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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등단. 소설집 『행복』 『봄빛』『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방울방울

 

 

첫 호흡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였다. 그럼에도 당신은 오래 도록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나는 서글 펐던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였다. 오히려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나에게 잠식당해가는 당신이 안타까울 때가 더 많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장악하고 있다. 당신과 나는 이미 한몸이나 다름없다. 당신은 지난밤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기 전에 잠들었다. 기나긴 잠에 들었다고 생각할 테지만 꿈도 없는 당신의 잠은 나에게 이르는 마지막 여정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꿈을 꾸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마지막 꿈을 기억하는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당신이 구순의 노파였던 어느 봄날, 섬진강 변의 벚나무가 혼곤한 꿈같은 꽃송이들을 종일 흩뿌리고 있었다. 벚꽃길에서 백 미터 남 짓 떨어진 당신의 창가에도 바람에 떠밀린 꽃잎들이 살랑거렸다. 당신은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으나 그 기억은 무좀 걸린 엄지발톱처럼 두꺼워진 무의식의 표면을 끝내 뚫고 나오지 못했다. 아기 살결 같은 만월의 보얀 빛이 천지만물을 고루 비추는 밤, 젊은 당신이라면 잠을 떨치고 밤사이를 훌훌 걸어 새 옷인 양 달빛을 두르고 싶었을 터였다. 그러나 만월의 빛도 낙화의 서글픔도 더는 당신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당신은 아스라한 어떤 기억의 표면만 어루만지다 쉽게 잠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 밤, 당신은 마지막 꿈을 꾸었다.

복사꽃이 비처럼 흩뿌리는 만월의 밤, 갈래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소녀가 세살배기 사내아이를 포대기에 업은 채 쉬지 않고 꽃을 떨구는 복숭아나무 아래를 밤새도록 서성거린다. 만월이 느릿느릿 계곡을 건너 뒷산으로 흘러간다. 사내아이의 보얀 뺨에 아이의 살결처럼 보얀 복사꽃 한송이가 내려앉는다. 차갑기도 하고 촉촉하기도 한 감촉 때문인지 아이가 자지러지는 울음 을 터뜨린다. 그 밤 내내, 소녀는 아이의 울음과 만월의 빛과 수북한 복사꽃의 잔해를 밟으며 걷고 또 걷는다.

그 꿈은 나의 작은 선물이었다. 당신이 잠들기 전 오래 어루만졌으나 끝내 떠올리지 못한 그 기억은 이미 내가 삼켜 나의 일부가 된 지 오래였다. 당신이 잠든 동안에도 쉼 없이 흩날리는 벚꽃에 흔들림 없는 나의 마음이 잠시 심란하였던가. 나는 내가 삼킨 기억의 일부를 당신의 꿈으로 흘려보냈더랬다. 당신이 복사꽃 흩날리던 그 밤을 기억조차 못하면서도 못내 포기하지 못하고 더듬거린 것은 그날 당신의 창가에 흩날린 벚꽃이 복사꽃과 거의 흡사해서였다.

어미를 제물 삼아 태어난 당신의 막냇동생은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어미는 그 아이를 낳자마자 폭포처럼 피를 쏟고 죽었다. 핏덩이 속에서 건져 낸 아이는 제 어미의 피 냄새, 그러니까 죽음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온몸에 각인시켰다. 당신은 아이가 울음을 그칠까 싶어 복사꽃 흩날리는 마을 뒷길로 향했던 것이지만 그 꽃길은 아이에게 죽음의 냄새 진동하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낙하하는 꽃잎 하나하나가 내뿜는 죽음의 기운을 아이는 느낄 수 있었고 꽃잎 하나가 제 뺨에 달라붙었을 때 아직 이성이랄 것도 없던 아이는 그것을 제 코앞까지 닥쳐온 죽음이라 받아들였다.

당신은 그해 가을 열여섯살 나이에 시집을 갔다. 몇달 지나지 않아 막냇동생은 고작 3년, 짧은 생에 작별을 고했다. 죽음이 뭔지 몰랐으므로, 정확하게는 삶이 뭔지 몰랐으므로 동생은 천진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조차 없었다. 잠자는 사이 느닷없이 심장이 멈추어 죽음 같은 잠에서 진짜 죽음으로 아주 간단하게 건너뛰었을 뿐이다. 그런 죽음도 흔하다. 고통 없이 생을 건너 죽음으로 이동했으니 축복받은 것인가. 사람다운 고뇌나 후회, 고통도 없이 죽음에 맞닥뜨렸으니 저주받은 것인가. 당신은 후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봉분 하나 남기지 않은 쓸쓸한 죽음이라고, 당신은 오래오래 애달파했다. 어미의 죽음을 거름 삼아 태어난 목숨이니 그만큼 질기게 잘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당신은 어미의 무덤 옆에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오열했다. 그날 당신은 하늘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인간의 생을 관장한다는 모든 것에 대한 일체의 미련을 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남은 날만 바라보며 살겠노라 굳게 다짐했지만 당신은 오래도록 동생의 그림자에 갇혀 있었다. 동생의 그림자를 걷어낸 것은 당신 아들의 죽음이었다.

