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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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터뷰

 

가장 따뜻한 비관주의자

 

 

성혜령 成慧玲

소설가. 소설집 『버섯 농장』등이 있음.

eve_adam@naver.com

 

 

 

겉은 버석하고 속은 축축한

 

모든 이야기에는 겉과 속이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표면에 드러난 인상과 그 안에 품고 있는 정서가 꼭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좋은 이야기는 겉과 속의 간극이 적당히 벌어져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와 숨겨진 속살의 온도차가 너무 크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기 십상이고, 가까우면 퍽 뻔한 이야기가 될 확률이 높다. 정이현의 소설은 매끄러워 보이는 표면에 발을 담그는 순간 매력적인 진창 속으로 우리를 빠뜨린다. 겉과 속을 뒤집어 드러내 보이며 그밖의 다른 면은 없다는 듯 독자를 완전히 이야기 속으로 몰입시킨 뒤, 인물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거나(혹은 거짓말에 당하거나) 자신의 생활을 사수하기 위해 윤리를 저버리는 순간을 생생히 목도하게 한다. 각자의 위치와 위계에 순응하는 소위 ‘정상’적인 삶의 한꺼풀이 벗겨지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마음이 가릴 곳 없이 드러나는 순간, 이야기는 파스스 바스러지며 어떤 진실은 잔여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는 듯 부서지고 사라지는 짜릿함은 동시에 읽는 이들의 마음에 씁쓸한 여운과 찝찝한 반성이 뒤섞인 독특한 뒷맛을 남긴다. 그 맛이 그리웠을 독자들 앞에 9년 만의 신작 소설집『노 피플 존』(문학동네 2025)이 차려졌다. 정이현은 여전히 원경과 근경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욕망과 금기가 어지럽게 얽힌 거미줄 위를 오가다 추락하고 마는 인물들의 삶을 선연히 잘라 보여주는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특히 훨씬 풍부한 부스러기들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오래 기다린 이 책을, 그러나 너무 급하지 않게 한입씩 음미해보자. 『노 피플 존』을 여는 소설 「실패담 크루」에서는 마치 예언처럼 다음과 같은 첫 문장을 만나게 된다.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9면)

 

‘금수저’ ‘흙수저’ 같은 신조어가 이제 익숙한 일상어처럼 자리잡았고, 중산층의 신화라고 믿었던 전문직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인생 역전’을 향한 시도는 ‘인생 여전’이 되기 쉽다. 「실패담 크루」의 화자인 주변호사는—줄여서 ‘주변’으로 불리는 것이 의미심장한데—사회적·경제적으로 상위에 속하는 사람들의 모임, 일명 ‘실패담 크루’에 초대받는다. 서로의 실패담을 공유하되 눈치 보거나 간섭하지 않고 말하고 들어주는 모임이다. 주변호사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발가락 끝까지 긴장하며” “간신히, 간신히 실패를 피해가면서”(42면)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고, 얼떨떨하지만 이 모임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그 최선이, 그를 모임에서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그는 마치 페이스트리를 한입 베어 물면 떨어지는 가루처럼 모임 밖으로 건조하게 떠밀린다. 주변호사는 스스로 모임에 그만 나가기로 ‘선택’하지만 실은 밀려난 것이고, 본인도 그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하며 실패담을 공유할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실패가 불가능한 인생이라는 점도. 그런 자들과 달리 주변호사에게 실패는 숨기지 않으면 곧 약점이 되고 만다. 그의 실패는 가루처럼 쉽게 털어지지 않는다. 박완서 소설 「도둑맞은 가난」(1975)의 부자 청년이 가난마저 자신의 경험으로 소유하려 했듯, 이제 실패조차 상류층이 자신의 삶을 장식하기 위해 전유하는 것이 된 것일까.

 

 

실패는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각자의 삶에서 각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실패가 실패이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그들이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짜 실패한 사람들의 삶을 전유하거나 훔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느냐,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고의라기보다는 이미 체화된 방식인 거지요. 이 소설은 실패와 실패담 사이에 틈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실패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것은 실패 그 자체와는 또다른 문제니까요. 그것은 경험을 이야기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러다보면 외려 진짜로 느꼈던 열패감이나 여러 감정들이 밑으로 가라 앉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말하기가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말할 수 없는, 말하지 못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들이 숨겨지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 선은 말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일 테지만, 저는 그 선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항상 궁금했어요.

