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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 ①1

새로운 문명의 단서들

나혜석과 염상섭 사상의 재인식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평론집 『리얼리티 재장전』, 편저 『안창호: 민족혁명의 이정표』, 공저 『개벽의 사상사』 『문명전환의 한국사상』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문제적 개인’과 문명비평가

 

 

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과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은 대한제국의 황혼기에 태어나 20세기의 전반부를 치열하게 살다 간 한국 근대지성사·예술사의 전위였다. 이 문명전환기의 ‘신지식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새로운 주체적 각성이었고 그 결실이자 정점으로서 3·1운동이었으며 무엇보다 예술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원점을 개척했던 이들 두 주역은 예술가로서의 위업 못지않은 사상적 성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입체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했지만 사상가로서 이들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못한 편이었다. 남성중심사회의 편견으로 떠들썩하기만 했던 이혼 스캔들과 불우한 말년에 가려져 나혜석의 이력은 오랫동안 풍문에 지나지 않아 보였고, 좌우를 막론한 어떤 형태의 비현실적 극단주의와도 긴장을 유지했던 염상섭은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이념적으로 더욱 고립되어버렸기 때문이다. 3·1운동 참여를 통해 개화한 나혜석·염상섭의 삶과 사유가 3·1운동을 점진 혁명적 과정으로 충실화해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는, 따라서 아직 밝혀져야 할 대목이 많다. 무엇보다 ‘개성의 해방’을 골자로 한 자주적 각성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역사와 전통, 생명에 근거를 둔 “조선 특수”2 또는 “‘조선’이라는 독자성”3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그들의 출발점이었다. 나혜석이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만들고 또 안 것을 실행하게 만드는 이상하게 헤아릴 수 없는 근본되는 힘”4이라 설명한 것을 염상섭은 “거룩한 ‘독이적(獨異的, 고유의) 생명의 유로(流露, 드러남)’”5라 지칭했거니와, 그 또한 “그 토지, 그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이법(理法)대로 된 그 백성의 영혼과 개성의 울림”6에서 비롯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개성의 해방’을 식민지 극복이라는 당대의 역사적 과제상황과 떨어뜨려 사고할 수 없게 만드는 핵심 논거가 된다.

이들 두 사람은 3·1운동 전야의 선구적 여성해방론자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나혜석과 염상섭이 공식 지면에 처음 발표한 논설이 각각 「이상적 부인」(1914)과 「부인의 각성이 남자보다 긴급한 소이(所以)(1918)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식민치하의 정치적 제약과 성차별에 이중으로 구속된 ‘여성’이야말로 시대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을 연결해준 소월(素月) 최승구(崔承九)는 토오꾜오 조선유학생 사회의 청년 지도자로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이끌던 아나키스트 시인·선각자였거니와 나혜석은 그의 널리 알려진 연인이었고 염상섭은 동지적 우애를 나눈 벗이었다. 염상섭의 첫 단행본 창작집인 중편『해바라기』(1924)의 제재가 된 것이 바로 최승구의 요절과 뒤이은 나혜석·김우영의 결혼 사건이기도 했다. 이 창작집과 두번째 단행본 『견우화(牽牛花)(1924)의 장정을 나혜석이 도맡았고, 나중에 무연고 사망자로 불우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을 문장으로 처음 기린 사람이 염상섭이었다는 사실 또한 잊을 수 없다. 사실 그대로라 보아도 손색없을 염상섭의 소설 「추도(追悼)(1954)는 해방 전 두 사람 사이의 우연한 해후를 포착한 에세이체 단편으로 “여성해방의 여명기(黎明期)에 예술을 들고 앞잡이로 나서서 패배와 희생에 일생을 바치고 만”7 나혜석의 일면을 날카롭게 저며낸 작품이다.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섰다가, 차차차차 곱아드는 등성이 길목을 훌떡 넘어서 자취마다 스러진 뒤의 인생의 공허와, 적막이 자위 없이 가만히 가라앉는 것 같다”8는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시대적 상징성마저 띠게 되는 것이다.