결혼 후 남들보다 늦게 얻은 당신 아들은 일찍 죽은 막냇동생을 쏙 빼닮았다. 그래서 키우는 내내 당신은 가슴을 졸였다. 본 적 없는 삼촌과 쌍둥이처럼 닮았던 아들은 다행히 건강하게 육십년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다. 환갑잔치를 끝내고 숙면에 든 아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동생과 똑같은 심장마비였다. 그때 당신은 여든다섯이었고, 자손들은 건강을 염려하여 아들의 죽음을 당신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들이 일년 넘게 찾아오지 않았을 때에야 당신은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무렵 유난히 자주 찾아오던 딸에게 당신은 불쑥 물었다.

워치케 갔냐?

뜬금없는 질문을 딸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다가. 아픈 줄도 몰랐을 거야. 가는 줄도 몰랐을 거야. 남은 사람 걱정할 새도 없었을 거야.

그러면 됐다는 듯이,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이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 시는 아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여든여섯해를 살면서 당신은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애달픈 죽음, 시원코 잘됐다 싶은 죽음, 예기한 죽음, 예기치 않은 죽음, 타인에 의한 죽음, 스스로 선택한 죽음. 죽음의 방식은 달랐지만 죽었다는 결과만큼은 평등했다. 어떻게 죽든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게 당신이 아는 세상사의 유일한 진리였다. 게다가 당신은 여든여 섯,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웠지만 그런 사람치고 명은 질기디질겨 여태 살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있을 죽음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와주기를 당신은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에게는 쉽게도 찾아오는 죽음이 당신에게만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당신의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 다. 겨우 마흔하나,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던 남편의 배가 만삭의 임신부처럼 부풀어올랐다. 읍내 병원에 갔더니 청진기만 대보고는 위암인데 이미 복수가 차서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진통제 한대만 맞고 돌아온 며칠 뒤 남편 은 대들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전날 당신은 논을 팔아서라도 큰 병원에 가보자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남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남편은 자식들 대학 보내는 게 유일한 꿈이었다. 그때 아들은 열다섯, 아들을 낳은 뒤로 영 소식이 없다 마흔에 겨우 얻은 딸은 돌을 두달 앞두고 있었다.

기왕 죽음을 앞둔 남편이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이 심했을 수도 있고 고통에 먹힌 자신이 자식들 교육 밑천인 논을 제 손으로 팔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죽음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오만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남편 목에 묶인 밧줄을 직접 풀었고 복수가 가득 찬 시신이 당신을 덮쳤다. 그 무게 탓에 아직 수유 중이던 당신의 가슴에서 젖이 뿜어져나와 앞섶을 적셨다. 주검이 어린 딸의 생명수인 젖을 뿜게 하다니. 당신은 그것을 살아야 한다는 남편의 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살았다. 그래도 그날 경험한 시신의 무게는 평생 당신을 짓눌렀다. 십칠년 한 이불 덮고 살아온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그 무게만큼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만 참아주지. 그랬더라면 평생 애달파하기만 했을 테지. 누군가의 자살은 가까운 사람들을 파괴시킨다.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책,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서글픔. 당신은 남편이 떠난 뒤로 사람들과 관계맺을 때마다 동동거렸다. 남편의 느닷없는 선택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봐. 자식들을 대할 때조차 당신은 늘 조바심이 났다. 이 아이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내가 제대로 짚은 걸까.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걸까. 남편이 가고 난 뒤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게 당신의 습관이 되었다. 아무리 죽고 싶어도 혼자 남을 딸에게 그런 상처를 남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당신은 견뎠다. 억겁처럼 길고 긴 하루를. 그런 하루들이 쌓여 어느새 십수년이 지났다는 것을, 당신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 세월, 당신은 살아 있었던 것인가, 죽어 있었던 것인가.