 

페이스트리가 ‘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보다 그 사이에 선처럼 얇은 ‘틈’이 숨겨져 있음을 보는 것.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특정 계층의 견고함이나 몰인정에 대한 고발이기보다 각자가 품고 있는 틈, 켜켜이 쌓여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틈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실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실패담 크루’의 멤버들과 그 모임에서도 ‘주변’이 되는 주변호사의 처지는 일견 건조하게 대조되는 듯하지만, 그 속을 더 들여다보면 인물들 모두가 저마다 부풀어오른 ‘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령 주변호사의 발언기회를 칼같이 차단하는 성지연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이 몰래 숨겼던 벽돌의 무게를, “소중하게 감춰둔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는”(32면) 모종의 불신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다.

그간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이 위선이든 위악이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삶을 꽉 붙들고 있는 모습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자신의 실패를 그저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밟힌다. 「사는 사람」은 계급의 격차가 거주지로 드러나는 시대, 소위 ‘상급지’로 위장 임장을 다니는 남자친구와 사귀며 학구열 높은 지역의 대형학원에서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한 학생이 SNS 메시지를 통해 ‘나’에게 ‘시험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하며 학원 시험지를 미리 보여달라는 요청을 한다. 70점 이하의 성적이면 집에서 매를 맞는다며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의 마음을 ‘나’는 외면하지 못하고, 아이가 제시한 금전적 댓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아무런 보상 없이 돕기로 한다. 이처럼 누군가의 실패를 그냥 두지 못하고 선을 넘어서까지 도와준 ‘나’의 이야기는—정이현 소설답게 그대로 봉합되지 않고—마지막에 이르러 숨어 있던 함정을 드러낸다. ‘나’는 자신이 “거대한 거미줄의 한 귀퉁이에 얽혀버린 날벌레인지 아니면 둔한 공모자인지 영원히 가려낼 수 없을 것”(338면)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이 『노피플 존』의 마지막에 배치된 소설이라는 점에서, 결말에 돌연히 나타난 이 문장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도 읽혔다. 이제 인물들은 자신의 추락을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를 바라보듯 관조할 정도로 체념하고 만 것일까?

 

그다음에 문장이 하나 더 이어지거든요. 마지막 문장으로 “모르는 새 내가 팔아버린 것과, 내가 빼앗긴 것을, 그리고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나중에 추가했지요. 편집과정에서 굳이 이 대목을 추가하지 않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꼭 넣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빼앗긴 것”으로 끝나느냐, 그럼에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저한테는 무척 큰 문제였던 거죠. 그런 과정을 겪으며 저 스스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예전의 나라면 추가하지 않았을 문장 같거든요. ‘빼앗긴 것’에서 끝내는 게 더 깔끔할 수도, 덜 촌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도 지금의 나는 구태여 그 말을 보태고 싶구나,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되새기고 싶구나 했어요.

 

거미줄에 얽혀버린 날벌레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일보다 ‘잃어버리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해주는 일이 더 중요했다는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이번 소설집에서 유난히 오래 남는 ‘맛’의 비밀이 밝혀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언뜻 체념이나 관조로 보이는 물음 뒤에, 여전히 우리가 마음을 쏟았던 것이 남아 있음을 기억하려는 시선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불편할 정도로 인물들을 과감하게 비추던 정이현의 한없이 투명한 렌즈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 날카로운 투명함을 여전히 유지하되 물기 어린 시야를 드러낸다고 할까, 촉촉하고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고 할까. 버석한 겉에 무른 속살이 여러겹 생긴 듯한 이야기를 차례차례 건너다보면 우리의 마음도 어딘가 물러진 채 물끄러미 지금 이대로의 시대와 사람들을 응시하게 된다. 여기, 지금, 조금은 망가지고 비뚤어진 채 여전히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우리의 모습을.

 

 

불가능한 ‘노피플’

 

‘노 피플 존’이라는 소설집의 인상적인 제목은 「단 하나의 아이」에서 등장한다. 이 소설은 놀이 가정교사로 일하던 중 돌보는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는 ‘한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157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한나는 소설의 마지막에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해고를 당하고도 멀찍이서나마 아이를 보기 위해 움직인다. 아이의 일상에서 밀려난 후 그 아이는 오히려 ‘단 하나의 아이’로 한나의 마음속에 남는다. 우리는 인파로 꽉 찬 지하철을 타야 할 때나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서야 할 때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많아야 하는지 묻곤 한다. 그 물음 뒤에 ‘나’ 혹은 ‘우리’라는 한 덩어리 빼고는 모두 타인이라는 자연스러운 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모두 없었으면, 하고 부정하는 마음을 거친 후에야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타인’이고 ‘너무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좋은 틈새겠다.