나혜석이 마치 한 시대의 가능성과 한계를 온몸으로 입증하는 소설 속 ‘문제적 개인’에 비유할 만한 존재였다면, 염상섭은 그와 같은 ‘주인공’들 뒤에서 그들의 시대와 장래를 함께 사색한 문명비평가 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가치가 동요하며 새롭게 수립되는 전환기에 나혜석은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통해 예의 ‘문제적 개인’에 육박해갔다.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에게 만일 성공이란 허영심과 위인 될 욕심이 없었던들 어찌 백천년 후세를 전하여 수억만 사람이 뇌 속에 기억을 삼았으리까.”9 그것은 신기루 같은 위인 선망이기는커녕 여성들이 더 많은 향상욕을 가지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할수록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시대의 한계를 새롭게 드러내고 극복하는 데에도 이바지할 것이라는 신념의 토로였다. 그와 동시에 아직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시대와 인간상에 대한 염상섭의 비평적 분석은 집요하고도 한층 전방위적이었다. 그것이 식민지의 모습으로 찾아온 자본주의 근대의 정체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그 극복의 전망을 탐색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이들이 온몸으로 경험한 시대가 그랬듯 우리 시대가 또다른 단계의 문명전환기를 통과하는 중이라면, 그들의 사상적 성취를 지금 여기로 소환해 다가올 새 문명의 단서들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필수 선결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2. 여성해방과 예술이라는 화두: 나혜석

 

예술가로서 나혜석은 우선 소설 「경희」(1918)로 “3·1운동 이후 정립될 근대 단편의 탄생을 일찍이 예고”10한 첨단의 소설가였고, “갈 바를 몰라서 네거리에 헤매는 만(萬)인간의 신(新)생명 충동을 길이 펴도 마름이 없는 구원(久遠)의 미(美)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의 만들어내는 예술 위에서 저 흐늘거리는 시대의 신경을 죄어”11주자고 역설했던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서양화가였다. 사상 및 사회운동 차원에서 그가 “기미(己未) 당시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전위적 여성이었다”12는 세간의 평가 또한 과장이 아니었다. “동경 유학 시절 유학생학우회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과 투고, 귀국 이후의 3·1운동 참여와 조직화, 여자야학과 여자미술학교 설립·운영 등 교육활동, 국외 항일세력과 의열단에 대한 후원, 언론을 통한 문화계몽운동 참여 등”13은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소위 민족운동 참여를 중심에 둔 이러한 평가방식은 나혜석 세대 여성 선각자들의 실력양성·계몽운동이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신여성운동, 즉 제도개혁의 요구 또는 소극적 항일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 민족해방·계급해방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진 못했다는 비판의 논거로도 자주 동원된다는 점에서 양면성이 있다. 예컨대 나혜석의 글쓰기에 “당대 식민지화에 대한 인식이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등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단지 불합리한 제도나 인습 등을 비판하고 있을 뿐”14 이혼 스캔들(1930) 뒤로 현실 문제에서 후퇴했다는 등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그가 일관되게 주창했던 개성의 해방과 여성해방이 식민지 극복이라는 대전제를 속종으로 감춘 ‘노예의 용어’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하게 만들며, 그것이 그를 둘러싼 인적 관계망이나 정치적 공기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이겨낸 결과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특히 중일전쟁(1937) 이후 한두편의 수필 발표를 제외하곤 사실상 침묵에 잠겼던 그는 속령자치론과 참정론15으로 대별되는 친일노선에서 거의 자유로웠다. 가령 다음과 같은 나혜석의 발언들은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극복의 비전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고 단순한 ‘제도개혁의 요구’에 안주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본질에서 나타나는 가장 높은 사상이요, 가장 높은 경험인 줄 압니다.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상과 실행, 영(靈)과 육(肉), 이성(理性)과 정의(情意)가 융합 일치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이리 되어야만 조선 사람의 생활개량이 근본적이요 계속적일 것이며 급진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생활의 안착이 생길것이요 민족적 평화가 낳아질 것입니다.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275~76면