당신의 시간은 아흔에서 멈췄다. 젊어서부터 앓은 척추협착증 때문에 당신은 여든일곱부터 눕지도 앉지도 못했다. 밭일은 그전에 멈췄다. 더이상 장을 담그지 않게 된 것은 그 몇년 전이다. 보다 못한 딸이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귀향했다. 딸이 지극정성으로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신경차단시술을 시켜준 덕에 누워 잠은 잘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난 듯하자 딸은 당신을 위해 별채를 지었다. 바람 숭숭 드나드는 본채와 달리 두툼한 단열재를 쓰고 편백나무로 마감을 한, 당신이 경험해본 적 없는 최고의 집이었다.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올 뿐만 아니라 바닥 난방이 되는 욕실까지 딸린, 수고로웠던 평생에 대한 보상인 듯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딸은 당신이 행여 또 아플세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당신은 밥을 할 필요도, 세탁기를 돌릴 필요도, 방을 쓸고 닦을 필요도 없었다. 딸이 해주는 밥을 먹고, 간식을 먹고, 딸이 빨아 온 새 옷을 입었다. 당신의 노쇠한 뇌는 하지 않게 된 것들을 금세 잊었다. 밥솥이나 가스레인지 켜는 법을 잊었고, 세탁기 돌리는 법을 잊었고, 마침내는 보일러 켜는 법도 잊었다. 언젠가부터 당신은 산수화 속의 한그루 늙은 고목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은 오래 만나지 않은 사람도 잊었다. 평생 애달프던 동생의 죽음도, 평생 어깨 짓누르던 남편의 죽음도 잊었다. 당신만 그들을 잊은 게 아니다. 당신과 오래 함께한 친척이며 이웃 대부분은 죽음으로 당신을 잊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몇은 당신을 찾아올 기력이 없거나 기억이 없다. 당신과 사소한 시간을 나눈 젊은이들, 그러니까 아들과 딸의 자손들은 바쁜 일상에 치여 당신을 기억해낼 시간이 없거나 찾아올 시간이 없다. 약이 다한 시계처럼 어느 순간 멈춰 선 당신의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그제야 당신은 희미하게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때로 당신은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한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완전히 삼키지 않는 것은, 아니 삼키지 못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죽음과 같은 잠 속에 있다. 잠인지 죽음인지 분간조차 하지 못한 채로. 눈을 뜨지 못하면 죽음일 테고 눈을 뜨면 잠이었을 터이다. 미 명을 뚫고 다가오는 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올해 환갑을 맞은 당신의 딸이다. 딸의 심장은 아들과 달리 튼튼하여 발소리보다 먼저 새벽의 고요를 휘젓는다. 당신은 늘 잠들어 있어 딸의 아침을 알지 못한다. 당신의 딸은 새벽 여섯시, 시계보다 정확하게 번쩍 눈을 뜬다. 당신에게로 온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딸의 몸은 스스로 시계가 되었다. 잠의 기운을 순식간에 떨쳐낸 딸은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커피포트의 전원을 누른 뒤 냉장고에서 경옥고를 꺼내 나무스푼으로 한숟가락 컵에 덜어낸다. 그러고는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그사이 이미 끓은 물은 안성맞춤으로 식어 있다. 암환자들에게 튜브로 공급하기도 한다는 뉴케어 하나와 혈당을 올리지 않을 옛날식 보리빵 하나,

경옥고 탄 물을 들고 딸은 현관문을 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아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는 딸의 일상이다. 십년 넘게 반복되면 서 딸의 동작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

당신이 머무는 별채가 가까워올수록 딸의 걸음이 빨라진다. 불안이 엄습 해서이다. 문을 열자마자 딸은 소리친다.

엄마!

동이 훤히 튼 여름이나 사위 깜깜한 겨울이나 당신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금세 깨어날 때도, 서너번 외친 뒤에야 간신히 깨어날 때도 있 다. 한번 외쳐도 반응이 없으면 딸은 후다닥 방으로 뛰어든다.

엄마!

엄마,라는 외침이 당신을 죽음에서 건져올린다. 엄마? 요즘 당신은 어리둥절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다. 당신의 엄마를 찾는 소리다. 당신의 백년 인생에서 엄마를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었던 건 고작 십삼년이었다. 그 십삼년 간 있었던 대부분의 일을 당신은 진작 잊었다. 그런데도 엄마라는 말만은, 엄마, 소리치고 달려가 와락 달려들었던 엄마의 품만은, 그 품에서 풍기던 희미한 살냄새만은 잊지 못했다. 어쩌면 당신이 잊지 못하고 평생 그리워했던 건 그때처럼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온전히 당신의 몸과 마음을 던질 수 있 는, 엄마로 표상되는 어떤 존재 혹은 추상은 아니었을는지. 어린아이로 깨어난 당신은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머리 희끗한 딸을 보며 백살 노인으로, 딸이 아니라 엄마로 순식간에 늙는다.

