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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진정성이라는 대리 물성과 정체성의 딜레마

 

 

성현아 成炫兒

문학평론가. 공저서 『아직 오지 않은 시』 『한강을 읽는다』 등이 있음.

 

 

1. ‘나’를 보증하는 감정과 2020년대식 진정성의 두 갈래

 

 

진정성(authenticity)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전통, 규범, 타인)과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1로, 자기(self)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도덕적 이상이다. 신실성(sincerity)과의 대비를 통해 진정성 개념을 구체화한 라이어널 트릴링(Lionel Trilling)에 따르면 “개인의 외부에 적극적인 가치가 있음”2을 전제하는 신실성과 달리, 진정성은 외부의 규범과 불화하더라도 자기 존재의 내밀한 욕망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그렇기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외부보다는 내부에 주목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정성에 관한 논의는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강조된 ‘민중’ ‘민족’ 대신 ‘개인’과 ‘일상’을 적극적으로 조명했던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활성화되었다. 그 가운데 문학적 진정성의 추구는,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소 보수적인 ‘문학성’에 대한 고집으로 계승되었다고 비판받았다.3 진정성이 자기 안의 참된 것을 발견하고 추구하려는 개념인 만큼, 문학적 진정성 역시 텍스트 내부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아 이외의 것을 도외시하게 만들 위험을 수반했으며, 문학을 현실이라는 제반 환경과 시대적·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진정성의 경우 유일무이한 가치를 제외하고는 가짜, 즉 ‘가치 없음’으로 내모는 “진품성(眞品性)의 개념에서 연원”4한 것으로, 타자의 비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데다 ‘참다운’ ‘진실한’ 등으로 모호하게 수식되는 것이기에 논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문학적 진정성이 문학의 자율성을 최우선시해 퀴어·페미니즘 문학을 ‘정치적 메시지만 앞세운 미학성은 부족한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는 일종의 백래시나, 거시적인 관점이나 대의가 결여되었다며 요즘 문학을 비판하는 기성세대의 압박에 대응하는 모호한 준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 또는 퀴어적 전회 이후, 고백적 성격을 지닌 1인칭 자기서사가 활성화되면서 진정성 개념이 새로이 부상했다. 다수가 공감할 만한 전형적인 삶을 반영·재현함으로써 구조적 현실을 자각하고 변혁의 동력을 마련해왔던 리얼리즘 문학이 이성애-지식인-비장애-시스젠더-남성 중심의 삶을 집중적으로 그림으로써 이를 보편적인 삶으로 가정했음을 지적하는 흐름이 이 시기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밀려난 자’들의 진정성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진정성이 지닌 기존 제도와 규범에 반(反)하는 특성이 긍정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5 그리하여 문학은 편중된 관점으로 인해 재현의 기회가 부족했던 ‘나’들의 무수한 현실을 담아내려 노력하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계보의 리얼리즘의 등장이라 볼 수 있다. 없다고 여겨져왔던 존재와 삶을 가시화함으로써 인식되지 않았으나 분명히 잔존해온 감각을 독자가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 흐름의 강력한 구심점은 ‘예외적 불행을 과장하여 묘사한다는 식의 비난’이나 ‘그러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현실 낙인’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생생한 현실감이자 그로 인한 분노, 슬픔, 공포 등의 감정이다. 이는 진정성이 수량화될 수 없고 관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진정한 느낌’으로 주장되는 측면과도 맞닿는다.