 

여기서 나혜석은 “사랑”과 같은 보편 차원을 제시함으로써 “생활개량”과 “민족적 평화”라는 하위 의제가 위계적으로 뒤따라나오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생활 내용은 버려두고 살림, 즉 제도부터 고치려 하는 데는 어딘지 잊은 것이나 있는 것 같은 저어한 마음이 생깁니다”(같은 글 273면)라거나 “평범한 여자들은 참정권 운동에 야단들이나, 비범한 여자들은 세계적 애(愛)에 참가”16한다는 등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사유와 당대 신여성운동의 그것을 구별하고 있다. 여론의 악화로 사회적 고립 상태였을 뿐 아니라 민족해방·계급해방 운동이 해체위기에 직면했던 1930년대 중반에도 “가시덤불 속의 들장미화, 너는 언제나 빛나는 꽃이 되려나. 그러나 타임은 간다. 그 타임은 모든 변화를 가지고 온다. 그 타임은 미구(未久)에 너에게 자각과 의식과 실행을 움켜 주리라. 아니 지금 진행 중에 있다”17고 씀으로써 ‘보편적 사랑’이 전개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초기 민족운동의 주도세력 가운데서 나혜석이 지녔던 차별성은 그와 깊숙이 관계 맺었던 남성지식인들과의 대비에서 한결 뚜렷해진다. 요절한 최승구를 제외하면, 나혜석의 토오꾜오 유학과 사상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오빠 나경석이었다. ‘최승구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급진사회주의 진영의 공격 속에 운동을 접고 만주지역의 실업가로 변신했지만, 1920년대만 하더라도 산업발전과 도시노동자의 각성이라는 혁명의 “순서와 계단을 무시하면 이는 공상적 사회주의”18에 지나지 않는다고 급진파를 비난하던 견실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동아시아 왕도연맹 결성”19이라는 만주국 이념을 체화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참정론자들의 노선이 단순 청원운동에서 ‘국민의무’의 선(先)이행을 통한 참정권 요구로 바뀌었고 이 흐름에 왕년의 민족주의·사회주의 운동을 이탈한 전향자들이 상당수 결합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나경석 또한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것으로 추정할 만하다. 이혼 스캔들의 당사자였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이나 일제관료로 충실했던 남편 김우영(金雨英)의 훼절 경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에 비할 때 나혜석의 입장은 차별화된 안목과 심지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그가 여성해방에 각성한 예술가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20는 다짐이 벌써 예술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조선의 여성 문제로 확장되어가는 나혜석 특유의 사유방식을 함축한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위안물(慰安物)21의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선 노라(Nora)가 바로 그 자신이었고, 그러한 자각이 있었기에 매판적 지식사회에 휩쓸리지않는 비판적 거리두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형의 집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노라의 여정을 나혜석 자신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나의 10년 생활 중에는 계급과 빈부와 귀천의 굴곡이 가로 내려질리고 세로 흘러 나를 웃기고 혹 울리고, 즐겁게 또는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억제케 하는 것은 오직 내게 깊이 뿌리 박혀진 예술심과 보리심(菩提心)이다.