우리 딸 왔능가? 엄마 보러 왔능가?

그제야 당신의 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몸을 잡아당기는 듯하여 당신은 안간힘을 쓰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무언가를 잡으면 몸을 일으키기 쉬울 테지만 낙상을 염려하여 딸이 준비한 킹사이즈 침대의 끝은 너무 멀다.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엉덩이를 조금씩 밀며 침대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 바람에 지난밤 딸이 깔아준 패드 두장이 이리저리 밀린다. 밤새 푹 젖은 기저귀 틈새로 오줌이 새고 있다는 걸 당신은 인지하지 못한다. 뇌만 늙은 게 아니다. 당신의 몸도 늙어 괄약근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오줌이 새고 있다는 걸 감지해야 할 감각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지금 당신은 모든 신경을 몸을 일으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당신은 침대와 나란히 놓여 있는 소파 끝을 붙들고 간신히 두 발로 서는 데 성공한다. 그런 당신을 딸은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다. 매정해서가 아니다. 딸은 뒤늦게 알았다. 늙은이에게서 일을 빼앗는 건 뇌를 노쇠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평생 일하느라 몸을 혹사한 당신이 안타까워 딸은 모든 일을 도맡았다. 당신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게. 처음에는 당신이 너무 늙은 뒤에야 일에서 물러나게 한 게 딸의 한이었다. 힘들어도 스스로 밥을 짓고 세탁기를 돌리게 했어야 한다고, 이제 와 당신의 딸은 후회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딸이 맨 처음 한 일은 당신의 손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빼앗는 것이었다. 딸이 에어컨을 켜두고 문을 나서면 당신은 바로 에어컨을 껐다. 훅훅 찌는 삼복더위, 온몸에 땀띠가 돋을 지경이어도. 딸이 리모컨을 치워버린 건 당신이 시원하게 여름을 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일러 전원장치를 당신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옮긴 이유도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일상에서는 찌든 가난의 냄새가 풍겼다. 그 가난을 진작 내던지게 할 만한 여유가 있었음에도 미처 살피지 못한 자신의 안일함 혹은 무신경이 여름날의 푹푹 찌는 방, 겨울날의 냉 골방에 들어설 때마다 가시가 되어 심장을 무자비하게 찔러댔으므로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당신의 딸은 당신을 노동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시킨 것이었다. 그 해방이 기억조차 해방시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당신은 평생 여름은 덥게, 겨울은 춥게 살았다. 일찍 떠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되었고, 남편의 소망대로 자식 둘을 대학에 보내야 했다. 남편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유산으로 남긴 논 열마지기가 세 식구의 유일한 미래였다. 당신은 어두컴컴한 첫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산으로 들로, 논으로 밭으로 쏘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아직 젊은 몸뚱아리의 욕망 따위 헤아릴 시간조차 없었다. 아들은 제 아비 죽기 전부터 광주 중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딸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당신 품을 떠났다. 아이들이 떠난 뒤 당신은 예사로 밥을 굶었다. 해 지는 것도 모르고 고사리나 취를 끊다 산길에서 구른 적도 여러번이었다. 한번은 대낮에도 어두침침한 대숲에서 죽순을 베다 해가 진 적이 있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지만 오랜 경험으로 당신은 알고 있었다. 허기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흐르는 시간 앞에 무릎 꿇기 마련이라는 것을. 가져간 부대 두개를 죽순으로 가득 채웠을 때는 대숲 밖까지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개울가에 위치한 대밭에서 길로 나가려면 돌뿐인 언덕을 하나 올라야 했다. 별도 달도 뜨기 전이라 사방은 그야말로 칠흑처럼 어두웠다. 당신은 죽순이 가득 찬 부대 하나를 머리에 이고 다른 부대는 오른손으로 질질 끌며 왼손으로 앞을 더듬거려 앉은뱅이걸음으로 나아갔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멩이에 발이 걸린 당신은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죽순 부대를 추스른 뒤 일어나려고 무심히 땅에 손을 짚은 당신은 사선으로 날카롭게 베인 대나무 그루터기에 손을 찔리고 말았다. 칼처럼 날카로운 그 그루터기는 쓰러진 당신의 허리에서 겨우 손 한마디 정도 떨어져 있었다. 몇 센티미터만 더 간 곳에서 쓰러졌다면 그루터기가 당신의 허리를 꿰뚫었을 터였다. 죽어도 안 죽을 목심인갑네. 당신은 혼잣말을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죽순 부대를 다시 머리에 이었다. 그날 당신은 안도했던가, 통탄했던가. 죽어도 안 죽을 목숨인 모양이라는 당신의 말이 나에게는 죽을 수도 없는 목숨이라는 말로 들렸다. 독한 당신은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피를 뚝뚝 흘리며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죽순을 삶아 껍질을 벗긴 뒤에야 작약 뿌리 갈아놓은 가루를 상처에 듬뿍 뿌리고 얇은 수건으로 감쌌을 뿐이다. 지금도 당신의 왼손바닥에 그날의 상처가 뚜렷이 남아 있다.