 

 

‘노 피플 존’이라 해도 진짜 누구도, 아무도 없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노 키즈 존’이라는 말에도 ‘나’는 있는 거잖아요. 소설집 출간을 앞두고 북까페에서 작업을 할 때 그 층에 저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혼자 있어서 좋다 싶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한 커플이 내리더라고요. 저도 놀랐지만 그들도 저를 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설집 제목을 확정하게 된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서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같이 존재하는 사람들인 거죠.

 

사람을 부정함으로써 사람의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인연은 헤어지고 나서야 우리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내린다.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여린 속살을 지녀서 반대로 나의 범속한 마음을 가장 많이 찌른 작품인 「언니」는 어떤 그리움의 언어 없이, 낭만적이거나 폭력적인 몸짓 없이, 화자인 ‘나’가 ‘인회 언니’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 속 언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기어코 하는 사람”(68면)이자, 누구도 침범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방’으로 침잠하는 사람이다. ‘나’는 언니를 잠깐 도울 수 있었지만 끝내 그의 방으로 함께 가지는 못하고 헤어진다.

 

작은 장면 하나가 이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됐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소설 초반에 주인공이 인회 언니와 함께 학교 후문 쪽으로 밥을 먹으러 다녔던 기억들을 떠올리는데, 이때 언니가 항상 한발 앞서서 걸었다고 말해요. 저는 그게 ‘언니’의 느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두 딸을 키우는데 둘째가 늘 “언니야, 언니야” 하면서 한살 차이밖에 안 나는 제 언니를 따라 하더라고요. 어쩌면 언니란 나쁜 사람을 앞장서서 무찌르는 존재까진 아니더라도 뒤따라오던 사람들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외치고 제일 나중에 도망가는 사람이지 않을까, 우리 모두 얼마간은 그런 언니를 만나왔고 그런 언니가 되어주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으니 영영 헤어진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이들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길이 달라도 미래에는 또다시 교차할 수 있는 거고, 한번 마음속에 다정하게 자리잡은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도 좋지 않을까 하고요. 다만 그 관계가 영원히 갈라짐이나 부딪침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는것이 반드시 상실을 뜻하는 건 아니니까요.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는 서로에게 ‘시절 인연’일 뿐이겠지만, 갈림길 전까지만 함께 걷는 짧은 동행이 무의미할 수는 없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헤어짐 이후를 살아갈 수 있다.

「언니」가 한 시절의 인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지나간 인연을 그린다면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불안하고 얇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작품도 있다. 「선의 감정」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의사인 ‘나’가 병원의 블랙리스트 환자인 ‘안복희’와 그의 딸 ‘김현숙’과 얽히게 되는 이야기이다. 안복희는 시시때때로 병원에 입원해 퇴원을 거부하는 환자이며, 그의 딸 김현숙은 엄마를 병원에 하루라도 더 입원시키기 위해 폭력까지 불사하는, 알코올중독이 의심되는 사람이다.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타인들이 결국 ‘나’의 환자가 되어가는 이 아슬아슬한 인연에 대해 ‘나’는 “이런 것도 연결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묻는다.

 

김현숙 환자는 내가 모니터 위에 나열된 자신의 간 검사 수치를 확인하고, 주치의로서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불안정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이 일은 그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거나 외래에 오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지기 전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면 나는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된다. 가느다란 실 같은 불안으로 우리는 이어져 있다. 이런 것도 연결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118~19면)

 

어쩌면 저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정서가 바로 이 얇고 길게 이어지는 불안 같아요. 많은 경우 불안이라는 감정이 내면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불안은 외부의 어떤 것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관계라고 하면 저는 ‘실’이 떠오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실이 꼭 따뜻한 온정이나 긍정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느껴요. 우리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실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을 둘러싼 것은 불안이나 혼란 같은 다루기 쉽지 않은 감정들이죠. 각자의 삶과 서로가 맺는 관계는 마치 허공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불안정하게 이어지고요. 잠깐씩 스쳐가며 만나는 연결이 우리가 맺는 관계이고, 문학이 그려내는 현실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높은 곳에 올라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 풍경 속 서로 스쳐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도 얽혀 있는 거예요. 이런 교차가 반복되고, 그게 어떤 파장을 얼마만큼 미칠지 알 수 없는 것이 삶이겠죠.