—「화가로 어머니로: 나의 10년간 생활」(1933), 347면

 

이 “예술심과 보리심”이야말로 초기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남성지식인들의 정치적 오류에서 그를 구원한 “이상하게 헤아릴 수 없는 근본되는 힘”(「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275면)의 원천일 것이다. 나혜석은 위의 문장 바로 뒤에 불가의 사홍서원(四弘誓願)22을 열거함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보리심이 혼자만의 고독한 깨달음에 그치지 않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마음의 일으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나혜석의 보리심은 사회성을 강하게 띤 대승(大乘)적 문맥에 속한다. 예술심 또한 보리심과 별개의 차원은 아닌 듯하다. 가령 그의 행복론은 평범한 듯 독특한데, 그것은 “어떤 일에 일념이 되었을 때” 획득되는 것으로 이는 “즉 예술적 기분을 깨닫는 때”이다.23 따라서 ‘일념’과 ‘예술적 기분’은 같은 경지를 가리키는 동의어인 셈이며 여기서 일념은 불가의 일반용례에 따른 ‘한 생각’, 그러니까 벗어나야 할 어떤 마음의 집착 상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완전한 몰입의 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순간을 나혜석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신이 왕래하는 일념이 되었을 때”24라거나 사람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 신의 왕래를 볼 때만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혼 고백장」 402면)이라 부연하기도 했다. 신의 왕래를 목도한다는 비유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그것은 결국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분별이 사라지는 더 높은 차원의 통합으로, ‘나’의 몰각을 경험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다 자아에게 있는 것”(같은 글401면)이지만 그 목적지는 오히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에 신의 왕래를 보는 ‘나’의 몰각 상태인 셈이다. 자아에서 출발하되 끝내는 자아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는 일종의 예술적 선정(禪定)으로서 ‘일념’ 즉, 예술심은 그 궁극의 경지에서 결국 ‘나’와 모든 중생을 함께 제도하는 참된 보리심과 정확히 겹친다. 나혜석의 예술론·여성해방론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 근저 위에 세워진 것이었기에 제도주의적 신여성운동의 한계나 자치·참정론의 역사적 오류에 빠지지 않는 균형 잡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형의 집’을 벗어난 나혜석이 당대 현실의 제약 가운데 스스로를 희생하고 말았다는 서사가 흔하지만,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으로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할 것을 당당히 선언한 「경희」의 결말이 예고한바(103~104면), 그는 거의 단 한번도 외력에 자신을 꺾지 않았다.

식민지시대 사상사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틀로 파악하는 한, 나혜석 사상의 자리가 충분히 확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혜석을 아나키즘 계보에 배치하려는 시도25 또한 그러한 고민의 표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제도든 학문이든 언제나 “조선화시킬 욕심”(「잡감: K언니에게 여함」 195면)을 강조했던 나혜석 사유의 독자성을 20세기 서구사상의 계보 어딘가에 반드시 수렴시킬 필요는 없다. 1924년 경성에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를 관람하고 난 후기에서 나혜석은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벌써 서양류의 그림을 흉내낼 때가 아니요, 다만 서양의 화구와 필(筆)을 사용하고 서양의 화포(畫布, 캔버스)를 사용하므로 우리는 이미 그 묘법(描法)이라든지 용구(用具)에 대한 선택이 있는 동시에 향토라든지 국민성을 통한 개성의 표현은 순연한 서양의 풍과 반드시 달라야 할 조선 특수의 표현력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1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 260면) 이것이 자아, 개성, 조선적 특수성에 관한 진술이라면 그가 남긴 유일한 희곡 「파리의 그 여자」(1935)의 제2막 ‘H’의 마지막 대사는 그가 앞서 ‘사랑’이라고도 불렀던 종교적이고 보편적인 무엇에 관한 발언이다. “사람도 가고 천지도 변하고 상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의지하고 살까. 한 갓 우리 속 사람에게 빛이 되는 그 빛 하나만을 굳게 붙잡고 이에서 기쁨을 얻고, 힘을 얻고, 무한한 가치를 얻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파리의 그 여자」 148면) 이는 초월주의가 아니다. 중일전쟁 무렵부터 해방 직전까지 수덕사 수덕여관에 자신을 의탁했던 나혜석은 김일엽(金一葉)의 출가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예술심과 보리심의 회통이라는 나혜석 사상의 맥락을 놓고 볼 때 어쩌면 그는 어디까지나 세속 가운데서 여성해방과 예술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끝까지 용맹정진했던 최초의 재가수행자였는지 모른다.