당신은 잊었을 것이다. 다음 날 그 죽순을 팔아 얼마를 손에 쥐었는지. 나는 기억한다. 고작 이천원. 당신은 그 돈으로 마른오징어 몇마리를 샀다. 그리고 그 밤 내내 가위로 오징어를 잘랐다. 토요일이면 돌아올 딸을 위해. 딸 이 제일 좋아하는 게 오징어채 고추장무침이었고, 딸은 오징어채가 두꺼우면 젓가락을 대지도 않았다. 다행히 왼손을 다쳐 가위질은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친 손으로 오징어를 쥐고 있어야 했다. 끙끙 앓으면서도 당신은 그 밤 내내 느릿느릿, 가위질을 끝내 멈추지는 않았다. 주말에 온 딸이 어디서 왜 다쳤느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당신은 암시랑토 않다며 빙긋 웃었을 뿐이다. 아무도 모르고 당신만 알았던 그날의 아픔을 이제 당신도 잊었으니 그날의 아픔은 존재했던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당신의 딸은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도, 그 시신이 당신의 몸을 덮쳤다는 것도 당연히 모른다. 죽음에 임박하여 자살이라 말하기도 무엇한 남편의 죽음을 당신은 단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딸은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남편을 떠나보냈는지 알 길이 없다. 남편이 떠난 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알지 못한다. 힘들었을 거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도 딸이 당신 곁으로 돌아온 것은 스스로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징어채 고추장무침 때문이었다. 딸은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신 곁을 떠나 타지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 아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당신의 오징어채 고추장무침이었 다. 어디서도 당신이 자른 것처럼 가는 오징어채를 보지 못했고, 당신이 직접 담근 것처럼 감칠맛 나는 고추장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꼭 손을 다친 그날이 아니더라도 기나긴 겨울밤이면 당신은 외로움을 잘라내듯 오징어를 잘랐고, 어린 딸은 까무룩 잠들었다 간혹 깨어 당신의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곤한 잠에 빠지곤 했다. 아침 밥상에 오를 오징어채 고추장무침 생각에 입맛을 다시면서. 그 사소한 기억이 딸을 당신 곁으로 불러들였다. 당신 또한 몰랐겠지만. 사람들도 모른다. 사소한 일들의 축적이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을. 결정적 순간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다. 사소한 것들이 인생을 바꾼다.

조금 전, 경옥고 한숟가락을 물에 풀면서 당신의 딸은 불현듯 까맣게 잊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때로 어떤 기억은 저 깊은 무의식의 바닥에 묻혀 있다가 태풍 뒤 강물이 속살을 게워내듯 느닷없이 의식의 표면으로 역류하기도 하는 법이다. 딸은 초등학교 오학년 때부터 당신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 아침마다 두유를 먹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기 전 딸은 매일 경옥고를 미 온수에 타는 게 귀찮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찰나의 생각이 죄책감을 부르고 그 죄책감이 잊힌 기억을 되살려내지 않았으려나. 이상도 하지. 사십년 넘게 떠올린 적 없는 기억이 또다른 기억을 줄줄이 소환했다. 마침내 당신의 딸은 하나의 풍경을 촘촘히 복원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당신은 콩 한줌을 물에 담근다. 당신의 껌딱지였던 딸은 그 모습을 수십, 수백번 보았다. 동도 트기 전, 딸이 깰까 조심스레 이불을 빠져나온 당신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콩을 삶는다. 입맛이 까다로운 딸은 덜 삶은 콩은 비려 역하다 하고 너무 익힌 콩은 냄새가 사라져 밍밍하다 한다. 콩을 살캉할 정도로 익히는 게 관건이다. 당신은 냄새만 맡아도 콩이 익은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삶은 콩을 플라스틱 절구에 대충 빻은 뒤 삼베주머니에 담고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부으며 몇번이고 치댄다. 콩 알갱이가 씹히는 걸 딸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콩을 치대는 동안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숭늉 그릇도 뜨거워 잡지 못하던 당신의 손은 세월 속에 단련되어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따뜻한 콩 물을 딸에게 먹이는 것으로 당신의 하루가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딸 은 아침마다 코끝에 맴돌던 갓 만든 두유의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자고 있어 보지 못했던 부엌의 풍경까지도. 그것은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왜곡일 테지만 신기하게도 딸이 복원한, 실제로는 직접 본 적 없는 이른 새벽의 부엌 풍경은 실제와 매우 흡사했다. 딸은 잊었던 기억을 되찾은 뒤 몇방울 눈물을 떨궜다. 딸만 아는 이 아침의 눈물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조차 잊혀질 테지만. 그리하여 없었던 것과 다름없을 테지만.