한영인은 “감정의 생동하는 힘에 긍정적으로 주목하는 움직임이 강해진 오늘날에는 개인의 감정과 느낌이 사태의 진실을 보증하는 중요한 심급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감정의 정치적 힘이 복권”6되었다는 점은 긍정할 만한 사실로 본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내밀한 진심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서사가 부상했던 것 역시 그간 문학적 재현에서 배제되어온 이들의 인정투쟁이자 자기증명 과정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 진정성을 추구하고 입증하는 과정이 ‘정체성’ 문제에 연루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정체성이 사회관계망 속에서 부여된 젠더나 계급, 국적과 역할 등을 의미한다면, 진정성은 이러한 외부의 규정에 반하더라도 스스로 인정할 만한 진짜 ‘나’를 추구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개념은 상이한 방향성을 지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충돌하는 동시에 서로를 구성하는 역동적 관계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자기정체성이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위치할 경우, 정체성은 오히려 당사자의 삶이 지니는 진정성을 통해 사후적으로 가시화되고 증명된다. 역으로 사회적으로 부여된 정체성이 끊임없이 진정성을 요구함으로써 존재를 옭아매기도 한다. 진정성은 본질적으로 측정 불가능함에도 지속적으로 평가되며,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주체를 ‘가짜’로 판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체성 또한 단단한 틀로 고착되어 자기를 속박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준거가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이름과 이력을 소설의 화자에게 부여함으로써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작가와 작품을 비(非)분리하게 만들어 자기고백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도가 비슷한 시기에 활성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7 소설의 서사 전체가 작가의 실제 체험으로 보이도록 의도하는 것은 여성이나 퀴어가 주인공인 작품이 어떤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실제 체험으로, 어떤 때는 과도하게 부풀려진 피해-서사로 비판받았던 데 대한 저항적 움직임이다. 어차피 소설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거나 윤리적이지만 미학성은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절하와 낙인이 따라붙을 거라면, 작가와 화자를 분리할 수 없게 만들어 진정으로 실존하는 작가-‘나’와 그 안에 명징하게 살아 있는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려 한 것이다. ‘작가-화자-나’의 실존하는 삶이 소설에 ‘진정성 있게’ 제시되면서 그간 비가시화되어온 인물들의 ‘정체성’이 보증되도록 하는, 일종의 문학적 투쟁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수자들과 그 삶의 실존을 증언하는 개념으로서의 진정성·정체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고정된 틀처럼 사유될 때는 또다른 억압과 배제를 낳게 된다. 즉,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기’를 확정된 개체가 아니라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이자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8로 인식할 때, 진정성 또한 개인으로부터 확장되어 감정적 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존재가 독립된 개체일 수 없으며 만남의 장 속에 위치한다는 관점은, 정체성이 가변적이며 그와 상호작용하는 진정성 역시 맥락 안에서 조정된다는 점을 충분히 사유할 때만 체득될 수 있다.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위해 하나로 고정되고 순치되려는 경향을 지니며, 진정성 또한 이를 추구하는 주체를 개별적 존재로 상정하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2. 대리 물성이 된 진정성과 정체성의 딜레마: 『혼모노

 

‘진정성’에 집중하는 자기서사는 여러 층위의 위험을 불러오기도 한다. 첫째로, 한영인이 지적했듯 “자신이 느낀 ‘진짜 감정’을 물신화하여 내세우는 태도”는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을 살피고 관리하는 기법에 힘을 쏟게” 하는 “신자유주의 감정정치”와 맞물려 “정치적인 감정의 존재론에는 무감하기를 강제”9할 수 있다. 이는 진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적인 주관성을 옹호하며, 판단하는 주체의 강력한 권위를 부각하려 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때 주체 역시 이미 한 사회의 문화적·시대적·역사적 맥락에 영향받은 존재임은 망각되곤 한다.

한영인이 성해나의 「스무드」(『혼모노』, 창비 2025)를 분석하며 한국계 미국인 ‘듀이’가 극우시위대의 집회현장에서 느낀 순수한 감동이 “그것을 생산하고 보증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토대를 몰각하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10음을 설명하는 것 역시, ‘진짜 감정’의 허구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같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고문실의 건축 도면을 그림으로써 “이상을 뺀 지독한 합리주의”(185면)를 실현하려는 열정은 건축가 ‘구보승’의 진정성이지만, 독자들은 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고문실의 설계를 명령한 독재권력과 이어져온 폭력, 앞으로 자행될 잔혹한 고문과 피해자들의 일그러진 얼굴까지 모두 지워내고, 설계 도면을 역사성으로부터 탈각된 진공상태의 시공간으로 남길 때만 그 진정성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진실한 감정 또는 진정성에 대한 천착이 개인을 지우는 사회를 향한 인정투쟁인 한편 “사회적 유리(civil disengagement)”가 “공적 공간의 표준”11이 된 사회로부터 습득된 물성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험이 (나아가 감정적 경험까지도) 기술에 의해 매개되고 간접경험으로 대체되었을 뿐 아니라 AI를 통한 가상경험이 실제 체험과 분리 불가능해진 지금, 역설적으로 진정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경험이 멸종된 시기, ‘진짜’로 입증받을 만한 무엇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감각과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을 주장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절실해지는 것이다. 이같은 진짜에 대한 과도한 갈망은 자기감정, 직접경험, 나아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물질에 대한 집착적 열기로 드러나기도 한다.

