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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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한여진 韓汝眞

1990년 서울 출생.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등이 있음.

hotdolsotbob@naver.com

 

 

자수

 

 

바늘은 푸른 비단을 관통한다

늙은 매화나무 두그루가 한숨을 내쉬고

다섯마리 잉어는 곧 아홉마리가 된다

 

술래잡기하는 아이처럼

바늘을 피해

저 깊은 잠 속으로 펄떡이는

백년 동안의 기다림

백년 동안의 비밀

 

조금만 기다려 형님……

아, 오밤중에 누군가 텔레비전 앞에서 잠든 모양이야

지지직거리는 은하수

별이 돌고 또 돌아

어느날 별은 끔찍하리만큼 저 멀리에 있어

어느날 별은 내 비단 속에 떨어져

어느날 별은 나와 함께 소멸해

 

듣고 있어 형님?

 

지난 동짓날 손가락을 찔린 형님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형님을 찔렀던 그 바늘로 달을 풀고 해를 새겨넣어

그러면서 생각해 저고리 하나 달랑 들고

산 넘고 물 건너 시집온 우리의 그 긴긴 세월

 

형님이 평생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눈 좀 떠봐 비단이 넓어

나 혼자로는

도무지

정말……

자꾸만 눈이 감겨와

 

지금도 어느 은하수는 소멸하고

어느 별은 태어나는 중이래

 

형님을 몰랐지

열아홉살의 증명사진, 구멍 난 양말, 홀로 들어간 겨울숲

스러져간 꿈, 타오르던 슬픔과 파도처럼 덮쳐오던 잠

 

그때 가본 적도 없는 마을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어

그 눈빛이 아직도 겨울숲에 홀로 묶여 있는 것 같아서

당신에게 내 사랑을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네

 

종소리가 잦아들면

깊은 침묵이 있어

침묵 다음에는 깊은 밤

다음에는 더 깊은 밤

 

조심해 앞에는 구덩이야

별이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파놓았어

다 끝나면 우리가 나란히 누울 자리야 형님

 

정각에 출발하는 기차를 놓쳤던 날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형님은 내 옆에

우리는 다정히 손을 잡고 있었겠지

 

밤은 깊고 비단은 넓고 답해줄 사람은 없네

이거 다 수놓고 나면 형님이 눈을 뜨려나

나, 형님에게로 가고 있어

 

빨간 피 한방울 도로록 마루 위를 구른다

그 속에서 놓친 줄 알았던 잉어들 유유히 헤엄치고

바람에 떠밀린 꽃잎 하나 나풀거리며

영원히 지상으로 내려앉지 않는다

 

 

 

연착

 

 

기차는 눈의 도시를 통과하는 중이다

새하얀 빛에 눈이 멀어 비상유리창을 깬다

여우색시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야?

 

네가 출발한 곳으로부터 백년이 흘렀지

 

눈 덮인 하얀 들판 아래 어제의 낙엽이 죽어 있다 그 위를 명랑하게 걷던 사람들도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눈 위로 뛰어든다 풍덩이며 파도가 인다 겨울잠을 자던 잉어가 놀라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덜컹이며 기차가 잠시 멈출 때

단꿈에서 깬다

 

모든 빛은 과거의 것

그러니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기차가 정시에 도착해도

거기 네가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소멸하지 않고 그 빛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