당신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딸도 많은 것을 잊었다. 당신이 왜 매일 두유를 만들어 먹였는지. 딸은 당신이 극성스러운 엄마라서였을 거라 짐작했으나 사실은 딸 때문이었다. 무던한 아들과 달리 딸은 욕심이 많았다. 어느날 약국집 딸이 점심으로 싸 온 흰 우유와 카스텔라가 부러웠던지 우유를 사달 라 졸랐다. 우유조차 사 먹기 힘든 시절이었다. 딸 기죽이기 싫어 당신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리점까지 가서 신선한 우유 한병을 샀다. 딸은 그 우유를 먹고 사흘 밤낮 설사를 했다. 장이 난생 처음 먹는 우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설사가 멎은 뒤부터 당신은 매일 아침 두유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유 대신 두유라도 먹이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었다. 비록 처음을 기억 해내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딸도 알았다.

딸은 당신을 모시며 뒤늦게 많은 것을 기억해냈다. 며칠 전, 딸은 제가 가꾸는 텃밭에서 어린 상추를 솎았다. 딸은 어려서부터 모든 종류의 생채를 좋아했다. 어린 상추를 물에 씻으며 딸은 여러번 당신을 떠올렸다. 조금 자란 딸이 스스로 어린 상추나 어린 열무를 씻겠노라 소매를 걷어붙일 때마다 당신은 몇번이고 일렀다.

얼둥애기 다루대끼 살살 흔들어야 풋내가 안 난다이.

잔소리라면 질색팔색하던 딸은 다 안다고 자신있게 당신의 말을 잘랐지만 매번 딸이 씻은 상추나 열무에서는 풋내가 났다. 반백이 된 딸은 당신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아이 다루듯 살살 씻었다. 역시 나 여린 잎사귀에 드문드문 상처가 났다. 무쳐놓으면 풋내가 날 게 분명했다. 엄마는 대체 어떻게 씻었던 거야! 진작 엄마 말에 귀 기울일걸, 잠시 후 회도 했으나 냉철한 딸은 금세 깨달았다. 지금의 당신에게선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반성에는 때가 중요한 법이다. 딸은 회한에 잠겨 상추를 무치고 국을 데우고 밥을 퍼 상에 앉았다. 몇젓가락 먹지도 않은 상추겉절이에 서 물이 나기 시작했다. 당신이 한 겉절이는 밥을 다 먹을 때쯤에야 물이 났다. 그 차이를 곰곰 생각하던 딸은 또 잊었던 기억을 찾아냈다. 당신과 딸이 마주한 밥상에는 자주 스테인리스 볼이 놓여 있었다. 딸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제야 당신은 상추나 열무나 오이를 무쳤다. 몇젓가락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딸은 환갑에야 알았다. 당신에게 단 한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날, 당신의 딸은 쌀보다 많은 분량의 전복을 갈아 죽을 새로 끓이고 이틀 내 곤 사골국을 차려 왔다. 당신에게 죽을 떠먹이던 그날의 딸은 유난히 살가웠다. 딸이 눈물 젖어 촉촉한 눈으로 당신의 엷은 머리카락을 몇번이고 쓰다듬을 때 당신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아이, 먼 일 있냐? 먼 일 있제?