성해나 소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같은 책) 속 ‘나’가 감독 ‘김곤’을 향한 자신의 팬심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순도 높은 애정임을 확인하기 위해 ‘굿즈’를 사 모으는 광경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도 진정성의 단계가 있으며 증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 연원은 김곤의 골수팬만 활동하는 ‘길티 클럽’ 모임에 참석한 ‘나’가 은근히 배척받는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지식을 과시하듯 늘어놓는 팬들은 ‘나’와 ‘여자-주부’를 은근히 따돌리면서 김곤의 특정 영화에 대한 애호를 그의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귀여운’ ‘소녀팬’ 취향으로 치부하고 업신여긴다. 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일에도 수준과 급을 나누고 감정마저 위계화하는 이러한 태도는 굿즈가 대유행하는 현재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굿즈란 자신이 무언가를 진짜로 경험했다는 물증이자 ‘한정판’의 감각을 더해 경험하지 않은 이들과의 차이를 벌리는 데 유용하게 기능하는 수단이다. 문학책 역시 ‘표지 리커버’ ‘작가 싸인본’ ‘시꾸(시집 꾸미기)용 스티커’ 등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한정판으로 마케팅되는 지금, 진정성이란 ‘자기’를 확인하기 어려워진 세계에서의 자기증명을 가능케 하는 다소 허망한 대리 물성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체험과 그것을 경험한 ‘나’가 진짜임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진정성의 승인 권력은 SNS와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는 불특정 다수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본래 진정성의 판단 주체였던 ‘자기’는 이 과정에서 뒤로 밀려나게 되며, 그로 인해 세번째 문제점이 생긴다. 타자에게 ‘나’의 진정성을 호소하고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면,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는 오롯한 ‘나’를 드러내기보다 가장 대표성이 강한 상징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는 어떤 특성으로 인해 차별받으면서도 그 피해양상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특성만을 강조해야 하는 역설과 맞닿아 있다. 가령 여성으로 환원되거나 패싱되기 때문에 차별받지만,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내면서 여성으로서 차별당한 경험을 내보여야 한다. 그렇다면 단일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일은 정해진 계급에 걸맞은 몫과 감각에 순응하는 상태를 주체가 도리어 능동적으로 소환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성해나의 소설이 이러한 진정성의 대리 물성적 차원을 가시화해주었다면, 이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계보의 리얼리즘 소설들도 살펴보자.

 

 

3. 유동하는 정체성을 매 순간 재현하기: 「여기는 서울

 

전춘화 소설 「여기는 서울」(『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은 정체성이 장소의 이동이나 타자와의 교류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축되는 유동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동포 청년 ‘영화’는 한국어만 사용하리라 기대했던 서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어에 적응해야 하는 이상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232면)와 같은 말을 발음하는 데 위화감을 느낀다. 이는 영어와 이딸리아어로 표기된 메뉴명을 더욱 고급스럽게 느끼는 한국의 기이한 사대주의를 환기함과 동시에 중국에도 한국에도 온전히 속하기 어려운 인물이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응축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 단어가 본래의 기의인 “마늘 기름과 해물을 넣은 매운 볶음면”(같은 면)을 지칭하기보다 ‘있어 보이는’ 감각을 모호하게 환기하는 기표로 기능하듯, 영화를 이르는 ‘조선족’ 또는 ‘중국동포’라는 명칭 역시 같은 뿌리를 둔 한 민족이라는 결속의 의미가 아니라 한국인이 아니라는 단절과 부정의 감각만을 창출한다.

