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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조온윤 曺溫潤
1993년 광주 출생.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햇볕 쬐기』 『자꾸만 꿈을 꾸자』 등이 있음.
onewnx@naver.com
종이의 친구
나 온통 종이로 덮인 방 안에서
종이로 만든 책상 앞 종이로 만든 의자에 앉아
네게 편지를 쓴다
쓴다고 했지만, 여기선 펜을 사용하지 않아
종이를 오려 붙이면 글자가 되거든
필체를 알 수 없으니, 어쩌면 내가 아닐지도
협박범의 수상한 편지처럼
알록달록한 글씨가 섬찟한 말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종이의 매일, 종이의 기분, 종이의 친구
이것 봐, 나야
이런 말을 쓰는 건 오직 나밖에 없잖니
나 너를 기다리면서 갱지에 담긴 세간(世間)을 읽는다
간밤의 교신을 이렇게 얇고도 가벼운 평면 위에 전부
옮길 수 있다는 게 멋지지 않니
점과 선과 면만으로 물정을 배우는 게 기특하지 않니
이것 좀 봐, 도쿄의 올림픽 선수들은
종이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데
밤이면 골판지에 납작 적혀 있는 기분일지도
꿈에 높이 뛰어오르는 무릎을 아코디언처럼 접을지도
이름 없는 공작원들은 비밀리에 모난 종이를
무기로 만드는 연습을 한다는데
종이접기를 배우는 학생들처럼
어느 볕 드는 강의실에 귀엽게 둘러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 속에 나 너를 기다리면서
종이접기의 신이라고 불리는 고수가 티브이에 나와
종이로 지구 접는 법을 시연하는 걸 봤다
세상 같은 건 쉰여섯번만 반으로 접으면
주머니에 넣어버릴 수 있다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나 그 말이 허풍이 아닌 것 같아서
손바닥만 하게 포개진 세상 전부를 떠올리니 무섭고
가여웠다
너도 그렇지 않니
너 침묵만 가득 적힌 쪽지를 받아본 적 있잖아
네게 말을 줄 친구가 필요해서 거기에
눈과 코와 입을 그려주고 사람을 접어본 적 있잖아
그러니
언젠가 주머니 속 나를 꺼내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펼쳐줄 거지?
너의 마음을 오리고 접어 나를 만드는 법을
잊지 않을 거지?
나 시간의 입체를 모르니, 종이의 친구는 그때까지
얌전한 평면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온통 종이로 만든 벽
종이로 만든 창문과
종이로 만든 자동차
종이로 만든 새
기특하지, 그 새는 날갯짓은 하지 않지만
바람이 불면 멀리로 날아갈 거야
빨강의 자리
모든 진실은 빨강으로 적어둘게
그러니까 너는
빨간색 셀로판지를 두 눈에 쓰고
모호한 현상 속에 온실처럼 살아가든지
네 것이 아닌 핏자국일랑 지워버리든지
그게 아니라면 맨눈으로
밖을 바라봐도 좋아
이따금 시린 빛에 얻어맞아 생긴 잔상이
푸른 멍처럼 아프게 머물겠지만
네가 밟고 서 있는 하얀 모래밭이
오래전 장밋빛으로 물든 적이 있다는 걸
네게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들이
한때 피 흘리며 살아 있었다는 걸 그래도
알고 있는 게 낫지 않겠니
스스로 색맹 속으로 걸어들어간 사람은
너무 간절한 말들엔 색깔이 스민다는 것도
네가 유령이라 여기던 존재들이
실은 붉은 수의를 입고 있기 때문이란 것도
믿지 못하겠지만
반구를 돌아온 개기일식을 보려고
창가로 몰려드는 아이들
모두들 셀로판지를 눈에 가져다 댈 때
먼 나라에서는 유령의 장난처럼
투명한 깃발만 나부끼고 있겠지
추악도 학살도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도
빨강으로 써둘게
맨눈으로 그걸 읽고 멀어버리든지
그래서
그 빛을 네 눈 속에 아주 간직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