 

 

3. 근대극복과 문명전환: 염상섭

 

염상섭의 사상적 입장은 종종 주장되어온 것처럼 중인(中人)에서 근대 부르주아지로 넘어가는 계선을 굴곡 없이 대변한 근대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개는 그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었으며, 자기 시대에 현존했던 ‘근대극복’의 여러 노선들—가령, 현실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을 당면한 현실

의 1차적 과제인 식민지해방 후위에 설정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물론 염상섭이 식민지해방 저 너머의 중·장기적 전망 가운데서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 스펙트럼에 공명하고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주의는 “다양한 사상들의 융합적 조합을 통해 최량의 힘의 배치를 만들어 내고자”26 한 시도였다. 다만 이 ‘최량의 힘의 배치’를 통해 수행하고자 하는 과제들 사이에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 하는 선차성에 대한 고려가 누락된다면 “다양한 사상들의 융합적 조합”은 변화무쌍하고 구체적인 현실과의 역동적 관계를 상실하고 절충적 또는 산술적 종합 같은 제3의 이념 모델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염상섭의 사상적 입장이 중요한 이유는 예의 과제의 선차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아래 그러한 단선적인 주의·노선들과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면서도 순전한 배제에 머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때그때의 주어진 현실에 따라 ‘최량의 힘의 배치’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는 자본주의 근대를 불가항력의 현실로 수락함으로써 환멸의 포즈 뒤로 모습을 가리고 궁극적으로는 근대주의에 투항하고 마는 단순한 ‘자연주의’ 작가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근대를 급진사회주의자들처럼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3·1운동 이후—인용자)(純)정치운동에서 경제운동에 완만한 보조로 전향하여 ‘민족 대 민족’의 착취를 자민족의 자본주의적 발달로서 방어할 수밖에 없는 답안에 득달(得達)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변태요, 역류다. (…) 까딱하다가는 무산자 스스로의 묘혈을 준비하는 것이지마는, 일면으로 보면 과연 여기에 피압박민족, 피착취민족의 남에게 말 못 할 이중, 삼중의 고통이 있고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민족의 현실을 유지하는 유일로(唯一路)일 지경이면 순리적 입장을 버리고 사태에 순응하여 일시적 권도(權道)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이 점이다! 민족주의가 현재에 지지하는 경제정 책이 어떠한 시기까지의 임기응변적 권도인 것을 자진하여 인식하는 때부터 사회운동의 우익에 출진할 자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민족, 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이하「유심적 고찰」) 536~38면

 

앞에서 보듯 염상섭의 사유가 여러 버전의 사회주의 근대극복 기획과 뚜렷이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근대극복의 지향을 놓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근대를 건너뛰지도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임형택은 “리얼리즘은 본디 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비판인데 진정한 리얼리즘이라면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까지 요망하게 된다”는 전제 아래 『삼대』(1931) 서사의 리얼리즘이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뿐 아니라 사회주의에도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라며, 이는 “그가 자본주의적 근대에 매몰되어서라기보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한층 원만하게 수행하려는 자세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염상섭의 입장에서는 “식민지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조선의 현실로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을) 건너뛸 수도 없다고 판단”27했다는 것이다.

염상섭의 근대 인식이 이중과제적 통찰을 내장한 것이었음은 초기 논설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소설로만 보더라도 『만세전』(1924)까지는 소급이 가능할 것이다. 부산항에 도착한 주인공 이인화의 눈에 비친 풍경은 맑스가 “자본의 역사의 전주곡”28이라고 불렀던, 이른바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 무차별적으로 진행 중인 식민지 조선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몇천 몇백 년 동안 그들의 조상이 근기 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져놓은 이 토지를, 다른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시외로 쫓겨나가거나 촌으로 기어들어갈 제, (…) 어떠한 사정이 어떻게 되어서 한 가구가 주는지 그 내막이야 아무도 모를 것이다. (…) 이같이 해 한 집 줄고 두 집 줄며 열 집 줄고 백 집 주는 동안에 쓰러져가는 집은 헐려 어느 틈에 새 집이 서고, 단층집은 이층으로 변하며, 온돌이 다다미가 되고 석유불이 전등이 된다.29