아버지의 소개로 “우리 민족 서로 돕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민단체”(235면)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영화는 “증조부나 증조모의 이주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234면) 있는지 질문을 받게 된다. 그는 증조부가 어떤 연유로 만주로 왔는지 제대로 들은 적이 없고,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펼치는 중국에서는 민족의 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곤란해진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가 한국에 오자 비로소 중국에서 나고 자란 조선인이라는 ‘친숙한 이방인’으로서의 이력이 부각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한다. 영화는 “조선족이라는 아이덴티티에 대해 질문”(254면)을 받으며 그간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화 역시 무덤덤하게 배웠던 역사적 지식과 달리 감정을 자극하는 생생한 자료를 마주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극복할 수 없는 입장 차가 있음을 실감하며, 자신이 자란 “매일 밤 일곱시면 거의 모든 채널에서 똑같은 공영 뉴스가 흘러”(246면)나왔던 곳의 폐쇄성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고향에서의 삶을 재해석”(253면)하고 ‘나 됨’을 반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며, 주체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이때 소설은 하나의 정체성, 이를테면 차별받는 조선족 또는 중국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된 유학생 혹은 한국의 문화를 배우며 자신의 뿌리를 뜨겁게 확인하는 동포 등을 미리 설정해두고 중심인물의 감정에 단선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이 겪는 혼란을 고백적인 편지 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부여받은 정체성과 자신이 구축하려는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엄밀한 구조화를 거치지 않은 다소 투박한 형식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경재가 적절히 짚어주었듯 전춘화 소설의 중심인물인 ‘조선족’은 “조국과 고국이 일치”하는 한국인과 달리 “‘한인(韓人)이라는 에스니시티’와 ‘중화민족이라는 네이션’의 성격을 동시에”12 지닐 수밖에 없는 교착적인 자리에 있다. 이들은 중국인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양쪽에서 강요받으면서 동화의 압박에 놓이거나 ‘조선에서 온 이방인’ 혹은 ‘중화사상을 가진 외국인’으로 내몰리며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유대감을 기대했으나 낯설기만 한 고국에서 소속과 배제를 오가며 새로이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을 그리기에는, 빠짐없이 진술하는 고백의 형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인들과의 식사자리에 자연스럽게 동석할 수 있게 된 영화가 그러지 못했을 부모세대를 생각하며 불현듯 우울해질 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영화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에 와 3D산업에 종사했을 부모세대가 “한국에 몇십년을 살아도 중화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동화되지 않는다”(247면)는 혹평을 듣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영화는 서글픔을 느낀다. 그들이 자기 세대와 달리 한국인들과 제대로 대화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간병이나 가사노동만 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감정적으로 개방될 수 없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린 영화가 내뱉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조할아버지가 만주에 건너갔으면 조선족, 러시아에 끌려갔으면 고려인, 일본에 강제징용당했으면 일본 교포, 남쪽에 남았으면 한국인, 북쪽에 건너갔다 돌아오면 새터민 아닙니까”(248면). 이때 열거된 조선족, 고려인, 일본 교포, 한국인, 새터민은 공간의 이동을 기준으로 같은 민족을 모두 다르게 명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같이 상이한 명칭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타자화하는 낯섦을 증폭시킨다. 비극적인 한국사의 영향 아래 정체성은 연대하기 어렵도록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이는 진정한 ‘나’를 탐색하고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긍정적 목표를 생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적대감만을 극대화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냐는 시민단체 이사장의 질문에, 영화는 그가 사회주의 이론을 열심히 암기하여 당원이 되었고 국가의 검열을 거친 뉴스를 열혈 시청한다는 점을 떠올리며 사회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당원이어야만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과 공산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고려하면 사회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추측한다. 강제로 순응하게 된 이념을 그의 정체성에 적용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다가 아버지도 자기도 “방관만 하며 주체적이지 않은 인민의 삶을 성실히 영위해나가는 사람”(253면)이라는 데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진정성”이 서울에서 살아남는 “생존 스킬”(235면)이듯이, 그 준거가 되는 정체성 역시 국가와 체제의 압력 아래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조정됨을 나타낸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가 증언했듯,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중국동포 대다수가 “함경북도에서 온 누구요”와 같이 본적을 들어 자신을 소개하며 돌아갈 고향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족보가 불태워지고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북쪽 간첩, 남한에 친척이 있으면 남쪽 간첩으로 몰리”는 등의 핍박을 당하면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소거되어갔음13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역이용되는 정체성과 기획되는 진정성에서 흘러넘치기: 「칼리의 숲」

