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신예시인선
조성래 趙成來
1992년 경남 마산 출생. 202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천국어 사전』 등이 있음.
dotlinego@naver.com
나주
관군에 패배한 전봉준은 나주목사와 협상하기 위하여 서성문으로 들어섰다
서성문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시상식 끝나고, 낮술하고
펄펄 날리는 눈 구경하며 박시인과 걷는데
일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 같다
하천 너머 나주고등학교가 보이는 곳
마리아의 구원방주 서늘한 경당이 있는 곳
어릴 적 어느날 인터넷에 떠돌던 사진
피눈물 흘리는 마리아 동상을 보고
아버지 작심하시고
직접 가족을 이끌고 찾아왔던 곳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성체(聖體)의 기적을
믿게 되신 곳, 가시 면류관 쓰고
이마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교주의 고통을 제 아픔처럼 느끼게 되신 곳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텐데
당신은 그렇게도 믿음이 없냐고
어머닐 다그치며 월급을 고스란히
나주(羅州)라는
자신만의 천국으로 불태워 올려 보냈던
온 집 안이 타오르던 연기,
거실에서 풍겨오는 그의 궤변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뛰쳐나와서는
야 이 개새끼야! 소리쳤다
엉켜 뒹굴다 깔린 채로 두들겨 맞았다
뒤에서 열네살 동생이
우산 끝으로 그를 찍어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투명인간처럼 조용히
금속공장과 집만 들락거리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십오년 후,
그 패전의 도시, 눈 내리는 나주에
상 받으러 왔다
오늘 받은 일천만원은
대체 무슨 돈인가
그날의 매캐한 연기 하늘로 오르더니
오늘은 그 하늘에서
펄펄 눈이 쏟아진다
하얀 서성문 앞에서
나는 나의 기억들과
이제 타협하고 싶은 걸까
관군과 협상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왔던 패장 녹두처럼
깃발도 없이, 눈보라 속을 걸으며
여전히 아름답다고, 마음 깊이 느끼며
비닐하우스 성전의 철야기도회
마치고 내려와
온 가족이 함께
새벽 아침 곰탕과 순댓국 먹던 곳
가끔,
그걸 다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걸
누르고
눌러왔다가
오늘은 박시인과
친구 건훈
유일하게 와준 두 사람과 먹는다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단풍잎 가득한 마로니에공원
가족과 함께 백일장
머지않은 날 헤어질 아버지
이어폰 한쪽 달라 하시더니
내가 듣는 음악을
조용히 함께 듣는 것이었다
손톱만 한 디지털 화면으로
점박이 글자들이 천천히 지나갔다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Mozart.mp3………………………………
스무해가 지난 오늘 까페에서
그 음악 흘러나온다
이제는 이 곡이 바흐의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날의 음악은 그곳에서
영원히 모차르트의 것,
누구도 그 장면을 수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