 

『만세전』의 많은 부분이 식민지 조선의 전근대적 유제와 자본주의화 과정을 분석하는 데에 할애되어 있거니와, 이인화는 조혼한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토오꾜오 귀환을 결심하면서 일본에서 만난 시즈꼬에게마저 결별을 선언한다. 이는 3·1운동이 폭발하기 직전, 그러한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고양된 조건들을 ‘질식할 것 같은 묘지’로 상징한 데서 이미 드러나듯 환멸의 일방통행만이 아닌 부활의 선포이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토오꾜오 귀환이 지닌 함의가 단순치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다음은 이인화가 토오꾜오로 떠나며 시즈꼬에게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이다. “나는 잃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얻고 간다고 생각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아서 나가십시다. (…) 우리는 다만 호흡을 하고 의식이 남아 있다는 명료하고 엄숙한 사실을 대할 때에 현실을 정확히 통찰하며 스스로의 길을 힘 있게 밟고 굳세게 살아나가야 할 자각만을 스스로 자기에게 강요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외다. (…) 가슴을 훨씬 펴고 모든 생의 힘을 듬뿍이 받으소서.”(『만세전』 160~61면)

여기서 ‘나’ ‘생의 힘’에 대한 강조가 개인주의나 아나키즘 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하지만 문필활동 초기부터 “개념적 사상의 복창”30을 타기해 마지않았던 작가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히 통찰하며 스스로의 길을 힘 있게 밟고 굳세게 살아나가야 할 자각”의 내용이다. 이인화는 자본의 공세 아래 형질변이 중인 식민지의 현실을 구체제의 종언(조혼한 아내의 죽음과 매장을 둘러싼 논란)과 분리하기 힘든 불가피한 과정으로 섭수하되, 식민종주국에서 타전되어온 모더니티에도 투항하지 않는 것(시즈꼬와의 결별 선언)을 선택한다. 결말의 토오꾜오행은 그러므로 근대극복의 전망을 견지한 적응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적응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극복의 사회적 상징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 염상섭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근대 이중과제적 함의를 포착하고 규명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지점은 그것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차원, 즉 문명전환의 비전과 관련된다. “개성의 표현은 생명의 유로(流露)이며, 개성이 없는 곳에 생명은 없다”(「개성과 예술」 194면)는 염상섭의 강조는 많은 평문에서 반복되었지만 그것이 문명전환의 비전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완성된 논리로 정리된 것은 앞서 언급한 「유심적 고찰」에 와서가 아닐까 싶다. 그 열쇳말은 ‘자연의 이법’이다. 물론 그보다 이른 시기에 「노동운동의 경향과 노동의 진의」(1920)에서도 노동의 5대 의의 가운데 첫손에 꼽은 것이 “생명의 발로”(115면)였고, 그것이 노동생산에 엄연히 개입하면서도 인간의 노력 여하를 넘어선 ‘자연의 대법칙’을 포괄한다는 맥락이었기에 「유심적 고찰」의 발상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금후의 인류의 대목표는 자연에, 자연의 이법에 돌아가는 데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 목표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할 자각이나 근기(根氣)가 없다 하면 인류의 운명은 내림길이다. 인류는 쇠미하여 갈 길밖에 없다”(「유심적 고찰」 533면)고 단언한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이 가져온 물질적·정신적 폐단들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염상섭 당대에도 수없이 많았지만 일방적인 부정에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갱생의 전망을 제시하는 경우는 희소했다는 측면에서 주목에 값한다

 