딸은 젖은 눈으로 그냥 웃었다. 당신은 쉽게 마음을 놓았다. 예전이라면 꼬치꼬치 캐물었을 테고,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 기를 썼을 테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딸의 엄마가 아니다. 딸이 당신의 엄마다. 엄마가 괜찮다니 그러려니, 당신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당신의 딸이 보행기 앞에 우두커니 서서 당신을 기다린다. 지난 몇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어온 일상이지만 일상 따위 당신의 뇌에 어떤 자극도 되지 않는다. 오줌을 뚝뚝 떨구며 당신은 딸에게 간다. 딸이 옆으로 비켜서며 보행기 손잡이를 가리킨다. 머리 대신 몸이 기억하여 당신은 손잡이를 잡고 두 다리를 벌려 선다. 딸이 능숙한 솜씨로 기저귀를 벗긴다. 기저귀에서 오른발을 빼려는 찰나 주르륵 오줌이 샌다. 이번에는 당신도 요의를 느꼈다. 아이, 오줌 나올라근다. 화장실 댕겨와야 쓰겄다.

딸이 말없이 기저귀를 마저 벗긴다. 당신은 하의를 완전히 벗은 채 소파를 잡고 발을 옮긴다. 당신의 딸은 어려서 당신의 알몸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딸이 있을 때는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젊은 날의 당신은 그토록 정갈한 사람이었다. 오년 전만 해도 당신은 딸에게 몸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당신과 딸은 목욕을 시켜주네 마네, 손톱을 깎아주네 마네, 그런 일들로 매일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마지막으로 싸우던 날, 욕실로 끌려가던 당신은 문턱

앞에 드러누워 울음을 터뜨렸다. 딸 앞에서 울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마지막이었다.

아이, 늙었다고 사램이 아닌 중 아냐? 늙어도 사램이어야.

그러거나 말거나 매정한 딸은 당신을 답삭 안아 욕조 안에 집어넣었다. 그날 이후 당신은 급격히 기억을 잃었다. 기억을 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인간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버틸 수 있는 세월이었다. 예전의 정갈했던 당신을 야무지게 기억하고, 스스로 몸을 씻을 기력조차 없는 당신을 깨끗이 씻겨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었을 뿐인 딸은 더러울지언정 남의 손을 빌려서는 절대로 씻고 싶지 않은 당신의 자존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딸 앞에서까지 자존심을 세울 일이냐고 되레 성질을 부렸다. 어린것들은 늙은이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배웠든 못 배웠든 제가 늙어봐야 비로소 늙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식으로도 온전히 알 수 없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늙음이다.

그전까지 당신의 알몸을 본 것은 당신의 어미뿐이다. 남편조차 당신의 알몸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호롱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조심스레 당신의 몸을 더듬고 탐했으니 문풍지 사이로 스며든 달빛 아래 흐린 실루엣으로나 보았을 것이다. 남편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당신의 젊은 몸은 희디흰 치자꽃처럼 어여뻤다. 그 어여쁜 몸을 당신의 어미만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속속들이 보고 만졌다. 당신을 낳았을 때 고작 스물둘이었던 어미는 기저귀를 갈 때마다 당신의 보얀 궁둥이를 톡톡 두들기며 함빡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궁둥이는 유독 희고 둥글었다. 그때 당신의 궁둥이에서는 달큰한 젖냄새가 났고, 당신의 어미는 그 궁둥이에 얼굴을 묻은 채 킁킁 냄새를 맡거나 입술로 깨물곤 했다. 자근자근 깨무는 입술의 감촉이 따뜻하고 간지러워 당신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젖히곤 했다. 어미는 한번도 땅을 밟지 않은 당신의 야들야들한 발바닥도 사랑했다. 발바닥에 수십번 입을 맞추다 투르르르 입술을 털 때도 당신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어미의 우주였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당신이 처음 몸을 뒤집었을 때, 처음 배밀이를 했을 때, 처음 섰을 때, 처음 걸었을 때, 처음 말을 했을 때, 그 모두가 온전한 기적이었다.

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당신은 열살 때만큼 몸집이 줄어들었다. 단단히 버티고 섰던 다리는 힘이 빠져 뼈만 남았다. 토실토실 보얗던 궁둥이에도 백년의 더께가 내려앉아 거무튀튀하다. 색소가 침착된 엉덩이 골은 더욱 검다. 당신은 뼈의 구조가 훤히 보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엉덩이를 엇박으로 씰룩이며 딸이 설치해놓은 봉을 잡고 겨우 걸음을 뗀다. 걸음을 뗄 때마다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역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진다. 당신이 아이였을 때는 오줌마저 달큰했다. 갓 잡은 고등어에서는 비린내 대신 상쾌한 바다향이 난다. 싱싱한 생명은 향기를 풍긴다. 냄새가 나는 것은 죽음이 가깝기 때문이다.