 

지강숙 소설 「칼리의 숲」(『현대문학』 2025년 10월호)은 진정성이 자본을 창출할 수 있도록 기획되는 과정까지 재현한다. 소설은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서울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네팔 출신 이주여성 ‘디피카’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한국인도 기독교인도 아니기에 차별받는 디피카는 연신 ‘아멘’을 외고 “나, 한국 음식 잘해요!”(44면)라고 소리치면서 한국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계속해서 네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새 삶을 찾”은 “네팔의 빈곤 여성”(같은 면)이자 “이단을 믿다 주님의 종”(38면)이 된, “가난을 신앙으로 극복한 사람”(37면)으로 남아 그를 전도하려 애쓴 목사와 신도들의 굳건한 신앙심을 입증해주는 상징적인 자리에 있을 때만 식당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받고 네팔에 있는 동생을 학교에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정투쟁에 긍정적으로 활용되는 진정성이 대표성을 지닌 하나의 정체성과 결합할 때 더욱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진정하다고 여겨지는 감정만 드러내며 부여된 정체성을 충실히 연기하는 디피카는 이 고된 과정을 “가게를 지키려면 견뎌야 하는 일”(34~35면)이라고 여긴다. 여러 기준에서 다중적으로 소외되는 디피카의 정체성이 ‘불쌍히 여겨야 하는 대상’으로 수렴될 때, 역설적으로 그는 자본을 분배받을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은 언뜻 문화적 인정과 부의 재분배가 동시에 수행되는 긍정적인 흐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디피카가 여전히 칼리 성물 앞에 향을 피우고 만트라를 외며, 목사의 딸이자 교회 까페 매니저인 ‘예은’을 위해 생강을 빼고 찌아를 끓여 한국사람의 기호에 맞춘 맛을 연출하고, 동정받는 일을 웃어넘기려 할 때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모두 지워낼 때만 가능한 것이다.