기계의 법칙은 자연의 이법에서 나왔다. 그러나 기계는 자연이 아니다. 자연의 아들을 기계의 노예로 한 데에 인류생활의 현실은 폭로되었다. 인간은 인간을 생산하는 기계로서야 비로소 존재의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요,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벌써 예전에 쓰러졌다. 사람이 기계의 노예라는 말은 ‘기계 대 노동자’ ‘자본가 대 노동자’인 경우에만 특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정복하였다는 자신(自信)은 자연의 이법이라는 대실재(大實在), 대본의(大本義)를 무시하고 기계가 산출하여주는 부(富)를 중심으로 하여 생활의 법칙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 일장(一章) 법규야말로 빗들어선 인류생활의 최후 결산인 동시에, 유물적으로만 기계에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그 기계를 통하여 유심적으로도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 된 점에 있어서는 자본가나 노동자나 일반이다.

—「유심적 고찰」 533면

 

자연과 기계, 자연의 이법과 기계의 법칙을 단순 대립항으로 설정하기보다 전자가 후자를 생산하고 포함하는 관계로 본다는 점이 눈에 띈다. 기계의 법칙은 자연의 이법에서 나왔지만 기계는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인류의 대목표가 자연의 이법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술문명의 소거·배제로 단순화할 수 없다. “자연의 아들을 기계의 노예로” 만든 것이 오늘날 문명의 본질이라면 바로 그 본말전도의 현상을 타파하고 재전도하는 과업이 인류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기계의 노예가 되어 생산한 부와 생활의 법칙이란 한마디로 자본주의를 말하거니와, 노동자뿐 아니라 자본가조차 노예로 만드는 이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자연 또는 자연의 이법에 귀순시키는 일이 단순한 기술문명 부정론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기술문명의 성취는 성취대로 인정—그 또한 본질적으로는 자연의 이법에서 나왔으므로—하는 토대 위에서 자연의 이법과 기계의 법칙 양자 간 지배예속 관계의 재전도를 요청한다는 면에서 이는 뜻밖에 다음과 같은 맑스의 설명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생기는 자본주의적 취득방식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낳는다. 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 과정의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생산자에게 사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협업, 그리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를 바탕으로 개인적 소유를 재건한다.

—「맑스」 1046면

 

맑스가 말하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 그렇듯 염상섭이 말하는 “인류의 대목표” 또한 지금까지 물질문명이 이룩한 성과를 근거와 바탕으로 새롭게 열리는 비전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맑스에게 비중이 흐릿한 ‘유심적’ 차원을 염상섭은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문명비평적 사상이 다음과 같은 대지(大地)적 사유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생활환경에 안적(安適)할 수 있더라도 민족적 개성을 상실하였거나 지리적 조건으로 약속된 민족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원은 자연의 이법에 귀순하려는 인류의 신(新)행로의 동행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떠한 세대, 어떠한 생활조직하에서라도 반도의 흙은 조선말을 하는 사람과 및 그의 자손의 손에서 갈〔耕〕리고 조선말은 반도의 흙을 가는 사람 이외의 사람의 입에서 회화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유심적 고찰」 538면)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대생산력의 시대로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은 만연한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으로 대전환의 요청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기계/자연’ 논의에서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단순대립이 아니라 양자 간 포함관계를 근본적으로 전도시키는 사유와 실천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염상섭이 자연 또는 자연의 이법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가리키고 있는 문명전환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염상섭 사상의 재인식이 필요하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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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엮고 쓴 『나혜석·염상섭: 개성의 해방과 문명전환』(한국사상선 25), 창비 2026의 서문을 본지의 기획방향에 맞추어 개고한 것이다

 