 

 

작가의 말을 들으니 ‘노 피플’이라는 부정은 예고이기보다 기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엔 낭떠러지 같은 허공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이 온전한 따뜻함이나 충만함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불안’으로나마 우리가 함께 있음을, 나아가 그렇게 존재할 때 우리는 굳이 ‘우리’로 묶이지 않더라도 타인으로서 공존할 수 있음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선의 감정」의 마지막도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119면)

 

 

여전히, 보는 사람

 

실패하고 떠밀리고, 가까운 이들과 헤어지거나 그들에게 배신당하고, 혹은 전혀 낯선 타인에게 기습을 당할 때도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은 파국을 애써 수습하거나 힘껏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본다. 응시한다. 그 실패와 상실과 배신의 잔여물을. 「빛의 한가운데」에서 고등학생 아들을 둔 ‘안희’는 아들과 같은 또래의 딸을 혼자 키우는 ‘미령’과 오랜 친구로 지내왔다. 아들이 여성의 나체를 합성한 이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학교에 불려간 안희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 생각했던 아들이 자신을 농락하고 배신했음을 알게 된다. 그 무겁고 어두운 자각 속에서 안희는 자신이 자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그런 엄마가, 아니”라고 여러번 되뇐다. “희미한 깜빡임조차 없는 어두움을 안희는 몰랐으나 거기서도 끝내 보아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153면) 「단 하나의 아이」에서 마지막까지 아이를 걱정하며 보러 간 한나와 마찬가지로 안희 역시 마지막에 ‘끝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보다’는 동사지만, 여기서는 행위보다 상태 혹은 어떤 결심처럼 느껴진다.

 

어떤 소설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항상 ‘카메라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해왔어요. 그만큼 본다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고, 저의 소설쓰기를 규정하는 단어 같아요. 다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정말 필요한 곳에만 ‘보다’라는 동사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본다는 것, 관찰한다는 것이 때로는 비겁하고 의도적인 회피가 되기도 하고, 잘 보려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경계나 바깥에 서 있는 게 필요한데 그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럼에도 저는 작가로서 여전히 ‘보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시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성을 통해 그것을 수정하는 용기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고요.

 

정이현은 ‘매크로렌즈’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작가다. 이번 소설집 역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선의 감정」에서는 병원 의사들에게 성과제가 도입되는 장면을, 「단 하나의 아이」에서는 자기들만의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아이의 놀이교사를 배정하는 중개업체를 그린다. 「빛의 한가운데」에서 학교 내 성폭력은 하나의 골치 아픈 행정문제로 다루어지고, 「언니」에서는 대학원의 불합리한 시스템이 인회 언니를 학교 밖으로 내몬다. 이처럼 거대한 사회구조가 우리의 삶을 침범하는 순간을 정이현은 치열하게 포착해왔다. 그 시선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여전히 날카롭다. 다만, 이제는 그 초점이 우리 바깥에서 우리 안으로 좀더 가까이 들어오는 듯하다. 우리 안의 부정과 불안까지 인정하면서.

 

소설을 쓰는 게 마치 어떤 벽을 넘는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점점 더 높은 벽을 넘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벽을 넘고 난 뒤의 잔해나 부스러기가 남은 자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전에는 그런 잔해들을 내가 감히 마주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내 뷰파인더에 들어온 이상 그것에 대해서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달리 말하면 전에는 벽을 넘는 사람이나 넘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는 사람, 혹은 넘었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허무에 관심이 갔다면, 지금은 벽 아래 핀 풀이나 그 주변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사소하고 작은 흔적들에 시선이 머물고 거기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사회의 시스템이 거대한 벽이라면, 끊임없이 그 벽에 부딪치거나 벽을 넘어가야 하는 우리가 말끔하고 멀쩡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부스러기를 흘릴 것이고, 그것을 먹고 자라나는 감정들도 언제나 어딘가에 잔존할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인물들이 자기 안에 혹은 자기 주변에 가라앉은 것들을 끊임없이 보듯이,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을 붙잡아보듯이.

마지막으로, 왜 어떤 진실은 소설로만 이야기될 수 있을지를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소설로만 포착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떤 지점에 시선이 닿아 어떻게 서사가 시작되는지 저도 정답은 모르겠어요. 어쩌면 정답은 없겠죠. 계속 그렇게 시선을 던져보고 의심하고 되묻는 자세가 전부일지도요. 제 생각에 소설을 쓰는 사람은 모두가 어느정도 비관주의자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설을 쓰는 일 역시 망설임과 고민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것을 견디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누구에게나 한발을 더 내딛고 싶은 각자의 싸움이 있을 텐데 저에게는 그게 소설쓰기이고,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느슨하더라도 소설쓰기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 엄정해지고 싶어요.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났는지 작가는 항상 사후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어떤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밖에 없었는지 시작하기 전에는 알 수 없기에. 그보다 앞선 질문들을 신중하게 반려한 뒤에 시작되는, 기어코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정이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그의 뷰파인더에 기꺼이 초점을 맞춰보며, 얇은 선으로 연결된 우리의 아슬아슬한 세계를 껴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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