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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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이하윤 李霞玧

2004년 서울 출생. 2023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hayun0124@naver.com

 

 

빛이 만나는 자리에

 

 

먼 나라에 사는 네가 잊지 않고 절기를 알려주어서

우리 집 화단은 매번 무사하다

 

너는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향신료와 유명한 건축물이 양각된 마그넷 같은 것과 이름 모를 식물이 심어진 크고 작은 화분을 보내주기도 하는데

 

그런 건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아니다

 

누군가 노크를 하고

나는 화분이 든 상자를 받아들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잘 지내? 묻고

돌아오는 것이 있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 너도 알잖아 그런 건 여기 있으면 어떻게든 상하게 되는 거 그래서 무엇이든 깨진 채로 도착하기를 바란 적 있어 내 탓이 아니라고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버리러 가고 싶었어

 

말하기도 전에 손끝에서 맥이 뛰고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아 나는 두 손으로 화분을 쥔다 차갑다

 

괜찮아진다

 

안도 밖도 아닌

빛이 만나는 자리에 화분을 둔다 너무 밝아서 잠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처럼

먼 나라에 사는 네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다

 

네가 선물한 잼 먹지 않고 찬장에 넣어두었다가 일년이 지났다는 말 아직 버리지 못해서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말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한다

 

화단에선 내가 심은 적 없는 식물이 자라고

아침에는 스스로 몸에 물방울을 맺히게 하는 방식으로 수십개의 화단을 품는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거기엔 슬프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덧붙이지 않고 커다랗게

 

너는 결국 감기처럼 가벼운, 그러니까 너를 아주 아프게 하지도 편안하게 하지도 않을 질병에 걸렸다는 적당한 이유로 이곳에 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런 일화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문 앞에 놓일 낯선 것들을 기다린다

 

 

 

단차

 

 

손톱이 자꾸만 부러진다

 

옷깃에 붙고 안감에 붙어 곳곳이 상처인데

이런 건 꼭 어둠 속에 있거나 숨소리가 전부일 때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더이상 아주 작고 날카롭고 치밀하게 도래하는 무언가를

징조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건

 

자신의 몸을 녹이며

보이지 않는 것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양초와

 

공포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에 앉아 두 눈을 가리면서도

비상구로 뛰쳐나가지 않는 몸의 따뜻함 같은 것이지

 

영화 속 주인공이 새로 이사한 집에서 짐을 정리한다

잠시 평화로움이 지속된다

 

지금이야 눈을 떠

눈을 떠

 

곳곳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그들의 말대로 지금은 무엇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활보하는 시체도 죽은 자의 혼이 깃든 사물도 복수심 가득한 사람도

 

하지만 그걸 보지 않는다면……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뜻일까

 

한번 태어난 빛은 사라지지 않고

끝에 다다를 때까지 멀리 간다고 한다

 

어떤 일의 발생을 우리는 곧장 알아차릴 수 없고

 

스크린 안과 밖에서 이편과 저편에서

서로 다른 불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진짜지

 

너와 나는 이렇게나 가까운데

먼 곳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

자꾸만 되물었다

 

그때마다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의 입모양을 오래도록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