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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유선혜 柳善惠
1998년 서울 출생. 202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모텔과 나방』 등이 있음.
seonhyeyoo07@gmail.com
내가 원하는 소설
서점의 냄새로 향수를 만들 생각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결말의 소설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런 것 말고
내가 원하는 소설은
소설을 훔치는 여자에 관한 소설
그녀는 주로 아무렇게나 지낸다
자신이 훔친 소설의 내용은 모른다
놀랍지 않은 반전이 과장된 대사와 절묘히 섞인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훔친 소설이든 그녀가 나오는 소설이든
내용은 중요치 않다 그런 것 말고
그녀가 원하는 건
동물, 사랑, 지구, 인류, 사별, 가족
그런 것 말고, 그런 것 말고……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닌
훔쳐온 세상
그녀의 것은 아닌
그녀의 문제는 쉽게 도망치는 경향
쫓긴다고 생각하는 비합리적인 불안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유약함
그런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건
소설을 훔치는 여자가 사실 소설을 훔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설
그녀는 결국 이 서점에 다시 오게 된다
손톱 옆의 거스러미처럼
잡아 뜯으면 피가 나지만 아무렇게나 두기 힘든 마음 때문에
모국어로 가득 찬 이곳을 견디기에는 너무 빈약한 마음 때문에
나의 문제는
모든 것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경향
무엇도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나쁜 습관
해피엔딩은 지루하고 주제넘은 일이라는 강박
우리는 언제나 제값을 주고 소설을 구매했었지
서점을 나올 때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고
훔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러 오기를 영원히 반복할 것 같다
이건 새드엔딩은 아니다
유혹하는 글쓰기
시련을 만들어보세요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짐승을 기다리는 함정 같은 불행을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인물을 만들어보세요
청첩장 모임의 가십거리로는 훌륭하지만 뉴스에 나올 정도는 아닌 딱 알맞은 익힘의 사건에 던져질 적당한 인물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법하면서도 주위에서는 찾기 힘들고 그렇기에 현대사회가 은폐한 폭력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슬픔처럼 읽힐 만한 인물을요
아직 이름을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완벽한 시련이 있고 그 구덩이에 밀어넣을 사냥감 같은
인물 이전에
섬세히 마련된 비극이 있어야죠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주변인의 자살이나 사소하지만 인격 형성에는 중요한 영향을 미친 가정의 불화처럼 유년 시절에 느낀 계급적 열등감이나 말 못할 정체성의 혼란도 나쁘지 않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은 너무 평범해요
이혼 정도가 어떨까요? 아이는 없어도 되고요
거기에 거짓말처럼 들어맞는
절묘한 인물에게도
이름은 섣부릅니다
남의 인생사를 주워들은 그대로 베껴오지는 말죠 변형하고 부풀리고 끼워넣으세요 허우적대기 좋도록
직접 만들어보세요
우리의 직업윤리에 따라
손수 개발한 창의적인 고통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색다른 불행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읽는 사람들은 내심 패배를 원해요 숨겨진 이면의 의미를 원하고요 누가 봐도 망친 게임을 승리라고 끼워 맞추며 쾌감을 느끼죠
아, 인간이여!
(사실은 인물이여!)
해석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덫에 걸려 다리가 찢어지고 피가 나도 처연한 청설모처럼 굴지 않을 인물, 절망 속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듯이 구는 인물, 당신과 닮았지만 당신이라고 확신하기엔 애매한 인물, 뇌에 전기 자극을 받는 실험 쥐처럼 슬픔을 시뮬레이션할
인물을
만들어보세요
극복과 고난과 극복과 고난과 극복과 고난 후에도
끝내 숨이 붙어 있을 인물을
완성했나요?
이제 이름을 정해보세요
(당신 이름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