지 발음을 잃어버린 입술이 바닥을 기어다닌다 그런데 방의 정확한 가장자리는 어디일까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서 있던 곳도 가장자리인 적은 없을까 그래서 넘어져버린 적은 없을까 까치발로 아슬아슬하게 서서 생각한다

 

골목의 가장자리에 서서 생각한다 그 언니와 이 까페를 왔었지 그 언니는 지구적인 면모를 갖추고 싶다고 말했지 그 언니의 신혼집에 한번 간 적이 있다 서울 외곽 동네에 있는 분리형 원룸이었다 그 남편이 싫어서 금방 일어나 현관 턱에 발을 걸치고 그 언니에게 말했다 이만 가볼게 어설프게 앉아 있던 그 언니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매일 해오던 인사를 수행했을 뿐인데 문을 열고 나가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에는 행동이 없다 그 언니는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눈물을 닦지 않는다 이제는 그 순간 그 언니가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지구의 가장자리에 서서 생각한다 무엇인가 지나가고 있다 달라지고 있다 그 언니의 느린 인사와는 관계없는 서글플 만큼 어린 소녀가 모퉁이를 돌아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지구적인 면모를 갖춘 소녀다 나를 보며 웃을 줄 아는 소녀다 그 뜀박질에는 능력이 없다 의식도 없다 그저 지나갈 뿐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인데 나는 가장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소녀를 바라볼 뿐이다 행동이 없는 감정이 볼을 찢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