  1.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은 창간 60주년을 맞이하여 K담론의 거점으로 이바지하려는 본지의 다짐을 실천하고자 마련한 연속기획이다. 이제껏 한국문학이 일구어온 결실은 다양한 차원에 닿아 있고, 그 가운데 사유의 지평을 여는 탁월한 ‘사상자원’으로서의 기여도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하여 한국문학의 성취를 새기고 나누려는 이 기획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
  2. 나혜석 「1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1924), 이상경 편집교열 『나혜석 전집』, 태학사 2000, 260면. 이하 나혜석 글은 이 책에서 인용시 제목(발표년도)과 이 책의 면수로 표기.
  3. 염상섭 「소설시대=사대 사상」(1928), 한기형·이혜령 엮음 『염상섭 문장 전집』 1권, 소명출판 2013, 679면. 이하 염상섭 글은 이 책에서 인용시 제목(발표년도)과 이 책의 면수로 표기.
  4. 나혜석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1926), 275면.
  5. 염상섭 「개성과 예술」(1922), 193~94면.
  6. 염상섭 「민족, 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 반동, 전통, 문학의 관계」(1927), 539면.
  7. 「추도」, 서정자 엮음 『원본 나혜석 전집』, 푸른사상 2013, 776면.
  8. 같은 글 781면.
  9. 나혜석 「잡감: K언니에게 여(與)함」(1917), 193면.
  10. 최원식 「한국현대문학사 연습 (6): 정월 나혜석」, 웹진 『작가들』 2025년 여름호.
  11. 나혜석 「화실의 개방: 여자미술학사」(1933), 649면.
  12. 비파동주인(琵琶洞主人) 「백화난만의 기미 여인군: 광무·융희시대의 신여성 총관 (2)」, 『삼천 리』 1931년 6월호, 28면.
  13. 김형목 「나혜석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에서 역할」, 『숭실사학』 제24집, 2010, 113면.
  14. 같은 글 134면.
  15. 자치론은 일제의 지배를 수용하면서 내정의 독자화를 추구하는 노선이고 참정론은 민족의 구분 없는 ‘국민화’를 통해 조선과 일본을 통합함으로써 조선인이 제국의회에 진출, 조선반도에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태훈 「일제하 친일정치운동 연구」,연세대 박사학위논문, 2010이 상세하다.
  16. 나혜석 「백결생(百結生)에게 답함」(1923), 238면.
  17. 나혜석 「구미여성을 보고 반도여성에게」(1935), 442면.
  18. 나공민(羅公民) 「물산장려와 사회문제 (4)」, 『동아일보』 1923.2.27. 공민은 나경석의 호.
  19. 황민호 「나혜석의 독립운동과 관련 인물들」, 『나혜석연구』 제6집, 2015, 92면.
  20. 나혜석 「모(母)된 감상기」(1923), 220면.
  21. 양백화·박계강의 번역극본 『인형의 가(家)』(헨릭 입센 원작)에 부친 같은 제목의 나혜석의 노랫 말 부분. 『매일신보』 1921.4.3.
  22. 한량없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濟度)하고, 번뇌를 끊으며, 모든 법문을 배워, 가장 높은 불도를 이루겠다는 네가지 큰 서원을 가리킴.
  23. 나혜석 「이혼 고백장」(1934), 423면.
  24. 나혜석 「조선에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압니다」(『삼천리』 설문응답, 1934), 654면.
  25. 김복순 「‘조선적 특수’의 제 방법과 아나카 페미니즘의 신여성 계보: 나혜석의 경우」, 『나혜석연구』 창간호, 2012.12.
  26. 이종호 「염상섭 문학의 대안근대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7, 251면.
  27. 임형택 「『삼대』론: 염상섭의 작가정신과 한국 근대」,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 소명출판 2022, 720면.
  28.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개역판), 1044면. 이하 「맑스」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기.
  29. 김경수 책임편집 『염상섭 중편선: 만세전』, 문학과지성사 2014(개정판), 76~77면. 이 책의 저본은 고려공사판(1924). 이하 『만세전』으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기.
  30. 염상섭 「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신경향파에 여함」(1926), 4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