디피카가 지속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원하지도 않는 돌봄과 연민을 받아야 한다는 데서 오는 수치심과 요구받은 역할을 웃는 낯으로 수행해야 할 때 샘솟는 울분이다. 그러나 그가 내보여서 진정한 것으로 수용되는 감정은 가난한 처지로 인한 슬픔과 교회 사람들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기쁨뿐이다. 소설은 진짜 감정을 숨기고 인내해 얻게 될 이득을 계산하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진정해 보이는 감정을 정제된 형태로 표출할뿐더러 획득한 정체성을 역이용하기도 하는 디피카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진정성 마케팅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알게 한다. 과거 디피카는 NGO 한국본부의 임시직원으로 발탁되어 한국으로 오기 위해, 동생 ‘람’에게 심사를 맡은 임원들 앞에서 울라고 지시했다. 동정을 끌어내어 고된 삶에서 구출되기를 바라는 이들의 감정 표출은 기획된 것이나 한국의 임원들에게는 진정성 있게 다가간다. 게다가 실로 이들의 간절함을 허구로 치부할 수도 없다. 선별된 슬픔은 극적으로 연출됨으로써 더욱더 진정한 감정으로 거듭난다. 또한 디피카는 정부의 다문화사업 지원금을 받기 위해 네팔 여성들의 수공예품을 들여와 직거래 상점을 열려는 예은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학교에 보내달라고 협상한다. 이는 디피카가 ‘개종한 이주여성’이라는 의도된 정체성을 고수할 때, 자기 몫을 챙길 여지가 오히려 늘어나고 그의 진정성 역시 극대화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소설은 그러한 모순을 고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므로 다층적인 위계를 경험하게 되는 디피카의 삶을 집요하게 재현한다. 베트남 교환학생인 ‘프엉’은 한국으로 이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디피카와 같지만, 학교에 다니고 도서관 봉사를 하는 인물이다. 소설은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사람만을 이분하여 대립시키지 않고, 이주민 규모나 경제력, 학력 등의 차이에 따라 이주여성의 삶 역시 상이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디피카가 매료된 파괴의 신 칼리의 무용담은 소설 속에서 상징성을 지닌다. “피 한 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악마 ‘락타비자’를 파괴하려는 칼리는 긴 혓바닥으로 “악마의 피가 땅에 떨어지기 전”(45면)에 피를 핥아 마신다. 디피카는 “수치심이 사라진 자리엔 끝도 없는 욕망이 내려앉을 거라는”(47면) 불안감을 느끼면서 “떨어진 핏방울이 악마로 변하는”(46면) 상황에 자신을 빗댄다. 누군가를 전도했다는 명분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그럼에도 구세주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예은을 ‘칼리’로 묘사하던 디피카는 자신 역시 욕망을 실현해나가다 보면 “마침내 칼리가 될 것”이라고 느끼며, “피라도 핥아먹을 수 있을”(54면) 심정이 되어간다. 여러 방울로 분화되어 자기를 복제해가는 악마 락타비자의 형상과 그것을 핥아먹음으로써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그에 동화되기도하는 칼리를 모두 닮은 디피카의 혼종적인 삶은, 다층적인 진정성을 획득함으로써 진실한 삶이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는 자신이 증오하면서도 의지하는 예은을 닮아가고, 때론 염려하고 어떤 때는 무시하고 싶어지는 동생 람을 닮아가고,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는 프엉을 닮아가면서 자기에게 부여된 정체성으로부터 무한정 멀어졌다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결미에 언급되는, 디피카가 한국에 가게 되었을 때 람이 울면서 추었던 춤은 예은에게는 “누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56면) 슬픔의 표현이면서 “너무 좋은” 광경으로, 디피카에게는 “만족감에 젖어”(57면) 벅차서 추는 춤으로 이해되지만, 어느 하나 정답은 아니다. 사람의 진정한 삶은 순간순간의 몸짓으로만 명멸할 뿐,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의미화할 수 없는 춤사위까지 빠짐없이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즘 소설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2020년대식 진정성이 대리 물성이 되지 않도록, 다채로운 정체성이 하나로 수렴되어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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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26면.
  2. 박상만 「라이어널 트릴링의 『성실과 진정』 다시 읽기」, 『신영어영문학』 제42집, 2009, 62.
  3. 가령 차미령이 짚어주었듯, 2020년대에 다시 점화된 진정성 논의는 “진정성에 대한 비판과 그 탈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는 “대체로 내면성 담론에 대한 비판과 결합하여 ‘문학주의’, ‘문학권력’ 비판의 형태”를 띤다. 차미령 「진정성의 아포리아」, 『상허학보』 69집, 2023, 555면.
  4. 김홍중, 앞의 글 35면.
  5. 이러한 경향성에 주목하여 황종연은, 외환위기 이후 생존의 문제로 그 관심이 옮겨가며 진정성이 사회의 주도적 가치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하는 김홍중의 견해에 반대하며,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과 문화에서 여성이나 그 밖의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 주장이 얼마나 세차게 대두했는가를 생각하면 진정성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고는 경솔한 것”이라고 판단한다(황종연 「현대성과 진정성」,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79면). 필자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한다.
  6. 한영인 「‘진짜’에서 벗어나기」, 『창작과비평』 2025년 가을호 239~40면.
  7. 이는 작가의 창작과정을 창작물에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창작 행위→결과물로서의 작품’이라는 일방적 인과를 교란하려 했던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과도 다른 결이며, 필자는 이를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이차원의 사랑법」(조선일보 2021.1.1) 참조.
  8. 김미정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315면.
  9. 한영인, 앞의 글 240면.
  10. 같은 글 245면.
  11.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이영래 옮김, 어크로스 2025, 67면.
  12. 이경재 「고국과 조국이 다른 사람들」, 『황해문화』 2025년 가을호 246면, 245면.
  13. 손고운 「조선이 사라진 시대, 조선인으로 남은 사람들을 그리다」, 『한겨레21』 2023.4.25.