당신의 딸은 침대 위의 패드를 꺼내고 그 위에 오줌 닦은 키친타월을 한 뭉치 올려놓는다. 당신의 오줌 냄새가 나날이 짙어지고 있다. 딸도 느낀다. 당신은 점점 방귀를 자주 뀌고 냄새는 더욱 독해진다. 당신의 모든 장기가 사용 연한에 임박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딸은 뒤를 따르며 당신이 떨군 오줌 방울을 물수건으로 닦고, 알코올을 뿌려 키친타월로 꼼꼼히 또 닦는다. 오줌 한방울에 눈물 한방울이 섞인다. 당신의 오줌 한방울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한방울, 그마저 장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역한 냄새를 풍기고, 딸은 죽음의 냄새를 지우듯 몇번이고 눈물을 떨궈 희석시킨 뒤 알코올로 야무지게 닦아낸다. 이미 나와 하나가 된 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은 딸 덕이다. 당신의 딸이 멱살을 잡고 당신을 죽음에서 삶으로 끌어내고 있는 덕이다. 고마워할 일인지 원망스러울 일인지 나는 모른다.

당신이 오줌을 쌌다는 좀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니다. 당신은 수치스럽다. 무언지 모르게. 사람이 아니게 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수치스럽고, 딸의 수발을 받아야 하는 몸인 것도 수치스럽고, 숨 돌릴 틈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낸 생의 기억이 거진 사라진 것도 수치스럽다. 오줌을 방울방울 떨구며 힘겨운 걸음을 내디디면서 당신은 생각한다. 이러려고 악을 악을 쓰며 살아온 것인가. 대체 인간은 왜 사는 것인가. 이러한 끝을 위하여? 제법 본질적인 질문을 하다가 당신의 노쇠한 뇌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혀를 깨물고 확 죽어버릴까, 못할 것도 없지, 생각하던 당신의 뇌는 뒤따르며 오줌을 닦고 있는 딸을 의식한다. 다시 모든 것을 잊은 것은 노쇠한 뇌의 현명한 전략이다. 딸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는 없어 당신은 잊음으로써 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잊음조차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일 뿐이다. 당신은 태어난 순간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때의 당신은 비틀거릴지언정 태어나자마자 저 홀로 걸음을 떼는 동물보다 못한 존재였다. 어미의 돌봄 덕에 당신은 살아남았다. 결혼을 하고 다른 생명을 품고 어미처럼 그 생명을 세상으로 떠나보내며 당신은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루하루 힘겹 게 살아냈으나 모든 시간이 당신의 기억에 저장되지는 않았다. 기쁘거나 슬 프거나 아프거나 사무친 어떤 순간들이, 왜 기억하는지도 모를 사소한 순간 들이 뇌리에 각인되었고, 때로는 그 기억들이 살아갈 힘이 되기도 했다. 기 억을 쌓아가는 시간이 지나자 쌓인 기억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 었다. 살아낸 시간들이 점점 무로 화하고, 아이처럼 딸의 돌봄을 받으며 당 신은 나를 향해 천천히 오고 있는 중이다. 탄생 속에 죽음의 싹이, 성장 속에 쇠퇴의 싹이, 기억 속에 망각의 싹이 내재해 있다. 백지로 태어나 백지로 돌 아가는 것, 그 순환을 온전히 끝마칠 수 있는 당신은 죽음의 축복을 받은 존 재다. 이제 당신은 백년에 걸친 기나긴 순환을 끝내려 한다.

방울방울 오줌을 흘리며 이제 막 화장실 문턱을 넘는 당신, 변기에 앉았으나 오는 길에 다 흘려 더는 나올 오줌조차 남아 있지 않은 당신. 나는 그러한 당신까지 사랑하였다. 당신과 함께하는 내내, 나는 당신의 생이 새파랗게 무성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당신의 생은 나의 것이기도 하였으니까. 무성하던 생의 기억이 잎사귀를 떨구고 줄기마저 시든 지 오래다. 심장에 박힌 마지막 생의 미련은 환갑 지난 당신의 딸, 빛바랜 미련을 오줌인 듯 방울방울 떨구며 그대, 나에게 오라. 나, 태어날 때부터 당신과 한몸이었던 나, 당신의 죽음에게로. 당신의 생명이었던 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